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16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69. 에필로그 (7)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12.19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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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식구는 느닷없는 그의 선언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놀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특별한 의미로 한 말은 아닙니다. 제가 이 아이를 직접 가르치면서 제 일을 도울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거창한 일은 아니고 윤혁이 수준에서 맡을 수 있는 정도로만 말입니다. 형이라면서 이제껏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지금부터라도 잘해주고 싶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사부 겸 고용인을 자처하겠다는 뜻.
“하지만 재혁아.”
성한은 역시 아들들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기껏 그들 품에 비집고 들어온 재혁을 차갑게 내치고 싶지는 않았다. 가족이 존재하지 않는 척박한 배경 속에서 살아오다가 이제야 겨우 쉴곳을 찾은 아이에게 냉담함을 보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전에 에드레이나 크로스솔져들에게서 들었던 경고가 떠올랐다. 재혁을 향한 경계심도 내려놓기 어려웠다.
“윤혁이를 제 색으로 물들일 생각은 없습니다. 동생의 개성을 존중하는 선에서 이 아이에게 필요한 지식, 특별히 저 아이가 전공했던 공학 분야 쪽으로 가르침을 베풀까 합니다. 분명 큰 도움이 될겁니다.”
“으음.”
유진도 고민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윤혁을 믿어보고 싶었다. 어엿이 다 성장한 아들이다. 윤혁은 넓은 세상을 거닐며 경험을 쌓았고 정신적으로도 충분히 성장했다. 무작정 아이처럼 여기고 감싸돌 이유는 없지 않을까. 무엇보다 윤혁은 두 부모의 소유물이 아닌 주님께 맡겨진 아이이다.
“저는 윤혁이의 결정을 존중해줄래요. 결국, 본인이 선택해야할 문제니까요.”
“여보…….”
성한도 아내의 뜻이 옳음을 직감했는지 고집을 굽혔다. 부부의 아들은 긴 여행을 통과의례로 삼아 자그마한 세계에서 독립했고 큰 소명을 발견해 이루었다. 그러니 이번 선택의 기로도 윤혁에게는 나름대로 중대한 시험이 될지 모르겠다. 성한은 아들에게 충분히 스스로를 점검해본뒤 뜻을 확정할 것을 권유했다.
한편, 윤혁은 갑작스러운 제의에 당혹했다. 분명 형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실리적으로는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다. 격변하는 미래를 감당하려면 학습은 불가피하다. 교과서만 배워서는 변화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재혁은 문명의 최전방을 이끄는 선두주자이니 그가 직접 사사한다면 윤혁으로서는 이 시대에 대처할 분별력과 적응력을 갖출 최고의 기회가 되리라.
‘하지만 형은……, 역시 위험하겠지?’
다른 한편으로는 뒤집어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만일 이 기회를 역이용해 형과의 진실한 유대감을 형성한다면, 그가 그릇된 길과 가능성을 포기하고 올바른 진리 앞에 다가가 무릎꿇도록 인도해줄 수 있다. 물론 그와 반대로 윤혁 자신이 형에게 의도치 않은 영향을 받을 위험도 있다.
‘간단한 선택이 아닌걸.’
선택의 기로를 앞두고 윤혁은 속으로 하나님께 질문하였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떤 길을 바라십니까?’
재혁은 곁에서 잠잠히 동생의 판단을 기다렸다. 결국, 동생으로부터 조금 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것 같다는 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너무 늦지는 않을 거에요.” 윤혁은 이렇게만 말하며 잠시만 보류해줄 것을 부탁했다.
“오늘 쉬고 가실거죠?”
“……그래.”
재혁은 기다림을 시작한 김에 좀 더 그 곁을 지켜보기로 생각했다.
*
식구들은 재혁이 숙식하도록 3층 객실을 말끔히 정리해주었다. 그 동안 그는 몇 시간에 걸쳐 아버지와 진중한 대화와 수다를 나누었다. 속으로는 그도 내심 해후의 시간을 기다려왔던 참이었다. 아버지와 나눌 이야기들이 참 많았다.
