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98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66. 대역전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10.19 | 회차평점 0 |
Chapter 66. 대역전
눈을 뜨자마자 상공을 올려다보였다. 섬광의 향연. 어릴 적 좋아했던 불꽃놀이의 장면이 떠올랐다. 하늘을 수놓는 아름다운 폭죽은 축제의 상징과도 같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폭죽은 그저 치열한 전쟁으로 인한 여파였다.
포탈 너머의 우주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격전의 현실. 그 여파가 땅에서도 선명히 드러나 보였다. 여기에 텔레파시로 공유되는 시각 정보까지 겹쳐지자 더욱 뚜렷해졌다. 우주의 장엄함과 인간의 왜소함이 선명히 대비되었다.
‘아니, 저것들도 인간들의 작품이니 도리어 인간을 고평가해야 하려나.’
기운이 다 소진되었는지 몸에는 미약한 힘도 잘 들어가지 않았다. 욱신거리는 불편한 감각이 전신에서 전달되었다. 근육은 삐걱였으며 피부는 열기에 데였는지 화끈거렸다. 그래도 다행히 심각한 내상은 없는 듯했다. 그저 몇 대 심하게 얻어맞고 기절했다가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듯한 기분이었다.
“좀 견딜만해?”
때마침 누군가가 쓰러진 윤혁의 상체를 조심스레 일으켜 세워 주었다. 목소리로 보아 리온 같았다. 그는 쓰러진 친구를 부축해 바닥에 앉힌 후 다시 맥없이 쓰러지지 않도록 자신의 몸으로 지탱해주었다.
“루디아는?”
“잠들었어. 중력을 오래 버텨내느라 기운을 모두 소진했나 봐. 누르던 초능력이 치워진 뒤로 우리 둘 다 잠시 쓰러졌어. 나는 조금 전에 깨어났는데 루디아는 아직 회복 중이야. 다행히도 생체 계측 장비를 보니 몸에는 이상 없는듯해.”
“다행이네.”
조금 전 하늘도시 내부를 가득 메웠던 우글거리는 칼리드의 군단은 에녹의 기이한 힘에 휘말린 여파에 봉인되기라도 했는지 아직도 정지 중이었다. 단순히 소프트웨어만 마비된 것이 아니라 육체 자체도 특수한 힘에 묶여서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우주선, 소형 함, 이종족 군사, 로봇, 드론, 심지어는 원격 전투 무기까지, 전부 다 공간 속에 박제 당한 상태였다.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그나저나 좀 허전하네.”
윤혁은 다친 상태를 점검할 겸 제 몸을 둘러보았다. 예상대로 실오라기 하나 남지 않은 무장 해제의 처지였다. 친구가 이미 허리 아래쪽을 천으로 덮어두어서 부끄러움은 면했지만, 실외의 찬 기운이 맨몸에 직접 닿아서 그런지 싸늘하고 썰렁했다. 비련한 패배자 처지가 된 것이 실감이 나 설움에 가슴이 쓰렸다.
‘펜던트에서 발생한 특수 에너지의 충격파가 옷까지 분해한 건가?’
그것참 기이한 일이로세. 그렇다는 건 분명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되었다는 뜻인데 막상 의외로 몸은 멀쩡하였다. 그 방출된 에너지가 일반적인 형태의 물리적 에너지가 아니라 특수한 무언가였던 걸까? 원리가 무엇인지 이해는 되지 않았으나 이제 와서는 아무려면 어쩌랴 싶기도 했다.
‘뒷통수가 얼얼하단 말이지.’
조금 전에 당하면서는 카가미씨를 향해 원통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그도 나름대로 윤혁이 다치지 않도록 선을 잘 지켜줬던 모양이다. 정황은 잘 몰라도, 펜던트가 윤혁의 신체를 매개체로 썼는데도 몸에 가해진 물리적 손상은 비교적 적었다. 내상이나 세포 손상 여부는 추후 치료하면서 확인해야겠지만.
“아, 미안해, 옷을 잊고 있었네. 춥지? 잠시만 기다려.”
