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35회 아벨의 후예 Ch 4. 이레귤러 (6)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2.24 | 회차평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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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은 결국 간단하게 마무리 되었다.
“일어나라.”
힘을 충분히 시험해본 카이젤은 뭉친 근육을 간단히 풀었다. 그는 대련에서 패해 쓰러진 부하들에게 무감각하면서도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육체와 초능력의 동화 과정에서 생성된 에너지를 과도하게 소모한 영향으로 네 명의 부하들은 녹초가 된 상태였다. 원래 불멸의 체력임에도 그러할 정도였다. 그런데 정작 더 많은 힘을 사용한 그는 멀쩡했다. 이것이 초인의 육체의 질적 차이였다.
“오늘따라 감정이 많이 실리는군요, 킹.”
퀸, 아키라가 그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보인다고?”
“확실히 기분이 좋지는 않아 보이시네요.”
“그렇다면 실례했군.”
카이젤이 담담히 사과했다.
“뻔하지 뭐. 또 그 얼빠진 일반인 녀석이랑 다퉜을…….”
“비숍.”
버릇 없이 떠벌리던 비숍은 킹의 낮게 깔린 묵직한 책망의 목소리에 즉각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퀸과 나이트는 비숍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맥락을 몰라 갸우뚱거렸으나 룩은 누구의 이야기인지를 곧바로 알아들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비숍의 가볍고 경박한 입도 문제지만 킹도 킹 나름대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갈수록 당신답지 않은 모습이 나타나는군요.”
룩이 직접적으로 충언했다.
“나답다는 게 어떤 의미지?”
킹이 반문하였다.
“당신은 냉철하고 신중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완벽주의자이시죠.”
큐오즈린의 정확한 감상평에 카이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남들의 시선에 비친 자신의 자화상이 이러하였구나. 확실히 자신도 강윤혁을 만나면서부터 변하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증거로 평생 봉해둔 흔들리기 쉬운 연약한 내적 심정들이 차례차례 바깥으로 비집고 빠져나왔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최근 들어 적잖이 느껴졌다. 썩 반갑지는 않은 변화였지만 스스로를 성찰해봐도 흥미로움을 유발하는 연구 주제였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잔뜩 땀으로 젖은 상체를 이능 에너지 방출을 통해 말린 카이젤은 휴식으로 잠시 지친 몸을 회복시켰다. 이후 기력이 돌아온 그는 다시금 냉정한 어조로 두 부하를 호명하였다.
“퀸, 나이트.”
“네.”
“말씀하시죠.”
오늘 이 자리에 헥터와 아키라를 불러 모은 건 초월화된 육체의 성능을 확인하고자 대련을 시행하는 것을 겸해 다른 확인할 사항도 하나 있어서였다. 물론 카이젤 스스로 직접 조사할 수도 있겠지만 이왕이면 당사자의 입으로 직접 증언을 듣고 싶었다.
“지구 기준으로 34년 전, 그러니까 나와 지구 출신의 선천적 3세대 초인들이 태어났던 그 해 말이다. 그때 너희 둘도 지면에서 깨어났었지. 너희는 그때 상황을 혹 기억하는가?”
이에 적발의 여성인 퀸이 잠깐 회상에 잠겼다. 그 당시의 그녀는 이미 탄생 후 몇 달간의 배양 프로세스를 거쳐 최종적인 성체로 자라난 상태였다. 통상의 인간에게 적용되는 탄생, 성장, 성년화의 개념과는 매우 다른 과정의 발육이 그녀에게서는 나타났다. 애초에 그녀는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존재였으니까.
“온전하게는 아니어도 그때 처음으로 자의식을 얻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희미하기 그지없는 불투명한 기억이었다. 그 실험실의 역사는 베일에 싸인 인류 흑역사로 카이젤도, 현 초인들도, 심지어 아키라와 헥터 자신도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다. 그 일을 알던 모든 이들이 아키라와 헥터 두 실험체의 에너지 흡수 폭주로 인해 휘말려 몰살당했고 실험실의 데이터들도 충격파로 인해 모조리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는 인간이라기보다는 괴물에 가까웠죠.”
