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38회 아벨의 후예 Ch 5. 루디아의 편지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2.21 | 회차평점 ![]() |
(이전 회차에서 연속됨)
편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였다.
친애하는 윤혁이에게
윤혁아, 안녕.
한국에서 잘 지내고 있지? 나는 섬에서 동포들과 건강히 잘 지내고 있어. 아렌 할아버지와 얀 할아버지, 그리고 동생들도 안부 전해달래. 언젠가 너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더라. 1, 2차 선교 여행 때 도와주셨던 우리나라 분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하고 있어. 따지고 보면 예슈아 안에서 다 같은 지체인데 이방인과 유대인을 나누는 게 무의미할지도 모르겠네.
요새 너희 소식은 어때? 리온은 잘 지내고 있고? 리온이 이번에 설립된 지구 교회에서 사역자로서의 소명을 감당하기 시작했다고 듣긴 했는데 그 친구가 워낙 바빠서 그런지 연락하기도 조금 미안한 기분이야. 그래도 언젠가 시간이 된다면 나도 지구 교회를 방문할 생각이야. 너도 같이 가자. 인류연합의 눈치 때문에 몸을 사리는 중인 건 이해하지만 한 번 정도는 괜찮을 거야.
아, 참. 스테판 씨 소식은 나도 아직 못 들었어. 솔직히 조금 걱정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해주셨으리라고 믿어. 혹시 네가 들은 게 있다면 나한테 답장으로 알려주지 않을래?
건강은 어때? 물론 너야 워낙 튼튼하니까 크게 염려는 안 하지만 여행 때 네가 너무 무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심 마음이 아팠어. 내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는 사실도 안타까웠고. 사명감도 좋지만 자기 자신도 좀 돌봐가면서 해줘. 그래야 더 오랫동안 뛸 수 있잖아.
이곳 소식을 들려줄게. 요새 메시아닉 유대인 사이에서는 강력한 선교의 열망이 불고 있어. 우리도 외관상의 전통만 다르지, 본질적으로는 그리스도인과 똑같으니(히브리어 단어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크리스토스’가 되잖아) 이것이 마땅하고 바람직하고 올바르고 필연적인 흐름이겠지. 우리도 마땅히 이방인들을 향해 복음으로 나아가야 해.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뻐.
지구 교회가 수세에 몰린 지금 우리도 그들을 돕기 위해 본격적으로 전면에 나설 생각이야. 벌써 수만 명의 유대인 청년이 선교사로 자원하고 있어. 대단하지 않아? 이제야 우리 민족이 하나님의 일에 제대로 쓰임 받는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은 쉬고 있지만 나도 조만간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어.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전할 중요한 소식이 있어. 아마 너도 기뻐할 거야. 아가씨께서 너에게 공식적으로 섬의 주민권을 부여하셨어. 이제부터는 너도 우리 메시아닉 유대인들처럼 원할 때마다 마음대로 섬을 드나들 수 있어. 네게 선물 된 주민권은 우리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이라고 하시더라. 나처럼 섬의 중앙부까지 마음껏 방문할 수 있대. 언젠가 한 번은 너에게 아가씨와 아가씨네 아버지를 소개해주고 싶었는데 잘 됐지? 네가 이방인과 유대인을 잇는 다리가 되어주어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예슈아께서 너를 정말로 귀한 역할로 쓰시는 것 같아.
지금 보내는 편지 안에 아가씨가 주민권을 동봉하셨어. 아가씨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제일 똑똑한 분인지라 희한한 기술을 많이 다루셔. 정확한 원리는 모르지만 네 자유의지에 입각한 허락만 따르면 곧바로 주민권이 네게 주어질 거래. 혹시라도 기술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내 편으로 다시 답변해줘. 그러면 내가 아가씨에게 해결을 부탁할게.
