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24회 아벨의 후예 Ch 2. 재회 (4)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1.20 | 회차평점 0 |
*
재현네 형제가 찾아간 곳은 성운의 집, 정확히는 그의 본가였다. 때마침 성운은 카이젤에게서 부여받은 임무 때문에 꽤 오래 지구 바깥으로 나가 있을 계획을 앞둔 상태였다. 떠나기 전에 성운은 가족들에게 배웅이라도 받을 겸 부모님 집에서 저녁 약속을 잡았다. 성운의 다섯 동생도 이날 함께 모여있었다.
“괜찮을까?”
“솔직히 말하면 나도 두려워, 형.”
수현도 성운과 자신의 위상 격차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자신은 일개 D 클래스에 불과하지만, 상대는 무려 최상위 초인이라고 불리는 SSS 클래스, 그중에서도 특별한 24인 중 하나. 지혜의 차이나 사회경제적 신분의 격차는 말할 것도 없거늘 초능력 기술이 일반화된 지금은 물리적인 권능 측면에서도 압도적인 차이가 생겨났다.
“형이 부모님이나 나한테 곧장 오지 못한 것도 저분의 계약 때문이었겠지?”
“부정하지는 않을게.”
수현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 앞에서 자신의 낮은 위치와 무력함을 보여준다는 것은 썩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물론 절대적으로 보면 수현도 지배 계층에 속하나 상대적으로 보면 누구든 항상 다른 누군가보다 아래에 놓이기 마련이다. 우주를 지배하는 계층이라고까지 불리는 초인 사이에서도 이렇듯 엄연한 서열이 존재했다.
“내가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하고 지혜로웠다면 형을 유성운 회장님한테 무력하게 빼앗기진 않았을 텐데. 지금처럼 힘의 결핍이 한스러웠던 적이 없네.”
과거의 수현은 형의 사망 소식 이전에는 지위나 권력이나 실력 우위 같은 것에 별 관심이 없었다. 능력이 넘치면서도 욕심 한 점 없었던 동생의 옛 모습을 잘 기억하던 재현은 다시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 말 하지 마. 너는 지금 모습만으로도 충분하고 훌륭해.”
씁쓸함과 미안함이 섞인 어투로 재현이 말했다.
“예전에 내가 너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고 부러워했는데.”
“일반인 사이에서나 우러러볼 만하지 내가 속한 사회에서는 나도 약자야.”
제아무리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이라도 같은 부류끼리 한자리에 모아놓으면 일등부터 꼴찌까지 잔인하게 등수가 나뉘는 법. 절대적으로 실력 우선주의를 신봉하는 초인 집단은 그러한 경향이 훨씬 더 심하게 두드러졌다.
“유 회장……, 네게도 꽤 어려운 상대인가 보네.”
“초인들의 왕께서도 신뢰하는 부관 중 하나니까. 게다가 최근에는 지구 섹터 구분이 해체되어서 새로운 직책도 받았는데 그 덕에 더 기세등등해졌어. 이전의 숱한 공적들을 인정받아 우주 무인 기업체들을 제어하고 관리하는 중직을 부여받았거든. 이제 나 같은 아랫것들은 감히 눈도 못 마주치지.”
말로는 그렇게 겁을 주었으나 의외로 수현은 의연하고 침착했다.
“다 왔다.”
형제는 긴장감을 잔뜩 품고 정문 앞에 섰다.
“특수 결계가 설치되어 있어. 초인들을 막게 되어있네.”
수현의 눈이 성운이 설치해놓은 투명한 결계의 기반 기술을 분석했다.
“그러면 어떻게 뚫을 생각인데?”
“정면으로 돌파해야지.”
돌연 수현이 비상용 텔레파시를 성운에게로 송신했다. 그러더니 자기 형의 팔 위에 잠시 손을 얹어 두 신체의 초능력을 공명시켰다. 그는 재현의 이능력을 해석해내어 외부 간섭으로 조작한 뒤 자신의 초능력과 섞어내었다.
“형, 잠시만 힘 빌릴게.”
곧 복잡한 차원 이변들이 연달아 벌어졌다. 수현은 재빨리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연쇄적으로 보이지 않는 작업을 이어나갔다.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친 끝에 둘은 결계를 통과해 성운의 사념 파가 감지되는 곳으로 곧장 순간 이동했다.
