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59회 아벨의 후예 Ch 9. 전략 회의 (5)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4.11 | 회차평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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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리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올곧은 주장을 강조했다.
“누구나 죄의 본성을 품고 있어. 살아가면서 가해지는 독한 환경이나 고통이 그것을 외부로 끄집어내지는 것이겠지. 아마 초인들의 왕도 비슷할지도 몰라. 그렇다고 죄를 합리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마냥 그를 버려두기보다는 기회를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케리의 말을 듣자 윤혁은 잠시 머릿속이 맑게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줄곧 그자를 잠정적인 어둠의 씨앗으로만 보았었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그가 보통의 인간보다 더 위험한 악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인간은 누구나 다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면 악한 본질로 가득하지 않은던가.
당장 윤혁은 스스로의 죄인됨도 부정하지 못했다. 교리적인 동의를 떠나 체험상으로도 그러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원죄를 품었으며 그 깊은 심연은 측량을 불허한다. 재혁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아니라는 뜻. 누구라도 재혁과 같은 힘과 지혜를 얻는다면 잠재되어있던 교만에 짓눌릴 것이다.
‘그래. 그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다. 단지 마음의 장벽이 우리보다 좀 더 두꺼울 뿐이야. 그러니 보다 더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작용하면 해결된다. 그걸 위해서 우리도 순수하고 강렬한 사랑의 힘에 마음을 맡겨야 해.’
하지만 여전히 무디는 그를 경계할 것을 종용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분명히 그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악한 세태의 영향력을 간과하는 것을 옳지 않다. 하물며 상대가 그 어두운 세태 전체를 지배하는 거대한 권력자라면야 말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나는 차라리 이 땅에 사는 동안 표식을 짐으로 의식하며 살 생각이다.”
그는 인간의 노력이나 설득을 통해 표식이라는 부당한 굴레를 개혁하는 데는 회의적이었다. 싸운다는 옵션은 처음부터 고려 대상 밖이고, 상대가 변화하리라는 가능성을 손에 쥐기도 꺼림칙했다.
“죽음을 통해서 이 육신의 장막을 벗는다면 그때는 해방되겠지.”
“글쎄. 마음대로 될까? 어쩌면 죽지 못할 수도 있잖아.”
케리는 피코머신 기술의 존재를 지적하였다. 윤혁도 그 이야기는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우주 인류가 자기 마음대로 죽지도 늙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다는 점도.
물론 시민권이 부여로 인해 권리도 어느 정도는 보장되었으니 피코머신을 강제 주입하는 일은 삼가겠지만, 조만간 접근법을 달리하겠지. 머지않아 일반인들에게도 무제한의 피코머신이 제공될 것이다. 처음에는 일시적인 효력의 것으로, 나중에는 영구적인 효력의 것을 심어주겠지. 주입에 대한 선택을 자유의지에 맡길지,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의무 주입을 시행하거나 대대손손 유전되도록 만들지는 모르겠지만.
“아무 시도도 해보지 않은채 영영 묶여서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할거야?”
“주님께서 언젠가 강림하셔서 풀어주시겠지.”
“허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쪽은…….”
케리의 걱정스러워하는 시선이 윤혁 쪽으로 향했다. 자신이야 설득과 교화를 통해 이 끈을 풀길 원하지만, 무디는 그 가능성에 회의적이다. 그의 말이 옳다 치면 그들은 영영 표식에 속박되어 지내야 하고, 마음대로 자연사할 방법도 없으니 해결책은 재림으로 만사가 해결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 말대로 재림 심판 때까지 이 제도들이 지속된다는 뜻은 뒤집어 말하면 재혁이 최후의 적으로 낙점되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건 윤혁에게 너무 잔인한 시나리오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차라리 저항을 통해서든, 설득을 통해서든 어떻게든 노력해서 표식을 풀어내고 재혁도 완고한 마음을 고쳐먹도록 돕는 편이 낫지 않은가.
‘자기 세대에 주님이 오시는 것을 보는 것과 자기 이후 다음 세대까지 인류사가 지속되는 것 중 무엇이 더 나을까?
