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03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67. 여행의 마무리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10.31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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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아, 이런, 드디어 시작인가 보네요.”
갑자기 큐오즈린은 가벼운 두통이 발생했는지 머리를 부여잡으며 쓴 표정을 머금었다. 마침내 ‘그 존재’가 해방되어 선명하게 우주 전역으로 존재감을 발산하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난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괜찮아?”
“그야 형은 순수한 인간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출생 과정에서 이질적인 요소가 포함된 인간이라서 이종족으로서의 속성이 약간 있어요. 그래서 간접적이나마 영향을 받게 되거든요.”
“영향? 무엇의 영향을?”
룩은 무응답으로 응하겠다는 듯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미안하지만 그건 비밀이에요.”
한편, 마침내 카이젤은 셀레스티언들과 관련해 벌어진 모든 일들에 대한 데이터를 최종 수합한 뒤, 묵혀왔던 결정을 확고히 굳혔다. 부하들의 활약은 어설펐으나 그 나름대로 쓸만했다. 그들이 고생해준 덕분에 더욱 완벽한 지휘 체계를 향한 밑거름이 완성되었다. 우매한 이들의 소중한 실수가 토대가 되어 지혜자의 지배 체계를 불락의 요새로 완성해 주리라.
“이로써 네 번째 것까지 활성화인가.”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네 번째 메이저급 초지능체를 최종 가동했다. 일라이저의 신수들을 뜯어내고 해부하여 문제의 그 거짓 영성이란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데이터들마저 얻은 결과, 드디어 불완전했던 네 번째 초지능체마저도 완전한 작품으로써 데뷔를 앞두게 되었다.
“과연 이번에도 고통이 상당하겠군?”
그는 상의를 탈의한 뒤 신체와 수술용 인공신경다발을 연결하였다.
“부디 한 번에 성공하기를.”
이윽고 카이젤은 온 정신력을 하나의 작업에 집중시켰다.
‘인비저블 마인드, 파이널 액티베이트 프로세스 온.’
이내 강대한 사념의 파동이 우주 전역을 물들였다. 이종족들은 마법에라도 걸린 양 자아 통제력을 빼앗겼다. 지금까지는 미약한 최면의 힘만이 그들을 옥죄었다면 이번에는 정신 자체를 영원히 종속시키는 절대적인 지배력이 출현하였다.
인간의 손에서 만들어졌건, 아니면 기계나 다른 이종족에 의해 간접적으로 만들어졌건 관계없이 모든 인위적 존재가 이 권세에 휘말려 들었다. 심지어 그토록 위협적이었던 셀레스티언마저도 허무하게 굴복되었다. 마치 문명계의 과거와 현재, 심지어는 미래 자체마저도 황제에게 굴종하는 듯했다.
이후 카이젤이 상상 속에서 온전히 시뮬레이션했던 지배의 4중주가 현실이라는 영역 속에서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기계를 지배하는 힘, 생명체를 지배하는 힘, 상위 차원의 힘을 기반으로 하위 물리계를 다루는 힘, 그리고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창조력, 이 네 가지가 사원소마냥 온전한 조화를 이루었다.
곧 가공할 시너지 효과가 벌어지면서 네 축의 힘의 위력이 폭발적으로 상승하여 무한의 곡선을 그렸다. 성공적인 가동을 마친 카이젤은 신체적 고통으로 인하여 식은땀을 흘리며 부르르 떨었다. 정신적인 고통과 몸의 아픔조차도 성취를 향한 그의 열의를 방해하지는 못했다.
바로 그 시각, 크로스솔져들은 마지막 사냥감을 막 처리하던 참이었다. 특수 물질로 코팅된 냉병기에 찔려 전신이 고슴도치처럼 된 베헤모스가 그들 앞에 널브러져 있었다. 재현의 광역 공격으로 베헤모스의 본체도 썰린 생선처럼 반 토막 난 상태였다. 탈진한 크로스솔져들은 잠시 휴식으로 회복하는 중이었다.
그때 별안 간 날뛰던 신수 군단의 행동 양상이 일제히 돌변했다. 그것들은 마치 아기양과 더불어 뛰노는 맹수마냥 온순해졌다. 얼마 전 대대적인 뇌 수술을 받은 이후로 그들이 소유한 소위 거짓 영성이 대부분 삭제되었는데 지금 나타난 이변으로 인해 남은 흔적마저도 사라졌다. 악령들의 간섭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신수들도 일반 이종족과 다를 바 없어진 셈이다.
“인류연합 대표가 약속을 지킨 건가?”