가까운 시일 내에 만났으면 참 좋겠다. 네가 너무 바쁘면 내가 찾아갈게. 우리에게도 이제 세계 밖에서 경제 활동을 할 방도가 생겼거든. 아가씨가 통 크게 큰 혜택을 베푸셨어. 덕분에 비록 불완전하긴 해도 선교 여행을 다닐 여건은 돼. 아니면 네가 섬을 찾아와도 좋고. 맛있는 전통 음식도 많이 준비해놓을게. 섬 중앙에 건강에 좋은 온천도 있는데 친구들과 같이 놀러 와도 좋아. 아가씨랑 나도 종종 갔었는데 피로가 잘 풀리더라.
그럼 건강 잘 챙기고, 늘 주님 은혜 안에서 평안하길 바라.
네 소중한 친구, 루디아.
편지를 읽는 내내 윤혁의 입에는 절로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중립지대를 마음 놓고 왕래할 수 있는 권한이라니. 가슴이 기대감에 들떴다. 이제는 메시아닉 유대인들과 물리적 장벽 없이 교제를 나누면서 신앙적인 교류를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루디아와 자주 만날 길이 열렸다는 사실이 기뻤다.
‘룻,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그녀의 맑은 얼굴을 다시금 마주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갈 때 어떤 선물을 준비해가는 것이 좋을까? 루디아네 공동체 사람들에게는 어떤 선물이 필요할까?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이것저것 준비해가야겠다. 기쁜 고민과 생각들이 아른거렸다.
‘그나저나 동봉된 주민권이라고?’
문득 의문이 들었다. 막상 편지를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뒤져보아도 종이 뒷면에 희미한 문양만 하나 있었다. 장미꽃 모양이었다. 윤혁은 혹시나 하여 그것을 찬찬히 만져보았다.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기분 탓인가?’
실망해서 돌아서려는 찰나, 갑자기 눈앞에 허상 스크린이 나타났다.
{승인 요청 확인. 집행자 ‘통일시스템’이 중립지대의 관할자, 레리엔 로즈가 양도한 생명 에너지의 파편에 대해 강윤혁의 임시 소유권을 부여합니다.}
{경제 체제 및 자본 포인트와 동기화 완료.}
{인류연합 치외법권 지대에 대한 주민권 이식 완료.}
{중립지대 결계 출입 허가 코드 이식 완료.}
복잡한 메시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뇌리로 전달되었다. 최근에 개편된 인류 경영 무형 시스템은 모든 인간에게 효과적으로 접근하고자 이러한 식의 접근 방법을 취하였다. 마치 현실의 존재들을 게임 속 캐릭터로 전락시킨 것 같아 어색한 기분이었지만 아무런 물리적 인프라 없이 무형 시스템의 실시간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편리하긴 했다.
‘거꾸로 말하면 그만큼 철저히 감시한다는 뜻이겠지.’
이런 범우주 단위의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얼마나 큰 노력이 소요되었을까? 인간은 물론 이종족과 기계, 심지어 동물과 자연과 행성들과 천체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모든 것을 관장하는 궁극의 인공 관리자, 통일시스템. 인간이 정복한 영역 한정으로는 인공적인 ‘신적 존재’와 마찬가지의 구실을 하는 존재. 그런 괴물을 창작한 카이젤의 실력이 놀랍고 경악스러웠다. 또한 그가 통일시스템을 이용해 펼칠 독재정치를 생각하니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나저나……, 아가씨라는 분은 어떤 사람이지?’
루디아나 아렌 할아버지에게서 몇 번 전해 듣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녀는 윤혁에게 있어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다. 통일시스템의 공지 사항을 찬찬히 보아하니 ‘레리엔 로즈’라는 이름이 아마도 그녀를 지칭하는 듯했다. 루디아와는 개인적으로 친밀한 사이라고 했던가? 하긴 난민 시절의 메시아닉 유대인들을 섬에 받아주었을 테니 루디아에게는 분명 인생 제일의 은인이었을 것이다.
‘범인과 비범한 자의 친밀한 관계……, 리온과 성녀처럼?’
하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은혜를 입었음에도 극도로 성녀를 경계하는 리온과 달리, 루디아는 그 아가씨라는 사람에 대해 긍정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레리엔이라는 인물은 티아라와는 달리 간교하게 기독교 신앙에 걸림돌을 놓는 인물은 아닐 것이다. 일단은 그리 믿고 싶었다. 물론 사람의 속은 한 길도 알기 어려우니 진정한 속내는 직접 만나 살펴봐야 알겠지만 당장은 걱정거리로 간주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나저나, 생명 에너지의 파편이라고?’
