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58회 아벨의 후예 Ch 9. 전략 회의 (4)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4.16 | 회차평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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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절이 지났을 때 루디아는 윤혁에게 작별을 고했다.
“오늘 데려와 줘서 고마워, 이만 난 섬으로 돌아갈게.”
“벌써? 형들을 소개해주려 했는데……. 부모님도 너 보고 싶다던데.”
아쉬움에 축 쳐지려는 눈초리를 애써 붙드는 윤혁.
“아, 스테판 씨도 있었지. 그분 너 보면 반가워할 텐데.”
“잘 지내고 계셨구나. 신경 써줘서 고마워, 윤혁아.”
루디아는 윤혁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하지만 당분간 며칠은 그분들을 만나지 않아야 할 것 같아.”
루디아로서도 나름 깊게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틀림없이 네 형님이 날 감시하려들거야. 그 이유는 너도 알겠지.”
이에 윤혁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렇구나. 카이젤이라면 분명히 루디아가 무엇을 요구할지 미리 청구서를 알아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채 각종 감시의 눈을 붙여두었을 것이다.
“감시받고 있는 입장인 내가 스테판씨와 접촉한다면 결과가 썩 좋지 않을 거야. 스테판씨도 이레귤러라는 이유로 인류연합의 감시를 받는 중이라면서. 아버님의 경우에는 네 형님의 아버지이기도 하니 말할 것도 없지.”
“……확실히 그러겠네.”
더욱이 크로스솔져들도 카이젤이 주시하는 대상 중 하나. 당연히 감시의 시선이 붙어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루디아는 성한, 크로스솔져, 스테판, 그들 중 누구와도 마주하지 않는 편이 유리하다.
‘역시 룻은 생각이 깊구나.’
정에 휘둘려 섣불리 제안한 게 조금은 부끄러웠다. 내심 아쉬워하는 윤혁의 두 손을 루디아가 꼭 잡아주었다. 따스한 온기가 피부 너머로 전해졌다. 그 손에서 자신을 향한 그녀의 신뢰와 유대감이 느껴지자 윤혁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
그로부터 며칠 후, 윤혁은 스테판이 거주하는 시설을 면회차 방문했다. 마침 케리와 무디와 신해도 윤혁과 함께 동행하였다. 처음에는 윤혁이 형의 감시를 의식하여 동반을 망설였지만, 셋이 강력하게 원하는 바람에 결국은 동의하였다.
‘크로스솔져들도 우주 인류 출신이니 스테판씨와 함께 대화를 나누면 도움이 될만한 점이 분명 발견될 거야. 꼭 그게 아니더라도 예수님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서로 친해져서 나쁠 거야 없겠지.’
때는 저녁 시간인지라 신해는 출입하자마자 부엌으로 향하여 미리 준비해둔 식재료로 음식 장만을 개시하였다. 그동안 윤혁과 스테판은 케리와 무디와 더불어 사자 대면의 시간을 공유하였다. 윤혁을 제외한 셋은 자기소개를 나누었다.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스테판. 윤혁이한테 이야기는 자주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리오.”
케리와 무디는 스테판이 이레귤러라는 점에는 의외로 별 주목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윤혁과 함께 선교 여행을 다니며 활동한 점에 더 주목하였다. 그들은 여행 도중 스테판과 윤혁이 겪었던 가지각색의 신비로운 일화를 듣더니 큰 감탄을 드러내었다
“어쩐지 큰 인물 같더니, 여간 대단한 분이 아니셨네요.”
“역시 윤혁이가 인복 하나는 제대로 타고났네요.”
“과분한 과찬이시오.”
둘은 스테판에게 인류연합의 현황에 대해 여러 정보를 알려주었다. 몇 년 전 있었던 히어로즈의 창립, 크로스솔져 팀들의 결성, 그리고 현재 인류연합과 크로스솔져 사이의 미묘한 알력까지. 나아가 그들의 식민지 주민 시절과 휴먼 솔져 시절의 이야기들도 들려주었다.
