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17회 (2부 完) 하늘위의 도시들 Ch 69. 에필로그 (8)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12.24 | 회차평점 0 |
(이전 회차에서 연속됨)
“몸은 괜찮아?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대답 대신 재혁은 동생의 품에 녹초가 된 몸을 기댄 뒤 고개를 어깨 위로 파묻었다. 윤혁은 형의 등을 토닥이며 아이 달래듯 진정시켜주었다. 지켜보던 부부는 거실로 나가 재빨리 마른 수건과 젖은 수건, 그리고 물컵을 준비하였다. 가까이 맞댄 몸 너머로 부들거리는 떨림이 전달되자 윤혁은 속은 미어졌다.
“괜히 걱정시켜서 미안하다.”
“원래도 이렇게 악몽을 자주 겪어?”
윤혁의 걱정섞인 질문에 재혁은 체념어린 어조로 일부러 담담히 답했다.
“거의 매일. 이미 익숙할대로 익숙해.”
처연한 그 얼굴을 보며 동생으로서 속이 쓰라렸다.
“왜 힘들다는 말을 안했어?”
“수치스러운 이야기니까. 터놓을 사람도 없었고.”
그의 주변에는 대등한 위치의, 진정으로 어깨를 나란히 할 친구가 없었다. 그나마 어린 시절에는 버금가는 실력을 지닌 친구들이라도 있었으나 그들은 전부 배신하거나 떠나갔다. 이차 각성을 통해 위버멘쉬로 자리매김한 지금, 그에게 비견될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부하들은 그에게서 자신들을 이끌어줄 위대한 영도자의 모습만 기대하며 갈망했다. 그러므로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모습을 타인에게 드러낸다는 것은 애초에 재혁의 선택지 위에 없었다.
“이제는 우리가 있으니까 기운내줘, 형.”
“……알았다.”
윤혁은 자꾸만 이 커다란 체구의 사내가 연약한 어린 동물처럼 눈에 밟혔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으로 보이나 가장 중요한 심장은 텅빈 남자. 윤혁이 지금껏 누려온 온갖 감사해야 할 축복들, 이를테면 선량하고 따뜻한 부모님, 기꺼이 의지할 친구, 주어진 삶에 대한 만족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안, 그리고 삶의 전부를 내맡긴 위대한 주인, 이것들은 하나같이 재혁에게는 결여된 축복이었다.
‘이 사람을 대체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뼈저리게 아픈 손가락.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가여운 이. 어쩌면 자신은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기 전까지는 끝끝내 그를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정이라는 것을 쌓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갈등되지는 않았을텐데.
잠시 후에 성한과 유진이 방에 들어왔다. 둘은 기진맥진한채로 고개를 푹 숙인 재혁 곁에 앉아 그를 정성껏 간호해주었다. 유진은 땀에 잔뜩 젖은 재혁의 상체를 물수건으로 닦아낸 후 부드러운 마른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모성애라는 것을 체험해보지 못한 재혁은 속이 간질거리는 낯선 감각에 얼굴을 돌렸다.
“감사합니다만, 저는 괜찮습니다.”
“식은땀에 젖은채로 있으면 감기 걸려요.”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불도 갈아드릴까요?”
“그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가뜩이나 신세를 잔뜩 졌는데 이 이상으로 의지하자니 민망함을 이기기가 힘들 듯했다. 땀에 젖은 이불 정도야 손가락 한 번만 까딱하면 청결하게 씻을 수 있고.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어느 정도 진정된 재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남의 집에서 민폐를 보여서 미안합니다.”
“남이라니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상대였으나 유진에게는 얼마든 그를 가족처럼 받아들일 의향이 있었다. 아니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을 열고 수용하였다. 그 이유는 복잡하지 않았다.
“당신도 제 아들과 남편의 가족인걸요.”
그 말인즉 그녀에게도 가족. 적어도 사랑의 대상인 이웃이지 않겠는가. 불편함을 부디 거둬들이고 이 공간을 자신의 집처럼 생각해달라는 무언의 요청이 유진의 상냥한 온기를 통해 생생히 전달되었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강대한 체격과 완전한 근육질의 육체를 지닌 강인한 사내는 아주머니에게서 전해지는 부드러운 위엄과의 조우에 비에 젖은 소동물마냥 수그러들었다. 해학적이고 자조적이면서도 동시에 따뜻한, 참으로 역설적인 한 장면이었다.
곧 이어 성한이 아들 곁에 앉아 따뜻한 물을 건내었다. 지친 재혁은 얌전히 받아마셨다. 성한은 큰아들 옆에 앉아서 손을 꼭 잡더니 작은 목소리로 기도해주었다. 재혁은 왠지 모르게 자신을 짓누르던 탁한 공기가 맑아진듯하다고 느꼈다.