“막상 신수 놈들을 억눌렀는데도 썩 유쾌하지 않군.”
아무튼, 이것으로 크로스솔져의 임무는 일단락되었다.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무력을 사용하여 무언가를 해결할 일이 나타나주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
“적의 잔재는 다 처리하고 왔다.”
한즈가 거침없이 우주선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는 치료받으면서 큐오즈린과 대화를 나누는 윤혁을 힐긋 쳐다보았다. 아울러 그는 윤혁의 몰골을 훑어보더니 약올리듯 킥킥 웃었다.
“거참 비실비실하군.”
이에 윤혁은 아주 조금 발끈하며 약이 올랐다. 저 표정부터 태도까지 은근 얄밉다고 해야 하려나. 저 2미터도 넘는 체구의 근육 덩어리들과 비교당한 탓에 왜소해 보일 뿐이지 자신도 평균 이상의 체격인데. 그러나 딱히 대꾸할 말은 없었다.
‘상대를 말아야지.’
한즈는 병 주다 약 주듯 윤혁의 뺨을 살살 장난 치듯 꼬집었다.
“야야, 설마 토라진 건 아니지?”
“글쎄? 딱히 기대할 일도 없어서.”
“난 원래 이런 성격이니까 착한 네가 좀 이해해라.”
“아서라.”
그 와중에도 우주선은 천천히 유영하며 우주를 가로질렀다. 일부러 워프 사용을 미루는 것을 보아 지구에 도착하기 전까지 넉넉히 시간을 벌며 치료를 수행할 모양 같았다.
“이런 저런 할 일들도 있어서 어차피 천천히 갈 거야. 푹 자둬라.”
한즈는 투박하고 큰 손으로 윤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킬킬 거렸다.
“네가 좀 팔팔해지거든 좀 더 진득히 담화를 나눠보자고.”
이후 우주선 안에 머무는 며칠간 윤혁은 두 명의 얼티밋워리어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자신이 수년간 겪었던 일들을 들려주었다. 그 외에도 갖가지 중요한 이야기부터 불필요한 잡담까지 떠들었다. 지루한 시간을 떼우기에는 말동무보다 좋은 게 없었다. 둘은 의외로 흥미를 보이며 경청했다.
“하여간 너도 참 대단한 녀석이네.”
“그러게요, 난 형처럼 어떤 가치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본 일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뭐 그것도 나름대로 대단한 일인 것 같아요. 존재한다는 의미를 그렇게라도 발견한다면야.”
둘은 특히 티아라와의 대결 대목에서 관심을 기울였다.
“난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내내 약올려대던 얄미운 한즈가 의외로 차분하고 진지하게 반응하였다.
“보통의 인간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늘 공허감을 느껴.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나를 창조한 궁극적인 존재가 누구인지, 의문이 풀리지 않는단 말이지. 실험으로 우릴 제작한 쓰레기 같은 인간들 말고……, 진정으로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고 계획한 존재 말이야.”
의외로 한즈는 자신의 뿌리에 대해 깊고 진지한 철학적 고민을 하고 있었다. 살면서 직면하게 되는 가장 중대하고 첫째 가는 질문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받는다면 정직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렇게 답하겠지. 특히 한즈 같은 경우 출생 자체도 특이하고 기괴하다보니 더욱 그 질문의 무게가 남다를 것이다. 다만.
“왜 그런 고민을 시작하게 된 건데?”
분명 윤혁이 이전에 만났을 때의 한즈나 큐오즈린은 그렇게까지 심각한 고민을 내비치지는 않았었다. 비록 생체실험으로 인해 생성된 자신의 존재를 늘 저주하고 원망해왔지만 정작 궁극적인 근원, 창조주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았었다. 그들의 심경에는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일까?
“아마도 우리에게 흘러들어온 데이터가 촉매제가 된 탓일 거예요.”
“데이터라고? 무슨 데이터인데?”
“히어로즈. 은퇴한 휴먼 솔져들로 구성된 자경단이요.”
“지구에서 활동하는 그 집단?”
“네, 히어로즈의 정신을 데이터화한 게 인공 인격의 형태로 가공되어 우리 바이오닉 솔져들 속에 실시간으로 흡수되었거든요. 원래 그런 목적으로 히어로즈를 창설하기도 했고요.”
비단 정신 데이터만이 아니었다. 히어로들의 각종 특수무술과 특수 전술 또한 고도로 정제된 뒤 차용되어 바이오닉 솔져 전용으로 개편되었다. 특히 천재현 같은 특수 케이스의 경우, 카이젤이 직접 데이터를 추출해서 훨씬 탁얼한 버전의 이능력들을 다양하게 개발해낸 뒤 얼티밋워리어들에게 손수 이식했다나.
