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44회 아벨의 후예 Ch 7. 선한 유대인 이야기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3.07 | 회차평점 ![]() |
Chapter 7. 선한 유대인 이야기
아크삼형제의 의식에서 파생된 파편들이 시뮬레이션 우주 속에 설치된 어떤 보안 구역 안으로 집결하였다.
“다들 본체의 보안 상태는 안전하게 점검했지?”
야르베스가 제일 먼저 점검 차 발언을 꺼냈다.
“걱정하지 마. 누구도 감히 우리를 찾을 수 없을 테니까.”
세미온이 호언장담하며 보증했다.
“너무 철저하게 은폐한 탓에 우리끼리의 접촉도 어렵다는 게 문제지.”
하르무트는 비아냥거리듯 중얼거렸다.
“그렇게 분리되다 보니 우리 셋은 각자 의견과 꿍꿍이가 판이하게 다른데도 불구하고 의견 조율을 못 한단 말이지. 당장 야르베스와 세미온 너희 둘만 놓고 봐도 각자 구상하는 인류 구성 플랜의 세부사항이 첨이하잖아. 나야 어떻게 흘러가든 흥미롭기만 하면 그만이지만.”
그녀의 말대로 세 인간은 마치 운명의 세 여신이나 북구의 노른을 연상시키듯 제각기 성향이 달랐다. 매우 강박적이고 규율을 통한 질서를 중시하는 야르베스, 강한 자의식과 독립성과 유연한 대처 능력을 강조하는 세미온, 그리고 본능적이고 야망과 욕망에만 충실한 하르무트.
이들은 사상 면에서 극명히 엇갈렸으나 그러면서도 경이로울 만큼 조화를 잘 이루었다. 이는 아크삼형제 전원을 제어하는 지배자 겸 통제자, 아크 트리니티의 중심축인 위버멘쉬 때문이었다. 과연 그는 삼형제로부터 도무지 공존되지 않을 세 종류의 인류 플랜을 전해 받더니 완벽한 한 덩어리로 재구축하여 현실 속에 구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세부적인 부분들에서는 셋의 의견 대립이 현재진행형이긴 했다.
“표식의 힘을 이대로 하향 조정해도 괜찮을까?”
야르베스가 걱정스럽게 투덜거렸다.
“어차피 언제까지고 거기에만 의존할 수는 없잖아. 표식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더라도 인류가 변함없이 영원토록 파파께 종속되도록 안배해둘 필요가 있어.”
세미온은 장기적인 대처 방안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들이 처음에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 일부러 표식 속에 영구적인 영향을 남기는 기능을 첨가한 이유도 그것과 관련이 있었다. 표식은 일종의 족쇄이기도 했으나 관절의 꺾인 형태를 특정 방향으로 교정하는 자세 교정기로서 기획된 것이기도 하였다.
“머지않아 테서렉트 아키텍쳐가 고도로 진화하여 ‘그것’을 키워내기 위한 화분이 될 거야. 일단 그 물건만 잘 자라나면 방주들에 의해 개척된 모든 은하와 차원들을 한번에 다스릴 수 있어. 표식의 필요성은 차츰 줄어들 거야.”
“하지만 과연 증명되지 않은 그 기술력만으로 충분할까? 나는 차라리 지금의 표식 체계를 좀 더 은밀하고 진한 형태로 개조해서 보다 장기적인 측면의 종속력을 극대화하여야 한다고 판단하는데?”
야르베스는 세미온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때 얌전히 듣고 있던 하르무트가 키득거리면서 비웃었다. 둘은 그녀를 기괴하고 엉뚱한 별종인 것마냥 한심스럽게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크큭, 너희는 표식이라는 발명품 속에 깃든 파파의 의도와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했구나. 그게 고작 신인류 구성에 유용한 도구 정도라고 생각하다니, 역시 ‘초자아’와 ‘자아’ 정도로는 깊은 성찰을 해낼 줄 모른다니까.”
“하르무트, 감히 파파에 대해 무례한 언변을 내뱉지 마라.”
“맞아, 그건 월권행위야.”
이에 하르무트는 고지식하고 유두리 없는 두 의자매를 한심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오직 ‘이드’를 상징하는 그녀만이 우주 인류의 무의식 속에 심겨진 본질적 저주를 이해할 수 있었다. 최첨단 표식 기술을 확립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그녀들이지만, 셋은 각자 표식이라는 물건의 의의에 관해 이해하는 방식이 달랐다.
