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43회 아벨의 후예 Ch 6. 레리엔 로즈 (5)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3.05 | 회차평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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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리엔과 루디아가 처음 만났을 시절, 그때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이제 막 난민 시절의 쓰라린 고통을 극복하고 하와이을 새로운 터전으로 둥지를 틀려던 차였다. 당시 레리엔의 나이는 22세, 루디아는 14세였다.
이미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섬에서 전원생활을 하기 시작한 지 한참이었던 레리엔은 당시도 얌전히 후학들을 가르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부나 권력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축소되었으나 아쉬워하거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의 소중한 고향만 지킬 수 있으면 충분했다.
이렇듯 은둔 현자로서 섬을 지키던 고고한 레리엔은 섬에 세들어 살기로 결심한 주민들과 정서적으로 교류하면서 외로움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현실적인 시선에서 보면 가난하고 무력했지만, 생명력 넘치는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왜 저런 극심한 고난과 비천한 가난 가운데서도 행복과 웃음을 잃지 않는 것인가. 레리엔으로서는 큰 의문점이었다. 단순히 양아버지와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에서도 호기심이 들었으나, 그 점을 넘어서 그들이 품은 불변하는 행복의 원천을 알고픈 호기심이 더 강하게 들었다.
처음에는 순전히 인류애 차원에서 메시아닉 유대인들에게 적선해준 레리엔이었지만, 차차 그녀도 그들에게서 배울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존중의 뜻으로 그녀는 주민들에게 자기 영토인 섬 중앙부를 언제든 방문할 권리를 선물했다.
매일 신규 초인을 가르치는 공적인 업무를 마친 뒤 여유의 시간이 찾아오면 레리엔은 섬의 유대인 주민 중 연륜과 지혜가 풍부한 이를 초대하여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대개는 레리엔이 친절하게 상대방의 수준에 맞춰주었지만, 의외로 어떤 방면에서는 그녀가 되려 배움을 얻기도 했다.
한편 레리엔의 양아버지인 레우벤도 당연히 자신과 혈통이 같은 유대인들을 호의적으로 대했다. 그와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곧 활발하게 어울려 지내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섬에 갇혀 살다 겨우 고향에 돌아갔더니 사랑하던 가족들이 환란에 휘말려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레우벤은 줄곧 깊은 실의에 빠져 있던 차였다. 그렇게 낙망한 채 하와이에 조용히 눌러 살던 그에게 새로운 생기를 되찾아준 이들이 바로 섬에 정착한 난민들이었다. 뿌리 깊은 본능적 동포애는 이들의 유대감 조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자연히 레리엔도 아버지를 봉양하는 과정에서 유대인들과 마주할 기회를 더 자주 얻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레우벤은 섬의 한 구역에서 루디아라는 이름의 소녀와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어른스러움과 이타심과 친절함을 선보였고 레우벤은 금세 그녀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 루디아에게서는 어딘가 모르게 아내와 상당히 비슷한 류의 온화함이 느껴졌던 덕이었다. 그는 루디아를 저도 모르는 사이에 딸처럼 여기며 잘 대우해주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중년의 사내와 어린 소녀는 가족처럼 되어 있었다.
그렇게 충분히 가까워진 후, 레우벤은 루디아를 섬 중앙부로 초대하였다. 그 자리를 기회로 루디아는 레리엔과 처음 만났다. 이내 루디아는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와 현명한 지혜, 그리고 저절로 이끌리는 부드러운 인망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완벽한 그녀를 동경하게 되었다.
레리엔과 루디아는 가깝고도 먼 사이였다. 현실적 처지로 보자면, 비유컨대 레리엔은 고귀한 레이디였고 루디아는 낮디낮은 메이드와 같았다. 게다가 개인적 차원은 물론이고 민족적 차원에서도 일방적으로 은혜를 입은 관계였기에 대등한 친구가 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리엔은 루디아에게 우정과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귀여운 루디가 자신을 자매로 혹은 친구로 생각해주길 원했다. 그래서 기회만 나면 소녀를 섬 중앙부의 정원으로 초대하였다. 루디와 같이 있을 때는 초인들을 가르칠 때처럼 복잡한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둘이 같이 지낼 때면 저도 덩달아 순수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난 루디가 정말 좋아.”
