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40회 아벨의 후예 Ch 6. 레리엔 로즈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2.26 | 회차평점 ![]() |
*
정겨운 음식 장만 노동을 끝마친 후, 윤혁과 어른들은 정성스레 차려진 음식들을 접시에 들고나와 식탁에 놓고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식사 기도를 마칠 즈음, 아렌과 얀이 나이가 많이 든 노인 한 분과 함께 집에 돌아왔다.
“오, 자네도 왔구먼.”
“루디아 그 아이의 반려로구먼.”
아렌과 얀이 윤혁을 보자마자 이렇게 반응하자 윤혁의 얼굴은 확 하고 달아올랐다. 그는 황급히 손을 저어 오해를 수습해보았지만, 노인들은 그저 허허거리며 흐뭇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들은 이미 마음속으로는 반쯤 윤혁을 사윗감으로 점찍어둔 기색이었다.
“반갑네.”
“저도 반갑습니다, 어르신들.”
그러자 아렌이 윤혁에게 질문했다.
“설마 이번에도 여행이라도 가겠다고 누굴 데려가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그럴리가요. 그저 친구 얼굴을 보러 왔을 뿐입니다.”
“허허, 에잇, 이 사람아. 좀 자주 방문하지 그랬나. 그 아이가 어찌나 자네 이야기를 열심히 하던데 말일세. 여자 마음도 모르는 순둥이 같으니라고.”
“하하, 죄송합니다. 마침 섬의 주인께서 제게도 출입 권한을 주셨으니 앞으로는 종종 자주 찾아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후 온 식구가 모여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만찬 자리를 가졌다.
“그나저나 선교 활동이 생각보다 활발한 모양이네요.”
윤혁은 호기심이 생겼는지 최근 진행 중인 메시아닉 유대인들의 지구 선교 활동에 관하여 질문했다. 아렌과 얀은 그간의 사정에 관해서 얼추 설명을 해주었다. 윤혁은 듣는 내내 한 순간도 집중을 멈추지 않았다.
다른 한 가지 흥미를 끄는 내용도 그 와중에 듣게 되었다. 바로 유대인들의 경제 활동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희소식 쪽에 가까웠다.
“섬의 주인께서 우리 중 해외 파견을 나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길을 열어주셨네. 임시적으로나마 외부인들의 포인트 시스템이란 것에 접속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주었네.”
사실 원리는 두 할아버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윤혁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편지를 통해서 넘겨받은 ‘생명 에너지의 파편’과 모종의 관련이 있는 듯했다. 과연 그 생명 에너지란 것이 물리적인 개념인지, 생물학적인 개념인지, 수명을 의미하는 추상적 개념인지, 그도 아니면 정신과 육체 양쪽과 관련된 어떤 요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현 인류연합 산하 경제 시스템의 기본 원료로 쓰이는 자본 포인트도 생명과의 유착과 연관이 있습니다.”
“호오. 자세히 좀 이야기해보게.”
“솔직히 저도 그 ‘생명에 유착되었다’ 라는 표현에서의 생명이 육체적 관점의 생명인지 아니면 정신이나 혼과 관련된 생명인지는 몰라요. 혹시 여주인께서는 자신의 일부를 떼어준 것일까요?”
“흠, 우리처럼 무식한 문외한들로서는 알 도리는 없지. 다만 선교를 위해 해외 지역에 나갔다 돌아온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이 받은 건 그녀 자신의 것이 아닌 ‘여분의 무언가’ 같다고 하더군. 게다가 영구적으로 넘겨주는 방식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다시 용수철이 되감기듯 되돌아가는 형식이었다고 하더군.”
“일시적 사용 이후에는 회수된다는 말인가요?”
“그렇게 이해해도 괜찮을 듯하네.”
그럼 무한정의 재활용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나저나 기이한 현상이 가능하다는 것은 온갖 산전수전 공중전 우주전을 다 겪은 윤혁으로서도 금시초문이었다.
궁금증에 짓눌린 청년에게 얀은 이렇게 제안하였다.
“궁금하면 그녀를 만나 직접 물어보게나.”
“제가요? 그분을요?”
“그래, 루디아가 그녀와 매우 친하다네.”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까요? 제가 찾아가도 될까요?”
“자네는 더 버거운 사람도 자주 만난다고 들었네만. 게다가 여주인은 대단히 자비로운 사람이라네. 더욱이 그녀의 양아버지가 이스라엘 출신이라서 그런지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항상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네.”