차츰 대화의 폭이 넓어졌고 어느덧 표식에 관한 이야기도 거론되었다. 스테판이 감시당하는 입장인지라 자세한 부분까지 꺼내지는 못했지만, 어쨌건 교류 과정에서 양쪽 모두 전에 몰랐던 정보들을 짭짤히 얻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이렇게 되겠군요.”
두서없이 흩어져 나온 정보들을 모은 윤혁이 한번 정리해보았다.
1) 현 우주 인류 개체는 예외없이 표식을 지녔다.
2) 표식은 속성상 ‘절대적 우성유전’ 법칙을 따르기에 우주 인류의 후손은 이종족과의 혼혈이건, 실험체 출신이건, 지구 시민과의 혼혈이건, 유전자 조작을 당했건, 그런 변칙과는 무관하게 무조건적으로 완전한 표식에 예속된다.
3) 한 세트의 표식은 총 일곱 개의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4) 표식은 물리적인 육체에서는 관측되지 않으며 제거도 불가능한 것으로 보아 원리상 상위 차원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5) 표식에는 스위치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스위치의 제어 권한은 인류연합 수장에게 귀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에 지구 시민권을 획득한 휴먼 솔져들은 스위치가 모두 OFF 된 상태이다. 하지만 미약하게나마 표식의 영향력은 남아있다.
6) 스테판처럼 이레귤러라 불리는 존재들은 모종의 이유로 표식의 본체가 고장이 났으며 그 영향인지 개인이 스위치를 어느 정도 제어하는 일이 가능하다.
7) 이레귤러로서 온전히 각성하려면 영(靈) 단계에서의 간섭이 요구된다.
8) 완전한 이레귤러만이 후손에게 표식 훼손을 유전시킬 수 있다. 현재로서는 스테판만 해당 사항이 있다. 나머지 이레귤러 개체는 불완전하여 이레귤러 특성을 유전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나, 그들도 영적 간섭은 받았기에 스테판과 거의 동일한 스위치 제어력을 보유하였다.
9) 현 2등 시민은 여전히 표식도 스위치도 카이젤의 제어하에 있다. 다만, 시민권 부여가 이뤄졌기에 식민지 주민이었을 때와는 달리 약간의 표식 내용 변경이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윤혁이 판단하기에 이 일곱 표식은 구속당함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지만, 역설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위장된 축복 같았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존엄성의 훼손처럼 보였지만 이것이 있었기에 도리어 우주 인류에게 복음이 급속도로 확산될 수 있었다. 만약 표식이 없었다면 표식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선서하는 성령의 권능을 가시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웠을 테지.
그러므로 표식은 인간이 만든 제도 가운데 셔플 제도와 더불어 복음화의 일등 공신이나 마찬가지라고 평가받기에 합당했다. 제작자들은 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겠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덕이 아닌 건 아니지.”
무디의 지적도 일리가 있었다. 고난의 문제는 일종의 역설. 고난은 때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연마하기 위해 간접적으로 사용하는 도구가 된다. 하지만 고난 그 자체는 분명 완벽했던 창조 질서에서 어긋난 오류이다. 인간과 천사들의 죄로 인해서 야기된 간접적인 산물이다. 신께서 그 악으로부터 이차적인 선을 유도해내신다고 해서 악 자체가 정당성을 얻지는 않는다.
표식 역시 마찬가지. 일시적으로는 섭리에 이끌려 복음화에 유용한 도구로 역이용되었지만, 마냥 이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될 위험한 존재이기도 하다. 마치 가난이 하나님을 알게끔 사람들을 일깨우는 도구임은 분명하나 그걸 빌미로 가난한 자들을 배고픔 속에 방치해둬서는 안 되는 것처럼.
“무디 말이 맞아. 게다가 표식은 지속적인 자동 업데이트가 가능하잖아. 최근에도 얼마나 많이 개량되었는지. 교묘하게 기독교를 궁지에 몰아넣는 방식으로 개조되었지. 내버려 두면 교회를 약화시키는 데 유용한 도구로 변형될 거야.”
케리가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스위치가 꺼진 우리나 이레귤러인 스테판씨는 그나마 조금 상황이 낫다지만 오늘날까지도 우주의 여러 교회에 소속된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강력한 표식의 영향력에 묶여 영적 갈등을 겪고 있는 실정이야.”
