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517회 아벨의 후예 Ch 25. 전조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9.08 | 회차평점 ![]() |
Chapter 25. Survival Contest : 전조
지구의 유일한 위성인 달.
요새로 개조된 달 표면에 커다란 체구의 흑인 남성 하나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훤히 드러난 그의 상체는 맹렬하고 건장한 근육으로 팽팽히 짜여있었다. 흡사 무투(武鬪)의 극한에 도달한 전설 속의 용사, 혹은 무신들의 왕을 연상시켰다.
초인들 중에서도 특별히 한없이 최강에 근접한 육체를 자랑하는 그였다. 바이오닉 솔져 같은 특수하게 개조된 인간의 경우를 제외하면, 그의 육체는 정상에 근접한 수준이었다. 무기를 배제하고 오롯이 맨손 싸움만으로 그를 꺾었던 초인은 지금껏 단 하나뿐이었다.
“큰형님, 돌아왔습니다.”
“바깥에서 임무를 맡느라 수고했다.”
흑인 남성은 원거리 통신 기술을 통해 누군가와 통신하였다. 무투가로서의 그를 꺾었던 바로 그 한 명이었다. 타인을 쉽게 동료로 받아주지 않고 툭하면 오만한 자들을 심판하기를 즐기던 검은 사자조차도 존경을 표하는 유일한 상대였다.
“렐릭 프로세스는 순탄하게 진행 중입니다.”
“그런가?”
“불씨는 이미 던졌습니다. 저뿐 아니라 다른 로스트엠페러들도 한창 봉화를 올리고 있습니다. 이제 2등 시민들의 세계는 발칵 뒤집힐 것입니다. 더 높이, 탑 꼭대기까지 올라가리라는 열망에 사로잡혀 모두가 날뛰게 될 것입니다.”
“나쁘지 않은 흐름이군.”
“그런데 이번에 저와 그자를 지구권으로 불러들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무런 이유도 설명해주시지 않고 소환하셨는데 말이죠.”
통신 선의 반대편에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차차 계획을 설명해주지. 이제 슬슬 사다리를 놓을 때가 되었어.”
“우주 인류가 지구로 올라올 사다리 말입니까.”
“그래, 이제 실력자들이 성지를 차지해야지. 탈락자들은 퇴출하고.”
“굳이 저희까지 동반되어야 할 복잡한 이벤트입니까? 큰형님께서 해오셨던 대로 하시면 될 텐데요. 하늘도시의 셔플 정책처럼 말입니다.”
“대상이 지구라면 좀 더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접근법을 취해야지, 쿠에시.”
카이젤은 자신의 신하를 어린아이 달래듯 부드럽게 꾸짖었다. 상냥한 목소리 속에 담긴 무시무시한 카리스마와 아우라, 그 위엄을 잘 아는 검은 사자는 얌전히 고개를 조아리고 상대의 응답을 기다렸다.
“이전 생각이 나는군. 너와 내가 진검승부 했던 때 말이야.”
“그때는 제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쳤습니다.”
“아니야, 나름 내게도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 기회였어. 두뇌 싸움이야 그 네 명과 질리도록 해보았고 한 번도 전력을 다한 적이 없었지만, 계급장을 내려놓고 사나이 대 사나이로 맨손으로 진검승부를 벌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
진검승부라.
그렇게 말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지 않을까?
당시의 카이젤은 아직 완벽히 다 자라지 않은 열다섯 살의 풋풋한 청소년이었고 쿠에시는 이미 장성한 스무 살 청년이었다. 물론 청소년이라 해도 이미 세계를 거의 다 제패한 상태였다. 또 이미 아나키스트들의 수장이었던 쿠에시를 굴욕적으로 패퇴시켜 몸 하나만 남는 지경까지 몰아붙이긴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몸 싸움으로 겨루기에는 불리한 조건 아니겠는가.
군대를 보내서 쉽게 제압할 수 있었겠지만, 카이젤은 그 남자와 무투로 겨뤄보겠노라고 나섰다. 당연히 부하들은 만류했다. 왜 굳이 그런 불리한 싸움을 벌이냐고. 전력 차가 불 보듯 뻔한데 왜 애써 불편하고 복잡한 길로 돌아가느냐고. 하지만 등산가에게 산 정상이 꼭 정복해야 할 대상이듯, 카이젤에게도 나름대로 고집이 있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하며 다가왔다.
“내가 당신을 아무런 술수없이 꺾는다면 어쩔 셈이지?”
아프리카의 눈 덮인 산악 지대에서 소년 카이젤이 도전장을 던졌다.
“당신을 인간들의 왕으로 순순히 인정하고 복종을 맹세하지.”
“생각보다 단순해서 마음에 드네.”
