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94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64. 숙청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10.12 | 회차평점 0 |
*
스테판의 고통은 이 와중에 텔레파시를 매개로 윤혁에게도 생생히 전달되고 있었다. 그는 또다시 친구를 구해내지 못했다는 자책에 깊은 상심에 빠졌다. 그렇다고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직 곁에는 지켜야 할 동료가 있었다.
“크윽.”
윤혁은 지친 몸을 겨우 일으켜 리온과 루디아를 감싸 안았다. 이미 둘은 과도한 중력에 저항하느라 지쳐서 그런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곧 쉴 새도 없이 군단이 윤혁에게 다가왔다. 윤혁은 필사적으로 일부러 자해하는 시늉을 하였다.
“물러서지 않으면 제가 다칠 겁니다.”
과연 그들은 전달받은 최상위 오더에 불복하기를 꺼렸는지 윤혁의 신체가 위협을 받자 주춤하였다. 칼리드의 명령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마도 더 높은 권위, 위버멘쉬를 의식해서이리라. 특별 감시대상이라 불리던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그들의 감찰력으로도 그 공갈의 진실성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윤혁의 결의와 결단은 저 자신도 분간하지 못할 만큼 진지했다.
-{물러나시죠.}
“싫습니다.”
-{골치 아프게 되었는걸. 감시대상을 해치면 안 되잖아.}
-{그러게. 명령을 어기면 폐기될 텐데.}
실랑이가 벌어졌지만, 워낙 윤혁이 고집불통으로 버티는 통에 군단은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단순히 붙잡아두어 자해를 막기만 해도 될텐데 그러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존엄성에 대한 존중 또한 그들에게 강제된 본능인 듯했다.
그사이에 윤혁은 간절히 부르짖는 심정으로 기도했다. 목숨이라도 바치라면 바치고픈 생각이었다. 제발 이 큰 위기에서 모두를 구해달라고, 동료들과 온 우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위기에 휘말리지 않게 해달라며 소원했다. 심장이 찢어지는 심정으로 외쳤다. 무장이 해제된 지금 하나님 말고는 의지할 존재가 없었다.
‘지난번엔 너희가 구하러 왔으니 이번에는 내가 희생할 차례야.’
윤혁은 두 친구를 꼭 품에 붙들어 맨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혹여나 적 병사들이 염동력 같은 이능력을 써서 자신을 친구들과 강제로 분리할까 봐 무서웠다. 다행인지 그 군사들에게는 윤혁을 털끝 하나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면서 리온과 루디아만 따로 떨어트릴 정도의 정밀한 솜씨나 제어력은 없는 듯했다.
그 시각, 셀레스티언들이 은하계 곳곳에 지정된 목표 좌표로 차원 이동을 해왔다. 5억 기가 넘는 무리가 산개했다. 통상 공간 후방의 칼라비-야우 차원 쪽으로도 1,400억 기가 우글거리며 주둔하고 있었다. 이 마저도 실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칼리드가 나름 나머지 세 철인왕의 제어권까지 빌려왔음에도 조종할 수 있는 수효는 전체 셀레스티언 수의 10분의 1에도 못 미쳤다.
5억 기는 각각 한 기당 200개씩 하늘도시와 접속을 개재했다. 미리 칼리드에게 수여받은 ‘인증 코드’의 복제본들이 내재된 덕에 일은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그 후에 셀레스티언들은 많은 양의 에너지를 기반으로 워프 터널을 형성했다.
물론 이들만으로는 강력한 하늘도시 방벽과 시스템을 모두 뚫긴 무리였다. 하지만 VII 단계 최면 능력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비록 셀레스티언들 속에는 초인의 것 같은 거대 질량의 영혼은 없었지만, 그 대신 본체의 거대한 부피 덕에 초고밀도로 집적된 특수 두뇌가 놓일 수 있었다. 진의 ‘태양의 영감’ 프로젝트를 수십 단계 발전시킨 기술이 셀레스티언의 지성 능력을 구성하는 데 적잖이 이바지했다.
덕분에 셀레스티언들은 자체 내장된 프로그램을 이용해 현자의 눈의 정신 제어 능력을 어느 정도는 모방해낼 수 있었다. 이는 단순한 정신력 증폭 장치와는 궤 자체가 달랐다.
{명령어 이식 완료.}
{대상 특정 알고리즘 탑재.}
{인간들의 표식에 심겨진 ‘워프 마커’와 공명할 코드를 배포합니다.}
셀레스티언들을 지배하는 지휘 체계용 프로그램이 칼리드의 프로젝트를 하나씩 점검하더니 필요한 사항을 체크리스트 상에서 하나하나 체크해나갔다. 해결은 한 치의 모순이나 걸림돌도 없이 원할히 이뤄졌다.
