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52회 아벨의 후예 Ch 8. 커버넌트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3.27 | 회차평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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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는 샘통이 났는지 다시금 임무쪽으로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슬슬 ‘1등 시민’ 선발에 관해서도 공지해줘야죠.”
“그래, 잊어버리기 전에 슬슬 준비해두자고.”
2등 시민이란 용어가 시민권을 얻은 우주 인류 전반을 의미한다면, 그에 대비되는 용어인 1등 시민은 지구에 거주할 권한을 획득한 인간을 의미한다.
일단 지금은 표식을 받은 적이 없던 지구 시민들이 1등 시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지만, 그들은 부적합한 자들이다. 조만간 실력에 기반해 지위가 뒤집힐 것이다. 지구의 원 거주자들은 반강제적으로 우주로 쫓겨날 것이다.
물론 불만의 목소리가 나올 명분은 없다. 2등 시민의 권리를 증진시켜 현 지구와 동등한 수준으로 상향 평준화시킨 뒤에 재배치를 할 테니까. 더욱이 막대한 사회경제적 보상을 쥐여주고 내보내면 할 말이 없겠지.
그 뒤 공석인 된 1등 시민 자리는 선별된 실력자 인간들로 다시 채워지게 될 것이다. 초인이나 초인에 준하는 급의 우수한 승리자들로.
“그런데 쫓겨난 지구 인류가 순순히 흩어져줄까요? 그들에게도 민족적인 정서가 강하잖아요. 쫓겨나더라도 저들끼리 좁은 영지에 모여 살 텐데. 그러면 그들의 민족 정체성은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예요. 그럼 우리 계획의 취지와도 어긋나는데.”
“괜찮아. 어차피 셔플 프로젝트의 후속 스텝이 남아있거든. 게다가 요새 사람들은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워낙 강해서 민족 같은 개념에 별 관심 없어. 아마 우주로 나가면 민족에 대한 낡은 소속감 따위는 까마득하게 잊고 우주 인류와 섞여 지낼걸. 곧 지구의 인종 개념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마냥 사라질 거야.”
자신들의 친족들의 정체성과 혈통의 경계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는 섬뜩한 예언을 나누면서도 둘은 아주 해맑게 웃었다. 애초에 이들에게는 선천적으로 타민족에 대한 증오심만 있을 뿐 애국심이나 민족 정서 따위는 전혀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 낡은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오히려 그들에게는 기쁨이 될 터였다.
“그나저나 표식 문제는 어떡하죠? 혹 우주 인류 출신과 지구 출신이 생물학적으로 결합해서 자손을 낳으면 혹 후손 대에서는 표식 전승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그분께서 싫어하실 텐데.”
“나도 그부분을 걱정했었는데 다 기우였더라. 대표님께서 설마 그 정도도 계산하지 못하셨을까 봐. 애초에 그 표식은 우성유전이래. 부모 중 한쪽만 표식이 있으면 자녀에게 100% 유전된대. 열화되지 않은 온전한 기능으로 말이야.”
“호오, 그러면 한 세대도 채 안 지나서 인류 전체가 완전히 속박되겠네요. 상급으로 자유를 얻은 1등 시민만 제외하면요.”
“아니, 1등 시민 중에서도 초인이 아닌 자들에게서는 표식이 완전하게 제거되진 않을 거야. 만일을 대비해 보험을 들어둬야지.”
제삼자가 엿듣다면 기겁할 한 층 더 섬뜩한 대화가 화기애애한 두 여인의 대화 분위기 속에서 흘러나왔다. 인간의 마음을 벗어난 초월적 괴수들이기에 자아낼 수 있는 모순적인 광경이었다.
“지금 일라이저와 지그문트는 지구에서 잘 대처하는 중이겠죠?”
“그래, 그 둘이라면 정에 휘둘리지 않고 지구의 질서를 공격적으로 개편할 준비를 효과적으로 완성할 거야. 이제 지구 전체가 제로원의 일부분으로 흡수당하는 거지. 선택받은 자들의 성지에 걸맞는 모습으로 말이야.”
“호호, 기대되네요.”
이러한 경각 가운데도 지구 시민들은 곧 닥쳐올 풍파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섬에서는 소소한 실랑이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형!”
“다 듣고 있으니까 살살 말해라.”
