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49회 아벨의 후예 Ch 7. 선한 유대인 이야기 (6)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3.19 | 회차평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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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을 마친 후, 윤혁과 루디아는 따로 모여 둘만의 담화를 가졌다. 카이젤은 루디아라는 존재의 등장을 간과하기 어려웠는지 일단 제로원으로 돌아가기를 보류한 채 정원에 남아 자리를 지켰다. 그동안 레리엔은 카이젤을 앞에 두고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이야기하게 자리를 비켜줄 것을 제안했다.
윤혁은 신중히 중요 화제를 거론하였다.
“룻, 형한테서 이야기는 들었어.”
“윤혁아, 그게 말이지…….”
“실례가 되겠지만, 허락된다면 내게도 알려주지 않을래? 네 입으로 진실을 듣고 판단하고 싶어. 마냥 형의 말만 들어서는 정황을 잘 모르겠어.”
루디아는 그날의 기억이 아직은 버거운지 망설였다.
“미안, 떠올리기 힘든 일인 것은 알아. 되도록 더 캐묻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어. 만약 형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더 이상 너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야. 유대인 전체의 운명과 직결될 거야.”
윤혁으로서도 선의를 기회로 이용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경우가 다르다. 운명이 걸린 중대사인만큼 최대한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 두 번 다시 이 같은 완벽한 기회는 찾아오지 않으리라.
“알겠어.”
“혹시, 그럼 이제 기억은 전부 되돌아온 거야?”
“응, 워낙 충격적이고 선명한 사건이었으니까.”
루디아는 천천히 과거의 흔적을 되새기며 열두 살의 일을 끄집어냈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메시아닉 유대인들이 동족들의 핍박으로 인해 이스라엘에서 쫓겨나던 해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축출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은 이스라엘의 경제적 사망 선고르 확정지은 경제 대란이었다. 인류연합의 공식 경제 시스템인 ‘생명에 유착된 자본’, 그 시스템이 막 확립되던 순간, 이스라엘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시스템에 접속되지 못한 상태로 영구적 배제를 당했다.
이는 크레센트 선지자의 음모로 인해 벌어진 현상이었으나 그런 사실을 알 턱이 없었던 다수의 이스라엘 국민은 동포들에게서 화풀이 대상을 찾았다. 그들은 무턱대고 메시아닉 유대인들이 인류연합에게 충성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달이 벌어졌다고 믿었다.
곧 대대적인 핍박이 시작되었고 근래 최대 규모의 종교 난민이 발생했다.
어렸을 때부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메시아닉 유대인들의 손에서 양육되었던 루디아. 그녀는 이미 여덟 살 무렵 예슈아를 믿고 그분을 인격적으로 영접한 상태였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나 보상이나 즐거움 대신 환란이 닥쳤다. 열두 살 소녀에게는 난민 생활이란 혹독한 시련이었다. 그러나 그녀와 동포들은 믿음과 소망으로 하루하루 고통을 견뎌 나갔다.
친 가족들로부터도 버림받았던 난민들은 대가족 규모의 공동체들로 구성되어 행동했다. 공동체 수십 개씩이 모여서 하나의 난민 캠프를 형성하였다. 여러 난민 캠프가 세계 각국을 무력히 배회하였다.
경제 시스템을 이용하지 못하는 탓에 도심 지역에서는 제대로 된 물질적 혜택을 누릴 수 없었다. 세계 경제가 풍요로워진 이후로도 사람들의 인심은 차가웠다. 누구 하나 가여운 메시아닉 유대인들에게 선뜻 구제의 손길을 베풀지 않았다.
그들은 도시 사람들이 누리고 남은 자원으로 가까스로 생활을 유지하며 연명했다. 그래도 한없이 무한에 가까워진 자원 덕인지 부스러기만으로도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는 있었다. 난민들은 그 사실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다시 돌아가서 그날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였다.
당시는 루디아가 속한 공동체가 인적 드문 오지 숲 지대에 캠프를 세우고 생활을 간간이 잇던 무렵이었다. 워낙 삶이 각박했고 일손이 턱없이 부족했기에 루디아 같은 어린 소녀마저도 궂은 손일을 도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불평불만 없이 자족하는 마음으로 임했다.
그날도 그녀는 평소와 똑같이 일을 나섰다. 필요 물자 획득을 위해 불가피하게 숲 지대에 들어가기 전, 맹수를 만나거나 다른 위협을 마주하지 않기를 바라며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다행히 걱정했던 위험은 나타나지 않았다. 훨씬 더 위험한 존재를 발견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필요한 자원을 얼추 마련해서 돌아가려던 무렵, 그녀는 문득 산속을 가로지르는 깨끗한 계곡물에서 얼굴이라도 씻고 싶어졌다.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길을 거닐던 중 그녀는 낯선 소리를 들었다. 덜컥 겁이 났다. 그 소리는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 같았다. 하지만 미묘하게 사람 목소리를 연상시켰다. 고통과 절규가 그 속에 배어있었다. 어디에선가 피 냄새도 스멀스멀 흘러들었다.
