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48회 아벨의 후예 Ch 7. 선한 유대인 이야기 (5)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3.17 | 회차평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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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젤은 억지로 기억해내기가 고역스러웠는지 몹시 망설이며 이마를 짚었다. 그로서도 최선을 다했지만 머릿속 필름에 새겨진 정보가 분명하지 않았다.
“하필 그 부분은 기억이 나지 않아. 구조 직후에 난 의식을 잃었던 것 같아. 정확히는 반쯤 흐릿한 정신 상태로 비몽사몽간에 있었지.”
아주 희미하게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흐릿한 의식 속에서 눈을 뜬 순간 그는 낡은 천막 안에 누워 있었다. 낡고 형편없는 허름한 곳이 배경이었다. 마치 난민 캠프처럼 보였다.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몸에는 조악하게나마 붕대가 감겨있었다. 흙에 더럽혀진 몸은 물에 깔끔히 씻겨졌고 상처들은 소독 후 봉합 처치까지 완료되었다. 첨단 의료장비가 없는 탓인지 조잡한 솜씨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응급조치는 얼추 되었던 것 같다.
“이후 어떤 한 노인과 간호인 몇몇이 찾아와 부축해주었어. 한동안 나는 눈을 뜨지도 못했고 몸을 움직이지 못했지. 꼼짝 없이 얌전히 그들의 간호를 받았던 것 같아. 아파서 인사불명인 상태로 말이야. 그들이 날마다 날 씻겨주고 상처를 감싸주고 소독해주고 약과 음식과 물을 제공해주었어. 기운을 회복하기 전에는 저항하거나 반항하지도 못했지.”
잘은 모르겠지만 얼굴도 다쳐서 피떡이 된 상태였기에 그 구조자들이 그를 알아보거나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며칠 뒤, 압도적으로 탁월한 초인의 회복력과 재생 능력 덕에 그는 기운을 되찾았다. 하지만 수일 간 1초도 쉬지 않고 이어진 끔찍한 고문의 후유증과 갑작스러운 2차 각성의 여파가 몸에 남았다. 그로 인해 잠시 작동 중지된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재가동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위기의 틈새였다. 그 사이에 전황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었다. 혹시 그 틈에 반역자들의 무리가 자신을 제거하러 온다면 퇴로가 없었다.
위기를 자각한 카이젤은 몸을 미처 다 회복하기도 전에 캠프에서 벗어나 정처 없이 달렸다. 그렇게 불완전한 상태로 몸을 이끌고 달리다가 지쳐 쓰러질 즈음, 그는 가까스로 인류연합 측에 구조되었다. 자신을 구해준 난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분명 난민 캠프였다는 말이지? 맞지?”
윤혁은 떨리는 심정으로 검증 차 되물었다. 이렇게 되면 추측 가능한 경우의 수는 하나뿐이었다. 수 년 전 부상으로 쓰러진 카이젤을 구조해준 사람들이 지금 이 섬에 거하는 중인 주민들, 유대인들이었다.
*
조금 떨어진 위치의 온천에서, 레리엔과 루디아는 몸을 물에 맡긴 채 피로를 풀고 있었다. 둘 사이에서도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담화가 오갔다. 특히 옛 인연에 관하여 자세히.
“말하려니 모호하네. 분명 그는 나와 연인에 가까운 사이였어. 적어도 친구 정도는 아니었지. 흐릿한 기억이지만 나도 그를 좋아했었고.”
“윤혁이의 형님분과요? 세상에!”
루디아도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지 깜짝 놀랐다.
“왜 그렇게 놀라?”
“아니, 그냥, 신기해서요. 역시 세상은 참 좁구나 싶어요.”
레리엔은 미소 지으며 루디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러면 지금은 왜……, 이렇게 된 건가요?”
분명 카이젤이라는 그 사람은 레리엔을 잡아먹을 듯한 기세였었다.
