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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13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69. 에필로그 (4)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11.28 | 회차평점 0 0

 

 

 

 

 

*

 

 

 

 

   루디아는 귀환한 뒤 안식 차 섬 중앙 구역에서 심신을 추스리며 지난 두 차례의 여행 일지를 손수 기록으로 정리하는데 열중했다. 루디아는 이 기록을 읽고 누군가가 하나님의 비전을 이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었다. 그 소원을 되뇌이며 매일 성실하게 한 챕터 씩 꼬박꼬박 일기를 작성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모든 에피소드에 이름을 붙였고 그것을 하나로 모아 수필집을 지었다.

   집필 작업 와중에 틈틈히 루디아는 풍경을 보며 휴식을 취했다. 그녀는 아름답고 푸르른 정원에 심겨진 수풀과 꽃을 감상하였다. 그녀는 그 속에서 창조자의 위대한 솜씨를 음미하였다. 하늘도시 순회 선교 당시 보았던 강하고 복잡하고 영리하기만 한 인공 괴물들과는 반대로, 자연 세계의 만물들 안에는 조화로운 사랑이 풍부히 담겨있었다. 그녀는 이토록 아름다운 창조물의 향기를 맡게 해주신 주님께 잊지않고 감사 기도를 드렸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자 펜을 내려놓은 순간, 익숙한 체향이 느껴졌다. 따뜻한 체온의 손길이 루디아의 목덜미를 살며시 휘감는 것이 아닌가. 그 손의 주인을 아는 루디아는 평온감에 자신을 내맡겼다.

   “오늘도 일기 쓰는구나. 대단한 열심이네, 루디?”

   “네, 아가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과 상냥한 인품을 소유한 자. 그리고 루디아의 소중한 친구. 위대한 레이디, 그리고 루디아에게는 아가씨라 불리는 여인. 무려 섬의 여주인과 난민 출신 소녀라는 신분차이가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십수년전 처음 만난 이래로 줄곧 자매나 다름없이 지내온 사이였다.

   “기껏 휴가 차 놀러왔는데 나랑은 안 놀아주네?”

   아가씨가 입술을 비죽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본래 워낙 어른스러워 어리광같은건 전혀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아가씨조차도 여동생과 같이 느껴지는 루디아 앞에서는 불편한 가면을 쓰지 않았다.

   “좋은 친구들을 만났구나.”

   “맞아요, 아가씨. 물론 힘들었지만 정말 추억에 남을만한 좋은 여행이었어요. 아가씨도 함께 그 광경들을 구경하셨다면 좋았을텐데 말이죠.”

   “고맙지만 사양할게. 난 전원 생활이 익숙한 체질이거든. 그래도 루디가 용감해져서 언니로서 무척 기쁜걸. 몇년전만 해도 툭치면 부서질 듯 여리고 사랑스런 아이여서 험한 세상 어떻게 살려나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말이야.”

   확실히 루디아는 지난 3년 간 온갖 험난하고 기묘한 여행을 거치며 마음과 몸이 굳건해졌다. 그녀에겐 뛰어난 물리력이나 엄청난 지혜는 없었지만, 든든한 두 다리가 되어주신 주님께서 늘 그녀와 함께하였다. 그녀는 주님께 의지하는 법을 체험을 통해 익혔고 역경과 고난과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을 깨달아나갔다.

   “고마워요, 아가씨.”

   아가씨는 루디아를 꼭 껴안아주었다. 루디아와 아가씨는 귓속말에 가까운 나직한 목소리로 속닥거리면서 이것저것 수다를 떨었다. 그렇게 두 숙녀가 때묻지 않은 순결한 우정을 공유하는 동안 저 멀리서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야, 아버지가 어르신들과 야외 만찬을 나눌텐데 오지 않으련?”

   “어머, 그게 벌써 오늘인가요?”

   “그래, 루디아 양도 같이 있었구나.”

   아가씨라는 여인은 중년의 사내를 향해 반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허름하고 소박한 차림이었지만 세월의 관록과 인자함이 얼굴에 자연히 묻어나오는 좋은 인상의 남자였다. 그는 혼돈의 시대 때 이스라엘에서 하와이로 이주한 유대인 출신의 사내였다. 이주 이후, 그는 줄곧 피가 섞이지 않은 수양딸과 함께 이곳의 터주대감으로 자리를 지켜왔었다.

   “건강히 잘 지내셨어요, 레우벤 아저씨?”

   루디아도 간만에 만난 아저씨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오랜만에 보니 그새 멋진 숙녀가 다 되었네요, 루디아 양.”

   “아저씨도 여전히 멋지세요.”

   부드럽고 말캉거리는 포근한 분위기 위에 편안함이 살며시 깔렸다.

