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90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63. 습격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10.02 | 회차평점 0 |
Chapter 63. 습격
{기함 급 요새, 템플, 워프 완료.}
공허한 우주 공간 위로 워프 충격파의 부스러기가 격렬히 산란되었다. 흉흉하고 거대한 어떤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화로운 기하학적 형태는 웅장하면서도 정교했다. 표면은 틈새 하나 없을 정도로 깔끔했다.
요새인지 함선인지 분간 안 될 그 물체는 무려 작은 행성만큼이나 거대했다. 중력 제어 기술이 어찌나 놀라운 수준인지 모양새가 구형(球形)으로부터 심하게 벗어났음에도 안정성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주변 함선들도 그 거대 물체의 중력을 전혀 받지 않는 것인지 자유로워 보였다.
“슬슬 직접 나서야겠군.”
템플로부터 푸른 빛줄기 다섯 개가 방출되었다. 빔이 아닌, 투명한 유리같이 생긴 물질이었다. 그것은 빛보다도 빠르게 뻗어 나가더니 갈라진 포탈을 뚫고 땅 위로 하강하였다. 윤혁은 그것을 보자마자 낯익은 기억을 떠올렸다.
‘필라?’
필라와 똑같이 생겼다. 하지만 유동성이 훨씬 더 높아졌다. 더욱이 전에는 지구의 엘리베이터처럼 쓰이던 물건이라 수량이 한정되었건만, 이제는 양산형처럼 쓰이는 모양이었다.
필라 다섯 줄기는 하늘도시의 지면에 닿기도 전에 서로서로 합쳐져 응축되더니 이내 하나의 형상을 빚어내었다. 푸른 크리스털로 만든 성채 같았다. 공중에 둥둥 떠 있던 성은 스스로 구조를 변화시켰다.
잠시 성의 문이 활짝 열렸다. 문에서 에스컬레이터처럼 계단이 전개되어 땅까지 죽 이어졌다. 그리고 그 계단을 통해 한 남자가 내려왔다. 그는 중력이라도 조종하는 듯 둥둥 부유하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마음대로 이동하였다. 남자는 공중에서 수천 개의 도심 지역들을 내려다보았다. 하찮은 미물들을 내려다보듯.
“보잘것없군.”
곧 남자는 거대한 초능력을 발산하였다. 그의 거대한 존재감이 하늘을 뚫고 포탈 뒤편에 놓인 우주에까지 닿았다. 손만 움켜쥐면 당장에라도 천체 몇 개 정도는 분자 단위로 해체할 기세였다. 지난 몇 달간, 윤혁 일행은 초능력 사용자를 보지 못했기에 그 위력의 감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잊혀졌던 서늘한 공포감이 스멀스멀 재현되었다.
처음에 그들이 초기 단계의 초능력을 목격했을 때는 일개 식민지 주민이나 이종족이 저렇게까지 강력한 힘을 마음대로 다룬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다. 그리고 에슈타르라고 불리던 자가 각성을 했을 때는 그보다 더 압도적으로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 이건 무슨…….”
압도적인 기세를 발산하면서 유유이 강림하는 지금 저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권능을 직면하니 전에 본 모든 것들이 공룡 앞의 개미처럼 하찮게 느껴졌다. 두 차례의 선교 여행을 거치면서 하늘도시 안에서 보아온 힘을 전부 합친다 해도 과연 저 힘의 발끝에나 이를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본능적인 공포감이 육신을 집어삼켰다. 전율이 일었다.
멀리서도 그 남자의 외양은 선명하게 보였다. 빛을 조작해 원근법을 무시하는 현상을 만든 것인지 아니면 단지 착시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선명도가 매우 뚜렷했다. 그 사내는 위협적으로 키가 크고 어깨가 널찍했다. 체형은 예술의 신이 빚어낸 양 완벽한 아름다움과 비례를 자랑했다. 몸을 덮는 제복은 상대를 단숨에 기죽이는 압도감이었다.