“고맙습니다.”
“힘들면 아빠가 옆에 있어줄까?”
“이제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후 부부는 형제가 같이 시간을 보내도록 잠시 자리를 비켜주었다. 두 형제가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서로를 향해 지지대가 되어준 광경을 조금 전 보았기에 비온 뒤의 대지가 단단해지듯 두 사람이 신뢰를 다져나가도록 시간을 주고 싶었다.
윤혁은 형의 아름다운 얼굴에 늘 그림자처럼 탁하게 깃들어있던 냉정함과 오만함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비록 찰나의 변화에 불과하겠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도 보호가 필요한 연약한 존재였다.
“연약함이 꼭 나쁜 건 아니야. 자신을 속이려 들 필요 없어. 아등바등 애쓰면서 자신을 감추기만 하면 서로가 힘들잖아. 자신도 속이 문드러지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괴로워지고.”
재혁은 문득 다정함에 취해 온기의 맛을 깨달아가는 자신이 두려워졌다. 그 낯선 바다에 몸을 던지는 행위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결정처럼 생각되었다. 제왕에게는 모든 인간이 당연스럽게 여기는 권리가 도리어 더 큰 부담이요 위기였다. 그러나 윤혁은 그 생각을 읽었는지 당당히 반문했다.
“무서워하지 마.”
늘 생각을 읽는 쪽은 재혁이었거늘, 오늘만은 그 역할이 반전되었다.
“사람이란 서로를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도록 설계된 존재라고.”
윤혁은 지친 형을 간호한 뒤 그가 편히 몸을 재정비하도록 시간을 들여 봉사하였다. 먼저 형의 피로 회복을 돕기 위해 그가 좋아하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았다. 몸을 가누는 데 성공한 재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 물 속에 몸을 내어맡겼다. 형이 피곤하여 잠들면 또다시 발작이 일어날까 염려되었던 윤혁은 재혁의 옆자리를 지켰다.
시간이 박제된 듯한 아늑함 가운데서 형제는 차분히 대화의 문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꿈 속에서 기괴한 경험을 한지는 꽤 오래됐다고 했었지.”
윤혁은 예전에 형에게서 들은 개인적 경험담을 되새겨보았다.
“악몽은 그 인격 흡수 현상이랑은 별개인건가?”
“그렇긴 하지.”
“그럼 언제부터 악몽을 꾸기 시작했는데?”
“그 날의 사건 이후로. 아직은 차도가 없어.”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윤혁은 무슨 날을 말하는 지 알 수 있었다. 배반당하고 가장 끔찍한 고문으로 심신이 무너졌던 저주의 날. 인류연합의 악몽인 날인 동시에 재혁의 최악의 날, 그리고 모두의 위기가 임했던 날. 한편으로는 형이 그 날에 괴물이 되지 않고 살아남아 준 것이 감사할 따름이었다.
‘당해보지 않았으면 나도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거야.’
한 번 헬리웃에게 납치와 고문을 당해보아 아주 조금 그 맛을 엿본 것이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감사할 노릇이었다, 형이 겪었던 끔찍한 재난을 상상하자니 온몸에 소름이 곤두섰다. 초재생능력과 압도적 회복력의 육체까지 있으니 더 극심하게 고통을 느꼈겠지. 게다가 가장 치욕스러운 모욕을 당하며 타고난 정체성마저 좌절당했으니 그 패배감의 쓰라림을 어찌 다 이해하겠는가.
‘이제 형도 아픔과 속박에서 벗어나 안식을 찾기를.’
설령 모두가 저 사람을 두려워할지라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배척할지라도, 윤혁 자신만은 마지막까지 곁에 남아서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더 나아가 구해주기를 원했다. 그가 더 큰 어둠 속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손을 붙잡아 주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는 믿음이 어느 때보다 더 깊게 와닿았다.
할수만 있다면 어둠 너머의 빛의 세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어둠의 바다로부터 건져내어 빛 속에 닻을 내리도록 돕는 일은 하나님의 몫이겠지만, 자신에게도 어떠한 역할이 있기 않겠는가.
윤혁은 먼저 용기를 내어 작은 일부터 도전해보기로 했다.
“그 제안 말이야, 여전히 유효하지? 취소된 건 아니겠지?”
“내가 오늘 한 제안?”
“응, 나를 거둬서 가르쳐주기로 한 제안 말이야.”
