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524회 아벨의 후예 Ch 26. 지구 해체 (4)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9.24 | 회차평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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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시스템이 시민들의 뇌리에 공지 사항을 알기 쉽게 요약해서 주입하는 바람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 내용이 없었다. 이제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는 하나뿐이었다. 대체 1차 경합이란 뭘 말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명쾌히 해답이 주어지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섣불리 판단할 수 없었다.
“지금부터 배심원을 소개하지.”
태양을 삼킨 늑대의 음성이 다시금 모두의 뇌리에 울렸다.
‘배심원이라. 재판이라도 하겠다는 뜻인가.’
금세 웅성거림이 일었다.
“공정한 녀석들이니 다들 마음에 들 거야.”
심판자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하늘 위에 기이한 장면이 펼쳐졌다. 지구의 주요 도시 상공마다 빛나는 구체들이 나타났다. 반투명한 구체 안에 한 명씩 사람이 들어 있었다.
‘누구지?’
참고로 시민들의 눈에는 자기가 속한 도시에 나타난 구체만 보이는 건 아니었다. 텔레파시 네트워크 덕택에 지구 원주민들과 우주 인류는 모든 구체 속 사람들을 빠짐없이 한번에 관찰할 수 있었다. 어찌나 구체적인지 생김새와 목소리도 생생하게 관찰되었다.
이윽고 프로파일 데이터가 허공에 나타나 각 후보자, 곧 구체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번호와 그의 이전 생애를 간략하게 소개해주었다. 후보자의 숫자는 정확히 111명이었다.
“자, 이들은 참고로 우주에서 태어나 방랑하는 일생을 겪어온 녀석들이야. 이번에 호송되기 전에는 지구 땅을 정식으로 밟아본 적 없지. 지구 역사에 대해서는 최근 들어 처음 교육받았다.
게다가 이들은 우리의 감시 대상이기에 어차피 1등 시민권을 얻지도 못해. 그렇기에 지금 이 자리에서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기에는 최적이지.”
완벽한 제삼자.
초인의 말마따나 111명의 이레귤러들은 최고로 적합한 배심원들이었다.
“재밌게도 이 녀석들 모두 신실하게 신을 섬기는 경건한 인간들이야.”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 거칠어졌다.
“우리 같은 인본주의자들과는 정반대 노선에 있다나. 아무튼 이토록 신실하고 도덕적이고 영적인 배심원들께서 얼마나 선량하고 올바르고 지혜로운 판단을 내려주실지 참으로 기대가 되지. 그렇지 않나?”
태양을 삼킨 늑대는 111명을 동시에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대다수는 표정이 굳었다. 설마 이용하겠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마음 같아서는 당장 기권하고 싶었지만, 초인은 그 생각을 예측하고 응수했다.
“너희 중 단 하나라도 경합에서 기권을 선언하거나 의도적으로 방만히 임하는 것이 발각되는 순간, 지구 해체 프로세스는 절차를 모두 생략하고 한 번에 최종 단계로 돌입한다.”
기권의 가능성은 이 한마디에 원천봉쇄되었다. 이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주어진 조건 내에서 최대한 지혜롭게 행동하는 수밖에. 넘버 1이 대표로 질문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슬슬 제대로 해볼 생각이 든 모양이네. 좋은 태도야.”
태양을 삼킨 늑대가 신호를 내리자 하늘 위에 거대한 홀로그램 그래프가 나타났다. 총 100억 명의 지구 원주민 각각의 숙려기간을 나타낸 그래프였다.
그래프는 개별로도 전개되어 있었지만, 그룹 별로 묶여 다양한 도식으로 정리되기도 하였다. 민족 별로 그룹 지어진 버전도 있었고 다른 기준에 따라 그룹 지어진 버전도 함께 배치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는 심지어 성 정체성에 따라 분류된 그래프도 있었다.
숙려기간의 길이 자체는 그래프상에서의 막대의 높이로 표기되었지만, 그것만이 변수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래프의 각 지점별로 미묘하게 색채와 채도와 질감이 다르게 할당되어 있었다.
이 변수들은 ‘지구로부터 퇴출 후 받게 될 보상’의 종류를 결정하는 인자를 나타낸 것이었다. 이 변수들이 어떻게 조합되느냐에 따라 경제, 영주권, 교육, 인권 등 축출된 자가 받게 될 퇴직금의 패턴이 결정될 것이다.
