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514회 아벨의 후예 Ch 24. 스미르나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9.01 | 회차평점 ![]() |
Chapter 24. Reformation : 스미르나
초인 정도 레벨이 되면 한 번 계획을 세우고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서 대대적인 행동을 벌이는 것이 가능하다. 이를테면 새로운 과학 기술의 개발, 건축물의 축조, 사회 운동, 정치 개편, 경영 프로젝트, 시민들 사이에 헤게모니를 퍼뜨리기 따위의 일들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원래 3세대 이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이런 거창한 종류의 일을 실행하려면 계획부터 완성까지 최소 수십 년 이상은 기다리면서 차분히 후일을 도모해야만 했다.
하지만 현재처럼 하루가 멀다하고 급변하는 이 시대에 이르자 초인들도 더는 그렇게까지 참을성을 발휘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미래를 내다보기에는 너무도 변혁 속도가 가속되었기 때문이다. 계획한 것을 제때에 신속하게 성과로 만들어내지 못하면 며칠 안에 계획이 휴짓조각이 되기 일쑤였다. 마침 이런 요구에 맞춰 세상을 신속하게 움직일 여건과 힘도 갖춰진 마당이었다.
그래서 갈트론도 자신이 만들어낸 사상인 ‘불가지론적 초차원적 유물론’을 구상이 확립된 후 바로 다음 날부터 실행했다. 그의 창조물은 즉각 Upol 수십억 개를 휘감았고 사람들의 뇌를 신속히 감염시켰다.
굳이 복잡하게 사회 혁명이니 뭐니 하는 수단을 거칠 필요도 없었다. 시뮬레이션 우주라는 이름의 매우 편리한 사상 전파 매질이 있었기에 하루면 충분했다.
게다가 그가 이번에 만든 작품은 인류연합의 컨스티튜션 중 어느 것에도 저촉되는 사항이 없었기에 제재도 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과거 사회주의 혁명이나 진화론의 파동 따위와는 격을 달리하는, 사상 최대규모의 사상 확산이 범우주적으로 이루어졌다.
불가지론적 초차원적 유물론은 자기 자신의 만행에서 그치지 않고 어머니가 딸을 낳듯 여러 종류의 부수적 사상 체계들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각각의 딸들은 시뮬레이션 우주를 통해 다시금 재확산하여 사방 곳곳의 2등 시민 출신 철학자, 과학자, 정치가들의 정신세계와 만나 다시금 독특한 열매들을 맺었다.
그리하여 소위 ASDM(Agnostic Super-dimensional materialism) 운동이라 불리는 괴이한 파동이 온 사회에 어마어마한 파장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ASDM 운동은 수천 개의 얼굴을 가진 괴물과 같았다. 그것은 다양각색한 모습으로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 데뷔했다. 2등 시민들이 나름 노력해서 발전시켜온 과학, 공학, 철학, 정치, 경제, 심리학, 사회학 등의 산물들이 이 운동의 영향으로 예전과 다르게 변질되었다.
만일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면 며칠 안에 1조 개의 Upol이 모조리 감염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리온 마흐무드 목사와 그의 신실한 제자들이 각지의 종교개혁자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되살려주기도 전에 기독교는 소멸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의 섭리가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다. 그분의 계획은 아슬아슬한 순간에도 작동하고 있었다. 느부갓네살 왕이나 고레스 왕, 그리고 아하수에로 왕 모두를 도구로 사용했던 신의 손실에서 초인들도 벗어나지는 못했다. 리온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갈트론과는 전혀 별개의 세력이 준동하였다.
사실 ASDM 사상의 확산을 몹시 불편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최상위 초인이 몇몇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무인 기업들을 통솔하는 자, 로스트엠페러 가운데서도 MVP인, 확률왕이라는 이명을 지닌 유성운이었다. 이것은 참으로 절묘한 이치였다. 성운은 하필 리온의 제자 중 하나인 지현의 큰형이었으니까.