인프라도 부족한 섬에서 그런 기술을 다루거나 구현하는 게 가능키나 한 일일까? 대체 무슨 원리의 기술인지 모르겠지만 레리엔이라는 인물은 대단히 지혜롭고 탁월한 위인일 것으로 예상되었다. 윤혁의 기억 속에 한 가지 회상이 스쳤다. 그러고보니 이전에 진이 스쳐가듯 그의 사부를 언급했었지. 정황상 그 사부라는 사람이 레리엔이라는 분과 동일인물일 테지. 무려 괴물 같은 천재성의 소유자인 진마저도 겸허히 인정할 정도이니 상상을 초월한 초지능을 지닌 현자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성녀나 크레센트의 선지자 같은 카테고리 분류 불가의 초인인가?’
생각해보니 티아라를 만났을 적, 그녀는 과거 카이젤이 납치당했던 시절의 사건 내막을 설명하면서 반역자 둘과 중립자 둘을 언급했다. 문맥으로 미루어보건대 그 중립 두 명이 티아라 본인과 레리엔을 말하는 것이었으리라.
‘크레센트의 선지자는 인류연합 측을 적대한 반역자 쪽에 속했겠지?’
스테판과 이레귤러들의 문제도 그렇고, 유대인들을 경제 시스템으로부터 축출해버린 사건도 그렇고, 그녀는 도저히 좋게 봐줄 수 없는 악인임이 분명했다. 그나마 온건하고 부드럽다는 성녀 티아라도 막상 만나본 바에 의하면 정상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 입장에서는 반겨줄 수 없는 존재였다. 윤혁은 부디 중립지대의 주인이라는 여인만큼은 정상적인 사람이기를 소원했다.
*
아나스타샤는 메시아닉 유대인을 대표하는 70인의 인물들을 초대하여 비공식 회담을 구성하였다. 사실 정식 국가 체계를 갖추지도 못한 채 섬에 세 들어 사는 난민들의 원로들인지라 대표라 하기에는 궁색한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엄연히 70만 동포에게 인품과 슬기로 인정과 존경을 받는 지혜자들이었다. 실제로 그들의 영적 활약은 놀라웠다. 최근 메시아닉 유대인이 폐쇄적 신앙인 집단에서 열린 선교 민족으로 재탄생한 데에도 이들의 지도 덕이 컸다.
사실 이번 회의는 첫 접촉이 아니었다. 그간 아나스타샤는 70인의 지도자와 정기적으로 접촉해오며 지혜로운 조언을 수없이 제공해왔다. 나이가 어리다고 그녀를 무시하는 이는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반쪽짜리 초인이기에 한없이 초인에 근접한 수준의 두뇌를 지닌 자. 더욱이 그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신자이기도 했기에 영성도 탁월했다. 메시아닉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이 이방인 여인에게 성령님의 지혜가 함께한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세를 낮춰 지혜의 조언을 구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회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아나스타샤가 본론을 꺼냈다.
“여러분께 부탁드리기 전에 미리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지도자들은 잠잠히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 섬의 여주인이신 그분의 양아버지, 레우벤 몰데카이 씨의 행적을 조사했습니다. 여러분도 대강 알고 계셨겠지만 그분은 이스라엘 국민이셨습니다. 여러분이 고향을 떠나오기 한참 전에 모종의 이유로 이 섬에 정착하셨죠.”
지난번 레우벤과의 인터뷰를 들은 후에 아나스타샤는 자기 발로 직접 이스라엘을 탐방하여 수소문을 통해 레우벤과 그 가문의 발자취를 역추적하였다. 생각 외로 어렵지 않게 그의 자취를 찾아갈 수 있었다. 그 자취의 끝에서 나름 흥미로운 비밀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저는 제일 먼저 그분의 옛 아내였던 레아 씨를 조사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실종된 이후로 몇 년간은 실연으로 방황하였죠. 그러다 결국은 남편이 죽었다고 판단하고 그를 찾기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남자를 만나 재혼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슬픔이 되었죠.”