리온은 자신이 셔츠 위에 덧입던 재킷을 하나 취해 다친 친구의 몸 위에 가져다 대었다. 잠시 후, 그는 옷에 내장된 변환 기능을 발동했다. 재킷은 나노 입자 단위로 재조립되더니 반바지의 형태가 되어 윤혁의 몸 위에 입혀졌다.
“고마워. 으윽!”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윤혁은 근골의 통증을 느끼고 주저앉았다.
“무리하지 마. 우리 중에서 네가 제일 심하게 다쳤어.”
“으으,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닌데 여전히 적응이 안 되네.”
하는 수 없이 단념한 윤혁은 한숨을 쉬며 주저앉았다.
둘은 앉은 채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주 대전투로 인해 발생한 화려한 불꽃놀이가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만약 전쟁만 아니었다면 경이로운 마음으로 저 경치를 올려다보았으리라. 정녕 세상이 무너지는 건가 덜컥 걱정도 들었다. 우물 안 개구리 신세인 행성 주민들은 저 장면을 보고 세상의 멸망이 임하는 듯한 파멸의 향기를 맡겠지.
“……정말로 우리 세상이 끝나는 걸까?”
리온이 담담한 어투로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뱉었다.
“저런 건 국소전도 못 돼. 진짜 전쟁이었다면 은하 전체가 불탔겠지.”
윤혁은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쟁 때문에 멸망한다는 뜻이 아니었어.”
리온은 서둘러 자신이 저의를 구체화하여 설명했다.
“네게 전해진 텔레파시……, 그게 내게도 일부 전달되었어. 솔직히 정황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꽤나 심각해 보이더라. 전 우주의 그리스도인들을 일거에 강제로 워프시켜서 괴수들의 뱃속에 감금한다니…….”
리온의 탄식을 듣고 윤혁도 무기력의 한숨을 쉬었다.
“지구의 역사 속에 나타난 학살자들은 귀여워 보일 지경이지.”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의외로 리온은 현재 펼쳐지는 악랄하고 거대한 계획을 직면하고도 격분하여 이성을 잃지 않았다. 악을 미워하기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았기에 차분한 느낌이랄까. 그는 마치 지금 상황에서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올바르게 아는 듯했다.
“그저 인류의 힘과 능력과 지식이 과거에 비해 크게 증대되어서 그럴 뿐이야. 하나님을 미워하는 인간의 본성이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 지도자들이라고 특별히 더 사악해진 건 아니야. 단지 전보다 더 큰 힘이 손에 쥐어졌을 뿐이지. 누구든 그런 위치에 올라가면 그런 일을 벌일 수 있을걸.”
윤혁도 리온의 말을 듣고 일리 있다고 여겼다.
‘역시 인간들에게는 강대한 힘을 보유할 자격이 없는 걸까?’
그 중 가장 강력한 힘이 어떤 인간의 손에 있는지를 알기에 심히 씁쓸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 마지막 순간이 아닐까?”
진리를 향한 적대심의 교활함과 정교함이 절정에 이른 지금이야말로 진정 말세의 시발점이 아닐까. 윤혁은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번 사태로 성도들이 대량으로 학살당하거나 비참한 신세에 처하거나 혹은 하나님께서 참다 못해서 신자들을 강제로 하늘로 데려가시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대환란의 시대가 시작되고 종말이 개시되는 건 아닐는지.”
실제로 윤혁이 보기에도 정말로 최후가 눈앞에 이른 것처럼 여겨졌다.
“너는 대환란 이전에 휴거가 있다고 믿는 입장인가?”
리온이 피식 웃으며 질문했다.
“아니, 꼭 그런 문제라기보다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지 않나?”
윤혁은 잘 모르겠다는 투로 짧게 한숨을 내뱉은 뒤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두 사람 모두 ‘환란과 휴거의 시간적 관계’ 같은 복잡한 종말론적 이슈에 관하여는 뚜렷이 확신하는 바가 없었다. 휴거가 먼저일 수도 있고 환란이 먼저일 수도 있다고 여겼다. 막상 닥쳐봐야 알리라는 게 그들의 지론이었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것보다는 말세를 바라보는 자들의 삶의 자세일테지.
