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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46회 아벨의 후예 Ch 7. 선한 유대인 이야기 (3)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3.14 | 회차평점 0 0

 

 

 

 

 

 

 

(이전 회차에서 연속됨)

 

 

 

 

 

 

 

 

   한편, 카이젤의 표정에는 망연자실함과 허탈함, 혹은 쓸쓸함이 깃들었다. 그 모습이 걱정된 윤혁은 형의 팔 위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이렇게까지 감정적이고 불안정한 모습의 형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대체 레리엔은 형과 과거에 무슨 관계였을까? 저렇게까지 얼굴을 붉히며 싸울 깊이의 감정이란 말인가?

   “형, 괜찮아?”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서 미안하다.”

   카이젤은 동생을 생각하여 감정을 추스르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하필이면 동생이 레리엔을 방문했을 때 이런 꼴을 보이다니. 오늘은 썩 재수가 좋지 못했다.

   “천천히 이야기하자.”

   “알았어, 형.”

   이제 처리할 일도 다 해결했겠다, 카이젤은 발걸음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작별의 인사를 전하려고 레리엔을 돌아보던 그는 문득 루디아의 얼굴이 눈에 돌아왔다. 바로 그 순간, 카이젤의 무의식중에 불현듯 의문스러운 충격이 스쳐 갔다.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는 그이건만,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무언가를 잊고 있었다고? 무의식중에 봉인되었던 기억의 파편이 수면 위로 튀어나왔다.

   “저 소녀는?”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루디아를 응시하였다. 루디아도 자신을 찌르는 시선이 의식되었는지 조심스레 카이젤 쪽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는 멀리 있었기에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엄청나게 두드러지는 존재감이었다. 당장 외모부터가 눈에 띄었다. 루디아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은 극한의 미남이었다. 아마도 윤혁의 외모를 천 배 정도 상향한 뒤 패기와 카리스마까지 더하면 저런 모습이 될까 싶었다.

   그런데 둘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친 순간, 루디아 속에도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이 하나 상승하였다. 너무도 끔찍한 탓에 의식적으로 잊어버렸던 악몽의 날, 그 바로 직전 시점에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루디아의 정신적 방어기제는 악몽의 날과 관련된 모든 부분을 송두리째 베일에 덮어둔 상태였다. 망각은 오랜 시간 그녀의 괴로움을 덜어주었다. 그런데 윤혁의 형님이라고 불리는 사내의 얼굴이 기억 속 희미한 잔흔과 연결되자 망각의 베일이 비로소 벗겨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루디아의 마음속에 흔들림과 두려움을 일으켰다.

   “룻, 괜찮아?”

   “루디?”

   무언가에 씌기라도 한 듯 얼어붙은 루디아의 표정에 윤혁과 레리엔이 걱정스레 물었다. 카이젤과 루디아는 넋을 놓은 채 서로의 눈만 계속 응시했다. 감춰졌던 과거의 기억들이 서서히 실타래처럼 풀리며 둘의 뇌리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루디아는 이 불편감과 상대의 위압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반면에 카이젤은 몹시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레리엔과 대립했을 때보다 더 심란해보였다.

   ‘곤란하게 되었군.’

 

 

 

 

 

 

 

 

*

 

 

 

 

   다행히 결과적으로 손님의 난입으로 인해 불거졌던 소란은 평화로이 마무리되었다. 카이젤과 레리엔은 아직 앙금이 남았는지 얼굴의 마주침을 의식적으로 피했다. 윤혁은 왠지 모르게 형이 성난 아이처럼 심통이 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억지로 사연을 알아내겠다고 비집고 들어가면 기분만 상하게 하고 된통 혼날 것 같아서 잠자코 기다리기만 했다.

레리엔은 형제가 떠나기 전, 가벼운 호의를 베풀었다. 몸의 피로를 회복할 기회였다. 섬 중앙부에 놓은 자연물 중 최고의 명소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하와이 온천 ‘베데스다’가 그녀의 허락으로 개방되었다.

   참고로 화산과 지하수로부터 생성된 그 온천은 레리엔의 자연 특화 카리스마타와 몇몇 기술력에 힘입어 원래보다 한층 더 아름다운 곳으로 정화된 상태였다. 그 천은 넓은 면적 덕에 많은 섬 주민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었다. 주변 경치 역시 심미적으로 흠잡을 데 없었다. 건강에 유익한 점은 말할 것도 없었다. 종종 재충전의 날이 되면 그녀의 허락으로 많은 주민들이 그 혜택을 누리고 가곤 했었다.