카이젤은 골치 아파하는 표정으로 동생의 잔소리를 참아내었다.
“떠나기 전에 해명해야 할 말이 있잖아?”
“하아!”
“이미 룻한테서도 들었어. 레리엔 씨도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고 하시더라. 솔직히 말해서, 형이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렇게 나 몰라라 해서는 안 돼.”
윤혁은 짐승이라도 은혜를 갚을 줄 안다면서 형을 몰아세우며 졸랐다. 그도 그럴 것이 루디아와 메시아닉 유대인 난민들은 엄연히 카이젤의 생명의 은인이었다. 덕행을 입은 자로서 마땅히 변명할 말이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말로만 해서 어떻게 믿어! 최소한 감사 인사라도 전하던가.”
“하아,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마침 그때 레리엔이 형제가 머무르는 방으로 들어왔다. 카이젤의 매서운 눈초리가 그녀를 노려보았으나 레리엔은 천연덕스럽게 무시했다. 도리어 그녀는 쾌활함으로 가득한 표정으로 형제를 흘겨보았다. 기분이 좋은지 휘파람까지 흥얼거리면서.
“너!”
“나 역시 다 들었어, 카이.”
카이젤은 분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루디네 식구들이 네 생명을 구해줬다면서.”
“그 이야기는 그만하지.”
“수치스러워? 가난하고 미천한 종족이 고귀하신 네가 발가벗겨진 채로 다쳐 쓰러진 걸 발견하고는 데려다가 씻기고 치료해주고 상처를 봉합해주었잖아? 혹 치부와 흑역사가 드러났다고 생각하니 화라도 나는 건가?”
“크윽.”
적나라한 지적에 카이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들이 아니었다면 너는 이 자리에 없었을 수도 있었지.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사실 넌 그들 앞에서 큰절이라도 해야 할 처지이잖아. 그런데다가 그들이 난민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삶을 이어나갈 때 너와 인류연합은 버젓이 거대한 부와 권력을 축적했었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미덕에서 어긋난 것 같은데?”
“경제 시스템 오류 발생은 내 탓이 아니야!”
“그래, 맞아. 엘이 저지른 일이었지. 하지만 너는 소수 민족이라 수습에 끼워넣기 귀찮다는 이유로 뒷수습을 보류했지. 게다가 이스라엘 근방에서 벌어진 내전은 크레센트 세력을 견제한다는 핑계로 내버려 뒀고.”
“그만해라.”
“게다가 그들은 너와도 혈통적으로 얽힌 민족이잖아. 너와 나를 포함해 그 다섯 명 중에서 유대 계통의 피가 섞인 건 오로지 너뿐이지. 봉양의 책무는 의식해야 하는 것 아닌가?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반목이 있었던 건 아니겠지?”
윤혁은 이 신랄하면서도 경탄스러운 광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천하의 카이젤 라흐블뤼크를 주물럭거리는 사람이라니. 그것도 말 한마디 지지 않고 몰아붙이다니. 흥미로웠다. 왜 레리엔이 그토록 유명한지 금세 이해되었다.
“좋다. 그녀를 불러줘. 내가 사적으로 사례하지.”
“루디 하나만? 너를 구해줬다가 휘말려서 봉변을 당한 이들은 어쩌고?”
“그들에게도 찾아가지. 그러면 됐나?”
결국은 항복선언은 카이젤의 몫이 됐다. 하지만 레리엔은 여기서 만족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꿍꿍이가 더 있어 보였다. 아무래도 이후에 삯을 받아낼 모양으로 여겨졌다.
윤혁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밖에서 기다리는 루디아를 불러냈다.
“가자, 룻. 우리 형이 너에게 전할 말이 있대.”
“나에게?”
루디아는 두려움에 지레 질렸다. 딱 두 번 밖에 만난 적 없다지만, 윤혁의 형님이라는 분은 너무 무서웠다. 처음에는 피투성이로 쓰러진 상태의 그를 만났고 두 번째 때는 위압적인 위엄을 직접 보았던 그녀. 어느 쪽이건 편안한 기억과는 거리가 멀었고 좋은 인상이 남을 턱이 없었다.
“걱정하지 마.”
윤혁은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를 믿고 루디아는 가까스로 용기를 냈다. 둘은 따로 예비된 방으로 들어갔다. 혹시라도 위험한 일이 벌어질지 몰라 레리엔과 윤혁이 투명한 벽 너머에 있는 옆방에서 대기하였다.