돌이켜보니 참으로 적절한 기회였다. 세상에서 앞서 나가기 위한 기회가 아닌, 형에게 손을 내밀 기회. 그렇다면 구태여 망설이면서 주저할 필요는 없겠지.
“승낙할게, 형.”
그 대답에 재혁의 표정이 미묘하게 밝아졌다.
“잘 생각했다, 윤혁아. 고맙다.”
“어디까지나 형을 실력을 알기에 그렇게 결정했을뿐이야. 난 형에게 영향을 받을 생각은 없어. 다만, 나도 이제 결의했어. 다가오는 미래와 맞서려면 현 시대의 실체를 피하지 않고 똑똑이 직시해야겠지. 그 목적으로 형을 이용하는 것이니 나로서는 환영이야.”
윤혁은 일부러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어내며 얼버무렸다. 너무 좋아하는 기색을 보이면 자신도 모르게 너무 정이 들 것 같아 걱정된 탓일까.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기뻤다. 자신에게 이러한 마음이 드는 것이 아직 하나님께서도 형을 완전히 포기하시지는 않았다는 사인 같아 안도감이 몰려왔다.
“오히려 나도 환영이다. 마음껏 너 자신을 위해 이용하도록 해.”
재혁은 내심 기쁜 표정으로 호쾌하게 웃었다.
“잘 배울게. 그리고 열심을 다해 섬기고 도울게.”
이용하겠다는 말은 그냥 꺼낸 말. 사실 윤혁으로서는 형을 한 명의 인간으로서 섬기고 돕고 지켜주고픈 마음뿐이었다. 손위의 형제에게 예를 갖추고, 세계의 지도자에게 선한 길을 알려주고, 그의 상실감을 채워줄 기회. 기대되었다.
‘형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해서라도 정성껏 섬길 거야.’
이제까지 윤혁과 그의 동료들은 카이젤 라흐블뤼크라는 거대한 존재의 영향에 일방적으로 좌지우지되었다. 그의 위험한 중력으로부터 마음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다행스럽게도 주님의 은혜 덕에 방어전은 그간 나름대로 무사히 감당하였다.
하지만 여기에 머무르기만 해서는 부끄러울 따름이다.
‘지금부터는 우리가 당신에게 선한 영향을 미칠테니, 기대해.’
언젠가 상황은 반전되리라. 힘이 닿는 대로 따스함을 전해주어 재혁의 완고하기 짝이 없는 영혼의 벽과 허물어뜨리고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겠노라는 소원이 견고한 목표로 자리잡았다. 거대한 질량을 자랑하나 생기는 없는 그 영혼에 생명의 불길을 선물해주리라.
그리고 이 일은 한 인간으로서의 목표인 동시에 인류를 위한 일이기도 했다. 적어도 자신의 시대에 멸망의 아들이 탄생하여 인류를 파멸시키는 일만큼은 총력을 다해 막아내겠다. 이것이 윤혁이 마음속으로 다짐한 바였다. 이로 인해 잠시 주님의 오심이 지연된다 할지라도, 자신은 주님께서 명하신 바를 수행하겠다.
먼 훗날 혹은 가까운 훗날 다시 다른 멸망의 아들이 반드시 나타나겠지만, 그것은 다음 세대의 몫이자 하나님의 섭리의 영역이다.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자신에게 맡겨진 시대, 자신의 손에 맡겨진 악의 위협만은 확실히 꺾는 것이 주의 전사에게 허락된 소명이었다.
“같이하게 되어 기쁘군.”
“나도.”
허심탄회한 해후가 끝난 후 잠들기 전 재혁은 동생에게 보호를 청했다. 그가 옆에 있을때면 악몽의 효력이 약해진다는 사실도 솔직하게 밝혔다. 그 고백은 윤혁으로 하여금 더욱 마음이 약해지게 했다. 괴로워하던 형의 모습을 기억한 윤혁은 조용히 옆자리에 누워 곁을 지켜주었다.
“편안한 밤 되길, 형.”
윤혁은 재혁의 이마 위에 손을 얹은 채로 잠시 창문 너머 별빛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상처받은 영혼이 잠깐의 안식을 허락받았는지 어느새 거친 숨소리는 잦아들고 고요하고 부드러운 숨소리만 임했다. 긴장과 따스함이 공존하던 경점이 지나고 마침내 고요한 밤이 찾아왔다.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나의 주님.”
윤혁은 자신과 가족의 미래를 더 큰 손 안에 내맡기며 조용히 잠들었다.
- 2부. ‘하늘 위의 도시들’. 끝 -
이전회
416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69. 에필로그 (7) |
다음회
다음회가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