처음에는 덜컥 무서운 마음이 들어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호기심이 두려움을 앞서다. 루디아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소리가 나는 방향을 따라갔다. 혹시나 모를 습격에 대비해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세상에!’
경악스럽게도 소리의 근원지에서 발견한 내용물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위험하다기보다는 비위가 연약하고 어린 소녀가 미처 감당하기 어려운, 대단히 무서운 장면이었다.
“끄으으윽.”
어떤 한 사람 형체가 개울 기슭에 쓰러져있었다. 키가 매우 큰 남자였다. 시신인지 사람인지도 구분이 어려웠다. 남자는 실오라기 하나 없이 발가벗겨진 채였고 온몸에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간간이 입에서 흘러나오는 낮은 신음만 아니라면 죽은 사람으로 착각할 뻔했다.
그는 전신에 자상과 타박상, 채찍에 맞은 자국이 가득했다. 옆구리와 허벅지에는 날카로운 칼에 찔린 듯한 깊은 상처들이 있었다. 살갗은 처참히 찢겨 있었고 군데 군데 깊은 속살이 보이기도 했다.
“어떡해!”
루디아는 황급히 다가가 그 사람의 생존 여부를 살폈다. 그는 고통에 짓눌려 눈을 감고 있었다. 혈액과 체액으로 범벅이 된 얼굴부터 시작해 몸 전체가 엉망이었다. 바늘처럼 생긴 것들이 몸 구석구석 꽂혀있었다. 영락없는 고슴도치 신세였다. 사내의 얼굴에는 짙은 절망감과 처절한 고통이 어려있었다. 의식을 반쯤 잃은 것 같은데도 눈에서는 원통함의 눈물이 흘렀다.
큰 두려움에 빠진 소녀. 그녀는 불안감을 무릅쓰고 찬찬히 남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혼자서는 도무지 처치할 방도가 없었다. 의료진을 불러야 마땅하건만 난민에게는 접촉이 허락된 인프라가 없었다. 더욱이 그곳은 오지였기에 주변에는 난민 캠프의 동포들 말고는 도움을 청할 이가 없었다. 내버려 두면 남자가 죽을 것은 자명했다.
‘대체 무슨 일을 겪은걸까?’
소녀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살펴보았다. 피와 땀, 콧물, 눈물, 흙 범벅이 되어 엉망이었지만 어렴풋이 보기에도 굉장한 미남이었다. 소녀의 눈으로도 확연히 느껴질 만큼. 흡사 사람이 아닌 땅에 추락한 대천사 같았다. 체격과 기골도 상당했으며 온몸이 빈틈없는 두터운 근육으로 팽팽하게 조여져 있었다.
부상당하지 않은 온전한 상태로 마주했다면 위압감에 압도되었겠지. 하지만 지금의 그는 그저 죽어가는 한 마리의 불쌍한 짐승 신세에 불과했다.
루디아는 급한 대로 긴급 상황이라도 해결해보려 했다. 지혈을 위해 천을 꺼내서 피가 용솟음치는 부위들을 눌렀다. 하지만 소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당장 외부 세계와 연락할 방도도 없었다. 최대한 빨리 지혈만 마치고 캠프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캠프에 머무르는 동포 중에는 최소한 의술을 다룰 줄 아는 이가 하나는 분명 있을테니까.
한참 힘겹게 피가 흐르는 곳들을 돌려막던 소녀는 더 심각한 한 상황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그것은 열두 살 아이가 보기에는 부적절한, 처참하고 징그러운 것이었다. 특히 여자아이라면 더욱더.
죽어가는 사내의 전신은 찢긴 상태였는데 그중 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하게 훼파된 부위가 있었다. 손상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징그럽겠지만 부상당한 상처의 모양과 상태가 심히 흉물스러웠다.
‘아아! 말도 안 돼!’
마치 들짐승이 찢어놓은 것마냥 처참히 일그러져있었다. 낭이 찢어졌고 부서진 내용물들이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양쪽 중 하나는 아예 흔적도 없었고 다른 쪽마저 심하게 부서져 출혈 중이었다. 살덩이는 베인 칼자국으로 도배된 상태였으며 잘게 저며져 있었다. 조금만 건드리면 절단되어 떨어져 나갈 판이었다. 혈액은 줄줄 흘러 웅덩이를 이룰 정도였다.
소녀는 그 흉악한 광경에 목을 부여잡고 구토하였다.
하지만 멈춰서 있기에는 의학적 상황이 긴급했다.
겨우 심각한 부상을 천으로 꽉 동여매어 지혈한 후 쓰러진 남자의 입에 물을 흘려 넣어 목을 축이게 한 그녀. 소녀는 어른들의 구조의 손길을 위해 캠프로 달려갔다.