“아니, 애초에 비인간이었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비인간으로 남았겠지. 너희는 그때부터 분명 인간이었다. 내가 거들어 준 것은 그저 안정화 치료에 불과했지. 너희의 본질은 사람이야.”
카이젤이 무덤덤하게 선언했다.
“그것참 고마운 말이로군요.”
아키라가 피식 웃었다. 이래서 따를 가치가 있다니까. 비록 권위적이긴 해도 저런 모습 때문에 기꺼이 따르기로 했고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 선택에 일절만큼도 후회가 없었다.
“아무튼 당시의 우리는 쌍둥이 실험체였습니다.”
퀸은 자조하듯 자신들의 흑역사를 읊기 시작했다.
“킹께서도 잘 알다시피 우리는 위버멘쉬를 대체하고자 만든 작품이었죠.”
이것은 카이젤을 비롯한 3세대 초인들도 잘 아는 이야기이다. 항상 초인 세계에서 한 세대로부터 다른 세대로의 전환이 일어나는 시기에는 으레 이런 류의 음모가 벌어지곤 했다.
“이벨리아 아담즈의 성공 사례를 보고 벤치마킹한 모방작, 그것이 바로 우리였습니다.”
1세대에서 2세대로의 전환에 인간들의 인위적인 계략이 일정 부분 공로를 세운 것은 사실이다. 윤리적인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이것은 후대에 이르기까지 다시 시도되고 탐구될 가치가 있었으리라. 인간은 그런 생각으로 다시금 초인 생산이라는 악행의 유혹에 기꺼이 넘어갔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2세대 초인 그 작자들은 과한 욕심을 부렸죠. 최강의 위버멘쉬를 만드는 일도 불확실하건만, 최강의 생체병기까지, 그 두 가지 토끼를 한 그릇에 담아낼 목적으로 무모한 짓을 벌었습니다.”
“초인인 동시에 인체 병기라.”
“그 결말은 우리 같은 폭주 실험체를 만들고 말았죠.”
탐심과 어리석음은 파국으로 이어졌다. 아키라와 헥터의 생명 에너지 폭주로 인하여 연구실 직원들만 죽은 것이 아니라 근방에 있던 하와이섬 주민들까지 한 날 한 시에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그 이후로 하와이는 유령이 출몰할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무인도로 줄곧 남겨졌다. 한 여인이 그곳을 자신의 영토로 선언하기 전까지는 아름다움을 되찾지 못했다.
여기까지는 이미 어느 정도 잘 알려진 이야기. 그러나 정작 오늘 묻고픈 부분은 따로 있었다. 당시 의식이 지워졌던 실험체들이 즉답을 줄 수 있을리는 만무하겠지만 어쩐지 그들의 기억 어딘가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리라는 직감이 카이젤의 첨예한 직관력을 자극했다.
“궁금하군.”
“어느 부분 말씀입니까?”
“혹시 너희가 폭주했을 때 레리엔도 그 자리에 있었나?”
그러자 검은 피부와 고동색 머리의 여성 헥터가 대답했다.
“글쎄요. 저희는 그 일 이후로 7년 이상 의식 없이 봉인을 당했기에 정황을 잘 모릅니다. 다만, 무의식 속에 희미하게 남은 기억의 잔흔은 있습니다. 만일 현실의 기억이 맞다면 말이죠. 아시다시피 갓 태어난 아기는 현실과 허상을 정확히 분간해서 기억을 쌓지 못합니다.”
“그건 그렇지.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여하튼 이 단서가 킹께서 찾으시던 실마리일지는 모르겠군요.”
헥터의 말에 카이젤은 그답지 않게 긴장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제 세포들과 뉴런들과 생명 에너지 속에 각인된 분자 단위 데이터에 의하면 그 당시 우리가 발생 과정을 마치면서 일으켰던 무차별적 생명력 흡수에 유일하게 굴하지 않고 도리어 우리가 흡수한 생명력을 역으로 흡수했던 존재가 단 하나 있었습니다.”
“생체 병기인 너희의 흡수에 역으로 대응했다?”