야르베스는 노예를 종속시키는 수단으로써, 세미온은 신인류를 재정립하는 건설적인 수단으로써 표식을 생각하였다. 하지만 하르무트는 달랐다. 그는 파파의 깊은 좌절감에서부터 표식의 기원과 존재의의를 찾았다.
“조금만 기다려봐. 파파가 표식의 힘을 잠시 퇴보시킨 것은 어디까지나 더 확실한 복수를 이루기 위한 전략상의 후퇴였음을 너희도 깨닫게 될 테니.
기껏 우리 셋의 불완전한 고유 재능을 섞어 넣어 만든 표식 정도로는 파파가 구상하는 장대한 미래를 완벽히 그려낼 수 없어. 그는 틀림없이 추가적인 특수 재능을 집어넣을 거야.”
그러자 세미온과 야르베스는 의아해했다. 표식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투입된 자신들의 재능보다도 더 상위의 것이라고? 그런 일이 가능해지려면 최소한 카테고리 분류 불가 초인의 특수 재능 정도는 재료로 쓰여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을 위해서?”
“표식, 혹은 그 상위 대체품을 통해 생명의 주도권을 빼앗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겠지. 그때가 되면 이레귤러라는 현상조차도 원천적으로 봉쇄되겠지. 그러면 파파는 이종족과 기계뿐 아니라 인간 위에서도 절대군주로 군림하게 될 거야.”
단순히 마음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닌, 생명의 본질까지 철두철미하게 지배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하르무트가 구상하는 차세대 표식이었다. 그녀는 이 방식을 통해서 뼈저리게 좌절된 파파의 심리성적(Psychosexual) 억압을 참 정의의 실현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소망을 꿈꿨다.
*
레리엔은 이곳에 행차한 고귀하신 손님을 데리고 그 근방에 있는 수정 호숫가로 향하였다. 윤혁과 루디아는 그들과 최대한 시선이 닿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하며 근처 나무에 몸을 의탁했다.
맑은 호수 옆에는 근사한 테라스가 놓여있었다. 꽃과 나무가 테라스 주변을 에워쌌으며 흑요석이 대리석의 표면을 두르고 있었다. 레리엔은 청초한 꽃들을 살며시 손으로 쓸어내리며 안온히 향기를 만끽하였다. 반면에 카이젤의 얼굴에는 은근한 조바심과 불편함이 짙게 깃들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급할 일도 참 많네. 아직 성미는 죽이지 못했구나.”
“너와 농담이나 나눌 여유 따위는 없다, 레리.”
그러자 레리엔은 살포시 고풍스러운 미소로 여유로움을 뽐내며 상황을 만끽하였다. 불쾌감에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상대방을 은근슬쩍 희롱하는 듯한 자태였다. 윤혁은 늘 여유만만하고 높은 입장에 있던 형이 저렇게까지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는 낯선 모습을 보고는 내심 크게 놀랐다.
‘형과 아는 관계라더니, 심상치가 않으시네.’
반면에 루디아는 윤혁과는 사뭇 다른 이유로 인해 당황했다. 그녀는 먼발치에 서 있는 초면의 낯선 사내에게서 뿜어지는 엄청난 밀도의 위압감에 섬칫 놀랐다. 물론 그녀도 하늘도시들을 선교 차 순회하면서 여러 강력한 존재들을 만났긴 했으나 이 순간 느껴지는 위압감에 대 보니 그런 존재들은 먼지보다도 작고 하찮게 느껴지는 착시가 들었다.
‘저 남자 분이 바로……, 그간 말로만 들어왔던 윤혁이네 형님?’
윤혁은 그녀가 압도감에 겁먹지 않도록 자신의 등 뒤를 잠시 내주었다.
“너무 무서워하지는 마. 형도 사람이니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겠지만.”
“응, 알겠어.”
“칼리드와는 달라. 말이 그래도 통하는 상대니 최악까지는 안 갈 거야.”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익숙하지 않은 루디아 입장은 달라다. 그녀는 흡사 수억 개의 은하계를 작은 평방미터에 압축해놓은 듯한 거대 질량체를 마주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윤혁이 안심시켜주는 말이 물리적으로는 전혀 와닿지 않았다.
