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07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68. 전면개방 (4)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11.09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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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할 만도 한 것이 지금 왕의 발언은 현재까지의 경영 원리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꽤 신선한 도전을 주는 이야기였다. 초인들의 사회에서는 지혜의 실질 측정치인 ‘클래스 레벨’이 곧 절대적 신분이나 마찬가지였다. ‘초인의 육체’야 개개인의 자랑거리이자 액세서리일뿐이지만, 초인의 정신은 사회 내에서의 격을 결정하는 가치 기준이었다.
클래스가 다른 초인 사이에는 대등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F 클래스와 일반인의 격차보다 도리어 E 클래스와 F 클래스의 격차가 훨씬 더 컸고, 윗 단계로 올라갈수록 그 격차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렇기에 여태까지는 낮은 클래스의 초인들은 사실상 상위 클래스 초인의 하수인처럼 활동해왔다.
카이젤은 이제 그 질서를 뒤집는 선언을 하는 중이었다.
“위버멘쉬의 말씀대로입니다.”
부대표 에녹이 덧붙여 분명하게 쐐기를 박아놓았다.
“지금부터 각 초인은 독립적인 세력이 되어 활동합니다. 우주 전역에 흩어져서 주기적으로 관할 영역을 로테이션합니다.”
이미 인류연합의 영토는 비약적으로 넓어졌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 빠르게 늘어날 예정이다. 기껏해야 120만 명에 불과한 초인들로는 넓은 세계를 모두 관리할 인원을 맞출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클랜을 형성할 여유는 없고 최대한 흩어져 개인 플레이를 해도 모자란다. 한명 한명이 다른 초인 밑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역을 맡고 주도적으로 막중한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이는 낮은 클래스의 초인들로서는 높은 클래스의 초인들의 그늘에서 벗어나 드넓은 세계를 활보하며 뜻을 펼칠 기회가 생기리라는 뜻이기도 했다. 위버멘쉬 이외의 초인에게는 명령받을 필요가 없어진 셈이니까. 물론 동시에 큰 책임의 무게도 같이 주어질 것이다.
자리에 모여있던 초인들은 내심 넓은 우주를 향한 야망으로 벅차올랐다.
“다만, 전면개방 전과는 달리 이제는 우주 인류를 다루기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지금껏 위버멘쉬가 일궈놓은 시스템 위에 숟가락만을 얹은 채 타성에 젖어 나태해졌을 것입니다. 솔직히 저 역시도 그 책망에서 자유롭지 못하겠죠. 하지만 이제 그런 식으로는 가치 증명을 하지 못할 겁니다.”
몇몇 우주 출신 초인들은 이 질책을 듣고 찔리는 구석이 있었는지 움찔하는 반응을 보였다. 특히 철인왕들의 경우, 지금껏 하늘도시의 역사를 자기 멋대로 주물러온 일이 부지기수였기에 입이 열이어도 대꾸할 말이 없었다. 특히 칼리드는 담담한 표정으로 묵묵히 듣기만 하였다.
“지금부터는 우리도 자기 자신의 성과로써 실력을 증명하고 그에 비례해서 정당한 대가를 보상받게 될 것입니다. 오로지 실력으로 가치를 입증하십시오.”
“설명하는 번거로움을 덜어줘서 감사하군.”
카이젤이 즉각 바통을 이어받았다.
“정치 시스템은 이미 새로운 형태로 개편했다. 이 부분도 예고했었으니 이미 잘 알 테지. 크게 세 축으로 나누었다. 간단하게 삼권분립이라고 이해해도 좋겠군.”
물론 과거 민주주의에서 말하던 그 삼권분립과는 눈곱만큼도 관련 없었다. 어디까지나 단지 세 종류의 축을 이루는 구성 요소가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인류 정치를 관할한다는 의미였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먼저, Upol(하늘도시)의 2등 시민들이나 Planet(외계행성)의 비시민 주민들에게도 일정 부분 자치권을 허락할 계획이다. 사소한 업무는 자기들끼리 알아서 상의해서 처리하는 게 효율성 측면에서 나으니까. 피지배자들도 엄연히 우리 종족의 일원이니 자주 의식 정도는 심어줘야겠지.”
자치권은 크게 두 성분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하나는 민주적 절차로 주민들이 선출할 관료로 대표된다. 다른 한 성분은 인류연합 측에서 훈련을 통해서 양육해낼 전문 정치인들이었다. 현 계획안은 민주적 요소와 철인적 요소, 그 두 가지를 적절히 배합하여 안정화하는 것이었다.
핵심은 두 번째 성분이었다. 구성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우주 주민들 중 우수한 개체 몇을 선발해내거나 혹은 지원을 받아 후보자를 모은 후, 타임필드나 시뮬레이션 우주 위에 펼쳐진 무대 속에서 오랜 시간 전문 정치가로 훈련시켜서 쓸만한 일꾼으로 양육한다.
물론 이런 임시 방편으로 초인을 탄생시키기란 불가능하겠지만, 어쨌건 훈련만 제대로 받으면 자신의 출신 행성 혹은 출신 대륙을 담당할 지도자로서 자격을 갖추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참고로 이는 플라톤이 제창했던 전문 정치가 훈련 아이디어를 현실화시킨 것이었다.