“좀 너무하네.”
윤혁은 나중에 형에게 따끔하게 한소리라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 참고로 그 히어로들 중 자신들을 크로스솔져라 부르던 녀석들이 있어. 경건주의 성향이 강한 영웅 집단인데 마치 너처럼 신을 섬기는 녀석들이지.”
한즈의 말에 윤혁은 신해 형과 아버지 성한을 떠올렸다.
“그 크로스솔져 녀석들의 정신 데이터는 나나 이 녀석을 비롯한 얼티밋워리어들에게 집중적으로 투입되었어. 그게 어떤 원리로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후로 나도 창조자에 대해서 철학적인 사색을 많이 하게 되었지.”
“그랬구나.”
과연 이런 현상이 둘에게 긍정적인 일일지는 잘 모르겠다.
‘역시 신께로 회귀하려는 인간 본연의 본성이 이들에게도 내포된 걸까. 그럼 역시 둘은 인간이라고 봐야 하겠지? 혹시 신수들처럼 가짜 마음이 심겨진 것은 아니겠지?’
사실 시험해볼 방법은 있었다. 티아라의 시험 때 썼던 전략을 비슷하게 활용해보면 된다. 허나 아직은 때가 아니라 여겨졌다. 사람이 회심할 때 일어나는 참된 내면 반응은 오로지 하나님만 인지하시는 현상이니 윤혁 자신은 그 여부를 깨달을 길이 없다.
‘게다가 두 사람은 우주 인류처럼 표식도 없고 텔레파시에 대한 정신 감응력도 높으니 정신 변화를 탐지할 뾰족한 수도 없겠지.’
이어서 두 얼티밋 워리어는 자신들의 탄생 일화를 좀 더 자세히 들려주었다. 아직 지구까지 시간은 많이 남았기에 넋두리할 여유는 충분했다.
“나는 네가 태어날 때쯤, 그러니까 네 형이 세계 무대에 데뷔했을 때쯤 만들어졌어. 여기 있는 룩은 그로부터 2년 뒤에 다섯 초인이 본격적인 패권 경쟁을 시작할 무렵에 제작되었지.”
한즈의 입으로 직접 이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2대째 위버멘쉬가 죽던 해 즈음에는 퀸과 나이트가 제작되었어.”
“만들어진 연도가 역사와 중요한 연관성이라도 있는 건가?”
윤혁의 질문에 한즈가 씁쓸한 표정으로 해답을 주었다.
“다른 실험체들과는 달리 우리 넷은 특수한 목적으로 제작되었거든. 제작자 놈들은 우리를 걸작처럼 취급했었지. 나로서는 그런 대우조차 혐오스럽지만.”
“특별한 목적이라면?”
이에 룩이 바통을 이어받아 대답했다.
“3대째 위버멘쉬를 인공 제작하기 위한 실험이었죠. 과거 1세대 초인들 몇몇이 작당해 2대째 위버멘쉬를 실험실에서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거든요. 그녀는 본래 ‘만들어진 인간’ 프로젝트의 결실이에요.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인간의 유전 데이터 중 가장 우수한 부분만 합쳐서 만들어내었죠.”
“그래서 2세대 중 어떤 정신 나간 작자들은 같은 원리로 3대째 위버멘쉬를 자기 손으로 만들어서 다루고 싶어했어. 아울러 생체병기의 전투력까지 첨가해 궁극의 인간을 손에 넣으려고 했었지. 그 결과물이 지금 보이는 우리들이고.”
2대째가 죽자마자 몇몇 2세대는 기다렸다는 듯 퀸과 나이트 두 개체를 제작했다. 이후 진짜 3대째 위버멘쉬인 카이젤이 세상에 등장하자 제어 불가의 독재자 대신 좀 더 다루기 쉬운 카드를 왕으로 만들고자 2세대 몇몇이 작당하여 두 개체를 추가로 만들었다고 한다.
윤혁은 2세대 초인들이 저지른 끔찍한 만행에 혀를 내둘렀다.
“이런, 유감이네.”
이런 슬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둘을 향한 안쓰러운 기분도 들었다.
“뭐, 별로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야.”
“그래도 체스판의 말로써 킹을 지키는 역할이라도 받았으니 다행이죠.”
이렇게 하염없이 무료한 시간을 대화로 떼우기를 반복하다보니 어느덧 창밖으로 그리운 고향별 푸른 행성의 모습이 비쳤다. 오랜 우주 여행의 마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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