{사상제어의 표식 – 염원과 법칙의 매개자, 쌍방 공명을 시행합니다.}
마지막으로 반지에 심겨진 권능인 ‘염원과 법칙의 매개자’, 그 경이로운 원리의 테크놀로지가 화룡정점을 이루었다. 셀레스티언이 지닌 거대한 크기의 물리력을 우주 단위의 정신간섭력으로 변환하는 능력. 이 기능의 도움을 통해 셀레스티언들은 우주 주민들의 표식 레벨에서 벌어진 오류 현상을 감지하였다. 그들은 다시 권능을 빌려 이 오류를 ‘워프’라는 물리적 현상에 짝 맞추어 놓았다.
“호오, 깨어났군.”
고통으로 정신을 잃은 스테판은 한참 후에야 가까스로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의기양양한 칼리드가 의기양양해하며 뭔가를 손 안에서 만지작거리는 광경이 보였다. 스테판은 상대가 설마 계획을 성취한 것인지 몹시 두려웠지만, 입을 열 기운도 없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쳤다.”
“…….”
“신체에는 이상이 없을 테니 걱정할 것 없다.”
“왜 나를 죽이지 않은 것이오?”
칼리드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당장은 죽이면 곤란하거든. 지금부터는 너를 표준 모델로 써먹어야 하니까. 그러니 정신도 몸도 멀쩡해야 하지. 방금 처리한 수술 작업은 그저 너를 적합한 형태의 표준 모델로 빚는 과정이었어. 너를 처음 조작했던 그자의 흔적을 싹 청소해내고 그 오류 데이터를 추출하는 일이었지.”
칼리드는 스테판이 누구와 처음 접촉한 것인지 어렵지 않게 추론해냈다. 과연 예상했던 대로 그녀일 가능성이 99.99%였다. 인류연합 측에서 현상 수배를 내건 오랜 위협. 차분히 뜯어서 분석해보니 스테판의 표식에 남겨진 오류에는 그녀 방식이 수두룩하게 깃들어있었다.
“일곱 표식의 테크놀로지는 오랜 세월 끝없이 발전해왔지. 인류의 기술력이 발전하면서 표식도 계속 진화했지. 처음에는 피코머신 형태였는데 차츰 발전한 끝에 나중에는 아예 초미시 초차원 구조물이 되었어. 인간의 물질 부위와 영혼 부위 사이에 덧입혀진 물건이 되었지.”
참고로 새로운 업그레이드 버전의 표식 기술이 개발되면 이전 버전의 표식은 저절로 업데이트된다. 즉 자동으로 새 표식이 덮어씌워 지고 옛 표식은 교체된다. 애당초 표식은 그런 편리한 덧씌우기가 되도록 초기 설계된 물건이었다.
그렇기에 인류연합은 일일이 우주 주민들을 스크리닝하거나 하나하나 수술로써 수정하는 수고를 겪지 않아도 편리하게 표식을 강화 교체할 수 있었다. 새로 태어나는 인간들에게도 마찬가지. 그들에게는 출생과 동시에 자동으로 새로운 표식이 심겨진다. 마치 종족 전체에 대물림되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처럼.
“그런데 네놈은 첫 단추가 이상하게 뒤틀렸더군. 그녀가 기막하게 조작을 해두었어. 그 탓에 우주 인류의 표식이 보편적으로 업데이트될 때마다 네놈의 것만은 올바르지 않은 뒤틀림이 추가로 축적되었지.”
마치 한 번 단추를 잘못 맞춘 옷이 연달아 어긋나듯이.
“그래서 표식은 존재하되 기능은 완전히 망가진 것이지. 어찌나 정교한 조작이었는지 방금 확인하고 난 뒤 나도 꽤나 놀랐지. 역시나 그녀의 실력만은 인정해줘야 한단 말이지.”
지금 칼리드의 손에 쥐어진 물체는 스테판에게서 추출해낸 것으로 바로 문제의 그 ‘어긋난 첫 단추’로서의 표식 원형의 복원체였다. 조작되었던 순간의 최초 버전의 표식, 그녀의 손때가 묻은 지문. 지금껏 스테판이 자신도 모르는 새 그녀에게 이리저리 휘둘리고 조종당했던 이유도 바로 저것 때문이었다.
“그녀 덕택에 덕 좀 많이 봤겠군.”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스테판은 침묵을 유지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우주 공간 위를 부유하는 중이었다. 거대한 행성급 요새와 함선, 그리고 셀레스티언이라고 불리던 괴물 천체들이 저 멀리서 배경을 아득히 메운 채 우글거렸다.
“이제 출발하기 전에 마지막 질문을 하나만 더 받지.”
“왜 당신의 음모를 술술 털어놓는 것이오?”
“하긴 이상하겠지. 나도 지금까지는 누구에게도 계획을 발설하지 않았어.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렇게 해보고픈 충동이 들더군.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너희는 상황이 어찌 흐르는지도 모른 채 막연히 두려워만 할 테니까.”
설령 알아도 너희 일행의 힘으로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할 테니 천천히 무력감을 음미하면서 깊은 절망을 충분히 만끽하라. 소중한 이들을 구해내지 못한 자신들의 한심함을 탓하면서. 이것이 칼리드가 내리는 형벌이었다.
“그럼 가보지.”
출발 시간이 이르자 칼리드는 모든 기술들을 활성화했다.