카이젤은 위압감에 대한 면역력이 없는 상대가 공포에 질릴 것을 감안해 일부러 의자에 앉은 채로 기다렸다. 이윽고 루디아가 조마조마해 하는 심정으로 그의 앞에 섰다. 그것은 영락없이 호랑이 앞에 웅크린 토끼 한 마리의 광경이었다.
“저기…….”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내뱉은 루디아.
“제가 그렇게 무섭습니까?”
카이젤은 상대를 배려하여 최대한 친절한 어투로 작은 목소리를 냈다.
“네? 아, 아니 그게 말이죠…….”
“겁먹지 마시죠. 해치지 않습니다.”
“그……, 가, 감사합니다.”
“그저 편하게 대해주세요, 제수씨.”
뭐가 어째?
대기하던 윤혁은 순간 잘못 들었나 의심하여 미간을 찌푸렸다.
“제 본명은 카이젤 א 라흐블뤼크입니다. 윤혁이 녀석의 이복형입니다. 한국식 이름으로는 강재혁이라고 부릅니다. 어느 쪽으로든 편한 식으로 불러주시죠.”
“마,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루디아에요.”
아무리 감추려 해도 그 거대한 포스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나름 상냥하게 대한다고 한 것인데도 루디아는 위축감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했다.
“제게도 그날의 기억이 되돌아왔습니다.”
“그날이라면?”
“제가 납치당했다가 가까스로 탈출했던 날 말입니다. 쓰러져 있었죠.”
“아…….”
루디아는 그날의 기억을 회상했다. 극심한 부상을 당한 채 널브러져 있던 반송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트라우마가 재현될까 걱정된 루디아는 당황스레 시선을 피했다. 그나저나 지금의 멀쩡한 카이젤과 그때의 그 사내를 비교해보니 갭이 너무도 큰 것 같다는 감상이 들었다.
“그때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드렸죠. 미안합니다.”
“아, 아니에요.”
먼저 말을 꺼낸 카이젤 자신도 어지간히 당황한 듯 보였다. 은혜를 입은 것 또한 부담이겠지만 수치스러운 기억에 괴로웠겠지. 맨몸을 보이는 것 자체를 극도로 치욕스러워하는 남자인데, 그런 일을 겪었으니 원. 비록 불가피한 처지였다지만 나약한 상태로 발가벗겨진 채 갖가지 굴욕적인 상처까지 드러내보였으니 민망함으로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으리라.
“그, 그러면 지금은 회복되신 건가요?”
“물론입니다. 저의 초재생능력은 탁월하니까요. 그리고 현대 의학은 매우 강력합니다. 몸 전체가 박살 나도 멀쩡히 원상복구할 수 있으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물론 전혀 괜찮지 않은 후유증이 딱 하나 남긴 했으나 자기 입으로 밝힐 엄두는 추호도 없었다. 구태여 남들이 알 필요도 없고.
“아무튼 감사 인사를 드리는게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이젤은 평소 태도와는 어울리지 않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가당찮아 보이겠지만, 어쨌건 감사드립니다. 그때 목숨을 구해주셔서.”
“아니에요, 저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글쎄요? 마땅한 일은 아닙니다. 듣기로는 저로 인해서 당신의 식구들이 위험한 일에 휘말렸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선행을 베푼 데 대한 마땅한 대가는 아니리라 사료됩니다만.”
루디아에게 몹시 민감한 이야기가 거론되자 윤혁은 매서운 눈으로 형을 흘겨보았다. 배려심이라고는 없는 저 무심한 남자 같으니라고. 동생의 날카로운 시선을 어렵사리 외면하며 카이젤은 황급히 말을 수습하였다.
“그게……, 너무도 큰 실례를 끼쳐 죄송하다는 뜻이었습니다.”
윤혁은 입을 떡 벌렸다. 천하의 그 카이젤이 사과를 하다니. 상상할 수나 있겠는가. 놀랍게도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이 자리에서 펼쳐졌다. 자신 같은 직접적 인연이 있는 혈육도 아닌, 연약하고 가난한 어느 낯선 여인 앞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우수하다고 칭송받는 압도적인 강자가, 얌전히 고집과 기세를 꺾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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