“나의 실수로 그만 그에게 큰 상처를 주었거든. 그는 나를 신뢰해주었는데 내가 의도치 않게 배신한 격이 되고 말았어. 사실 나와 그의 이상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거든. 변명 같지만, 나도 내 나름대로 대의를 위해 일을 바로잡고 싶었어. 그게 장기적으로는 그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 정반대로 흘러가고 말았지.”
구차하게 여러 말로 표현할 수는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남은 것은 상처뿐이었다. 파국의 결말을 맞고도 이미 커버넌트를 만들어두었던 카이젤은 레리엔을 내치지 않았다. 하지만 좋아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상처는 꽤 쓰라렸던 모양이다. 그 사건 이후로 두 사람은 되려 남보다도 못한 사이로 전락했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내심 그에게 열등감도 있었어. 어린 시절의 난 누군가의 여인으로서보다는 한 인간으로서 최고의 성취자로 서고 싶었거든. 정정당당히 경쟁하여 패한 뒤로도 질투의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했어. 어쩌면 그것이 잘못된 선택으로 충동적인 이끌림을 당한 요인이었는지도 몰라. 참 못났지?”
“아가씨…….”
그 사건 이후로 레리엔은 깊이 참회하는 심정으로 모든 권한, 명예, 지위를 완전히 내려놓고 오로지 후학양성과 진리 탐구, 그리고 난민들을 돕는 구제 활동에 힘썼다고 한다. 루디아는 늘 덕스럽고 자애로웠던 아가씨의 삶의 일면에 이런 일화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그러면 아가씨는 왜 그 남자분을 마음에 안 들어 하세요? 그분만 아가씨로부터 상처받았다기보다는, 뭐랄까, 아가씨도 그분께 상처를 받은 듯한 느낌이었는걸요. 그분이 어떤 실수를 범했나요?”
루디아의 정확한 지적에 레리엔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음, 그건 둘 사이의 개인적 사연과는 별개의 문제야.”
불화의 씨앗이 생기기 이전에도 원래 카이젤과 레리엔의 성향은 정반대였다.
카이젤은 강력한 힘과 지혜를 구심점으로 인류를 하나로 모아 거대한 번영을 이룩하기를 꾀했다. 민족 간의 투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거주의 경계를 허물려 노력했다. 다원주의적인 평화 협정 따위는 그의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카리스마의 구심점인 지도자가 되어 영구적인 평화를 구축하고 나아가 드넓은 우주를 개척하여 인류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확장하려 꾀했다.
반면 레리엔은 절제와 균형과 공존을 중시했다. 그녀는 초인들의 역할을 조언자 수준으로 제한하려고 했다. 또한 그녀는 인류의 우주 정복 야욕에 대단히 회의적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그것은 더 큰 파괴를 낳을 뿐이었다.
초인들은 레리엔의 방식을 거절하고 카이젤을 택했다. 일단 그가 그녀보다 자질 면에서 월등히 뛰어난 이유도 있었지만, 그가 내세운 사상 자체가 초인들의 지적 호기심과 야망을 잘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과연 카이젤은 자신이 내세운 헤게모니를 실질적인 업적으로 입증해주었다. 그는 실제로 은하 정복에 성공했고 더 넓은 영역까지 나아갈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인류는 어느 때보다 거대한 성장과 번영을 이룩했다. 기술 문명의 경지는 이제 물리적 제약마저 뛰어넘어 그 무엇이든 이룰 기세가 되었다.
“바라보는 방향의 차이가 너무 컸군요.”
“그래도 처음에는 서로를 이해해주려 노력했어. 나름 조언도 간간히 주고받았지. 의견이 정반대 방향이었기에 오히려 서로에게 피드백이 되는 측면도 있었어. 나는 보전을, 그는 야망을 추구했거든.”
하지만 스무 살 때 그 반역 사건이 벌어지면서 둘 사이에는 좁히기 힘든 크레바스가 생겨버렸다. 레리엔은 문을 닫고 섬 안에 칩거하였다. 카이젤은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끝없이 일에 매진했다.