   “가자, 루디. 아빠랑 같이가서 마을 어르신들에게 잔칫상 대접해야지.”

   “네, 아가씨.”

   아가씨는 섬의 여주인이라는 고귀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난민 신분으로 세들어사는 유대인들에게 융숭한 대접과 인도적인 대우를 아끼지 않아왔다. 루디아가 그녀와 레우벤 아저씨를 몹시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유에는 이런 상냥함도 한 몫을 했다. 언젠가는 아가씨도 메시아가 베푸시는 진리의 생명을 받아 영원히 함께하기를 루디아는 깊이 소망하였다.

   두 여인은 소꿉친구처럼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숲길을 걸었다.

 

 

 

 

 

 

 

 

*

 

 

 

 

   찻집에 앉아 옛 친우와 함께 담화를 나누는 성한.

   “형씨는 요새 뭐하고 지내지?”

   “뭐, 저야 늘 똑같죠. 가족들과 함께 식당 운영하고, 젊은 친구들이 오면 말동무가 되어주고, 마누라나 아들 녀석이랑 시간 보내고…….”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보기 좋네.”

   크리스는 뜨끈한 차를 한입에 쏟아부으며 말했다. 술을 좋아하는 그였지만 성한이 금주자라서 찻집을 모임 장소로 택했는데 생각보다 차의 풍미가 괜찮았다.

   “봉남, 아니 크리스 씨는 요새도 바쁘시겠죠?”

   “나? 아닌데. 엄청 한가해.”

   “영웅들 지도하시느라 바쁘다고 들었는데요?”

   “아하, 걔네들 이미 다 팔아치운지가 언젠데. 너도 뉴스에서 실컷 들었잖아. 이미 본격적인 우주 시대의 개막이라고. 시대가 달라졌어. 요새 얼마나 떠들썩한데 말이야. 아들내미가 황제면 좀 정세에도 관심을 가지라고.”

   성한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제는 히어로즈의 운영은 취소된 건가요? 우주 시대로의 전환 때문에?”

   “폐지라기보다는…, 정확히 표현하면 휴먼 솔져 시스템 안에 흡수시키는 방향으로 개편되었지. 그래서 이제는 내가 손댈 이유도 없고 그럴 수도 없어.”

   반체제 분자에 가까운 자에게는 애당초 정규군 시스템을 맡길수가 없다. 여전히 크리슈나는 카이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카이젤로서도 성한만 믿고 크리슈나를 이용해먹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성운도 지구에서의 업무를 손 털고 보다 더 큰 일에 뛰어들었기에 히어로즈를 건드릴 여유는 없었다. 이제 이 소꿉장난은 두 사람 모두에게서 떨어져나갔다.

   “형씨네 첫째 아들 놈은 아직 얼굴 안 비추지? 하여간 불효자 자식.”

   “크리스 씨는 재혁이 소식 들으셨나요?”

   “내가 무슨. 그 인간은 워낙 높으신 분이라서 감히 쳐다도 못봐.”

   크리스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자연스레 거짓말을 늘여놓았다.

   ‘정말 안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만.’

 

   사실 불과 며칠전에 그는 카이젤을 만났었다. 그때 카이젤은 어떤 기밀 프로젝트에 참여할 것을 제안하고자 크리스를 제로원으로 소환했다. 크리스는 보기싫은 그 얼굴 앞에서 건들거렸지만, 카이젤의 섬뜩한 눈빛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살갗이 곤두서며 얌전해졌다.

   “크리슈나 칼라만트라. 너를 섭외할 일이 생겼군.”

   “개인적인 용무? 아니면 공적인 일?” 

   한껏 기분나쁜 표정으로 툴툴거리면서도 크리스는 꼬박꼬박 대답했다.

   “당장은 개인적인 일인데 장기적으로 보면 공적인 일이 될 듯 하군.”

   “하여간 말 끼워맞추는데는 도사로군.”

   “내게 반항적인 유일한 3세대인 너야말로 이 일에 적합하지.”

   카이젤이 그를 찾은 이유는 다름아니라 클론솔져 제작에 필요한 열쇠가 될 요소가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이젤은 이미 그 시점에 메타뉴런을 기초 토대로 삼음으로써 클론솔져의 양산형 뇌를 제작한뒤, 이종족과 기계를 조합해 클론솔져의 몸뚱이까지 완성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는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분신에게 인격을 부여하여 온전한 인간과 같이 만들 생각이야. 인격성, 창조성, 영성을 골고루 갖춘 진정한 인간으로 말이지. 개성과 자율성은 갖추되 궁극적으로는 내 제어 아래에 놓여있어야 해. 그리고 나의 정신을 기반으로 한 정신체계이되 분신 나름대로의 학습 시스템을 따로 갖추어야 하지.”