“네, 그런 일이 가능해지려면 최소한 저희 둘보다 질적으로 우수한 생명력을 지닌 존재여야 합니다. 생체 병기 혹은 초인처럼 말이죠. 그런데 아시다시피 저희보다 강한 생체 병기는 존재치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현 U-society 소속 초인 중에서도 그럴 만한 위인은 없습니다. 킹을 제외하면 말이죠.”
카이젤의 머리가 빠르게 주판을 두드렸다. ‘초인의 육체’와 생체 병기의 우수성은 그 특색이 다르므로 비교하기가 애매하다. 그러나 적어도 U-society에 가입되어 데이터가 확인된 부하 초인들 가운데에는 아키라나 헥터를 상대로 상대적 우위성을 지닌 이가 없다. 그렇다면 가입되지 않은 이라면?
“다만 그 존재가 레이디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그녀는 유독 그 섬에 각별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지. 의심의 여지 없이 그녀의 고향은 그곳이다. 너희 증언이 모두 사실이라면 너희를 억누른 그 생명체는 레리엔이 될 수밖에 없겠군.”
최근 들어 메시아닉 유대인들이 지구 전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는 소식이 떠올랐다. 경제 시스템으로부터 배제당한 탓에 섬 밖에서는 생계유지가 불가능한 그들이 어떻게 버젓이 경제 활동을 할 수 있었을까? 현재의 경제 시스템은 그가 15살이 되던 해에 손수 완공한 이후로 지금껏 수천 번도 넘는 강화를 거쳤다. 레리엔의 실력만으로는 그 시스템에 간섭하지 못함이 자명. 그렇다면 그녀는 무슨 반칙을 부린 것일까? 지금까지는 막연한 가설뿐이었지만 헥터와 아키라의 증언 덕분에 신빙성이 생겼다.
‘생명에 유착된 자본……, 그 특성을 공략했다? 어쩌면 레리엔은 자신의 생명력을 섬에 세 들어 살던 민족에게 나눠줬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원리는 역시 고유 재능인가?’
만약 그렇다면 왜 자신은 그녀의 재능을 미리 알지 못했을까? 왜 그녀는 과거에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을까? 특수 조건이 성립할 때만 나타나는 능력인가? 아키라와 헥터의 생명력 흡수 폭주도 그 조건의 충족 인자였을까?
하지만 카이젤 속의 ‘학습의 괴물’은 무의식적으로 잠재된 재능마저도 감지하여 포식하는 능력. 어찌하여 레리엔의 그 재능에는 그 포식이 닿지 않았단 말인가. 그녀의 다른 모든 고유 재능은 분명 복제해서 삼켰었거늘. 혹시 삼키고도 인식하지 못한 것인가? 그녀의 몸에만 조화되는 능력이라서?
‘그것도 아니면……, 내가 기존에 보유한 재능과 상충을 일으켜서?’
카이젤 라흐블뤼크라는 인간에게는 ‘무한대의 용량’이라는 고유 특성이 있다. 외부로부터 물리적, 정신적, 영적 요소를 받아들일 때 용량 제한이나 과부하 없이 온전한 자신의 일부로 소화하는 특색. 그 때문에 레리엔의 희생적인 성격의 재능은 사용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뭐가 됐든 그녀를 만나봐서 진실을 파헤쳐봐야겠군.’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하니 무언가가 역린을 간지럽히는 기분이 들어 썩 좋지 않았다. 불쾌한 기억들과 함께 뼈저리게 기억 속에 새겨진 짙은 배신감이 상기되었다. 유독 옛 친구들 중에서 그녀만은 특이한 이유로 불편했다. 미워하지도, 애착 품지도 못할 얄궂은 운명이기에. 그녀에게 품은 애증은 몹시 깊고도 아렸다. 하체에 새겨진 굴욕적인 흉터가 욱신거리는 듯한 착시 감각이 들었다.
‘나도 참 한심하군. 그저 공적인 만남일 뿐인데 무슨.’
하필이면 한때 여자로 보았었던 사람을 또 마주해야 한다니. 뿌리 깊은 열패감과 숨겨둔 수치심이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다. 영원히 지워질 줄로만 알았던 괴로운 기억의 마지막 파편을 우연히 다시 발견하게 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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