언뜻 봐도 인류연합의 고위 간부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경이로울 만큼 수려한 흰 얼굴은 고고하고 수려했으며 제왕을 연상케 하는 짙은 아우라가 느껴졌다. 당장에라도 나약한 인간들을 기운만으로 무릎 꿇릴 기세였다.
“흐음.”
곧이어 남자는 순간이동인지 고속이동인지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신속히, 소리나 기색조차 없이 순식간에 윤혁 일행 근처로 다가왔다. 기겁한 넷은 일제히 그의 기척이 착륙한 뒤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곧 거대한 중력이 몸을 짓눌렀다. 넷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손으로 땅을 짚었다. 몸의 무게가 갑자기 너무도 무거워진 나머지 허리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여기까지다.”
화려한 미남자의 입가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음색에 담긴 살기가 어찌나 냉혹하고 무서운지 지상에 강림한 마왕이라도 되는 듯했다. 본능적으로 살이 떨리며 오금이 저려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직접 보는 건 처음이지만 의외로군. 그 명성과 악명……, 아버지께서 아끼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 기대했건만 겉보기에는 전혀 비범함이 보이지 않는군. 겉만으로 한 인간을 다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야.”
말하는 모양새를 보니 그는 맥락상 철인왕 중 하나같았다. 대체 누구일까? 윤혁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세 친구는 여전히 저항하지 못한 채 묶여있었다. 일부러 상대가 윤혁에게만 힘을 약하게 사용한 것 같았다. 아마 다치지 않도록 할 의도였겠지.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의 적입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편하겠군. 앞으로 벌일 일들을 미리 사과하지.”
사죄하는 어투와는 백억 광년 쯤 거리가 있는 어조. 그렇다. 명백한 협박과 조롱의 태도였다. 긴장감에 윤혁의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대기 전체가 사내의 지배 아래 놓인 것이 선명하게 피부로 느껴졌다. 분노를 느낄 여유도 없었다. 자연재해를 마주한 인간은 그저 무력감으로 인해 왜소해질 따름이니까.
“내 이름은 칼리드 라흐블뤼크, 인류연합으로부터 식민지들의 보조 관리권을 위임받은 대총통이자 제1 철인왕이다. 그리고 인류연합 대표이신 카이젤 א 라흐블뤼크의 첫 번째 양아들이기도 하지.”
칼리드. 마침내 에녹과 진이 누차 경고했던 그자가 나타났다.
*
윤혁은 단박에 직감했다. 저자에게는 대화나 설교 따위가 절대로 통하지 않을 것이다. 리온이 재혁에게 했던 것처럼 목숨 걸고 간언했다가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짓밟힐 것이다.
‘하필 여행 막바지에 이르러서 최악의 위협 요소가 직접 도래했다고?’
부랴부랴 윤혁은 자신의 제한된 두뇌를 황급히 굴려보았다. 동시에 속으로 위급한 심정을 쏟아내며 기도를 해보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머리 굴리는 일은 칼리드 쪽이 몇만 배 이상 우위에 있었다.
“회수할 물건부터 찾아가야겠군. 먼저 첫 번째 물건부터.”
칼리드는 여유로이 살짝 손을 뻗었다. 곧 염동력 같은 힘이 발동되더니 스테판의 몸이 저절로 휙 끌어당겨 졌다. 순식간에 스테판은 공중에 붕 들려서 칼리드 쪽으로 빨려 들어가듯 잡아당겨져다. 그의 목덜미는 삽시간에 칼리드의 손아귀에 붙잡혔다.
“크헉.”
질식된 스테판의 입에서 외마디비명이 힘없이 꺾였다. 초능력 없이도 힘이 장사인 것인지 칼리드는 한 손으로 성인 남자를 들고도 솜털 하나를 든 듯 가뿐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이레귤러는 확보 완료. 너는 이제 차근차근 해부해보지.”
“스테판 씨!”
윤혁과 리온과 루디아는 일제히 경악하며 외쳤다.
“아, 안돼!”