물론 성운이 갈트론을 불편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계기는 동생과는 무관했다. 순전히 사상적 불일치로 인함이었다. 과거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와 양립하지 못했던 것처럼, 성운의 방식도 갈트론의 방식과는 공존 불가였다. 신께서는 한 세력을 들어서 더 악한 세력을 심판하신다고 했던가. 이번에도 그분의 계획은 그 전략을 적극적으로 취하였다.
“꼴통 같은 머저리, 보스의 호부견자 막내아들 녀석.”
신사다운 성운도 속으로 욕을 머금으며 가까스로 분노를 삭였다. ASDM 운동은 의도치 않게 성운의 세력권에도 적잖은 손해를 끼치고 있었다.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전면개방 시대 이전부터 성운은 갈트론을 고깝게 여기고 있었다. 갈트론이 얼마나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니는 작자인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불법 생체실험은 물론이고 행성 단위의 인구 조작 실험까지. 가당찮은 만행이었다.
계산적인 성운이라지만 가족의 소중함을 배운 덕에 인륜에 민감했던 그의 상식선에서는 도무지 용납이 되지 않았다.
진이나 칼리드도 가끔씩 예상 밖의 기행을 벌인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최소한 충분한 상식 안에서 행동하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갈트론은 그 본질부터가 달랐다.
‘보스의 양아들인 동시에 성녀의 제자, 그런 자가 그따위로 어처구니없는 작태를 벌이다니. 보스가 갈트론의 기행을 인류 측에 유용하게 이용할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어서 망정이지, 내가 보스였다면 그런 놈은 척살했다.’
이성적인 성운은 차근차근 대응책을 준비했다. 어쩌면 지구에서 머무르던 시절보다 훨씬 치열한 냉전을 벌여야 할지도 모르는 판이었다. 어쨌건 성운은 갈트론이 제멋대로 병폐적인 사상을 퍼뜨리며 활개 치는 꼴을 두고 볼 의향이 없었다.
그는 자기의 뜻을 도울 초인 동지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칼리드나 에르샤, 혹은 스튜아를 끌어들이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의외로 중립을 선언했다.
“나는 근신 중이에요.”
스튜아는 예전 시뮬레이션 우주 사건으로 근신 처분을 받은 이후로는 얌전히 본업인 문화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그래서 성운의 내민 사상전 참여 제안에는 그다지 관심을 내비치지 않았다.
“내게는 다른 임무가 있어서 바쁘다.”
칼리드도 셀레스티언 사건 이후로는 대총통 자리에서 물러나 각 Upol의 자치권을 통일시스템과 조화시키는 업무에만 종사하고 있었다. 그는 카이젤의 명령대로 세력 다툼에는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내심 성운은 에르샤에게는 아주 조금 기대를 걸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무려 군인들에 대한 통솔 권한이 있지 않은가. 잘하면 매우 요긴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기대만큼 일이 흐르지는 않았다.
“저도 좀 곤란하겠군요, 확률왕.”
“마음에 걸리는 고민거리라도 있으신지요?”
“휴먼 솔져에 대한 제 통솔력이 예전과 같지 않아요.”
“어째서입니까?”
“아버지께서 새로운 유형의 군인을 군 시스템 내부에 첨가했거든요.”
“아.”
새 유형의 솔져에 관한 소식은 성운도 첩보를 통해서 듣긴 했다.
“클론솔져니, 뭐니 하는, 그 군단 말입니까?”
“네, 그들은 비단 군에만 배치되어 있는 게 아니에요. Upol의 민간 지역에도 시민들 사이에서 섞여 살고 있지요. 비유컨대 아버지의 게슈타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군 내에 미치는 영향력이 더 크지요. 저보다도.”
딱히 반론할 말이 없었다. 성운은 궁금증이라도 해소하고자 했다.
“대체 그 클론솔져란 것들 정체가 뭡니까? 총사령관은 아시는 바가 없습니까?”
“아뇨, 저조차도 모릅니다.”
“총사령관인 당신조차도요?”