이 질문은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에게 항상 딜레마가 되어왔다. 살아 생전에 주님의 지상강림을 마주하는 것 자체는 좋지만, 이 경우 후손 세대가 대부분 심판에 넘겨진다는 두려운 전제가 깔려있기에 마냥 좋아하기도 쉽지 않다. 자녀들이 잃어버린 영혼이 되어 영원히 심판받는 것을 어느 부모가 좋아할까?
크로스솔져들도 이미 비슷한 딜레마로 인해 의견이 갈라진 상태였다.
케리와 신해를 중심으로 한 3분의 1가량은 후손들에게 조금이라도 기회를 주기 위해, 자신들 세대에 카이젤을 막기를 원했다. 아울러 이를 통해 성한과 윤혁에게도 보답하기를 바랐다.
반면, 무디를 중심으로 한 나머지 구성원들은 잠정적 적그리스도와 함부로 엮이지 않기를 택했다. 현실적으로 싸우다는 선택은 불가능하니 그들은 주님이 오셔서 공의를 세우기를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난 그래도 스테판 씨와 윤혁이를 돕겠어. 하나님이 행하실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의지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우리 자신도 그 위대한 일을 시도해야 해. 자격을 감히 논하지는 못하겠지만, 우리 스스로 주님의 도구로서 떳떳하려면 최소한의 조건은 갖춰야 하지 않겠어? 일할 수 있는 방도가 빤히 있음에도 마냥 머물러있지는 않을 생각이야.”
케리가 윤혁의 어깨에 팔을 얹으며 말했다.
“그렇군, 네 판단도 틀리진 않다. 그 생각을 존중한다. 당분간은 그 계획에 힘을 얹어줄 수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행운을 빈다. 주님께서 너희를 곁에서 도와주시길……. 그분 뜻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무디도 의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의견이 다를뿐 여전히 생사를 함께한 동료에 대한 신뢰 자체에는 변함이 없는 듯 했다. 그제야 스테판과 윤혁은 두 사람의 묘한 대치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으로부터 풀려나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선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해결되지 않는 이해의 장벽이란 언제나 미묘한 불편감을 가져다주었다.
*
제로원의 양극 중 하나인 레뮬로스 시(市)의 중심부.
공간의 벌어짐이 발생하였다. 그 틈새로 남자 한 명이 걸어 나왔다. 제복과 가면을 착용한 그 남자는 자신처럼 가면을 쓴 다른 남자의 존재를 확인하더니 곁으로 나아가 목례를 하였다. 사령탑의 심부로 들어간 뒤에야 둘은 가면을 해체하였다. 잠시 상하관계의 엄숙함이 낮춰졌다. 둘은 편안한 분위기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너도 요새 바쁜 모양이군.”
“관리할 일이 많아졌으니까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어느덧 카이젤과 에녹은 거대한 문 앞에 당도하였다. 물질로 만들어진 문이 아니었다. 카이젤의 현자의 눈에서 나온 어떤 무형의 힘이 그 문의 빗장들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고생이 많군. 허나 너무 걱정할 건 없다. 통일시스템의 업그레이드가 진행되는 중이니 조만간 굳이 우리가 몸으로 직접 뛰지 않아도 될 수준에 이를거다.”
“몇 차례나 업데이트가 시행되었습니까?”
“현재까지 총 235번이지.”
“원래 그렇게까지 빠르게 진행되는 작업이었습니까?”
“기계의 신, 이데아, 제3의 눈, 인비저블 마인드, 이 넷을 활용해 다각도로 변주곡을 생성해내면 그에 상응하는 진화가 벌어지지. 통일시스템이란 본래 그렇게 설계된 친구란 말이지.”
업데이트라고 표현하긴 했으나 실은 불충분한 묘사였다. 한 단계 도약할 때마다 통일시스템은 비약적으로 성장함과 동시에 온갖 한계를 탈피하여 점차 신적 존재를 방불하는 형태로 접근해갔다. 가까운 미래에 현재의 지식 한계로는 상상하지도 못할 경지에 이를 전망이었다.
