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25회 아벨의 후예 Ch 2. 재회 (5)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1.22 | 회차평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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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초인 등급을 평가함으로써 재확인해보지 않아 불확실했지만, 만일 사실이라면 몹시 경악스러운 일이다. 천수현은 이미 각성한 후로도 두 클래스의 승급이 더 이루어진 것으로 유명한 사례. 단순 성장이 아닌 클래스 초월은 그 자체로 이례적인 일이거늘, 그런 승급이 한 차례로 끝나지 않고 오늘 추가로 한 번 더 이뤄지다니? 경이로울 만큼 특이한 표본이 아닐 수 없다.
‘지난번에는 형의 죽음, 이번에는 형이 살아났다는 충격과 나에 대한 분노가 기폭제가 되어 진화한 걸까? 정말로 기대 그 이상이군. 보스에게 보고해야 할까? 그러면 분명 보스께서도 저 표본을 주목하시겠지.’
성운의 내면에서 호기심이 분노를 누르고 우위를 점했다.
‘보스께서 추구하는 한계 초월의 결정적 힌트가 되어줄지도?’
그는 가식의 가면을 쓴 채 상대방에게 선뜻 선의의 손길을 내밀었다.
“조금 전 무례는 사과드리죠. 미리 천재현 군의 생존을 알리지 않은 점도 미안합니다. 궁색한 변명 같을지도 모르지만 내게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습니다.”
성운은 재현 앞으로 다가와 어깨 위에 손을 얹은 뒤 초능력을 써서 피코머신들에 간섭하였다. 그리고 이를 매개체로 재현의 체내에 잔뜩 얽힌 초능력들을 정교하게 풀어서 재조립해주었다. 재현은 당장이라도 폭주할 것만 같았던 힘이 빠르게 안정화되는 것을 감지했다. 아울러 힘을 안정적으로 운용하는 요령에 대한 지식도 뇌리로 흘러들어왔다. 성운이 제복을 매질로 뇌 속에 전송해준 듯했다.
“무리하게 힘을 쌓지만 않으면 꽤 오랫동안 안정성을 유지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재현은 감사 인사를 전했으나 수현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천재현 군의 이능력을 제거하는 것은 제 능력 밖의 일입니다. 죽어가는 그를 살려내는 과정에서 거의 우연에 가깝게 얻은 능력이기에 내게도 요행이나 다름없습니다. 본질적 원리를 다 이해하지도 못했죠. 섣불리 능력을 제거하려 하면 오히려 심한 손상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입니까?”
수현은 못 믿겠다는 어투로 되물었다.
“내 학문적 명성을 훼손해가면서까지 겸손 떠는 성격은 아닙니다.”
“그러면 다른 방도는 없겠습니까?”
“현재로서는 보스 말고는 해답을 알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왕이 거론되자 재현과 수현은 물론 성운까지도 긴장에 잠겼다.
“하지만 보스께서 선뜻 맡아주실지는 확답을 드릴 수 없군요.”
이에 재현은 동생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만류했다.
“나는 괜찮아, 수현아.”
“형.”
한참의 망설임 이후 수현은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하였다. 탐탁지 않더라도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공경의 표시로 성운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형을 데리고 재빨리 자리를 떴다. 돌아가는 길에도 수현은 재현에게 경고의 당부를 아끼지 않았다.
“당장 시간은 벌었지만, 앞으로도 계속 안정적이리라는 법은 없어.”
수현의 부정적 전망을 들은 재현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 따로 방법을 찾아볼게, 형.”
“하, 하지만…….”
“필요하면 3대째 위버멘쉬를 뵙고 거래를 시도해보지 뭐.”
“뭐라고? 거래라고? 그분과?”
동생이 자신 때문에 또 무슨 무리수를 둘지 심려되었다.
“내가 비록 가진 것은 부족해도 딱 한 가지 위버멘쉬께서 탐내는 조건을 가지고 있거든. 그것을 내주면 될지도 모르지. 그분이 안 그래도 나를 주목하고 있거든.”
“그,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수현은 카이젤이 왜 자신을 호시탐탐 노리는지를 설명해주었다.
“초인 중에서는 일반적인 규칙에서 벗어난 특이성을 지닌 이례적 예가 몇몇 있어. 흔히들 이레귤러라고도 표현하지. 그 특이성이란 게 능력적인 우월함을 말하는 건 아니야. 그보다는 에러(error)라는 개념에 더 가깝지.”
그는 이레귤러 초인의 유명한 예시 중 하나를 들려주었다.