종알거리는 것이 몹시 시끄럽고 거슬렸는지 칼리드는 한 번 더 매섭게 눈짓을 흘렸다. 그러자 이내 리온과 루디아의 몸이 무형의 힘에 강제로 묶인 것처럼 억눌렸다. 둘의 입은 봉쇄되어버렸다. 이번에도 칼리드는 윤혁의 입만 열어두었다. 그의 발언권만 인정해주고 나머지는 방해꾼으로 취급한 셈이었다.
“놔주시죠. 뭐 하는 짓입니까?”
윤혁은 아주 잠깐 두려움을 잊고 상대에게 분노하며 외쳤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군, 숙부. 대체 무슨 배짱으로 지금까지 이런 위험분자를 우리로부터 숨긴 거지? 진이 몰래 뒤를 봐주다 보니 간이라도 부었나? 원래대로였으면 이 이레귤러 녀석은 진즉 내 해부대에 올랐을 것이다.”
“사람을 무슨 물건마냥…….”
“규율을 어겼으니까. 표식을 제멋대로 풀어헤친 범죄자니까. 나아가…….”
칼리드는 자신이 착륙한 하늘도시 전역을 슥 둘러보았다.
“이 녀석은 아주 안 좋은 전례가 되었지. 이 녀석과 유사한 현상이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니까 말이야. 그래. 마치 역병처럼 말이지. 골치 아프게도 너희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었어.”
그리스도인들은 초자연적인 간섭력을 통해 표식의 지배력에서 아주 조금이나마 부분적으로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은 이미 윤혁 일행도 어느 정도 목격한 현상이었고 칼리드 또한 이 현상의 실존성과 심각성을 아는 바였다.
물론 스테판처럼 한없이 완전에 가깝게 벗어나는 현상은 드물다. 이는 이레귤러로서의 특수성이 더해져야만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건 하늘도시에 새로 생긴 많은 그리스도인이 표식의 속박력을 이전보다 많이 벗어던질 수 있었다. 비록 표식 자체가 원천 제거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자유의지로 스위치를 제어하게 되었다.
“이 현상은 이미 널리 알려졌어.”
칼리드는 매우 성가셔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덕분에 우리끼리도 제각기 의견이 나뉘었지. 이참에 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극단적인 입장이 있는가 하면 표식을 강화하고 재편해서 다시 새겨야 한다는 의견도 발생했지. 아무래도 아버지 같은 절대 권력자라면 모를까 우리 같은 하수인들은 표식 없이 아랫것들을 다루기 어려우니까.”
최근 이 사안과 관련해 초인들의 정치적 견해는 크게 엇갈렸다. 일부는 어차피 시민권과 자유를 줄 바에야 미리 좀 더 풀어주어도 괜찮다는 의견을 비쳤다. 이미 이 기이한 초자연적 자유 확산 현상을 막을 수 없게 되었으니 공존하는 편이 낫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런 때일수록 더욱 강하게 다루고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이종족과 기계들이야 카이젤이 완벽히 지배할 수 있다지만 인간의 영혼은 그렇지 않으니 초인들로서는 영 불안해했다. 물론 표식을 다룰 권한은 오로지 리더 한 명에게만 있으니 이들끼리의 토론은 어떤 실질적인 실행으로 이어질 수 없는 탁상공론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드문 기회가 주어진 경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나는 후자 중에서도 꽤 극단적인 파에 속해. 그렇다고 표식을 내 마음대로 다루거나 재편하지는 못하지. 그래서 더 근본적인 해결책을 취했지. 이왕이면 반란의 싹들을 이 기회에 깡그리 청소하겠노라고 결심했다.”
윤혁은 칼리드에게서 스스럼 없이 발설되는, 믿을 수 없이 섬뜩한 계획을 듣고는 당혹감과 공포감에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 어떤 잔인한 탄압자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한 급진적인 폭력적 선언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그 순간,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칼리드의 왼쪽 눈이 빛을 발하였다. 윤혁은 그의 눈이 보통 사람의 동공과 다르게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불의 구체와 똑같은 형상임을 발견하고 섬칫 놀랐다. 진에게서 본 격자무늬 눈도 기이했지만, 칼리드라는 자는 그보다도 더했다.
‘설마, 현자의 눈?’
극심한 이질감과 함께 공포감이 엄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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