초기 상태의 그래프는 원주민 개개인별로 값이 균일했다. 즉 현 지구인 모두는 숙려기간과 받게 될 보상의 패턴은 완벽히 똑같았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한편 그래프 아래로는 일종의 수평선이 놓여 있었다. 수평선보다 높이 치솟아 있는 막대에 해당하는 개인은 숙려기간이 무기한으로 산정된다는 규칙이 제시되었다. 놀랍게도 현재까지 그래프의 모든 지점에서 막대의 높이는 수평선보다 높았다. 후보자들과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왜 관용을 베푸는 것인가.
스테판은 뒤에 숨겨진 의도를 눈치채고 눈살을 찌푸렸다.
‘희망 고문을 한 뒤 우리를 움직여서 저 균형을 깨트리려는 셈이겠지.’
그의 예상대로 시스템의 설명이 이어졌다.
1) 그래프의 총 부피는 일단 별일이 없는 한 일정한 총량으로 유지된다.
(참고로 부피 계산법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부피 계산 개념과는 완전히 다르다)
2) 그래프의 한쪽 지점에서 변형을 일으키면 다른 쪽은 반동 변화를 겪는다.
(예컨대 한쪽을 높이면 다른 쪽 어딘가에서 낮아진다)
3) 그래프에 잦은 개입이 가미되면 색채, 질감 등의 변수가 변형을 겪는다.
4) 색채, 질감 등의 변수에도 모종의 개입을 가하여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단, 이런 개입이 일어날 경우 그래프 전체의 부피는 마모되어 감소한다.
5) 첫 턴 이후로는 오로지 경합 후보자들만 그래프에 개입할 수 있다.
6) 후보자가 개입을 할 때는 반드시 후보자 자신이 세운 ‘도덕적 기준’, ‘철학적 기준’에 의거하여 계산한 뒤 간섭해야 한다. 단, 그 개입에 따르는 여파에 대해서는 시스템이 책임지지 않는다.
공지를 통해 이 게임의 실체를 깨달은 이레귤러들은 경악했다. 어려운 용어들로 포장되긴 했으나 쉽게 말해서 인류연합은 이레귤러들로 하여금 지구 위의 민족을 심판대 위에 올려놓고 재단하고 평가할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하나님만 행하실 수 있는 도덕적 판단을 감히 그들에게 던져준 후 강제한 셈이다. 판단을 보류한 채 꾸물거리면 모든 원주민에게 최대의 불이익을 안기겠다는 협박과 함께.
“당황하지 마.”
이레귤러 중 한 명이 의견을 제시했다.
“경합에 참여하되 끝까지 개입하지 않고 버티면 돼.”
텔레파시 네트워크가 연결된 덕분에 이제는 후보자들끼리도 대화가 가능했다.
“저들의 계략에 놀아나 줄 필요는 없어.”
언뜻 합리적인 듯 비쳐지는 판단에 일제히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 같이 합심해서 개입을 막으면 그래프는 초기 상태 그대로 계속 변함없이 유지될 테니 이기는 싸움이 되리라. 게다가 초기 상태 그래프의 막대들의 높이는 임계선보다 높다. 인류연합이 개입하지 않는 한, 이런 교착 상태가 계속되면 당장은 어떤 시민도 쫓겨나지 않으리라.
‘라고 계산했겠지. 죄수의 딜레마란 고전적이면서도 흥미로운 테마야.’
태양을 삼킨 늑대는 속으로 음흉한 속셈을 삼키며 비웃음을 지었다.
‘그래봤자 손바닥 안이다.’
일단 저 이레귤러들은 외관상으로는 모두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그렇기에 겉으로는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인정해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저들이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110명을 믿을 수나 있을까. 배타적이기로 유명한 기독교 신앙 특성상 자신을 제외하면 다른 형제들의 신앙 상태를 파악할 길이란 없다. 종교가 없는 초인들에게도 그 정도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른 110명 중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 모를 테지.’