이번에는 윤혁도 두 사람의 일을 부담스럽게 여기거나 회피하지 않았다. 동생으로서 당당히 가족 곁에 앉아 경청했다. 세 부자(父子)는 현재 세상에서 벌어지는 여러 변화들에 대해 자신의 감상과 판단을 공유했다. 아울러 성한은 최근 자신과 가까워진 청년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의외로 그것은 재혁 안에서 은근슬쩍 질투의 감정이 드러나도록 유도하였다.
“자식들이 많아져서 기쁘시겠습니다.”
“너도 자주 찾아오면 되잖니.”
큰아들과 아버지는 전과 달리 상당히 친근감이 깊어졌는지 농담도 주고받을 정도가 되었다. 어느새 부담스러운 심리적 장벽의 높이가 많이 낮아진 듯햇다.
‘다행이야.’
윤혁은 개선된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기뻐했다.
이윽고 밤이 무르익자 형제는 집 근방을 둘러보며 산책을 하였다. 둘은 가볍게 근황을 공유했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요새 무슨 일들을 시작했는지, 큰 주제들 말고 주로 이런 시시콜콜한 것들을 털어놓았다.
윤혁이 그 와중에 자기 심정을 고백하였다.
“형한테서 배우는 게 괜찮은 일일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내가 못미더웠나?”
“실력을 말하는게 아닌 거 알잖아요.”
“내가 너무 독재자인데다 강압적인 사람 같아서?”
“아뇨, 그런 뜻이 아니에요.”
객관적으로 재혁은 분명 전제군주이지만, 동시에 사회질서와 공공선을 추구하며 실제로도 그것들을 증량시키는 사람이다. 약간 냉혹한 면은 있을지언정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모든 방면에서 인류에게 거대한 번영과 성장을 가져다준 위인이다. 그의 정책도 어디까지나 한없이 거룩한 하나님의 관점에서 속마음을 들여다볼 때나 악하지 사람들의 시선과 기준에서는 악으로 규정되기 어렵다.
‘설명하기가 어렵네.’
윤혁은 형과 자신의 영적 관계를 차마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러겠는가. 차라리 평생 그럴 날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외면하며 짐짓 잊으려는 작정은 아니었다.
“꼭 네게 내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건 아니다.”
재혁의 말에 윤혁은 멈칫하였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지. 어쩌면 내가 너를 필요로 할 가능성이 높지.”
“형이 저를요? 어떤 면에서요?”
어찌 설명할지 몰라 말문이 막힌 건 동생뿐만이 아니었다. 재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고민했다. 동생이란 존재는 분명 현재의 재혁이 스스로의 공허함과 상처를 달랠 거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정작 윤혁은 그 사실을 잘 모르지만 말이다. 재혁은 차마 자기 본심을 드러내기가 민망하여 대강 에둘러서 표현했다.
“넌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니까. 때로는 그 수준을 넘어서 나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하지. 지금까지의 난 내가 항상 옳다고 확신하며 살았건만……, 너를 만난 이후로는 계속 혼란스러워. 어쩌면 네가 내 부서진 실태를 거울로써 비춰주었던 것인지도 모르지.”
낯뜨거운 그 말에 왜인지 모르게 숙연한 감정이 메아리쳤다.
“형…….”
재혁은 동생의 머리를 손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계속 존대하려니 불편하지 않나?”
“네? 그, 그게, 저는 딱히…….”
“나 같으면 보통의 형제처럼 편히 대화하는 편이 좋았을 텐데 말이지.”
생각해보니 처음 만난 이후로 둘은 줄곧 사적인 자리에서는 공용어가 아닌 한국어로 대화했었다. 그러다보니 언어 상에서도 존대와 하대의 표현이 분명히 갈리곤 했다. 늘 형은 동생을 하대했으며 동생은 존대하는 일방적인 상하 관계였다.
재혁도 이제 가족이라는 배경 속에서만은 평등한 관계를 원하게 되었다. 늘 지배하던 그가 누군가에게 편한 말투를 허락한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 비로소 그가 동생을 자신과 대등한 위치로 인정해주었다는 방증이었다.
“저는 지금이 편한데요.”
“내가 불편해서 그렇다.”