“형이 잠들어 있던 동안 인류연합을 대적한 반역 사건이 한 번 일어났었어. 그때 루미니아라는 초인이 왕을 배신하고 반역에 가담했지. 순리대로라면 3세대 초인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우리는 본능적으로 동 세대의 왕에게 충성하게 되어있으니까. 그런데 그녀는 위버멘쉬를 너무 과도하게 집착적으로 사랑한 나머지 그를 소유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망가뜨리겠다는 마음으로 배신을 벌였어. 사건 직후 위버멘쉬는 그녀를 실험체로 삼는 형벌을 내렸어.”
사실 카이젤은 늘 이레귤러인 초인을 실험체 삼아 실험을 하기를 원해왔다. 초인 탄생과 초인 각성의 비밀을 밝혀내고 이를 일반화하여 인류를 고차원적인 경지로 도약시키려는 동기 때문이었다. 차마 같은 동족을 상대로 선을 넘는 일을 저지르기가 윤리적으로 꺼림칙해서 자제해왔을 뿐이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참에 때마침 드러난 루미니아의 어리석음은 그 양심의 가책을 전적으로 덜어주었다. 그녀의 반역 행위 가담은 사형에 준하는 범죄. 그 덕분에 카이젤은 합법적으로 좋은 실험체를 획득하게 되었다. 왕으로서는 부분적으로나마 전화위복이 생긴 셈이었다. 이후 실험체로서의 루미니아는 ‘충성의 표식’과 ‘정신 간섭 능력’을 완성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또다른 이레귤러 초인의 예시는 재현도 잘 아는 자였다.
“최근에는 자신에게 아예 충성하지 않는 3세대 후천 각성 초인, 형도 아는 크리슈나 칼라만트라를 정식으로 고용하여 실험에 참여시키셨어. 자유를 보장해주는 대가로 자발적으로 실험체로 참여하는 대가로 계약을 맺으셨지.”
크리슈나의 불복 성질은 3세대 초인의 일반적인 성질을 벗어난 특이성. 그의 특성도 연구 대상임은 마찬가지였다. 조만간 그는 클론 솔져, 즉 개성을 갖춘 카이젤의 인공 분신들을 제작하는 데 쓰일 유용한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참고로 각성 시 주어진 클래스의 한계를 깨트리고 진화했던 전례가 있는 수현도 이레귤러 중 하나에 포함된다. 무한히 성장하는 초인들에게도 클래스는 불변의 틀. 클래스 자체가 적용되지 않는 다섯 정상을 제외하면 그 틀을 벗어난 예는 현재까지는 수현뿐이었다.
“너 설마…….”
재현은 당혹감에 입이 굳었다.
“형을 치료해주기 위해서라면 내가 실험체가 될 생각도 있어.”
아니나 다를까 수현은 담담히 청천벽력 같은 선언을 했다.
*
심각했던 본론과 달리 뒷이야기들은 비교적 훈훈했다.
수현은 재현이 그간 유 회장의 그늘과 히어로즈라는 울타리에 속박된 채 정보와 소식을 차단 당한 동안 가족들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시간 순으로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재현은 하나하나 말없이 귀담아들었다.
“동생에게 듣기론 제가 없는 동안 제 주변 세상이 엄청 변했더라고요.”
형 때문에 일부러 자신을 감추었던 동생이 초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모두를 휘어잡은 일, 그 뒤에 이어진 수현의 인류연합으로의 합류, 가문에 속한 다른 이들의 몰락과 쇠퇴, 그리고 늘 수현을 꺼림칙하게 여겼던 조부의 타계까지. 그 시기가 아마 3대째 위버멘쉬의 철권 통치가 흔들림 없이 확립되던 무렵이라고 했던가? 여하튼 조부를 꽤 싫어했던 수현은 한 치의 애도도 섞이지 않은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돌아가신 분께는 죄송하지만, 저도 목 졸리는 듯한 속박감에서 아주 조금은 해방감을 느꼈죠. 솔직히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는 일이 무섭긴 했거든요.”
한때 재현의 삶을 괴로움으로 점철시켰던 장본인 중 하나였던만큼 이해는 충분히 되고도 남았다. 지난날의 굴레를 털어낸 재현은 애도와는 별개로 마음의 짐들을 홀가분하게 내려놓았다. 할아버지의 억척스러운 고집으로 생성된 동생을 향한 열등감과 원망에 더는 매이지 않아도 되었다.
그 외에도 이전에 재현과 수현 사이를 엉망으로 망가뜨린 주변 사람들은 모두 천벌을 받은 것인지 몰락하거나 쫓겨난 상태였다. 이미 초인들의 세계의 일원이 된 수현은 큰 그릇의 소유자답게 그런 잔챙이들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무시했다. 이제 지난 십수 년간 그토록 그리워했던 형제까지 되찾았으니 두 사람으로서는 모든 것이 얼추 올바르게 돌아온 셈이었다.
