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08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68. 전면개방 (5)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11.13 | 회차평점 0 |
(이전 회차에서 계속)
한편, 철인왕들의 배치 구역 및 임무에도 변화가 생겼다.
정치의 전문가인 칼리드에게는 통일시스템과 각 지역의 자치권 사이의 조화로운 융화 작용을 도우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다만, 최근 한 번 중대 실수를 범했던 터라 이제는 함부로 날뛰지 못하도록 여러 권한 제약이 씌워졌다. 말하자면 한동안 유익이나 열매를 받지 못한 채 봉사만 하라는 벌칙 처우였다.
마찬가지로 과잉 행동을 벌이다 근신 처분을 받은 제3 철인왕 스튜아도 막중한 과업을 맡았다. 본래 그녀의 전문 분야는 문화였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식민지들 속에서 발생한 문화들을 취합하고 융합하여 신(新)문화를 창출해내라는 임무가 부과되었다.
카이젤은 문화를 인류의 고유 자산으로 인정했으나 동시에 인류를 제어하는 수단으로써의 유용성도 늘 인식하였다. 스튜아는 그런 그의 의지를 집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재였다. 따라서 시뮬레이션 우주를 비롯한 여러 미디어를 매개체로 대중문화를 생성하고 퍼뜨려 일반 대중의 뇌리에 인류연합의 메시지를 이식하는 역할은 자연히 그녀 몫이 되었다.
진과 킴벨리아는 지구에 상시 주둔하도록 배치되었다. 호기심과 탐구 정신이 탁월한 진, 그리고 예언에 가까운 정확한 예측력과 혜안을 지닌 킴벨리아, 이 둘은 별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은 카이젤로서도 가까이 두고 활용해야 할 인재들이었다.
카이젤의 명령대로 진은 아엘브론 대륙에, 킴벨리아는 레뮬로스에 거주지를 마련했다. 둘의 연구를 지원하기 위한 자원은 무제한으로 제공되었다. 특별히 두 사람의 체내 초지능체를 활용하는 데 걸린 제약도 완전히 풀렸다. 이런 이유로 둘은 나름대로 지구에서의 생활에 만족하였다.
한편, 성운에게는 조금 다른 형태의 특수한 임무가 주어졌다.
“부르셨습니까, 보스.”
“그래, 개인적으로 나눌 이야기가 있다.”
카이젤은 간만에 그를 직접 불러내어 일대일로 대면하였다. 성운은 얌전히 한쪽 무릎을 꿇고 복종의 뜻을 보이며 보스의 명령을 잠잠히 기다렸다. 나쁜 일로 불러낸 것이 아님을 알지만 그럼에도 긴장되긴 마찬가지였다.
“편히 서 있어.”
“……네.”
혹시 훈계가 쏟아질까 했던 염려와 달리 부드러운 칭찬이 돌아왔다.
“두 번의 냉전, 종합 MVP는 네 차지다. 칭찬을 들어야 마땅하겠지.”
“과찬이십니다, 보스.”
확실히 성운은 근 몇 년간 유능함을 잘 증명해보였다. 특히 히어로즈를 비롯해 주요 프로젝트를 수행함으로써 각 방면에서 카이젤에게 유용한 도움을 많이 주었다. 유난히 크로스솔져라는 변수가 예상을 벗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냉전 전반에 걸쳐 가장 뛰어난 활약과 지혜를 어필한 것은 당연코 그였다.
카이젤은 여유로운 호흡으로 이야기의 서두를 펼쳐나갔다.
“나는 물신주의가 세상을 사로잡았던 과거의 체제를 증오하지.”
이는 그의 외할아버지인 초대째 위버멘쉬 칼튼이 등장하기 이전의 지구, 곧 네오 오더가 다스리던 시대의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시대는 인간의 인권이 상실되고 그 주권을 화폐가 잠식하던 시절이었다.
“일개 약속에 불과한 ‘화폐’가 주권을 앗아간다라. 아이러니한 일이야.”
그가 한 이 말은 딱히 물질만능주의 그 자체를 비판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화폐가 세상의 지배권을 차지해버림으로써 발생한 경제적 병폐에 대해 혐오를 표한 것이었다.
과거의 네오 오더는 돈이라는 환각을 통해 세계 정치 권력을 한 손에 넣고 떡 주무르듯 다루었었다. 칼튼이 가동한 오버 리셋 이후로는 그 병폐들이 상당 부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망령과 그 관성은 오랫동안 남아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쳤다.
“네, 하지만 이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운은 마침내 인류가 도덕이나 종교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물신주의의 근본적 한계를 초월할 시스템을 구축했노라고 확신하였고 그런 그의 믿음을 뒷받침할 증거는 충분하였다.