처음에는 그가 과도하게 폭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레리엔은 깊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카이젤은 용인하기 힘들 정도로 도를 넘어섰다. 우주 인류를 창조하기에 이르렀고, 강제로 초인을 각성시키는 특수 교육을 시행했으며, 은하 전역의 별들을 갈아 새로운 문명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그의 지식과 역량이 성장할수록 기행의 폭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시뮬레이션 우주, 이데아, 불로불사의 힘을 머금은 피코머신, 표식, 디지털 인격, 기계들의 사회, 타임필드, 우주 식민지 전역에서 전개된 인류 실험, 우주 인류 형성 프로젝트, 항성급 요새의 개발까지. 제자들의 입을 통해서 간간히 전해 들은 카이젤은 소식은 상상을 초월했다.
‘최근에는 퀘이사 엔진, 테서렉트 아키텍쳐, 갤럭시 클래스 바이오스피어를 삼연속으로 완성했다지. 아마 그 탐욕스러운 부하들마저 기겁하였겠지.’
그렇게까지 성장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미 가진 것으로도 충분하거늘. 레리엔은 궁금했다. 혹시 지금의 그가 보여주는 몰두는 괴로움에 사무친 몸부림의 반향일까? 속이 텅 비어버린 바람에 끝없이 자극을 받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몸이 돼버린걸까? 그는 상위 차원을 넘어 초자연계에마저 정복의 손길을 뻗칠 작정인가? 어찌하여 이카루스가 되어 무모히 신께 도전하려는 것인가?
그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은 가슴 속에 참담함을 안겨주었다.
차차 레리엔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염증이 났다. 자신의 분노를 해소하지도 못한 채, 솔직하게 고통을 인정하려 하지도 않는 어리석은 옛 친구가 갑갑했다. 또한 그가 좋은 뜻을 품게 세웠던 인류연합이 인간과 지성체들을 지배하는 독재의 매질로 변질되는 모습을 보면서 화도 나고 가슴이 쓰렸다.
다만, 요즘은 희망적인 소식도 간간이 들려왔다.
“그래도 최근에는 강윤혁 군이 나타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어리석은 기대일지도 모르겠지만 자꾸 희망을 품게 되거든. 혹시라도 그 청년이라면 그이에게 변화를 가져다줄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루디아는 그 희망이 무가치하지 않다고 믿었다.
“윤혁이라면 잘 해낼 거에요, 아가씨.”
“그래, 나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마냥 안일하게 기대만 해도 될까? 레리엔이 아는 카이젤은 쉽게 변화할 수 있는 성질의 사람이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완고하고 완강한 마음이 존재한다면 그의 내면이 아닐까 싶었다. 어쩌면 그 청년에게는 너무도 버거운 짐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루디, 그 말이 사실이니?”
레리엔은 조금 전 이미 루디아에게서 ‘그날’의 진상을 확인한 후였다.
“저도 기억이 막 되살아난 탓에 확실성은 보장 못하지만, 거짓말은 아니에요.”
“굉장한 일인 걸.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네.”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인가요?”
“물론. 루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으렴. 너처럼 착한 사람은 지금 상황의 의미를 활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이 기회를 결코 헛되이 넘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단다.”
그러자 놀란 루디아가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아가씨. 어떻게 제가 감히 그럴 수 있겠어요?”
“아니야, 자격은 충분해. 거래는 내게 맡기렴. 옆에서 도와줄게.”
“그렇지만 선의란 어떤 경우에도 보상을 바라서는 안 돼요.”
“그 말은 옳아. 넌 너의 그 신념을 소중히 지키렴. 하지만 그와 별개로 보답해야 할 책임도 엄연히 책임으로서 존재하지. 이건 내 사적인 판단을 배제한 채 순전히 도덕적인 측면에서 내린 결론이야. 강윤혁군도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할걸?”
레리엔은 이번 기회에야말로 그 드높았던 콧대를 제대로 낮춰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흥이 겨워 콧노래를 부르며 기뻐했다. 만약 이런 식으로라도 카이젤이 어리석은 자기파괴적 고집을 꺾는 기회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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