듣던 중 기분이 상쾌해지는 희소식이었다. 그녀의 호의가 지금 메시아닉 유대인들의 선교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준 열쇠라면, 나아가 그녀와 유대인들 사이의 긴밀한 인연을 나타내는 긍정의 징후라면, 좀 더 상세히 알아볼 필요성이 있으리라. 윤혁은 망설이며 꾸물거리기를 그만두고 루디아를 함께 섬 중앙을 방문해보겠노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이번에 온 김에 좋은 기회의 텃밭을 다져보자.’
식사를 마친 뒤, 윤혁은 아렌과 얀을 따라 집에 들어온 어느 노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메시아닉 유대인 중에서도 거의 최고 연장자에 해당하는 어르신이었다. 노인은 자신은 이스라엘에서 거주하던 젊은 시절에 이미 예슈아를 메시아로 영접하였고 그분께 구원을 받았다고 간증하였다. 흥미롭게도 그 노인의 젊을 적 이야기와 간증을 통해 윤혁은 반가운 이름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직 소년이었을 시절의 이야기일세. 그때의 메시아닉 유대인들의 종교적 정체성은 기독교보다는 유대교에 가까웠어. 예슈아를 믿었지만, 여전히 율법주의적 성향이 남아있었지.”
“아, 저도 루디아에게 들은 적 있어요. 유대인 형제들과 이방인 형제들이 똑같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온전히 하나가 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었죠.”
“그래. 그래서인지 심지어 신실한 프로테스탄트 교파 중에서도 일부는 우리를 이단시하며 정죄하기도 했다네. 우리도 서방 기독교와 손을 잡을 생각이 없었지. 지금 돌아보면 옹졸한 앙금과 서운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
“솔직히 저희도 그 부분에선 잘한 게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 작은 반전의 바람들이 소소히 불어오기 시작했다네. 여러 종류의 바람이 있었지만 그중에 유독 나는 그 사람이 기억나는구만. 21세기 중반 즈음 한 인물이 동료들과 함께 이스라엘을 방문했다네.”
노인의 옛날 이야기에 따르면 여러 화해의 씨앗들 중 하나였던 그 사람은 정통 복음주의 프로테스탄트 신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적 뿌리를 향해서 친근감을 나타냈다. 그는 자신의 혈통에도 유대인의 피가 일부 섞여 있음을 고백하며 유대인들에게 허물없이 다가왔다.
실로 그는 여러 면에서 현인이었다.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그 사람과 교류하면서 지혜로움과 더불어 숱한 교훈을 배웠다. 아울러 그 현인도 유대인들의 성경에 대한 이해와 고찰을 배워 자신의 지식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신앙 토론을 나누면서 여러 메시아닉 유대인들이 그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 영향은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참된 성경 말씀의 진리 위에 뿌리를 둔 자들이라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본질적 차이가 없음을. 결국, 최초로 프로테스탄트 진영과 메시아닉 유대인 사이에서 진지하고도 건전한 상호협력이 시작되었다.
“그 현인 덕택에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신약 성경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잘못된 신학들을 교정해나갈 수 있었다네. 그도 역시 우리에게서 구약을 깊이있게 배움으로써 기독교 신학의 연약한 점들을 보충하였어. 어느새 두 분파는 온전히 같은 뜻 안에 수렴하게 되었지.”
“이런 게 진정으로 올바른 통합이죠.”
비진리와 진리를 뒤섞어 아무도 못 먹을 음식물 폐기물을 만들어내는 성녀 식의 종교다원주의나 종교통합주의 말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진리 안에서의 온전한 이해와 통합. 이방인들끼리의 연합도 그토록 기뻐하시거늘, 하물며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의 담이 허물어진다면, 그 연합체의 중심이신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행복해하시겠는가.
“그때부터 우리는 율법주의를 탈피해 복음주의 노선으로 돌아섰고, 그는 성경에 대한 더 정확한 이해 방식을 확립했지. 그렇다고 전통과 소중한 유산들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네. 오히려 은혜의 복음을 온전히 이해함으로써 구약의 전통들 안에 담긴 아름다움의 진미를 더욱 깊이 체험했지.”
참고로 노인의 흐릿한 회상에 따르면 당시 이스라엘의 손님이 되어준 그 현인은 자기 나이를 50대 초중반으로 증언했지만 체질상 대단한 동안이었는지 기껏해야 삼십 대 중반 정도의 젊은 외모로 보였단다. 기억에 따르면 갈색머리에 푸른 눈을 한, 상당히 잘생긴 미남이었다고 한다. 이에 문득 무언가 예리한 감이 윤혁의 생각을 스쳐 갔다.