“저도 아가씨가 좋아요.”
물이 흐르듯 둘의 시간이 흘러갔고 우정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다.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씩, 루디아는 레리엔의 정원을 찾아가서 화목의 시간을 나누었다. 둘은 한 달간 겪었던 기쁜 일과 속상했던 일들을 털어놓으며 서로를 위로하였다.
다만, 이렇듯 지나치게 가까운 관계였기에 루디아로서는 신앙 고백을 하기에 오히려 어려움을 느꼈다. 루디아는 레리엔에게 가장 귀한 선물인 복음을 전해주고는 싶었지만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망설여졌다. 먼저 그녀를 영영 잃어버릴까 두려웠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로는 그녀를 말로 맞상대할 자신이 전혀 없었다. 레리엔과 루디아의 지혜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도 컸다.
이러한 한계를 알던 루디아는 선뜻 용기를 내지 못했다. 복음의 최전선에서 싸우며 강인한 영적 여전사로 성장한 지금의 루디아로서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참으로 나약한 핑계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아직은 충분히 자라지 못했던 시절이라 마냥 비난할 수는 없으리라. 적어도 레리엔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만은 거짓이 없었다.
두 여인의 우정에 얽힌 사연을 들으며 윤혁은 자신도 모르게 숙연해졌다. 과연 사내 녀석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들만의 우정의 세계가 존재하는구나. 그나저나 아가씨와 메이드의 진심어린 우정이라니, 이거야말로 동화 속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 아닌가.
“강윤혁 군이 루디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어요.”
“아, 아닙니다.”
“언니로서 감사를 드릴게요.”
확실히 레리엔에게서는 오만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무려 카테고리 분류 불가의 초인이라면 일반인 따위는 얼마든지 얕잡아보고 무시할 법도 한데 참으로 신기했다.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한 여타 초인들의 모습과 비교되어 상당히 새록새록한 신선함이 몰려왔다.
‘칼리드나 진이나 제3 철인왕이나 이분의 절반이라도 따라갔으면 좋겠네.’
그때 레리엔이 다시 질문했다.
“앞으로 강윤혁군은 어떤 일을 하실 생각인가요?”
대뜸 던져진 진로 질문에 윤혁은 망설이며 머뭇거렸다.
“지금은, 아직 공부하는 중입니다.”
“계속 선교를 하실 생각은 없고요?”
“기회가 된다면 참여할 마음은 있습니다.”
“의미 있는 일이 꼭 그것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랍니다.”
“그야 그렇죠.”
소명 의식에 대해서도 레리엔은 윤혁과 생각의 공통점이 많아 보였다.
“다만 조심하세요.”
“네?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요?”
“당신의 형님과의 접촉 말이에요. 당신이 요새 당신의 형 밑에서 배우는 중이라면서요. 그는 거물이지만, 그만큼 만만찮은 사람이랍니다. 일반인인 강윤혁군에게 자주 관심을 보이는 것 같은데 그럴수록 당신은 더욱더 피곤해질거에요.”
“이미 잘 숙지하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레리엔님은 어떻게 저에 관해 그렇게 자세히 알고 계시죠? 섬 안에서 지내시면 정보원이 많지 않을 텐데요. 초인들도 전부 형의 사람들일텐데.”
레리엔은 그게 뭘 그리 궁금하냐는 투로 빙긋 웃어 보였다.
“정보원은 제법 많아요. 이미 앞서서 말했지만, 초인들 중 적잖은 이들이 카이의 부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 옛 제자들이기도 하죠. 저도 그들과의 사이는 그다지 나쁘지 않답니다.”
“아,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자랑할 생각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제자들의 존경을 받는 스승이라서요. 진도 저를 자주 찾아온답니다. 저번에 한 번 당신이랑 함께 왔었죠.”