   “난 그런 것 관심없다.”

   카이젤은 싸늘한 어투로 시큰둥한 반응을 내비쳤다.

   “뭐, 싫다니 아쉽네. 루디랑 나만 만끽하고 가야겠네. 괜찮지?”

   “물론이죠, 아가씨.”

   레리엔은 별 삭막한 인생을 다 본다는 듯 카이젤을 흘겨보았다. 이미 베데스다의 묘미와 훌륭함을 잘 아는 루디아는 기쁜 목소리로 대답했다. 레리엔은 윤혁에게도 휴식을 권유하였다. 그리고 동생은 얄밉게도 형을 배신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겠습니다.”

   “너!”

   약하게 으르렁거리는 형을 못 본 척 윤혁은 쾌활히 웃었다.

   “혼자라면 조금 심심하겠지만 피로를 해소하는 것으로도 충분한 기쁨이죠.”

   “동생은 형이랑 달리 삶을 즐기는 태도가 유연하고 부드럽네요.”

   레리엔은 웃으며 윤혁에게 베데스다 남쪽 부근의 열쇠를 넘겨주었다. 카이젤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동생의 어깨 위에 말없이 손을 얹었다. 까탈스럽게 굴다 갑자기 태도를 돌이키기는 민망했는지 말없이 불만스러운 표정만 지었다. 긍정으로 이해한 윤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어쨌건 넷은 두 남자끼리, 두 여자끼리 동행하여 회복의 장소로 향했다.

   온천은 지난번 윤혁이 머물던 섬에 있던 것보다 훨씬 훌륭했다. 경치도 넓게 트였으며 자연물들의 모습도 아름다웠고 수질도 깨끗하며 온도도 적당했다. 카이젤은 불편한 기색으로 걸어와 동생이 잠겨있는 물속에 앉았다.

   ‘쳇.’

   그녀의 영토 한복판에서 무방비한 꼴로 있자니 괜히 신경 쓰였다. 왠지 이 섬의 구석구석에 그녀의 감시라도 닿는 것 같은 기분이라 찝찝했다. 그녀 앞에서 부상을 들키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래도 물을 좋아하는 그의 취향은 그 자신도 속이지 못했다. 차차 형의 미간에 있던 불편감의 주름이 가라앉는 것을 보고 윤혁은 한시름 놓았다. 긴장이 풀리더니 심리적으로도 안정되었나보네. 다행이다.

   “네가 이 섬과 인연이 있을 줄은 몰랐다.”

   “어라? 내가 전에 여기 왔던 알았던 거 아니었어? 감시할 수 있다며.”

   “이 섬의 결계는 특수해서 내부의 사정까지 다 들여다보진 못하거든.”

   “아아.”

   섬 주민들과 윤혁의 만남에 대해서는 감시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 결계란 거, 대단히 정밀한가 보네.”

   카이젤은 레리엔에게 이 섬의 지배권을 내주는 과정에서 감시나 간섭을 피할 자유까지 허락했다. 그녀와의 커버넌트에 그 계약 내용이 새겨지는 바람에 커버넌트로 생성된 결계에도 그 같은 조약의 강제성이 깃들었다. 덕분에 카이젤의 지배 아래 놓인 기술이나 물질은 일체 중립지대를 관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실상 은하계 어디에도 그의 지배 아래에 있지 않은 시스템이 없으니 레리엔의 섬만이 유일하게 허락된 완전한 치외법권인 셈이다.

   “그나저나 그 ‘커버넌트’라는 기술은 대체 정체가 뭐야, 형?”

   “네 수준에서는 그런 것까지는 몰라도 돼.”

   “하지만 형이 나한테 선물한 반지에도 그 기술이 깃들어 있었잖아. 내가 그 물건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 정도면 나도 알 권리가 있지 않겠어?”

   “…….”

   투정거리는 동생의 촐랑임에 형은 침묵하며 몸을 물 속에 가라앉혔다.

   “농담이야, 농담. 화내지 마.”

   분위기가 심각해지기 전에 윤혁은 재빨리 손을 저었다.

   “저기, 레리엔 씨하고는 전에 어떤 관계였어?”

   조심스럽게 윤혁은 화제를 돌렸다.