여기까지 듣고 나자 어떤 초인이 질의 사항을 질문하였다.
“자치 세력들만으로는 총체적 관리를 감당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즉각 위버멘쉬가 응답했다.
“바로 그렇기에 두 번째 핵심축이 작동할 것이다.”
왕의 청사진 속 둘째 요소는 바로 ‘통일시스템(United System)’이었다.
이전까지 인류연합이 하늘도시에서 쓰던 자동화 시스템, 서버, 인공지능, 사이버 네트워크 등은 너무도 산발적이고 통일성이 부족했다. 그래서 카이젤은 인류의 모든 정치, 경영, 통신, 교통, 지식을 한꺼번에 제어할 궁극의 단일 시스템을 구축해냈다. 인간 사회는 물론 기계와 이종족마저 지배할 수 있는 강력한 형태로.
이 통일시스템을이라는 물건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카이젤은 무려 자신 속의 네 개의 초지능체가 연합하여 자아내는 사중주 화합을 일으켰다. 여러 번의 시행 착오는 있었으나 이번에는 불협화음 없이 성공했고 그 결실은 탁월했다.
“통일시스템이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인류의 모든 영역을 제어할 거다. 말하자면 인공적으로 섭리를 생성하여 만물 통제를 구현하는 방식이다.”
이제 이 전천후 관리자의 손길 속에서 인간 사회의 행정과 경제, 문화, 세세한 생활양식, 식민지의 자원 배분과 환경, 기후까지도 완벽히 통제될 예정이다. 지금껏 인류는 이 수많은 문제들 속에 담긴 변수, 오차, 노이즈를 조금도 컨트롤하지 못했었다. 이제는 궤를 달리하는 시대가 찾아왓다.
기존에 쓰이던 무인 개척 시스템들도 하나의 예외 없이 통일시스템의 지배권 아래 복속될 예정이었다. 이러한 인수인계 과정을 마치면 거시적으로는 초은하단들이나 상위 차원의 기반 법칙, 미시적으로는 극미량의 데이터 한 조각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이 권력의 관리 아래에 놓인다.
초인들마저 이 섬뜩한 통보 앞에서 떨었다. 말이 ‘통일시스템’이지 사실상 위버멘쉬의 또 다른 분신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리더는 지금 자기 자신이 세계 그 자체가 되겠노라고 선언하는 중이었다. 몹시 두렵고 떨렸지만 어떤 초인도 감히 반박할 엄두를 못 내었다. 일인 독재라지만 현재로서는 이보다 합리적이고 완성도 높은 선택지가 없었다.
‘절대적 구심점이 없어지면 분열되어 뿔뿔이 흩어지고 종국에는 자멸하겠지.’
더욱이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자면 지금 리더의 천재성과 판단력을 대체할 인물도 찾을 길이 없었다. 앞으로 태어나기나 할까? 그럴 가능성도 먼지 한 톨에 미치기 힘들 듯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축, 너희는 보조자 역할을 맡는다. 아무래도 나와 통일시스템에만 권한이 집중된다면 인류가 충분한 유연성과 창조성을 끌어내는 데 장기적으로는 방해가 되겠지. 그러므로 너희가 인간과 시스템 사이에서 유연한 조율자 임무를 수행하며 창조적인 변화를 창출해야 한다.”
관리의 대부분을 통일 시스템에게 맡기되 인간의 존엄성과 자주성을 드높이기 위해 자치권을 부분적으로 허락하고, 두 요소의 긍정적인 조화를 극대화하기 위해 초인들이 인간들 곁에서 스승 겸 보조자의 임무를 수행한다. 비록 지배자를 자처하지는 못하겠지만, 대신에 그들은 현자가 되어 사람들을 계몽하게 될 것이다.
‘이건 흡사 신학을 모방한 것 같군.’
지나치게 영민한 진은 이번에 도입된 정책 속에서 신학과의 공통분모를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소위 통일시스템은 ‘신의 절대적 주권’을 모방했으며, 자치제도라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모방했고, 초인들에게 주어진 조력자 역할은 ‘천사의 임무’를 모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설마 아버지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 것인가?’
그 최종 단계의 모습이 어떠할지 두려움 섞인 궁금증이 맴돌았다.
*
긴 시간 지구에 갇혀있었던 로스트 엠페러들은 이제 넓은 세계에 나가서 활개 칠 기대감에 들떴다. 지금까지는 시민권이 오로지 지구인들에게만 제공되었기에 공식 직분이 ‘시민의 수호자’인 로스트엠페러들은 반드시 본성(本星)에 갇혀있어야 했다. 협소한 공간이 얼마나 갑갑했는가.
하지만 이제 곧 지구의 일반 시민들은 우주 곳곳으로 흩어지고 그 자리를 우주 인류가 채우게 된다. 새로이 등극한 시민들과 기존의 고인물 사이에서 질서 재배치가 이뤄지리라. 인류의 성지인 지구, 그곳은 찾는 자들은 많아도 크기는 한정적이다. 그렇기에 조만간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질 것이다. 아마 최고로 우수한 승리자들에게만 거주권이 허락되리라.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명하다.