“죄송하지만, 혹시 그분의 존함이 어떻게 되시죠?”
“이름 대신에 코드네임으로만 자신을 소개해주더군.”
익숙한 기시감에 윤혁은 멈칫하였다.
“맞아. 하필이면 알파벳 중에서도 우리 히브리어의 첫 번째 알파벳을 사용해서 뇌리에 아주 선명하게 남았지.”
순간 확증의 단서를 목격한 윤혁은 반가움에 희열을 이기지 못했다.
‘에드레이 테일란드!’
돌이켜보니 그가 자기 입으로 젊은 시절에 몇 차례 선교사로 활동했다는 증언은 했었다. 그런데 그 지평이 이스라엘에까지 닿았을 줄이야. 게다가 유대인들의 혈통과도 닿은 분이라니,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묘한 감동이 솟구쳤다.
‘하긴 형의 할아버지의 형님이니 당연히 유대인의 후손이려나.’
아무튼 감회가 새로웠다. 평생 기억하고 존경해야 할 멘토가 메시아닉 유대인들의 삶에도 올바른 발자취를 남겼구나. 그는 젊은 시절에 유대인과 이방인을 이어주려던 하나님의 소원을 충실히 수행해냈다. 이제는 자신이 그의 유지를 이어야 한다는 각오에 감동과 동시에 무거운 책임감이 들었다.
*
하루 만에 윤혁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아이와 어른과 노인들 모두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 톡톡히 점수를 얻었다. 이제 다음 단계는 루디아와의 재회, 그리고 섬의 중앙부 방문이었다.
다음 행적지로 옮기기 전, 윤혁은 미리 집에서 준비해온 선물을 루디아의 식구들에게 전해주었다. 과하지도 소박하지도 않은 적절한 선을 찾느라 며칠 전부터 상당히 고민했었다. 최종적으로 고른 것은 집안일에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기기들이었다. 자체적 재생 충전이 가능해 별도의 에너지 공급이 필요 없으며 자가 보수까지 가능해 낡아질 염려도 없는 물건들이었다.
“현대문물이라, 나쁘지 않구먼.”
“고맙네.”
할아버지들은 흔쾌한 마음으로 선물을 받아주었다. 사실 너무 현대화된 최첨단 기기를 가져가면 수혜자들이 문명 규모의 차이에 위축될까 봐 윤혁도 일부러 조심스레 골동품 가게에서 구입했었던 차였다. 그마저도 과연 이곳 기준으로는 미래 문물에 해당하였다. 다행히도 받는 이들 모두 윤혁의 정성을 기쁘게 여겼다.
“우리가 문 앞까지 데려다주겠습니다.”
느무엘, 아므람, 아비하일이 윤혁이 중앙까지 가는 데 길 찾는 걸 돕겠다며 나섰다. 그곳에는 일종의 다중 결계가 있기에 오랫동안 토박이로 지낸 섬 주민들이 아니면 가는 도중 길을 잃어버리기 쉽다고 하였다.
“다들 반가웠습니다.”
윤혁은 식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흐음.”
아렌이 그때 무언가 떠올랐는지 골똘히 궁리하기 시작했다.
“혹시 왜 그러시는지요, 어르신?”
윤혁은 노인의 갑작스런 반응에 의아해했다.
“음, 아니야, 아닐세. 뭔가 기억이 날 듯한데……, 무엇이었는지 떠오르지 않아서 말이지. 나도 나이를 먹더니 머리가 녹슬고 늙은 모양이야. ”
“어떤 기억 말씀이신가요?”
“그게 말이지. 전부터 느꼈네만……, 자네 얼굴이 왠지 이상하게 낯익네. 오래전에 이미 봤던 것 같은 착각이 들어. 그런데 그게 언제 어디서였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네. 이상할 노릇이지. 노망이라도 들었는지 원.”
아렌의 그 언급이 영 심상치 않았지만, 윤혁은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
‘뭘까?’
궁금증을 묻어둔 채 그는 세 아저씨와 함께 섬의 중앙부를 향해 걸어갔다.
(다음 회차에 연속됨)
이전회
439회 아벨의 후예 Ch 6. 레리엔 로즈 (1) |
다음회
441회 아벨의 후예 Ch 6. 레리엔 로즈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