“네, 시뮬레이션 우주 문제 때문에…….”
이어서 레이디는 윤혁에게 루디아를 잘 부탁한다고 거듭 말했다. 험한 세상 너머로 루디아를 내보내려니 걱정되는 부분이 많다면서 윤혁의 보호와 보살핌을 요청했다. 윤혁은 속으로 이미 루디아는 자신 이상으로 용감한 사람으로 성장했으니 걱정해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레리엔의 걱정이 다 자란 자녀도 걱정하는 어머니의 그것과 같음을 알기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루디 곁에 당신이 있으니 듬직하네요.”
“과찬의 말씀입니다.”
여주인과 두 손님은 근사한 경치의 테라스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다과와 차를 나누었다. 향긋한 밀크티에서 좋은 냄새가 풍겼다. 레리엔이 손수 구운 과자는 마치 요정의 음식처럼 이색적인 모양새와 향미를 발산했다. 적당히 뜨끈하고 말캉하면서도 나른한 풍미가 감도는 게 참으로 오묘했다.
어느덧 가벼운 산들바람에 커다란 나뭇잎들이 나부끼며 찬찬히 테이블 위에 내려앉았다.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고 안정적인 그림 속 장면이라 영화 속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때 정적을 깨트리는 섬뜩하고 이질적인 소리가 울렸다. 자연이 자아낸 한 폭의 평화로운 그림을 찢으며 인공적이고 강력한 힘이 침투해왔다. 레리엔이 그려낸 조화와 안정감이 깨어지면서 파괴적이고 막강한 무언가가 쳐들어왔다.
루디아는 낯선 공포감에 몸을 움츠렸다. 윤혁은 심히 익숙한 기운에 눈살을 찌푸렸다. 레리엔은 표정에 미동조차도 없이 의연하게 차만 홀짝거렸다. 다만 그 태연함 속에도 모종의 결의는 스며들어 있었다.
잠시 후, 윤혁과 루디아가 방금 통과해온 울타리의 정문 앞쪽의 공간이 강제로 찢어지더니 누군가가 워프로 성큼 들어왔다. 은하마저 찢을 거대한 권능이 한 몸에 압축된 채 흉흉한 존재감을 내뿜는 사내가 정문 앞에 섰다. 하지만 그 사내조차도 커버넌트의 계약 내용 때문인지 허락 없이 정문을 찢고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는 당장에라도 쳐들어가고픈 욕구를 억누르고 노크하였다.
“무슨 일이야?”
부드럽지만 뼈대가 서 있는 여주인의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할 이야기가 있다, 레리.”
“지금 이미 손님 대접하는 중이라서……, 나중에 오면 안 될까?”
그에게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리라.
“지금 내게…….”
“농담이야, 얌전히 들어와.”
레리엔의 허락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장신의 사내가 정원에 발걸음을 내디뎠다. 꽃과 나무와 동물들은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감지하고는 벌벌 떨었다. 그는 이내 수정 건물 안으로 터벅터벅 들어왔다. 커다란 고목 같은 그림자가 레리엔을 드리웠다. 윤혁과 루디아는 뒤로 물러나 조용히 상황을 엿보았다.
“오랜만이네, 카이.”
“너야말로.”
차분하게 찻잔을 어루만지던 레리엔이 자리에서 찬찬히 일어섰다. 그녀도 성인 남성에 버금가는 큰 키였으나 상대의 체격이 워낙 우월한지라 신장 차이는 극명했다. 패기와 위엄과 멋이 넘치는 훌륭한 제복을 입은 근육질 육체는 신이 손수 깎은 조각상마냥 근사했다. 하지만 냉정한 얼굴 위에는 웃음 한 점 없었다.
화려한 카리스마로 넘쳐나는 미남, 그리고 온화하면서도 강인한 미녀, 역대 인류 전체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외양을 소유한 두 아름다운 남녀의 눈에서 차가운 시선이 발산되어 서로를 맹렬하게 내리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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