“당신들이 왜 여기에……, 어떻게 들어온 거지?”
갈색 머리의 미남, 유성운은 무례한 침입자들을 발견하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마침 그는 제복도 아닌 편안한 디자인의 캐주얼한 사복을 입고 있었다. 아무 근심도 없이 제 가족들과 회포를 풀던 중 바람 쐴 겸 잠시 나온 듯했다.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로스트 엠페러 중 하나이신 확률왕이여.”
수현은 한쪽 무릎을 조아리고 예를 갖추었다. 성운의 눈빛은 재빨리 재현 쪽을 향하였다. 재현은 매서우면서도 이지적인 그 눈매에 위축되었다. 하지만 수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꼿꼿이 일으켜 성운을 똑바로 직시하였다.
“회장님께서 제 형제에게 실험을 시행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예의 바르고 겸손한 어투였지만 음절 하나하나에 힘이 실려있었다.
“표현이 마음에 안 드는군요. 마치 내가 그를 일부러 해쳤다는 힐난으로 들립니다만, 이거만은 분명히 해둡시다. 천재현 군을 살려낸 건 나입니다. 그에 대해 감사 인사를 들으면 들었지, 질책을 들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성운은 낮고 냉정한 목소리로 기선을 제압하였다.
“게다가 일이 있으면 공적인 자리로 찾아올 것이지.”
공기를 얼어붙게 하는 무형의 힘이 천 씨 형제를 짓눌렀다.
“왜 하필이면 내 사적인 영역에 침범하여 이 일을 거론하시는지?”
“왜냐하면 이번 일이 제게도 지극히 사사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호랑이 앞의 들개가 가까스로 버티듯 수현은 패기를 유지하려 애썼다.
“당신이라면 제 처지를 이해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초인은 가족을 걸림돌이나 정략적 도구로 여기지만, 당신만은 늘 자기 일반인 식구들을 보호하려 애써왔으니까요. 그런데 솔직히 이번에는 정말 실망했습니다. 자신의 가족이 소중하다면 남의 가족도 소중하다는 것을 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수현은 조금 전 재현에게서 추출한 데이터를 내밀어 성운의 흔적들을 밝히 드러내었다. 인체 양자 정보 복제전송을 시행한 후 실험을 거쳐 완성한 특수한 물리적 속성, 끝없이 신체를 개량하는 특수 피코머신, 수현의 제복을 복제한 유사품, 그리고 복제된 제복을 매개체로 하여 신체에 스며들게 한 초능력까지. 일반인은 속여도 초인의 분석력까지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이러고도 발뺌하시겠습니까?”
신분 차이를 고려하면 도무지 믿기 어려운 대담함이었다. 도리어 수현 곁에서 지켜보던 재현이 안절부절못할 지경이었다. 성운의 갈색 눈동자에는 희미한 노기가 깃들었다. 하지만 그는 전문가답게 부드러운 감정선을 유지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보상하면 됩니까?”
물질만능주의를 다스리는 주관자답게 성운은 사회경제적, 정치적 보상을 내걸었다. 하지만 보통 초인과 달리 수현은 그런 것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주도한 실험이니 원리도 당신이 가장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형을 당장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주십시오. 그것 하나면 만족하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유성운 회장님이 요구하시는 사항을 모두 수락하겠습니다.”
성운은 코웃음을 쳤다. 고쳐달라고? 그런 번거로운 부탁을 들어줄 의향은 없었다. 어차피 상대는 일개 하위 초인에 지나지 않는다. 무시하면 그만이다.
“이대로 넘어가실 겁니까?”
“만일 그런다면? 어쩔 셈이죠?”
“저에게도 생각이 있습니다.”
수현이 나지막이 경고했다. 성운은 그가 무슨 배짱으로 상급자에게 덤비는 것인지 의아해했다. 그러다가 이내 그 이유가 근처에 있음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대화가 벌어지던 정원 뒤쪽에 성운의 막내아우 지현이 있었다.
‘어느 시점부터 엿들은 거지? 아니, 그보다 왜 기척을 못 느꼈지?’