“부하들 뒤에 숨어 술수나 부리는 비겁자인 줄 알았는데 평가를 수정해야겠군.”
“영광이야.”
둘은 눈이 내리는 설원에서 상의를 벗고 결투를 시작했다. 나노 슈트를 비롯하여 아무런 기본 무장조차도 갖추지 않은, 공정한 맨몸 싸움. 전략적 두뇌로는 소년 쪽이 우위였지만, 체격 차가 컸다. 당시의 소년은 아직 신장이 180cm 후반이었고 청년은 2미터를 훌쩍 넘겼다.
둘은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신체 능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싸움은 얼추 엇비슷한 균형을 이루었다. 다만 타고난 신체적 잠재력에 있어서는 소년 쪽이 압도적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자기 몸의 잠재능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데 능숙했다. 또한 그가 지닌 ‘초인의 육체’ 역시 최상품이었고 당연히 재생 능력도 탁월했다. 장기전으로 돌입하자 청년은 서서히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결국, 쿠에시는 본인의 비기(祕技)를 꺼냈다.
그의 고유한 재능인 카리스마타를.
그것은 놀랍게도 물질세계에 의지를 불어넣는 류의 재능이었다.
“이 힘을 쓰게 만들다니, 칭찬해주마, 꼬마.”
이 시점으로부터 훗날 과학 기술은 놀라우리만큼 발전하였다. 상위 차원의 힘을 빌어 하위 차원의 법칙과 질서와 물리량을 조작하는 기술이 나올 정도로. 하지만 그렇게 도약하고도 인간이 정복할 수 있는 상위 차원은 여전히 방대한 만물 가운데 지극히 작은 부분으로 제한되었다. 영(靈)들의 세계는 아예 고사하고. 거기까지 닿으려면 수천 년으로도 턱없이 모자라리라.
훗날에도 그랬으니 그 당시는 오죽 미흡했으랴. 즉 쿠에시가 그때 보인 재주는 당시로서는 과학보다는 마법에 흡사한,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마법은 아닌, 것이었다. 인간이 지닌 영의 권세를 하계에 끌어내려 영향을 미치는 일? 그런 묘기는 특유의 고유재능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미약하고 비 정량적이고 한시적이고 한정적이긴 하나 카리스마타는 당시로서 초인이 영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쿠에시의 카리스마타는 그 가운데서도 특히나 독특했다. 그는 연금술마냥 물질에 신비한 변형 속성을 입힐 수 있었다. 아프리카 지역에 유독 우주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특수 자원이 많이 발굴되었는 것도 바로 그의 개입 때문이었다.
그런데 쿠에시는 이 재능을 조금 색다른 용도로도 활용할 수 있었다. 바로 맨손 격투 말이다. 그는 자신의 카리스마타를 응용함으로써 자신의 신체 능력을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 폭발적으로 증폭시키는 묘기가 가능했다. 그 효과는 순간적으로 수 배 이상 물리력을 높이는 식으로 나타났다.
갑작스럽게 쿠에시의 정권이 위력을 높이자 카이젤은 순간 죽음의 위험을 느끼고 몸을 회피했다. 그는 재빨리 대응책을 마련했다. 본래 2대째 위버멘쉬의 재능이었으며 이제는 자신이 한 단계 더 높여 완성한 재주, 곧 ‘학습의 괴물’, 그는 그것을 십분활용하여 쿠에시의 카리스마타도 자신의 것으로 복사해 소화해냈다.
“듣던 대로 도둑질에 능하군, 소년 왕. 하지만 어차피 베껴도 못 사용할걸?”
그 말대로였다. 쿠에시의 카리스마타를 강체술(剛體術)로 발현하려면 ‘초인의 정신’과 ‘초인의 육체’ 사이의 적절한 균형이 요구된다. 쿠에시는 이 조건에 최적화된 초인이었다. 반면, 카이젤은 신체적 재능도 쿠에시보다 우세했지만 정신 쪽의 우세함은 지나칠 정도로 더 강력했다. 즉 균형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그 바람에 그는 강체술을 사용할 수 없었다.
물론 그가 지닌 초인의 육체는 잠재력이 거대했다. 내적인 질과 희소성만 따지면 어떤 의미에서는 카이젤 본인의 초인의 정신보다도 더 가치가 있었다. 허나 그것은 잠재력의 차원이지 당장 물리적인 강인함으로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쿠에시는 강체술을 감당하지 못하는 그를 비웃었다.
“제 명을 재촉했구나, 소년.”
그러나 소년은 눈썹 하나도 떨지 않았다. 기껏 복사해낸 카리스마타를 강체술로 변환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소득이 없진 않았다. 그는 색다른 대응책을 내세웠다. 몰아붙이던 쿠에시는 갑자기 공기의 흐름이 바뀐 것을 감지하고는 당황했다.