한편 재혼한 뒤 얼마 지날 무렵, 레아는 한 세기 전부터 회자되던 예슈아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는 극적으로 회심하여 전통 유대교에서 벗어나 복음을 믿게 되었다. 하지만 종교를 바꾸는 바람에 필연적인 핍박이 따라왔다. 사회 주류를 차지하던 유대교 신자들, 그리고 위버멘쉬의 계통 가운데 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라고 믿던 광신자들은 그녀를 비롯한 메시아닉 신자들을 격렬히 미워했다.
“슬프게도 그녀의 새 남편도 바로 그러한 핍박자의 전형적 예였죠. 레아가 개종한 것은 첫 아이를 낳은 직후였습니다. 새 남편은 예슈아를 격렬히 미워하는 사람이었어요. 메시아닉 유대인이라면 학대와 비방은 물론 폭력까지도 서슴지 않는 과격파였죠.”
어느 날, 자신의 아내가 몰래 종교와 정체성을 바꾸어 메시아닉 유대인 무리와 합류하게 된 것을 알아차린 남편은 격한 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거듭된 학대 끝에 그는 끝내 아내를 자기 주먹으로 때려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의도된 살해인지 우발적 살해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레아와 그의 딸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된 고난이었다.
“감사하게도 레아가 미리 남편의 심상찮은 낌새를 알아차린 덕에 아이는 남편의 악행이 닿기 직전에 믿을만한 이웃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습니다. 신실하고 경건한 사람이었죠. 레아는 설령 아이가 핍박받는 대열에 합류하는 한이 있더라도 예슈아를 믿는 사람들로부터 배우며 복음 속에서 자라길 원했죠.”
다행히도 레아는 현명한 어머니였다. 여느 어머니처럼 그녀는 딸 아이가 잘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아이의 세속적인 평안보다는 그 작은 영혼의 구원과 성장을 더 우선시했다. 이스라엘의 종교관은 모 아니면 도. 대부분의 유대인은 예슈아를 독실하게 믿거나 위버멘쉬나 세상을 열광적으로 맹신했다. 이런 구조상 예슈아에 대한 신앙을 갖는 즉시 핍박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레아는 아이를 편안함보다는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를 택했다.
“안타까운 사연이군요. 아이와 같이 피신했으면 좋으련만.”
“그럴 여건이 안 되었던 모양이에요. 사연이 복잡했죠.”
아나스타샤는 안쓰러움을 뒤로 하고 본론으로 이어갔다.
“그 당시의 인간관계 네트워크를 어렵사리 추적한 결과, 당시 그녀의 딸아이를 맡아주었던 그 이웃에 대한 증언을 찾아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여러분께서 제공해주신 증언 정보와 교차하는 부분이 꽤 있었죠.”
이 기나긴 탐사 과정에서 아나스타샤 특유의 재치와 천재성, 그리고 민첩한 행동력과 운이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그녀가 내릴 최종 결론이 무엇일지 몹시 궁금했다.
“추적 결과 그녀의 이름을 알아냈습니다. 혹시나 동명이인은 아닐까 의심이 들어서 공동체 사람들을 만나 이중 삼중으로 검증을 해보았죠. 그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을 떠난 이후 어떤 경로로 피난을 갔는지 상세하게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그 경로를 직접 추적해보았습니다. ‘사이코메트리’라는 현대 과학 기술의 힘을 조금 빌려 증거물도 얻었죠. 그 결과, 여러 정황상…….”
아나스타샤는 짐짓 뜸을 들였다.
“설마 그렇다면 그 아이는!”
“네, 지금 여러분의 품 가운데 생존해있습니다.”
자욱한 정적이 흘렀다. 지도자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바로 우주 선교 여행에 동참했던 루디아 양입니다.”
레우벤, 레아, 루디아, 그리고 레리엔까지. 복잡하게 흩어져있던 과거의 인연 퍼즐이 명탐정 아나스타샤의 손에서 재조립되었다. 이제 마음의 준비는 완비되었다. 남은 일은 엉킨 줄들을 풀어나가도록 행동으로 옮기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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