‘진작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질적으로는 유복했으나 모든 부분에서 불행했던 어그러진 과거의 삶. 가끔 재현은 그 일들이 없었으면, 처음부터 동생과 자신이 화목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곤 했다. 우여곡절을 겪긴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 생각들이 현실이 되었으니 그로서는 기쁘면서도 떨떠름했다. 하긴 시련들을 겪지 않았으면 나약한 자신은 전혀 성장하지 못했으리라.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죠?”
“동생과 함께 곧장 집으로 가서 부모님과 재회했어요.”
윤혁의 질문에 재현은 가족들의 품으로 복귀한 이야기로 끝마무리를 맺었다. 분명 경축할 일이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으니 부모님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분명 크게 울며 그를 맞아주었으리라. 청자들도 그 감동적인 광경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 제수씨도 처음 만났고요. 동생이 몇 개월 전에 좋은 여자분과 결혼했더라고요. 동생과 동류의 사람, 그러니까 초인이긴 한데, 꽤 잘 맞는 좋은 짝이라는 감상이 들더라고요.”
기쁘긴 기쁜지 재현의 얼굴에 흐뭇함이 걸렸다.
“저야 지금의 복잡한 개인적 사정 때문에 당분간 가정을 이루긴 힘들겠지만, 동생이라도 멋지게 가정을 이루고 정착해서 다행이에요. 덕분에 부모님으로서는 겹경사가 되었죠.”
듣는 이의 입장에서도 한 잃어버린 식구가 가족들의 품에 돌아온 사연은 참으로 경사스러운 소식이었다. 다만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자리를 정리하던 중 본론 중 스쳐 간 한 가지 석연찮은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어그러졌던 과거의 삶은 올바르게 맞춰졌다지만 이제 새로운 차원의 고민거리가 생기지 않았던가.
“동생분이 정말로 막무가내로 희생을 결정하시던가요?”
염려스런 어조로 윤혁이 되물었다.
“글쎄요. 실제로는 어찌할지 모르겠어요.”
심려로 인해 재현의 낯도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 아이라면 한 번 내세운 고집은 꺾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더 걱정돼요. 인류연합 대표와 무리한 거래를 하면 안 될 텐데. 유성운 회장도 만만치 않거늘, 하물며 그분은 어떻겠어요?”
자신 때문에 또다시 동생이 희생하는 것은 사양이었다.
“염치없지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강윤혁 씨.”
“네, 말씀하세요.”
재현은 자신보다 한참 어린 청년에게 겸손한 자세로 부탁하였다.
“저도 이런 궁색한 방법을 쓰고 싶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상황이 이러하니 저로서도 어쩔 수 없네요. 강윤혁 씨는 인류연합 대표와 이복형제의 관계라고 들었습니다. 우애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들었고요.”
올 것이 왔다. 윤혁은 서론을 듣자마자 곧바로 긴장했다. 상대가 무엇을 부탁할지 대강 예상이 되었다. 하지만 윤혁과 카이젤은 단순히 친근한 형제 사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복잡한 뒷사정이 너무 많은 관계였다. 그렇다고 천 씨 형제의 애절한 사연을 듣고 보니 마냥 매몰차게 부탁을 내치기도 어려웠다. 따지고 보면 자신도 형에 대한 애정 때문에 형과 그의 세계의 침몰을 막으려 애쓰는 것 아니겠는가. 동병상련으로 인해 깊은 동질감이 느껴졌다. 딜레마가 깊어졌다.
“혹 당신의 형님을 만나거든 수현이를 실험체로 쓰지 말아 달라고 한 번만 부탁해 주세요. 제 동생이라면 그런 무모한 거래를 시행으로 옮기고도 남습니다. 그리고 인류연합 대표는 인류의 승리와 번영과 영광을 위해서라면 다소 위험한 도전도 마다치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인지라 당사자의 형제로서 할 말이 없었다.
“하, 하지만…….”
“윤혁 씨, 당신도 형제를 사랑하고 그의 길을 안타까워하는 분이니 저의 마음에 공감하리라고 믿습니다. 아니,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같은 주님을 믿는 영적인 형제로서 저에게 작은 긍휼의 마음을 베풀어주셨으면 합니다.”
윤혁은 몹시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과연 인류연합의 수장 카이젤의 폭주와 종횡무진을 막아낼 수 있을까? 형이기에 앞서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위험한 인간이거늘. 천재현 씨가 가족들의 품으로 무사히 돌아간 것처럼 카이젤도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려는 야욕을 멈추고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착잡한 심정으로 윤혁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장담은 함부로 할 수 없기에 현재로서는 이 대답이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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