“수천 년간 이어져 온 민족 개념이 사라져버리겠지.”
샤오 윤윤이 섭섭함보다는 도리어 후련한 어투로 말했다.
“그동안 참 지겨웠어. 민족 감정에 얽매여 사느라.”
“그래, 이제 우리도 드디어 저주로부터 해방이군.”
지그문트와 쿠에시가 대답했다.
로스트엠페러들에게 있어 초인으로의 각성 트리거는 무려 ‘민족 단위의 감정의 축적’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딱히 본인 민족에 대한 소속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대 민족에 대한 무의식적 원한에 묶여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보잘 것 없고 초라한 망령을 떨쳐버리고 초인으로서 더 위대한 도약을 하길 갈망했다. 그래서 그들은 지구의 민족 경계를 영원히 지워줄 것을 카이젤에게 부탁했었다. 하지만 왕은 때를 기다릴 것을 명하며 이들을 달랬다. 아직 민족 간의 경쟁심리라는 잔재에도 쓸모가 남은 이유였다. 그 쓸모만 다 빨아먹으면 장차 자연히 민족 개념이 사라질 것이라고 카이젤은 장담했었다.
이제 그 기대의 성취는 사실상 확실시되었다.
“그게 이런 식으로 전개될 줄은 몰랐었지.”
일라이저는 자신의 상상력의 한계를 한탄하며 혀를 찼다.
“하지만 어느 결말이건 후련하군. 이젠 민족 정서 따위의 제한적인 굴레에 묶여있지 않아도 되게 되었으니까. 브리타니아의 수장이니, 총통이니 하는 유치한 역할놀이도 슬슬 지겨워지던 참이었어.”
그는 앙숙인 태양을 삼킨 늑대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 같이 인류를 위해 봉사하자고.”
애초에 양숙 관계라 해도 그 깊이는 지극히 얕고 하찮은 것이었다.
“묵은 감정은 잊고 협력했으면 좋겠군.”
태양을 삼킨 늑대 또한 대수롭지 않게 받아주었다.
“그렇군. 동감이야.”
이제 곧 본인들의 민족을 포함해 모든 민족이 자취조차 남지 않고 역사 속에서 지워질 예정이니 갈등으로 얼룩진 과거를 되새김질하면서 얼굴 붉힐 명분도 없어졌다. 로스트엠페러들은 이제 새로운 가치관과 존재의의를 획득해 새 출발을 개시해 우주로 나아갈 것이다.
“난 지구라는 제약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기대돼.”
마리아 살바도르는 희열에 들뜬 마음을 숨김 없이 드러냈다.
참고로 그녀와 그 동료들이 그리 느끼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지구의 본체를 변형하여 제작된 제로원에는 초인들에게 이식된 초지능체 및 초능력의 범주를 제한하는 기능이 존재했다. 이로 인해 지구 내에서는 카이젤을 제외한 어느 초인도 온전하게 역량을 다 발휘할 수 없었다. 이는 만약에 발생할 충돌로 인해 하나뿐인 고향 행성이 훼손되는 것을 막으려는 안전장치의 일환이었다.
어쨌건 안전장치니 뭐니 해도 속박은 속박. 지구 밖을 자유로이 누비지 못하던 입장에서는 무거운 족쇄로만 다가왔던 것이 사실이었다. 가뜩이나 새로운 힘을 자아낼 발명품들이 많아진 오늘날에는 더더욱 그러하였다.
“새로 얻은 힘을 마음껏 발휘하고 싶어 얼마나 근질거렸는데.”
바야흐로 오랫동안 우리 안에만 갇혀있던 굶주린 맹수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그들은 먹잇감을 향해 맹렬히 달려들 채비를 이미 마쳤다. 그들의 발톱과 이빨은 날카롭게 다듬어진 상태였다. 철인왕들에게 농락당했던 우주 인류는 이제 전면개방을 맞자마자 새로운 차원의 위협과 맞닥트리게 될 운명이었다.
엠페러들은 임의로 팀을 분할하였다. 일라이저와 지그문트, 마리아와 윤윤, 그리고 쿠에시와 태양을 삼킨 늑대가 각각 2인1조 팀이 되었다. 그들은 연 단위로 스케쥴을 정하여 주기를 규정해두었다. 한 주기마다 세 팀 중 두 팀이 우주 전역을 순회하고 나머지 한 팀이 지구에 머무르기로 했다.
우주에 송출된 두 팀 중 하나는 당근 역할을 맡아 우주 인류에게 문명과 지식을 제공하는 현인이 되어주기로 했다. 다른 하나는 채찍 역할을 맡아 우주 인류에게 두려움을 심겨주고 속박과 견제를 씌워주기로 계획했다.
카이젤은 이들의 자율적인 계획에 어느 정도 동의하고 수긍했다. 과도하게 날뛰어 자신이 정한 선만 넘지 않는다면 그런 전략도 제법 유용하리라 판단이 들었던 그는 선뜻 이 모든 일을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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