재혁은 잠깐의 헛기침 후 말투와 어조를 교정하였다.
“그래, 나부터 노력해야겠지. 고압적인 말투를 바꿔보도록 노력할게.”
금세 어투 교정을 해내는 재혁의 모습에 윤혁도 피식 웃었다.
“정 그렇다면, 알겠어, 형.”
아직은 어색함이 짙었는지 윤혁은 말을 내뱉고도 낯을 붉혔다.
“이미 오래 알고 지냈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나야말로.”
산책 후 집에 돌아온 형제는 각자 방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유독 그날따라 윤혁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멀뚱거리며 천장만 바라보던 중, 신음처럼 들리는 낯설고 희끄무레한 음성이 귓가를 괴롭혔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비록 비싸지 않은 보통의 주택이라지만, 나름 그의 집도 현대적인 방음 장치가 잘 설치된 덕에 소음의 완전 차단이 가능한 건물이었다.
도대체 어떤 소음이 그런 방벽을 뚫고 들어온단 말인가. 게다가 그 낯선 소리는 진원지가 불명확해 공간적으로 어느 방향에서 흘러나오는지도 정확한 감을 잡기 어려웠다.
‘묘하게 기괴한 느낌인데?’
흡사 텔레파시에서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감각도 들었다. 중간 매개물 없이 뇌리로 직접 음파가 전달되는 느낌 말이다. 다만, 보통의 텔레파시와는 묘하게 달랐다. 명료하게 담긴 의미도 없이 짐승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을 때 들리는 소리만 전달되었다. 모르긴 해도 분명 짙은 고뇌가 실려있었다.
불길한 느낌을 이기지 못한 윤혁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급한 마음이 휘몰아쳤다. 그는 막 일어나 옷차림도 제대로 정돈하지 못한 채로 곧장 계단을 건너 3층으로 달려간 뒤 문을 두드렸다.
“형, 무슨 일이라도 있어?”
자욱한 침묵만 메아리쳤다.
“…….”
신음처럼 들리는 뇌리의 울림은 여전했다.
“실례지만 잠시 들어갈게.”
역시나 대답이 없었다. 윤혁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입장했다. 잠든 상태로 식은땀을 잔뜩 흘리며 괴로워하는 재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끔찍한 꿈을 꾸기라도 했는지 고통스레 부들부들 떠는 중이었다.
“형?”
언젠가 재혁은 이렇게 증언했었다. 자신은 이미 피코머신 연구 과정에서 불사신이 되었기에 신체적 질병이나 신체 이상을 초월했노라고 했지. 병도, 부상도, 노화도, 그로 인한 몸의 이상도 이제는 알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고 했었다. 그런 그가 모종의 고통을 느낀다면 그것은 필시 정신적 차원의 이상이리라.
“형!”
제삼자가 보기에도 고통스러운 그 광경에 윤혁은 화들짝 놀라 형의 곁으로 다가갔다. 재혁은 과연 보이지않는 세계의 악마들에게 고문이라도 당하는 것마냥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가 누운 침상과 몸을 덮은 천은 이미 땀으로 흥건히 젖은 상태였다. 입에서는 잠꼬대인지 모를 괴로운 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제발! 그만 놔둬! 하, 하지마!”
이 사내의 입에서 도무지 나올 것이라고 상상되지 않는 단어였다. 다함없이 강하기만 했던 이 사람이 이처럼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윤혁은 형을 깨워 진정시키고자 세차게 어깨를 흔들었지만 상대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마침 물을 마시러 거실로 나왔던 성한이 윤혁의 발소리로부터 난 소음을 듣더니 상황의 이상함을 느끼고 따라올라왔다. 유진도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겼나 걱정되었는지 남편을 뒤따라왔다. 두 사람은 재혁이 머무는 방 앞에 이르자 놀란 나머지 발걸음을 멈췄다.
“헉, 허억.”
몇 차례나 동생이 흔든 뒤에야 형은 가까스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힘겹게 떴다. 흡사 끔찍한 악몽에 쫓기다 간신히 살아난 어린아이의 모습 같았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동생을 발견하자마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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