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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15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69. 에필로그 (6)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12.11 | 회차평점 0 0

 

 

 

 

*

 

 

 

 

   선교 여행 종료 후 반년이 지났다. 지구는 또 한번의 새해를 맞이하였다. 눈 내리는 길을 거닐며 집으로 향하던 중 윤혁은 골똘히 사색하며 궁리했다. 대의와 관련된 비장한 고민은 아니었다. 당장 크게 고민되는 일은 어처구니없게도 현실적인 일이었다. 좋게 포장해서 말하면 소명, 노골적으로 말하면 직업 문제였다.

   선교사의 임무를 마친 뒤 돌아와보니 주위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일을 찾아 바쁘게 살아가고 있었다. 친하게 지냈던 대학 동기들과 고등학교 동문들도 어느새 급변하는 세상의 물결 속에서 나름대로의 길을 개척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한편 한편 써내려가는 중이었다.

친우인 리온은 날마다 거룩함에 이르기를 힘쓰며 목회자의 길을 착실히 준비해나가는 중이다. 크로스솔져들은 전역한 뒤 저마다 건실한 사회 일원이 되기 위해 소박하게나마 일을 시작하였다. 그중 신해는 성한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에 정식 일꾼으로 합류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탁월했던 요리사로서의 자질이 나날이 성장하는 것이 보이는 중이었다.

   ‘갈팡질팡하는 건 나뿐인걸까?’

   선교팀의 일원이 되어 하나님께서 맡기신 임무를 수행할때는 비록 고생은 되었어도 들어도 마음은 열정과 기쁨으로 충만했었다. 하루하루가 선물처럼 느껴졌었으며 고난마저도 큰 은혜로 다가왔다.

   그런데 막상 임무를 잘 마치고 돌아와 새 시작을 하려니 이루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섭섭함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공허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 시절의 충만감이 손 밖으로 빠져나간 듯 했다.

   현재는 여러 분야의 공부를 병행하며 틈틈히 리온의 사역을 도와주는 중이었는데 여행 시절처럼 눈에 띄는 놀라운 역사들을 목격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웠다.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성과만이 가치있는 일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연 중 실망감이 드는 부분은 어쩔 수 없었다.

  ‘장렬했던 꿈에서 깨어나버린 느낌이야.’

   여행을 계기로 일깨워낸 신앙심이 일상이라는 쳇바퀴에 파묻혀 시들어버릴까봐 걱정도 되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게을리하진 않았지만, 그 깊이가 예전보다 얕아진 건 아닌지 의심도 되었다. 혹 이제 주님께서 맡긴 임무가 자신에게는 남아있지 않은건가 하는 두려움도 들었다.

   물론 그분의 따뜻한 친절을 믿기에 자신이 버려질 리가 없음을 머리로는 잘 알았다. 아직 자신에게 형이라는 중요한 과업이 남아있음도 잊지 않았다. 분명 해야 할 일은 남았으리라. 하지만 녹슬어버린 지금의 미약한 힘과 능력으로 과연 무슨 일을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용기란 게 녹슬어버리는 것도 정말 한 순간이네.’

   침체기 혹은 슬럼프. 윤혁은 자신의 현 상태를 이렇게 판단했다. 지름길은 없었다. 주님과의 꾸준한 교제를 통해 극복해나가는 것 외에는 별반 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그분의 분명한 부르심을 발견해 빨리 예전의 열정적인 마음을 각성해내고 싶은 열망이 굴뚝같았다.

   이러한 생각을 머금은 채 눈길을 저벅저벅 걸어가던 윤혁은 어느 순간 익숙한 기척을 느끼고는 우뚝 멈춰섰다. 누군가의 나타남. 조금 전까지는 아무도 없었거늘. 누굴까?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기척은 선명했다. 윤혁은 혹시 자신이 착각한 것인가 의아해하며 다시 몸을 돌렸다.

   “안녕.”

   바로 그때 매력적인 느낌의 중저음이 귀에 울리며 뒤쪽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따뜻하면서 묵직한 온기가 대기를 통해서 전달되었다. 윤혁에게는 매우 익숙한 체향과 목소리였다. 이제는 보지 않아도 분간이 될 듯했다.

   “설마, 형? 재혁이 형?”

   “오랜만이구나, 동생.” 