“우리는 이미 상위자본과 하위자본을 분리하여 체계를 재정립했습니다. 게다가 생산 설비의 본질을 담당하는 무인 시스템도 보스의 주권 아래 있으니 곧 인류 자산 전체가 당신의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절대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십분발휘하는 이상 현 인류는 분배와 생산의 딜레마로부터 완벽히 자유롭습니다.”
성운은 칭찬인지 비판인지 알기 힘든 답을 하였다.
“흠, 이 몸이 우주를 독점하는 데 대한 비판인가. 타당성은 있군.”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도리어 인류라는 기생충은 보스께서 홀로 힘들게 자연 세계로부터 쟁취해 창조해낸 부를 대가 없이 나눠 누리는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생산자는 당신, 그러므로 이 제도야말로 가장 합리적이고 올바른 이치에 기반을 둔 경제입니다.”
같은 독점자요 지배자라 해도 카이젤과 네오 오더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정당성과 명분에 있었다. 네오 오더는 실질적 생산에 아무런 기여도 않은 채 오직 돈놀이를 통해서 비겁하게 남들의 재산을 독차지했다. 반면, 카이젤은 비록 무인 시스템이라는 수족을 동원하긴 했지만, 분명 인류 문명의 발전과 인류의 우주 정복에 있어서 거의 독보적인 공로를 혁혁히 세웠다.
“애초에 자본이란 개념은 우리 지배받는 자들 사이에서나 쓰이는, 분배 균형을 이룩하는 간접 수단이지 당신에겐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거야 그렇긴 하지.”
“제가 경영이라는 프로세스를 통해서 이룩하고자 하는 바는 당신을 도움으로써 생산자인 당신의 신뢰를 얻는 것이지 미약한 일반 대중의 코 묻은 돈을 갈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에는 에너지를 투자할 가치가 없습니다.”
“나의 신뢰라……. 하지만 그 또한 의도를 따지고 들어가면 너 스스로 더 많은 혜택을 취하기 위해 빌붙는 행위겠지. 결국, 철저히 너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심임에는 별반 다르지 않지 않은가?”
카이젤 또한 비난인지 칭찬인지 뉘양스가 모호한 평가로 대응했다.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그것이 과연 나쁜 것입니까?”
개인의 성정이 그러한만큼 성운은 물질만능주의적인 가치관을 그다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카이젤이나 성운이나 둘 다 자기 능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 자기 배를 채우려 한다는 본질에서는 똑같았다.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게 된 카이젤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피장파장이로군.”
“…….”
과연 모든 이가 똑같다고 여기며 자기 위로를 할 수 있을까? 글쎄. 동생이었다면 자기중심적인 삶의 태도 자체를 거부했을 것이다. 아마 그 아이라면 설령 손에 쥐었던 것이 모두 사라지더라도 변함 없이 평화와 만족을 누리겠지. 자신도 그리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부끄럽습니까?”
“글쎄, 늘 이렇게 살아와서 말이야.”
자조만 해서 무엇하겠는가.
“우리 같은 부류는 변하지 않아.”
카이젤은 성운을 소환한 본래의 목적을 슬슬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자본주의로부터 파생된 경제 개념은 아직 유용해. 물론 지금은 무한에 가까운 자원이 있으니 극단적인 이상 낙원을 당장에라도 실현할 수도 있겠지. 이를테면 돈 개념 없이 모든 사람이 필요한 만큼 자원을 배분받는다던가.”
“하지만 무절제하게 소비하도록 내버려 두기에는 아직 인류는 어리석죠. 게다가 특정 희귀 자원과 재화는 특별한 자격과 지혜가 있어야만 다룰 수 있고요.”
“그래, 적절한 경제적 수단을 통한 제어는 여전히 필요하다.”
바로 그 제어라는 것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안정성과 효율성이 가장 높고 부담과 후유증은 가장 적은 수단, 그 답은 사실 하나로 정해져있다. 이전 인류의 역사가 이를 너무나도 잘 증명해주었으니까.
“기업.”
“…….”
“우주 전역에 백억 개 이상의 무인 유니버설 기업을 심을 계획이다.”
“인공지능들에게 경영을 맡기실 생각입니까?”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그것들은 인간과는 달리 사리사욕에 휘둘리지 않으니까. 녀석들은 순수하게 공공의 유익을 극대화하는 것만이 존재 목적이자 동기지.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보다 더 나아.”
무인 시스템은 물욕의 영향을 일체 받지 않는다. 그렇기에 인간들의 경제 시스템을 공정하게 제어하고 관리하는 데는 이들만큼 유용한 수단이 없다. 만약 인간이 경영하는 기업들만 활개를 치게 내버려 둔다면 끝없는 탐욕과 부정부패가 뒤섞여 종국에는 우주 규모의 대혼란이 야기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들의 경영권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표면상으로는 자유로움을 허락해줘야지. 하지만 어차피 인공지능 기업의 경쟁력을 못 따라갈 거다. 금세 금융의 무게중심을 무인 기업에 빼앗기겠지. 장기적으로는 무인 기업들이 공정 분배와 건전한 경제관념 형성을 이룩해낼 거다.”