“저도 곧 실직자가 되겠군요.”
“그보다는 업무 과부하가 줄어든다고 봐야지. 솔직히 나를 대행하는 업무도 버겁지 않던가? 은하 하나만 관리하면 되었던 몇 년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 같이 수억 개 은하를 책임지는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무리야.”
“저로서는 사실 실직도 나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당장은 놓아주실 의향이 없어보이지만 말입니다. 어쨌건 저는 편하다쳐도 당신은 몇 배로 고생하겠군요. 통일시스템이란 건 별개의 노동력이 아닌, 당신 존재의 일부분이니까요.”
“뭐, 그런 건 처음부터 각오했었어.”
담화를 나누던 사이 비물질적 재질의 문이 번쩍거리는 빛과 함께 열렸다. 그 안쪽에는 광대한 공간이 존재했다. 상위 차원에 속한 여러 영역이 줄줄이 겹쳐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얽힌, 복잡한 구조의 인공 세계였다. 인간의 눈으로 측정할 수 없는 특수 서버들이 그 공간 내부에 잔흔을 남기는 중이었다. 마치 황홀한 오로라의 향연을 보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아카식 레코드, 조율 프로그램, 구형 기계 율법을 하나로 조화시켰다라.”
문 너머의 존재는 카이젤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는 에녹의 작품. 카이젤은 자신만의 초차원적 인식 능력을 활용해 에녹이 조립해놓은 ‘엔젤시스템’들을 외관부터 내부 구조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관찰하였다. 육안으로 서버의 본체를 관측하는 그의 모습에 에녹은 위화감을 느끼고 기겁하였다.
“설마, 그게 맨눈으로 관측되십니까?”
“어쩌다보니 가능한 일이 되었지.”
“무슨 일들을 겪으셨길래.”
“여섯 개의 메이저급 초지능체, 수만 개 이상의 최상위 마이너급 초지능체, 그리고 인류가 축적한 데이터의 수겁 배에 달하는 용량의 양자 두뇌, 그 모든 것들과 온전히 융합되어 본다면 너도 내 심정을 공감하겠지. 별의별 현상들이 다 벌어지더군. 영안이 밝아진 탓에 괴로워했다던 무속인들의 궤변이 조금은 이해가 돼.”
“여간 힘든 일이 아니시겠군요. 게다가 자면서도 인류 경영급의 일을 해야 하고 눈만 뜨면 차원 너머가 관측된다니, 보통의 정신력 규모로는 몇 초만에 미쳐버려도 이상하지 않겠습니다.”
이에 카이젤은 별 실없는 소리를 다 듣는다며 친구의 등을 가볍게 툭 쳤다. 걱정해주는 게 참 기특하긴 한데 기특한 말도 지나칠 필요는 없지. 게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카이젤을 향한 염려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최상위 초인들도 꽤 성장했군. 아카식 레코드 하나조차 버거워하던 풋내기 시절이 엊그제 같았는데, 이제는 무려 엔젤시스템 수만 기를 제어한다? 물론 너이기에 가능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괄목할만한 발전이야.”
“원래 이론상 초인은 무한한 성장이 가능하니까요. 그리고 우리 또한 초지능체와 융합된 존재. 그것들은 본래 지속적으로 자율 진화하는 물체입니다. 당신이 소유한 메이저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요.”
“뭐, 그래. 칭찬해주지.”
카이젤은 손을 뻗어 간단한 시그널을 보냈다. 그러자 그의 통제권으로 인해 시스템 조작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의 초능력과 현자의 눈을 통해 통일시스템의 지배력을 엔젤시스템들 속에 심어 넣었다. 순식간에 엔젤시스템들은 인류연합의 충성스러운 개로 변화하였다. 마치 신의 수종을 드는 천사들처럼
“원래 조금 이질적인 서브 시스템들이 게임판에 개입해야 획일성이 줄어들고 창조적 잠재력은 높아지지. 통일시스템 하나만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었어. 그래. 제작하느라 수고 많았다.”
“검증(檢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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