달려가는 동안 아주 잠시 유혹도 들었다. 차라리 그냥 도망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건 어리석은 행동이다. 위험한 사태에 휘말릴지도 몰라. 가뜩이나 우리는 힘도 없는데 잘못 휘말리면 어떡하지?
‘아니야, 못된 생각을 하면 안 돼.’
순간 신약 성서에서 배운 예슈아의 가르침이 아른거렸다. 이방인들이 그토록 줄기차게 읊어대던 그 비유. 여리고 성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던 중 강도를 만나 비참하게 방치된 한 행인의 비유. 유대인 중에서도 경건하다고 칭송받던 제사장과 레위인마저 길에 쓰러진 그 사람을 버려두었다지. 오히려 유대인과 사이가 나빴던 사마리아인만이 그를 구해주었다.
분명 그 비유는 이웃 사랑에 대한 교훈인 동시에 이방인들 사이에서는 은근 유대인들의 비정함을 암묵적으로 지적하는 이야기로 회자되었다. 예슈아의 본 의도가 그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적이 있던 민족의 입장에서 루디아는 반론하거나 투덜댈 떳떳함이 없었다.
‘우리 민족이 2천 년 전 예슈아 그분을 거절했던 이유는…….’
어쩌면 예슈아의 계명, 곧 서로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거절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경건의 모양만 있고 정작 경건의 능력은 없었던 조상들, 만약 지금의 자신이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을 모른 척한다면 그들과 무엇이 다를까. 예슈아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그 명령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고백일까?
이런 심령의 찔림이 들자 유혹에 귀를 기울일 새가 없었다. 루디아는 황급히 캠프에 당도해 부상당한 사람이 있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곧 캠프에 머무르던 건장한 성인 남자 몇이 루디아의 안내를 따라 부상자를 구하러 나섰다.
쓰러져있던 사내는 근육 때문에 제법 무게가 나갔고 그 탓에 장정 둘이 나서야 겨우 들 수 있었다. 일행은 부상자를 캠프 내 임시 의료시설로 데려가 곧바로 치료를 시작하였다. 전문적인 실력을 갖춘 의료인이 아니었기에 여러 면에서 미숙했다. 그럼에도 생명력이 엄청나게 끈질긴 덕인지 조잡한 의료 행위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빠르게 회복하였다.
“그 환자분은 기운을 차리자마자 이틀 만에 몰래 행방을 감췄어.”
루디아가 힘겨운 기억들을 더듬어가며 증언을 마무리했다.
“아마 캠프에 오래 머무르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지.”
“그랬구나.”
“그리고 바로 다음날 우리는 괴한 군단에 의해 학살을 당했어. 아마도 크레센트라는 그 무리였겠지. 지금 생각해보니 그들이 추적하던 대상은 우리가 아니라 쓰러진 남자 쪽이었던 것 같아.”
루디아의 회상을 통해 진실을 알게 된 윤혁은 어찌 평해야 할지 감히 가늠이 되지 않아 마음이 숙연해졌다. 얄궂은 운명이라고 해야 하려나. 유대인들은 형에게 과도한 선의를 베푸는 바람에 휘말리지 않아도 될 참극에 휘말렸다. 형의 잘못이라기보다는 크레센트라는 사교(詐敎) 집단의 악행 때문이라지만, 그래도 그들로서는 충분히 억울할 법한 일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 자리에서 루디아가 무서워 달아났다면, 위기에 처한 사람을 방치했다면, 형은 그대로 죽어버렸거나 목숨을 건지기 위해 더 위험한 존재로 재탄생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죽었다면 인류연합과 반역자들의 싸움으로 세계가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손 쓸 틈도 없이 지구 전체가 전란으로 멸망했을지도 모르지. 반대로 형이 어떠한 존재로 각성했다면 윤혁이 알지도 못한 사이에 곧바로 세계 종말의 마지막 초읽기가 이르렀으리라.
결과적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루디아는 온 세상을 거대한 위협과 악으로부터 구해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두려움을 이겨내고 베푼 친절, 그 가치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너란 친구는 정말……,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구나.’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본받을 점으로 가득한 그녀. 윤혁은 이러한 그녀가 자신의 친구라는 사실이 과분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감사했다. 누가 유대인들을 사마리아인들보다 친절이 없는 냉혹한 존재로 비방했는가. 그러한 자는 왜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당대의 냉대받고 비방을 받던 사마리아인을 선역으로 묘사했는지를 깨닫지 못한 것이리라.
선한 유대인.
이전에도 그랬지만, 그녀가 자신의 친구라는 사실이 지금은 더더욱 심히 기쁨으로 다가왔다. 그렇다면 이제 그녀와 동포들이 적법하고 합당한 보상을 받도록 상황을 이끌어내는 일은 자신이 맡아야 할 몫의 책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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