*
이윽고 여러 차원이 그들이 거하는 좌표 위에 겹쳐졌다. 먼저 칼라비-야우 차원이 일시적으로 통상 공간과 뒤섞이듯 연결되었다. 현재 칼라비-야우 차원에서 대기 중인 수천억 기의 후방 셀레스티언들의 에너지와 정신력을 투자받아야만 과업을 편리하게 수행할 수 있기에 이는 필수적인 절차였다.
두 번째로 시뮬레이션 우주가 부분적으로 실체화되더니 현실 차원 위로 옅게 덮어씌워 졌다. 목적은 시뮬레이션 우주를 통해 전 우주 인류의 정신 집산체에 손쉽게 접근하려는 것이었다. 현재 환상의 표식으로 인해 우주 인류는 꿈 형태로 여러 S-unvs에 접속된 상태였다. 드넓은 우주 공간을 일일이 수색하는 것보다는 이런 방법이 사람들의 정신에 한 번에 접속하기에 용이했다.
그 후, 수천 종류의 시블링 홀로그래피 차원이 통상 공간과 상호작용을 일으켰다. 이 차원들의 특수 형질은 칼리드가 반지에 담긴 ‘염원과 법칙의 매개자’를 쓸 때 촉매제로 쓰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버랩 월드의 일부인 ‘허수 차원’까지도 가동되었다. 좌표값이 복소수인 기묘한 공간. 아무리 계엄령이 발동되었다지만, 사람들을 바깥으로 빼내려면 교묘한 술책이 필요했다. 허수 차원이라는 우회로를 이용하면 강제 워프 대상으로 지정된 목표물들은 손쉽게 셀레스티언의 뱃속에 집어넣을 수 있으리라.
이윽고 칼리드의 정신체와 분신들이 여러 차원으로 흩어졌다. 그것들은 칼리드 본체와의 연결을 통해 초능력을 빌렸다. 곧 분신들은 미리 각 차원에 설치해두었던 초차원 구조물 및 슈퍼컴퓨터들과 융화하였다. 정교한 연산이 이루어지면서 순차적으로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끄아아아악.”
염동력에 붙들린 스테판은 칼리드의 본 프로젝트가 발동됨과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기괴한 성질의 에너지체가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이내 스테판의 신체와 정신은 ‘표준 모델’로 못 박혔다. 이제 그는 전 우주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기 위한 기준 표지판의 처지로 전락하였다.
“잘 봐둬. 이게 네 미래가 될 거야.”
“크헉, 크아아악.”
칼리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계획대로다.’
놈들이 열심히 발악해보았으나 다 수포가 되었다.
‘부질없는 저항이다. 어리석은 것들’
그때.
“안녕.”
별안간 들려온 메시지에 칼리드는 흠칫 얼어붙은 채 행동을 정지했다. 메시지인지 텔레파시인지 구분이 몹시도 애매했지만 분명히 노이즈가 아닌 메시지였다. 누군가가 시뮬레이션 우주를 매개체로 사용하여 전언을 보내는 중이었다.
“넌 누구지?”
“글쎄.”
“강제 수색을 해야겠군. 네트워크 상에서 검색하면…….”
“그럴 시간이나 있을까?”
의문의 목소리는 여유로웠다.
“너희의 제어 역량을 벗어난 존재들을 다루면서 부작용이 없을 것 같아?”
“……뭐라고?”
“한번 진지하게 돌아보도록 해. 지금부터는 환상적인 일이 벌어질 테니까.”
사태의 변화를 눈치챈 칼리드는 더는 자신만만한 태도를 유지하지 못했다. 셀레스티언의 명령어가 변형되어버린 게 아닌가. 해킹 같은 인위적인 조작은 아니었다. 셀레스티언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명령어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었다.
“참고로 나는 아무 일도 안 했어. 단지 너희가 그토록 믿고 자랑하던 시스템의 허점을 하나 찾아 한 방울의 화약을 던져주었을 뿐이야. 난 기술만 의지하는 너희와는 달리 불리한 조건에서 약점을 공략하며 싸우는 데 능숙하거든.”
진노한 칼리드는 이를 악물었다.
‘축출당한 이후 줄곧 파묻혀있던 그자가 하필 이 시점에서 기어 나왔다고?’
상대의 정체가 대번 짐작 갔다. 이런 얄팍한 수작. 범인은 뻔하다. 그녀를 당장에 진압하여 벌하고 싶었으나 냉철한 이성이 흥분을 잠재웠다. 당장은 셀레스티언 들이 벌일 돌발 행동에 대응하는 게 우선이다.
“알라드 마흐디……, 가증한 반역자!”
“자, 너는 과연 어떤 초인일까? 난 잘 모르겠지만……, 알아서 수고하도록 해.”
그 순간에도 위급한 상황은 바이러스처럼 번져나갔다. 비록 소수이긴 해도 몇몇 셀레스티언들의 명령어가 제멋대로 바뀌었다. 워프 대상자들을 단순히 포획, 감금하라는 명령에서 아예 죽여버리라는 명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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