케리도 적극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제창하는 바였다. 다만 똑같은 부정적인 견해를 내보이면서도 무디는 손발로 행하는 개혁에 직접 뛰어드는 일에 회의적인 입장을 다소 내비쳤다.
“하지만 우리 힘으로 뭘 할 수 있지?”
“무디!”
“엄연히 현실이 그렇지 않은가. 인류연합 대표를 상대로 싸울 방도도 없고 개혁을 일으킬만한 지식과 지혜도 없지. 이건 하나님께 맡겨야 할 영역이야. 우리가 손댈 수 있는 게 아니다.”
물론 복음 전파의 영향으로 조금 상황이 개선된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영적 부흥이 한창 극대화되었을 때조차도 표식의 제어력은 약간 느슨해진 것이 전부였지 사라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물며 현재는 우주 전역에 거짓 교리가 팽배하며 신자들의 열정도 빠르게 식어가는 흐름으로 넘어갔다. 더 나은 상황을 기대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었다.
그때.
“인류연합 지도자를 설득하는 방법은 어떻소.”
스테판이 획기적이면서도 엉뚱한 발상을 제기했다.
“설득이라고?”
케리는 호기심을 비췄다. 하지만.
“말이야 좋지만, 무리수다.”
무디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너무 기대하지 않는 편이 유익할 겁니다. 현 인류의 지도자는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스테판 당신이 상상하는 범위 이상으로 엄청난 행보를 벌여왔습니다. 완고함은 둘째치고 우리 같은 부류가 설득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아니, 애초에 만나는 것에서부터 거대한 장벽이 있죠.”
그러자 다시금 스테판이 되받아쳤다.
“그야 맞긴 하소이다만, 윤혁과는 만날 수 있잖소.”
“그쪽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으나 그는 지도자에 걸맞는 자격을 갖춘 위인입니다. 결코 사적인 감정을 자신의 프로젝트에 반영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그도 인간이라면 적어도 양심은 일깨워줄 수 있으리라 보오. 그도 어쩌면 자신의 정책이 인간의 존엄성을 벌거벗기는 월권이라는 점을 무의식중에나마 인지하고 있을지도 모르오.”
그러자 케리가 관심이 생겼는지 귀를 기울이며 경청했다. 스테판은 계속해서 자신이 고찰한 결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설득하였다.
“그렇다면 그가 완고한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오. 지구의 왕이 자신의 양심을 의도적으로 얼려두었거나, 아니면 모종의 이유로 마음속에 뒤틀림이 생겨서 양심조차 제어하지 못할, 깊은 쓴 뿌리가 생겨났을 수도 있지 않겠소?”
쓴 뿌리라는 단어에 윤혁은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멍한 감각을 느꼈다. 왜 자신은 그 생각을 짚지 못했을까. 형은 표식에 관해 해명할 때 유독 깊은 분노를 삭이는듯한 표정을 지었었다. 혹 그의 과거 원한과 관련된 무언가는 아닐까? 섣부른 지레짐작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자꾸만 스테판의 추론에 강력한 설득력이 실리는 듯 했다.
“무려 초인들의 왕입니다. 그런 인간에게까지 굳이 사연을 부여해야 할까요? 사연없는 범죄는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런 정상참작까지 해야 합니까?”
망설임에 가득한 목소리로 무디가 회의적으로 질문하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케리가 스테판의 편을 들어주었다. 똑같이 원죄 교리를 믿는 그리스도인이어도 지도자의 완악함을 향해 맹렬한 칼날을 들이미는 경향성이 있는가 하면, 악의 보편성을 참작하여 용서를 베풀려는 경향 또한 존재하는 법이다.
“내 생각도 이분과 같아. 그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잖아. 원죄에 짓눌린 불쌍한 인간. 그 본성이 특별히 우리보다 더 악하다고 속단할 수는 없어. 단지 우리보다 엄청나게 강하고 똑똑한 탓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이지. 우리가 그의 자리에 섰다면 어땠을까? 나로서는 그보다 더 나았으리라 장담할 자신이 없어.”
그의 타당한 주장에 분위기가 돌연 숙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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