“저분은 그때 우리가 본 붉은 눈의 남자보다도 강할까?”
“칼리드? 그를 말하는 것이라면…….”
어느 수준의 묘사가 적절할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윤혁은 솔직히 대답했다.
“칼리드의 힘이 일개 반딧불이라면, 형의 권능은 초신성 정도는 넘겠지. 아니겠구나. 지금은 이전보다 몇 세대는 더 강화된 초능력이 다양하게 개발되고 개량되었으니 능력치가 전반적으로 상향되었겠구나. 형은 개발 당사자이니 남들보다 더더욱 성장폭이 컸겠지. 운용할 지혜를 포함하면 구태여 미사여구를 덧댈 필요가 없을지도.”
“세상에! 일개 인간 개체가 그런 힘을 가질 수가 있다고? 믿기지 않아.”
“이건 은유나 과정이 아니야, 룻. 형은 실제로 우리가 가장 경계할 인물이야.”
그 말을 듣자 루디아는 레리엔의 안위가 너무도 걱정되었다. 하지만 염려가 무색하게 레리엔은 평온한 자태를 시종일관 유지하였다. 그녀의 성정은 일반적인 초인과 달랐다. 카테고리 분류 불가라는 말에 담긴 의미는 보통 범주로 설명될 가벼운 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약자에게는 연약했고 강자에게는 강했다. 자신을 숨결 한 번에 소멸케 할 수 있는 괴물을 앞에 두고도 두려움 한 점 안 보일 만큼.
“차 마실래?”
“팔자 한 번 좋으시군.”
“난 늘 이래왔어. 어떤 제국의 황제와는 달라서 말이야.”
레리엔은 당당히, 그러나 친절히 상대방에게 홍차를 대접하였다. 카이젤은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받아 마셨다. 사내의 커다란 손과 대조되는 아기자기한 찻잔의 조화. 참으로 역설적이면서도 우스운 한 폭의 그림이었다.
“나를 찾아올 이유가 있었던가? 딱히 기억이 안 나네.”
레리엔의 기색은 마치 제 목숨을 포기한 사냥감이 얌전히 포식자의 이빨을 기다리는 모양새 같았다. 담담하게, 그러나 무덤덤하게 희생을 기다리는 피식자.
“내 것을 빼앗으려는 이유를 제외하면.”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가 섬광의 금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강탈자 취급이라, 이거 서운하군.”
“원래 너는 사람들에게는 독재자, 자연을 향하여는 강탈자, 인공적 존재들에게는 가혹하고 무자비한 신이지. 너와 나의 커버넌트가 아니었다면 하와이도 영락없이 네게 약탈되고 가공되었겠지. 너에겐 탐욕의 끝이 없으니까.”
“그런 하찮은 섬에는 관심없다. 너의 말대로 지금 내 손에는 상위 차원과 무수한 은하들이 놓여있으니까. 앞으로 소유하게 될 것은 훨씬 더 많지.”
“낭만적이지는 않네. 어느 누가 탐욕적이고 오만한 남자를 좋아하겠어.”
잠잠한 어조로 진행되는 둘의 대화 속에는 보이지 않는 맹렬한 불꽃이 스파크를 튀기는 듯했다. 윤혁과 루디아는 그 무형의 기세에 집중하는 사이 저도 모르게 압도되어버렸다. 카테고리 분류 불가의 초인인 레리엔 로즈, 그리고 역대 최강의 초인이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카이젤 라흐블뤼크, 두 괴물이 팽팽하게 기 싸움을 하는 장면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하, 당장 집에 가고 싶다.’
지나치게 무서움을 모른다며 선교사 친구들에게 꾸중을 들어왔던 윤혁조차도 이 갑갑한 감옥의 압박감만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무서운 카이젤에게 들킬까봐 감히 자리를 옮기지도 못한 채 울며 겨자 먹기로 괴롭게 소리 없는 아우성만 지를뿐이었다. 마침 상대가 하필이면 형도 마음대로 다루지 못하는 레리엔인지라 싸움이 쉬이 잦아들 것 같지도 않았다. 사나운 수컷 호랑이와 암사자의 신경전을 바라보며 두 마리 토끼는 얌전히 몸을 수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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