“비록 제가 처음 제의를 드리긴 했지만, 구상 자체는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독단적으로 설계하고 창조하신 군단이니까요. 그들의 능력과 본질의 대부분은 현재 베일에 싸여있어요.”
성운의 마음속에 순간 클론솔져에 대한 경계심이 스며들었다 영민한 그는 그것들이 결코 만만치 않은 존재들임을 직감하였다. 기계나 이종족 따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속성이 깃들어 있음이 분명했다.
‘이거 기시감이 드는 군.’
클론솔져란 아무래도 예전에 자신이 창설했던 히어로즈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성향의 프로젝트인 것 같다. 하필이면 자신보다 훨씬 더 탁월한 보스의 작품이라는 점도 문제이지. 아무래도 지금 남아있는 히어로 잔당들이 예의 그 클론솔져라는 것들에게 모르긴 해도 한바탕 곤욕을 제대로 치르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뭐, 내가 신경써줄 바는 아니지.’
사실 에르샤도 성운도 그것들이 신경 쓰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는 정보는 기껏해야 그들이 몇 가지, 그들이 인간보다는 뛰어나지만, 초인보다는 조금 못한 지성과 창조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그리고 각자의 개성을 독특한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점뿐이다.’
굳이 더 들자면 클론솔져들끼리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여 함께 발전할 수 있다는 점까지? 어쩌면 더 많은 카드가 숨어있을지도 모르지. 어쨌건 이 사안은 비록 꺼림칙하나 보스의 계획이니 시비를 걸 사항은 아니다.
성운은 갈트론에 대적할 방법에나 집중하기로 했다.
끝내 에르샤를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꿩 대신 닭으로 SS 클래스 초인 열 명 정도를 동지로 모으는 데는 성공했다. 전면개방 시대 이후로는 초인들 사이의 상하관계가 폐지되어 버렸는데 이점이 오히려 성운에게는 호재로 작용했다. 다른 최상위 초인과는 달리 그는 애초에 수평적 관계를 선호해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강의 지원 세력을 모은 그.
이제 보스에게 최종 승인을 받는 일만 남았다.
“제가 보스의 막내 아들이 만든 괴뢰 사상을 훼파하겠습니다.”
성운은 단도직입적으로 카이젤에게 승인을 요청했다.
“과연 네 궤적은 어디로 튈지 모르겠군.”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물론이다. 갈트론도 내 허락받고 움직이는 놈은 아니었으니 너도 놈을 억제하는 일은 얼마든지 마음대로 행해도 좋아. 다만, 놈이 만만하지는 않을 거다. 신사다운 너와는 달리 품성이 뒤틀린 녀석이니까. 내 양자로 인정하기 민망할 정도로.”
텔레파시 네트워크 너머로 카이젤이 혀를 끌끌 차는 듯한 모양이 그려졌다.
“네가 교육해 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맡겨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별도의 지원은 필요 없나?”
“제게 계획이 있습니다.”
카이젤은 흔쾌히 성운의 움직임을 허락했다.
인류연합 대표는 그 시각, 한쪽 눈으로 리온 일행의 움직임을 면밀히 감시하고 있었다. 비단 선지자 역을 맡은 존재에게 신경이 쓰여서만은 아니었다. 아직은 천재현에게 감시의 눈을 붙여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보디가드로 붙여놓는 방식도 나쁘진 않군.’
내심 카이젤도 리온이 허무하게 당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무려 자신에게 처음으로 고개 뻣뻣이 들고 책망한 남자 아닌가. 그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그런 자가 허무하게 패하는 것도 재미없으리라.
이왕 천재현도 감시할 겸 리온 목사도 보호하도록 둘이 같이 다니게 해두는 전략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가 마침 성운의 동생도 저들 일행에 붙어있으니 성운을 좀 더 깊이 관여하게 할 수도 있겠고. 계획했던 바는 아니긴 해도 이렇게 흘러가는 흐름도 나름 괜찮구나 싶었다.
(다음 회차에서 연속됨)
이전회
513회 아벨의 후예 Ch 23. 핍박에 굴하지 말라 (3) |
다음회
다음회가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