“나도 사실 너와 비슷한 생각을 했어. 진짜로 이번이 최후일 수도 있겠지. 때마침 하나님께서 땅끝까지 복음 전파하는 임무도 어느 정도 완수하게 허락해주셨으니까. 어떻게 흘러가든 담담히, 감사히 여겨야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윤혁의 얼굴은 약간 수심으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리온은 도리어 평온하게 미소를 유지으며 말했다. 그에게는 종말이 그리 공포스러운 두려움이 아닌 것 같았다.
“끝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닐 수도 있고.”
“음…….”
“주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향한 기나긴 인내를 그치고 알곡들을 거둬가실 수도 있겠지. 휴거든 순교든 어떤 방식으로든 말이야. 하지만 만약에 아직 그분의 뜻이 더 남아있다면 신자들을 세상에 좀 더 남겨두실 수도 있겠지.”
“그럼 네 생각은 어떤데?”
그러자 리온은 윤혁 쪽으로 질문을 받아쳤다.
“글쎄. 나보다는 네가 더 잘 알아야 하지 않을까?”
“내가?”
“그래, 네가 지금 낙담하고 포기해버린다면 어쩌면 주님께서도 더 길게 시간 끌지 않으실 지도 모르지. 반면 네가 조금이라도 더 버티기를 원한다면 주님도 기회를 주시지 않을까? 너는 그분께서 남긴 세상의 안전핀이니까.”
그 직언에 윤혁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화들짝 놀랐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비밀에 대해 털어놓지 않았건만. 어떻게 알았지?
“너 설마……,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에드레이씨의 책에 메시지가 남아있었어. 복잡한 암호로 되어있어서 나로서는 풀 도리가 없었지. 아나스타샤 씨가 풀어주셨어. 우리가 두 번째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녀가 쪽지를 내 주석에 끼워 넣었어. 한참 후에야 발견했지. 그녀가 마음의 준비가 되거든 펼쳐보라고 하더군. 나도 최근 들어서 확인해봤어.”
리온은 쪽지에 아나스타샤가 적어둔 매뉴얼을 그대로 따라가며 주석 책의 여러 부분을 일일이 찾아서 단서를 모은 후 암호 해독을 시행하였다. 그 결과, 에드레이가 비밀리에 심어둔 메시지를 꺼낼 수 있었다. 그것은 에드레이가 윤혁에게 유언으로서 들려준 비밀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내게도 아주 미약하게나마 영적 분별력이 있기에 사실은 전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어. 강재혁 대표님을 만났을 때부터. 그리고 그 사람의 정체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
“리온! 잠시만! 내가 자세히 해명할게.”
“괜찮아. 다 아니까 그럴 필요 없어. 이해해. 너는 그 사람을 구해내고 싶은 거지? 넌 상냥한 친구니까 아무리 최악의 위험성을 품은 존재라 해도 그냥 내버려두지는 못할 거야. 사실 그런 너이기에 좋기도 하고 말이야.”
윤혁은 몹시 그늘진 표정으로 친구의 눈을 회피했다. 구태여 자기 때문에 친구까지 부담을 함께 짊어지게 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만류하지 않는 리온이 놀라웠다.
“네가 그 사람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확신이 들었다면……, 그 또한 네 욕심이 아니라 성령께서 심어준 생각이라고 믿어주고 싶어. 그렇다면 넌 그 뜻을 실천하도록 해. 나는 힘이 닿는 데까지 네 소원을 이루도록 도와줄게.”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동료의 사려 깊고 정성 어린 독려에 윤혁의 뒤숭숭했던 마음도 어느 정도는 정결하게 바로잡혔다. 만일 지금이 최후라면 겸허히 받아들이겠지만 아직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더 남아있다면 벅차더라도 좀 더 달려보고 싶다. 그러려면 지금 이 순간에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다.
“우리 힘으로는 절대 안 되겠지만……, 주님께 기도해보자. 최소한 그분의 뜻은 어떤지 여쭤보자고. 적의 계략이 꺾이도록,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더 오래 남아 복음을 끝까지 전파하도록, 하나님께 부탁해보자.”
“알겠어.”
결의를 다진 윤혁의 모습에 리온도 안도감과 뿌듯함에 한 시름을 놓았다.
(다음 회차에 계속)
이전회
397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65. 셀레스티언 대 솔져 (3) |
다음회
399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66. 대역전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