성운은 그 무서운 계획을 듣고는 긴장감에 전율하였다.
“잘 알겠습니다만, 그러면 굳이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지…….”
“너는 원래 경영이라는 프로세스에 있어서 상당히 탁월하지. 만약 21세기 이전에 일반인으로 태어났더라도 너는 제법 성공해서 부를 쌓았을 상이야.”
“과찬입니다.”
“무인 기업엔 너와 같은 강렬한 욕망이 없어. 그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동기에 의해 활동할 따름이지. 그것이 효율성과 공정성 측면에는 유용할지도 몰라도 때로는 인간 고유의 욕망과 염원이 예상 밖의 거대한 창조성을 유발하지.”
사람들의 욕망을 마냥 완전히 거세할 생각은 없었다. 무가치한 사람들의 욕망은 잡초와 같지만 유능한 인재의 야망은 선순환을 낳기도 한다. 카이젤은 유용한 욕망을 지속적으로 세상에 남겨두기 위해 성운을 택했다.
“너는 내가 창조한 무인 기업들 뒤에서 그것들을 감독하고 진화시켜라. 마치 에녹이 이종족의 진화를 제어했던 것처럼 말이야. 필요하다면 적절히 네 야망과 비전을 투사시켜도 좋아. 만약 인류 전체에게 보탬이 된다는 전제가 만족된다면 말이지. 대신 지금 맡고있는 기업들은 처분해라. 전면개방 시대에는 별반 도움도 안 되니까. 시시한 기업들을 맡느라 줄곧 지루했던 참 아닌가?”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보스.”
“그래, 네 특유의 발상력을 믿어보도록 하지.”
이렇게 성운의 오랜 야망은 날개를 달고 상송으로 비상할 기회를 획득했다.
‘하지만 이 또한 더 먼 장래를 위한 포석이자 허들에 불과하다.’
부하 앞에서는 일부러 인간들이 경쟁에서 밀려날 것을 반 확정적으로 예언했으나 사실 이는 카이젤이 바라는 본심도, 그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점도 아니었다. 도리어 그가 소원하는 바는 인류가 개체별로도, 집단별로도 새로운 차원의 경지로 도약하여 자신의 존재 의의를 우주라는 무대 앞에 실증해보이는 것이었다.
‘외할아버지가 꿈꿨던 만인 황제, 만인 경영자의 모델…….’
그는 자기 외조부가 이론상으로 그려냈던 이상, 아직까지 형이상학에만 머물렀던 그 경지를 기어코 현실화해버릴 작정이었다.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장기적인 계획을 운영해나가야 하겠지만, 그 정도의 수고는 충분히 인내할 가치가 있으리라.
하지만 모든 인간이 우주의 왕으로, 우주의 경영자로 각성하려면 먼저 지금의 나약함을 벗어버리고 성장하기 위한 큰 도전과 자극을 받을 필요성이 있었다. 도약을 위한 훈련법과 각성법들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다만 인류를 연약한 아기 동물처럼 감싸기만 해서는 그 예비된 선물들이 온전히 작동하지 못한다. 때로는 독수리가 자기 자식을 벼랑으로 내미는 것과 같은 훈련이 요구된다.
‘처음에는 꽤 괴롭겠지. 할아버지도 나도, 다른 영역은 몰라도 운영하고 다스리는 일은 인간 고유의 권역으로 분리하여 보존해주었거늘, 이제는 그 영역마저 침탈하게 생겼으니 말이야. 하지만 그 시련을 뛰어넘어야 진정한 성장이지.’
이제 인류는 최강의 인공 지성체들을 상대로 겨루고 발버둥치며 무한 경쟁의 파노라마를 체험할 것이다. 초인들은 그것들 위에 군림하겠지만 아직 일반인들에게는 버거운 과제이리라. 기껏 전면개방의 자유를 누리기 시작한 그들에게 새로운 과제의 압박감을 주려니 쓰라렸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위기란 곧 기회. 이 난처함만 뛰어넘는다면 일반인과 초인의 격차를 근본적으로 줄여 진정한 상향 평준화를 이룰 수 있다. 더 나아가 인간 종족의 ‘신인류로의 승천’를 현실화할 단서들을 얻을 수 있다.
“다들 잘 해보길. 나는 나대로 모두를 승천시킬 촉매제를 준비해보지.”
카이젤은 과학적, 초자연적, 창조적 지혜를 총동원하여 지금까지 마련된 성장용 방책들 이외의 것들을 상상하였다. 지금 당장은 현실성이 없는 몽상에 가까워 보이는 생각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이런 류의 독특한 상상들을 수없이 만들어 왔다. 현재는 그 대다수가 더는 몽상이 아닌 엄연한 현실의 영역으로 버젓이 뿌리내렸다. 아마 앞으로 그가 할 생각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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