“뭐지?”
“적어도 지금 당장은 당신의 체술을 직접 사용하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그 대신 당신이 당신의 강체술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는 있어. 상쇄 기법 말이야.”
그 말대로 조금 전까지는 바위를 깨부술 만큼 폭증하던 쿠에시의 힘이 사라져버렸다. 이제 대결은 다시 맨손 싸움으로 귀결되었다.
게다가 강체술은 신체에 부담을 주는 기술이었다. 무신(武神)의 경지에 이른 쿠에시였기에 그런 강체술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영향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조금 전까지 기술을 남발한 대가는 리바운드로 돌아왔따.
양팔 저울은 한순간에 기울어졌다. 흑인 청년은 소년에게 무참히 짓밟혔다.
회상을 마친 쿠에시.
“그땐 참 어이가 없었죠.”
“승복하기에 억울했나 보군.”
“그보다는 터무니없이 격차가 큰 나머지 아예 패배감도 못 느낄 정도랄까요.”
“그렇다고 억울하게 생각하진 마.”
카이젤은 상대의 위상을 추켜세워주었다.
“아직 난 너와는 달리 무신(武神)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으니까.”
“그것은 특수성 때문이죠. 초인의 육체란 최정상에 오르면 물리적 한계의 영향을 받습니다. 즉 경지에 오르면 정상급끼리는 비슷비슷하죠. 인류의 육체 자체를 개화하는 데 성공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하지만 초인의 정신은 상위 클래스로 갈수록 그 격차가 지수함수적으로 벌어지잖습니까? 당신 같은 경우는 그 상위 중에서도 독보적 유일 정상. 그러니 초인의 지능이 지나치게 강한 나머지 초인의 육체를 압도하는 것입니다.
양쪽 능력의 균형점을 맞출 수 있는 건 그나마 현재로선 저 밖에 없습니다.”
“그렇긴 하지.”
아쉬워하는 투의 카이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튼 조만간 임무 브리핑은 요약해서 전달해주지.”
“맡겨만 주십시오.”
“지구 안과 밖의 경계를 수호하는 센티넬(Sentinel)……, 기대하도록 하마.”
전직 아나키스트였던 흑사자는 최근 달 공전 궤도에 앉아 지구라는 이름의 성지를 보호하는 수문장 역할을 임시적으로 맡게 되었다. 그는 조만간 있을 대규모 축출과 대규모 인구 유입을 공정하게 조절하기 위한 파수꾼이 될 것이다.
한편, 통신을 마친 카이젤은 제복과 가면을 갖춰 입은 채 우주 공간을 거닐었다. 그가 현재 서 있는 곳은 인류연합 영토에서 수억 광년 이상 멀리 떨어진 장소. 아직 인류가 정복하지 못한 수천만의 은하들이 그를 중심으로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현자의 눈으로 관측된 광학적 측정 한계 거리 너머의 저 멀리에는 인류의 소유물인 자랑스러운 전략 병기가 하나 놓여있었다. 바로 QUASAR-II 엔진. 수개월 간 그것은 꾸준히 이분법으로 증식하였고 덕분에 지금은 총 16기로 늘어났다. 지금 보이는 저 개체는 그중 한 기로 막 카이젤의 소환을 받은 참이었다.
카이젤은 내심 고민했다. 청소년 시절 쿠에시와의 대결 이후로 그는 무투의 극의(極意)에 도달하고자 매일 수련에 정진했다. 그러던 중, 최근 들어 그는 뜻하지 않은 방향의 신체적 초월을 체험하게 되었다.
‘초인의 육체는 물리적 한계에 영향을 받는다라, 예전에야 그랬지. 하지만.’
몇 년 전 그가 발명해낸 각종 초능력 시스템들의 중추들, 그것들이 거듭 카이젤의 몸과 일체화되더니 끝내 몸 그 자체가 초능력에 융화되어 특수한 물리 속성으로 변화를 겪게 되었다. 덕분에 이제 카이젤은 초능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순수하게 육체만으로도 물리법칙을 넘어선 극한의 능력을 상시 소유하게 되었다.
‘지금이라면 정신과 육체의 균형이 맞으려나?’
이미 무투의 극의, 곧 무신(武神)의 경지를 눈앞에 두긴 했다. 그는 시험 삼아서 자신의 능력을 총체적으로 평가해보기로 했다. 인위적인 힘인 초능력은 배제하고 오롯이 신체 능력과 강체술, 그리고 신체 관련 카리스마타들만 조합함으로써 자신이 과연 어느 경지까지 달할 수 있을지 알아보자.
카이젤은 명령어를 통해 자신을 향해서 퀘이사-II가 극한의 공격 병기를 가동시키도록 조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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