사람의 사념 파에 예민한 초인은 초능력의 도움을 빌린다면 특정 사람에게 집중함으로써 광년 단위의 거리 너머까지 해당 사람을 감지해낼 수 있다. 그러니 최상위 초인인 성운이 지척에 있던 동생을 못 느낀 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성운의 순간적인 실수나 흥분으로 인한 주의 산만 때문인지, 우연들이 겹쳐 만들어진 요행인지, 신의 장난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형?”
지현은 자기 형이 사람을 대상으로 모종의 실험을 했다는 이야기를 이미 엿들었는지 다소 충격에 질려있었다. 성운은 곤란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분위기가 냉담하게 얼어붙었다. 그는 엄숙한 명령조로 나직이 말했다.
“들어가 있어라, 유지현.”
“자기 형제에게는 본색을 밝히기 부끄러우십니까?”
“천수현.”
이제 성운은 평소의 존댓말 어투는 내버리고 낮고 무서운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냉전 때마저도 평정심을 잃은 적 한번 없었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고요함을 잃었다. 성운의 몸에서 섬뜩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공간을 짓눌렀다. 고밀도로 압축된 초능력을 감지한 수현이 재빨리 제 형을 뒤로 밀어내었다.
“건방지군.”
성운은 염동력으로 수현의 몸을 먼 거리에서 압박했다. 압도적인 힘 차이로 인해 일방적인 구도가 펼쳐졌다. 어찌나 힘을 정교하게 조정했는지 수현의 몸에만 염동력이 가해질 뿐 주변의 물체는 풀 한 포기도 훼손되지 않았다. 이곳이 초능력 억제력이 작동하는 지구권이 아니었다면, 혹은 성운이 조절에 실패해 힘을 광범위하게 방사했다면 행성 몇 개쯤은 원자 단위로 해체되었을 것이다.
“안돼, 수현아!”
“그만두세요, 형.”
재현과 지현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외쳤다. 그러나 수현은 눈을 똑바로 부릅뜬 채 성운을 뚫어지라 응시하였다. 형을 지키려는 수호 감정이 공포감을 눌렀다. 서열이 뚜렷한 초인들 사이에서는 쉬이 일어날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이제부터는 피차 수평적 관계 아닙니까?”
수현이 당돌하게 현실을 들먹였다.
“위버멘쉬께서 공식적인 자리에서 발표했잖습니까. 클래스에 따른 차등 없이 모든 초인에게 독립적 주권을 주셨죠. 이제는 서로 수평적으로 대하라고 명령받았을 텐데요? 당신이 그 명령을 위반하는 것을 아시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성운은 수현의 변론과 항변에는 별 관심 없었다. 오히려 그는 지현의 눈치를 보았다. 과연 동생의 눈가에는 자신을 향한 본능적 두려움이 조금 녹아 있었다. 어떻게 안심시켰는데 하필이면 이런 때에 본 모습을 들켜 그르치다니.
‘젠장.’
성운은 혀를 내차며 권능을 풀어 수현을 내려놓았다.
“수현아!”
압박감이 사라지자 재현이 즉시 다가와 수현을 살펴보았다.
“다치진 않았어?”
“아무렇지도 않아, 형. 나한테도 신체 재생 능력 정도는 있어.”
“왜 그렇게 무리했어? 아무리 흥분해도 그렇지.”
“형 탓이 아니니까 자책하지 마.”
오순도순 서로를 위하는 형제의 의좋은 모습을 내려다보며 성운은 마음속으로 조금 심통이 났다. 교활하기 짝이 없는 천수현이 제법 자신의 약점을 잘 찔러 들어왔다.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평가절하를 취하해야 할 듯하다.
‘게다가 조금 전 내가 초능력으로 압박하던 도중에 분명 천수현 저자의 능력과 저항력과 역량이 확연히 향상됐다. 단순히 초능력만 강해진 게 아니야. 운용력의 차원이 높아졌다. 지혜의 수준 자체가 영구적으로 진화했어.’
강렬한 호기심과 의문이 솟구쳤다.
‘설마……, D 클래스에서 한 번 더 진화했다? 그 짧은 순간에?’
(다음 회차에 연속됨)
이전회
423회 아벨의 후예 Ch 2. 재회 (3) |
다음회
425회 아벨의 후예 Ch 2. 재회 (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