   불가시 모드로 은폐해있던 재혁이 광학 왜곡 현상을 해제한 뒤 모습을 드러내었다. 사람들이 최면에라도 걸린 것인지 사방에는 행인 한명 없이 한적했다. 재혁은 인류연합의 수장다운 위용을 두른 근사한 제복을 착용 중이었다. 물리 성질을 알 수 없는 기묘한 재질의 흑색 가면도 쓰고 있었다.

   그는 동생 곁으로 소리 없이 다가왔다. 잠시 후 제복이 나노단위로 재조립되어 일상복과 비슷한 형태로 변형되었고 가면이 사라지며 얼굴도 드러났다. 윤혁의 마지막 기억에 의하면 조금 구릿빛으로 그을려 있던 피부가 선탠이 옅어진 것인지 조금은 희어져있었다. 동양인보다 백인에 약간 더 근접해진 듯한 모습. 전이나 지금이나 눈부실 정도로 수려했다.

   그런데 막 동생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려던 재혁이 갑작스레 움찔거리며 미약히 전율하였다. 예전같았으면 형이 내뿜는 기백이나 카리스마 앞에 윤혁이 위축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느닷없이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오히려 형이 동생에게서 느껴지는 정체불명의 거대한 기운 앞에 축소되었다.

   ‘윤혁이가 왜?’

   정작 윤혁은 형이 당황하였다는 사실이 몹시 낯설게 다가왔다.

   “형?”

   “…….”

   그 시점으로 한달 전에 재혁은 기존 네 개에 추가로 두 개의 메이저급 초지능체와 융화하여 총 여섯 개를 보유하게 되었다. 본래 자신의 일부를 써서 만든 것이라 부작용이나 거부 반응도 없었다. 재혁 본체의 정신력 역시 새로운 지능 중추를 감당해낼만큼 충분히 성장하였다. 융화 프로세스의 성과는 완전했다.

   결론적으로 한층 더 진화한 재혁에게 높은 차원의 시공을 인지하는 능력이 생겨났다. 즉 이제 그는 미약하게나마 초자연적 실체의 존재감을 어렴풋이나마 감지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영적인 도움 없이 온전히 자체적인 역량만으로. 그 세계를 내다본다는 것은 불쾌한 기분이었으나, 그래도 나름 유용했다. 그만큼 훨씬 더 방대한 지식과 지혜를 손에 넣을 길이 활짝 열렸으니까.

   그러나 생각지 않았던 부작용이 오늘 동생과 만나며 드러났다.

   ‘왜……, 내 동생에게서 이런 막대한 존재감이 느껴지는 것인가?’

   예전에도 동생의 순수하고 깨끗한 인품으로부터 무의식중에 존경심을 느껴왔지만, 이번에는 기분이 좀 달랐다. 동생에게서 초자연적인 기척이 느껴졌다. 그것도 재혁 자신조차 감히 가늠하기 힘든 위대하고 짙고 아름다운 기운이었다.

   ‘끝이 가늠되지 않는다.’ 

   재혁도 종종 자신에게 불순한 목적으로 다가오는 초자연적 실체를 감지한 바가 있었다. 그것들도 분명 강했다. 하지만 윤혁 속에 담겨있는 것, 아니 ‘그’는 그러한 부류와는 격이 달랐다. 그 어떤 카테고리에도 가둘 수 없는 근원적 존재 이상인듯했다.

   희끄무레한 섬광이 재혁의 심장을 찔러왔다. 직접적인 물리 현상이 아닌, 초자연계에서만 감지될 현상. 바로 그 순간, 온 몸에서부터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이 임했다. 자신이 마주하는 존재의 정체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막대한 경외감이 내면에서 치밀었다. 감히 대면할 엄두조차 못 낼 정도의 위엄. 재혁은 본능적 두려움에 저도 모르게 한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형? 괜찮으세요?”

   “아, 미안하다.”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평범하기 그지없는 기운의 윤혁만이 서 있었다. 재혁은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섬뜩한 경외의 감정이었다.

   “집으로 같이 가요, 형. 아빠도 지금 집에 계세요.”

   윤혁은 어안이 벙벙해하는 형에게 화친의 손을 내미었다.

   “그래.”