   무제한으로 양산 가능하며 영구적으로 사라지지 않는 분신, 완벽한 개성을 갖춘 인격체인 동시에 본체의 일부분으로써 작동하여 상호간 지식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분신. 여기에 더해 분신을 통해 본체가 성장하고 본체의 성장을 통해 분신도 강해지는 시스템, 카이젤은 이 조건 전부를 포함한 완성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정신이 나갔군. 그런 터무니없는 일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그대 한 명이 희생하면 가능해.”

   이미 카이젤은 클론솔져의 개성적인 인격을 생성할 방도 또한 반쯤 마련해둔 상태였다. 최근 들어 마도왕 지그문트는 오랜 시간 디지털 인격과 네크로맨시 계열 테크놀로지를 연구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사라진 2세대 초인들을 부분적이나마 재현하는데 성공했었다. 카이젤은 바로 이 지그문트의 연구를 몇 단계 더 발전시킴으로써 궁극의 부관참시(剖棺斬屍)에 성공하였다.

   “네크로-슈퍼휴먼(Necro-superhuman). 앞으로의 작품의 프로토타입이다.”

   크리슈나는 카이젤의 명령만을 온전히 따르는 수천 명의 좀비 군단이 나타나자 기겁했다. 세력다툼 도중 처형당했거나 이브에게 숙청당했던 2세대 초인들이 죄다 인공인격의 형태로 완벽하게 재구축된 것이 아닌가. 그것도 이전의 보잘것없는 복제인격 기술과는 격을 달리하는 높은 정교함을 갖춘 채로. 육체와 정신 모두 원본을 능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왕, 당신은 참으로 미쳤군.”

   “초소형 초차원체 구조물을 활용해 유사영혼을 생성했다. 크리슈나 네 또래들도 꽤 있을테니 반가울테지. 단독 유닛으로만 만들긴 아쉬워서 분열, 융합, 재조합의 기능도 첨가했다. 과거 실패작에 비하면 상당히 고무적이지.”

   “하여간 제정신이 아니군. 네 부모도 2세대 아니었던가?”

   이에 카이젤의 얼굴에 비정한 냉기가 깃들었다.

   “말 한 번 잘 나왔군. 나와 부대표의 친부모는 바로 그 2세대 초인들에게 살해당했다. 그 낡고 빛바래고 하찮은 구시대의 유물들에게 말이야. 나로서는 딱히 존엄성을 고려해줄 이유가 없다만.”

   “네 원한은 잘 알겠는데, 왜 하필이면 2세대도 아닌 나를 연루시켰지?”

   “네크로-슈퍼휴먼 만으론 실험 데이터로써 부족한 면이 있으니까. 내게는 살아있는 3세대 초인의 데이터가 필요해. 그것도 다른 녀석들과는 다르게 유달리 내게 잘 복종하지 않으려는 네 녀석이 말이야.”

   카이젤의 손가락 끝이 크리슈나를 지목했다.

   “그래서 생체 실험이라도 하겠다?”

   “몸에는 아무런 손상도 가하지 않겠다고 약조하지. 그저 네 복제 인격 데이터만 추출해낼 계획이야. 일반인의 복제 인격 데이터야 충분한 빅데이터가 축적되었지만, 이레귤러 초인의 것과 일반인의 것은 확연히 질이 다르지.”

   “거절하겠다면?”

   그러자 냉담한 비웃음소리가 공기를 얼어붙게 했다.

   “부탁이 아니다, 크리슈나. 네가 지금 마음껏 누리고 있는 그 초능력은 애당초 내가 인정한 수하만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있어. 너로부터 그 힘을 앗아갈 여탈권은 내게 있지.”

   카이젤이 만들어낸 초능력에는 거부하기 힘든 깊은 중독성이 있었다. 초인들은 명상과 같은 정신적 순복 행위 없이도 그 초능력을 온전히 익혀 사용할 수 있기는 하지만, 대신에 그들도 한 번 그 권능에 맛을 들이면 사용하기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마치 마약에 중독되듯 말이다.

   “비겁한 녀석.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그 힘을 설계했군.”

   “그럼 조금 전의 제안에 대해 다시 한 번 묻도록 하지. 긍정적인 고찰이 있었으면 좋겠군.”

   금색 섬광의 두 동공과 그 위에 겹쳐진 청색과 적색의 고리, 권능의 상징인 그 눈은 군림하는 자의 위압감을 머금은 채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섬뜩한 빛을 발하여 상대를 압도하였다.

 

 

 

 

 

 

 

(다음 회차에서 연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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