   “친구.”

   “음.”

   그러나 윤혁이 보기에도 단순한 친구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대화의 맥락을 파악해보면 형은 레리엔에게 모종의 이유로 큰 배신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예전에 티아라가 증언해준대로 비극적인 납치 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매일 악몽에 시달릴만큼 엄청난 트라우마를 남긴 사건이니만큼 형 입장에서도 배신감을 느낄 법하지.

   ‘하지만 그저 친구이기만 했다면 절교나 처벌로 끝냈을 텐데.’

   조금 전 본 둘 사이에는 분명히 팽팽한 감정선이 존재했다. 대단히 복잡한 사정들이 끈적끈적 얽혀있는 느낌이었다. 카이젤은 레리엔 앞에 섰을 때 평상시의 신중하고 이지적인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였다. 어딘가 모르게 원망과 처연한 감정이 눌어붙어있는 것 같기도 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줘, 형.”

   “뭔데?”

   “레리엔 씨에게 혹시……, 이성으로서 감정이 있었어?”

   윤혁은 혹시라도 불호령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몸을 사리며 형에게 사려깊은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카이젤은 고개를 숙인 채 잠잠해졌다. 긍정도 부정도 않는 채.

   “미안해. 무례한 질문이었지?”

   “뭐라 표현하기 애매하네. 그땐 나도 내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거든.”

   그 대답에 윤혁은 입을 떡 벌렸다. 도무지 연정이란 감정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저 사내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뜻밖의 흥미진진한 전개에 온갖 상상의 나래가 저절로 펼쳐졌다.

   “설마 우리가 전에 진실 게임을 했을 때 암시했던 그 여인이 레리엔 씨?”

   “부정하지는 않을게.”

   “우와!”

   놀랄만한 사실이긴 했지만 어찌 반응해야 할지는 감이 안 섰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형과 레리엔은 사실상 거의 최악 직전의 사이로 보였다. 이미 서로를 향한 깊은 배신감과 원망에 찌들어있는 듯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둘 사이는 파국에 가까운 결말을 맞았을 것이다.

   “열여섯 살 이전에는 경쟁자의 관계에 가까웠어. 나 역시 그녀를 여자로 인식하기보다는 동등한 인간으로서, 어깨를 나란히 할 경쟁자로서 대우했어. 그녀도 그편을 더 좋아했고 말이야.”

   카이젤의 입에서 쉬이 듣기 힘든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자라면서 내가 나머지 넷을 압도하게 되었고 차츰 그로 인해 서로 간의 반목이 짙어졌지. 질투심과 우월감이 다섯을 분열시켰어. 어느 순간부터는 레리도, 나도 넘을 수 없는 격차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어.”

   왕관의 향방이 정해지자 레리엔은 모든 권한을 내려놓고 물러났다. 하지만 카이젤은 그녀가 떠나려 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마음이 흔들렸다. 강력한 괴물의 내면에도 옅게나마 인간적인 감정이 한 조각 있었다는 증거. 그 감정은 수년 동안 무럭무럭 자라나 보통의 사람을 대할 때와는 다른 성질의 마음이 되었다.

   “내 곁에 남아줘. 넷 중에서 믿을 사람이라곤 너밖에 없어.”

   카이젤은 그녀에게 과감히 손을 내밀었다. 정직하게 스스로를 고찰해본다면 본래 의도가 그것은 아님을 깨달았겠지만, 어쨌건 거짓말은 아니었다. 부하 중에서도 그녀만큼 뛰어난 인재는 없었다. 심히 의심스러운 엘, 발란 혹은 티아라와는 달리 그녀라면 믿고 등 뒤를 맡겨도 좋다고 생각했다.

   훌륭한 인재를 향한 지도자의 욕심과 갈망. 처음에는 자신이 이러한 이유로 그녀를 붙잡고 싶어 한다고 믿었다. 연정인지 신뢰인지 경계 짓기 힘든, 불확실한 감정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지배할 줄은 예상하지 못 했다.

   하지만.

   “미안해, 카이. 하지만 너와 나는 추구하는 길이 다르잖아.”

   안타깝게도 레리엔이 추구하는 인류애와 카이젤이 꿈꾸는 인류의 영광은 상반된 방향에 놓여있었다. 물론 내심 패배감으로 인한 쓰라림도 영향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어찌하랴. 그녀 자신의 역량이 모자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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