   원래 잠시 마주한 뒤 떠날까 고민했던 재혁은 얼떨결에 동생의 페이스에 휘둘려 부탁을 승낙하였다.

 

 

 

 

 

 

 

 

*

 

 

 

 

   “재혁아.” 

   뜻밖의 반가운 손님이 집을 방문하자 성한은 깜짝 놀라 슬리퍼를 신은 채 마당으로 달려나왔다. 재혁은 공손하게 아버지에게 목례를 하여 예를 표하였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 방금 윤혁이에게 네가 왔다고 연락받았다. 일은 바쁘지 않고?”

   “오늘은 쉬는 날이라서요. 그보다 윤혁이와 관련해서 드릴 말이 있습니다.”

   재혁은 곧장 그 자리에서 용건을 말할 작정이었으나 어쩐지 그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성한은 바깥이 추우니 안에 들어와서 식사나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거절하려던 재혁은 아버지의 얼굴에 깃든 기대감 가득한 반가움을 확인하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반가워요, 재혁 씨.”

   “저도 반갑습니다.”

   유진도 재혁을 따뜻함으로 맞아주었다. 재혁이 다스리는 세상은 하루가 멀다하고 대변혁을 겪고 있는데 반해 이 작은 가정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마치 세월의 풍파를 견뎌내는 고목처럼. 동생에게는 이 가정이 훌륭한 버팀목이겠지. 재혁 자신은 소유하지 못한 버팀목.

   오늘 윤혁의 눈에는 재혁이 이상하게도 어딘가 위축된 것처럼 보였다. 몇 달 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호기롭게 동생을 농락하면서 여유로움을 보였거늘, 이번에는 그와 반대로 재혁이 윤혁을 겁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전에 만났을 때는 윤혁이 정신적으로 충만했던 시기였다. 오히려 지금의 윤혁은 다소 침체기에 빠진 상태였다.

   ‘그때보다 지금의 형이 훨씬 더 강할텐데.’

   윤혁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잠시 연약해졌다고해서 함께하는 존재의 권세 그 자체까지 약해진 것이 아님을 미처 잊고 있었다. 이 사실을 깨달았다면 큰 위로를 받았으려니만. 자라나야 할 면이 많은 지라 아직은 먼 이야기였다.

   그는 의문을 잠시 접어두고 가족들과 식탁에 둘러 앉아 화기애애한 시간을 나누었다. 간만에 네 식구가 만나자 다정한 모양새가 그려졌다. 재혁은 여전히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못하고 어색해했지만, 아버지네 부부와 동생의 살가운 친절에 저도 모르게 경계심을 내려놓았다.

   “재혁아, 날도 추운데 하룻밤 자고가지 그러니?”

   자상한 어투로 성한이 재혁에게 권유했다.

   “집에 돌아가는데 얼마 안 걸립니다.”

   “에이, 형. 그래도 간만에 만났잖아요.”

   순간 재혁은 며칠 밤낮을 괴롭히던 극렬한 악몽과 고뇌를 떠올렸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아픔으로부터 잠시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승낙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바쁘니 딱 하룻밤만입니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 시간이 되었다. 재혁은 자신이 불편감과 편안함이라는 양가감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음을 발견했다. 오랫동안 자신을 짓누르던 무형의 권세가 이 집에 들어온 이후로는 말끔히 사라졌다. 동시에 그 힘은 발악과 함께 자신에게 다시 접근하고자 애쓰고 있었다. 이 현상을 어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초인지 능력을 너무 과도하게 증폭시켰군.’

   과욕을 부린 것이 아니었나 잠시 후회되었다.

   한편, 조금 전에 윤혁에게서 느껴졌던 거대한 존재감이 이제는 따스하고 인격적인 느낌으로 스며들어 자신을 무장해제시키는 것이 느껴졌다. 거대한 경외감보다는 오히려 이 따스한 느낌이 자신을 더 빠르게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듯했다. 평상시에 칭칭 휘둘러왔던 오만의 의복이 산산조각나는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는 불편감을 회피하기 위해 대화의 화두를 돌렸다.

   “사실 오늘 찾아 뵌 이유는…”

   재혁은 윤혁 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윤혁이를 제가 거두어볼까해서 입니다.”

 

 

 

 

 

 

 

(다음 회차에서 연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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