이것이야말로 교회라는 무리의 딜레마요 비극이리라. 형제자매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100% 확실하게 구분해낼 도리가 없다는 점. 그들은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경고로써 배웠기에 자신 이외의 교인 중 누가 진정한 회심자인지 겉으로 분간할 방도가 없다. 그런 마당에 그리스도인들이 지금과 같은 극한 상황에 몰린다면? 필시 서로를 의심하게 되리라.
<<서로를 의심하고 분열하라. 그렇게 세상 앞에 당당히 보여주는 거다. 너희가 지닌 신앙이란 게 얼마나 부질없고 거짓부렁에 지나지 않는지, 만천하에 수치스러움을 톡톡히 드러내라.>>
직접적으로 일을 벌인 것은 인류연합이었지만, 배후에는 더 위험한 자가 있었다.
<<내가 너희에게 의심을 심어주지.>>
*
태양을 삼킨 늑대는 이레귤러들의 감정 상태를 면밀히 관찰했다. 불안감, 불신, 걱정, 염려의 징후가 잔뜩 녹아 있었다. 금세 균열이 생길 기미가 보였다. 이제 누구 하나라도 엠바고를 깨트리고 개입하는 순간 작은 의심의 불씨가 거대한 불꽃이 되어 활활 타오를 것이다.
‘기다리기 귀찮으니 한번 장작이라도 던져줘 볼까?’
마침 잘 됐다. 지구 시민들에게는, 아니 시민이었던 자들에게는 그간 믿던 지도자들에게 버림받는 일의 충격을 좀 확실히 심어줄 겸 행동으로 옮겨보자. 초인은 카이젤에게 직접 비밀 텔레파시 메시지를 보냈다. 즉각 회답이 돌아왔다.
“허가한다.”
“감사합니다.”
이에 통일시스템이 느닷없이 새로운 메시지를 지구 전역에 통보했다. 후보자들이 수 시간이 지나도 개입하지 않았으니 먼저 인류연합 측의 지도자들이 개인별로 하나씩 수를 두겠다는 선포였다. 돌아가면서 딱 한 차례씩만. 대신 그 이후에는 오롯이 후보자들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고 선언했다.
지도자들의 이름이 하나씩 명시되었다. 주로 대중에게 이름이 잘 알려진 구 섹터장 출신 초인이었다. 정치가보다는 기업가에 가까운 성운을 제외한 나머지 로스트엠페러 여섯 명의 이름도 명시되었다.
사람들은 그중 몇몇 이름을 알아보더니 불안해하며 웅성거렸다. 전부 자신들이 나름 존경하고 추앙하던 정치 지도자들이 아닌가. 혹시라도 같은 출신 민족에는 혜택이나 보상을 더 주지 않을까? 부질없는 기대감과 막연한 두려움이 교차했다. 심판관으로 제시된 지도자들과 사이가 안 좋았던 민족들은 반대로 벌벌 떨었다.
{구 지도자들과의 통신 연결을 시행합니다.}
현재 그 지도자들은 대부분 지구 밖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지구권에 남아있는 자는 쿠에시와 태양을 삼킨 늑대 둘뿐이었다. 그래서 통일시스템은 원격 통신을 이용해서 우주 쪽에 있는 지도자들의 답변을 받아오겠노라고 말했다.
{지구 민족을 관리했었던 지도자들에게는 1회 한정 개입 권한을 허가합니다.}
이때 선택의 횟수뿐 아니라 선택의 폭 또한 크게 제한되었다. 민족 단위로 불이익을 부여하는 방식으로만 행동이 허락되었다.
{어떤 민족에게 불이익을 줄지 선택하십시오. 3순위까지 고를 수 있습니다.}
시스템의 메시지에 모든 인간들의 심장이 두려움으로 요동쳤다.
‘제발 아무도 개입하지 말아라. 다들 포기했으면.’
다수의 무고한 지구 원주민은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 나라 쪽에만 피해가 가지 않기를.’
‘꼴 보기 싫은 그 민족들이나 걸렸으면 좋겠어.’
조금 더 이기적인 편인 원주민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 기회에 난리로 이어져서 그래프가 송두리째 마모되어 사라져라.’
땅에 강림한 우주 인류와 방벽 뒤에 대기 중인 무리는 이렇게 기대했다. 그래야 그들에게 보다 더 많은 자리가 더 빨리 허락될 테니까. 결론적으로 그들 가운데에 이타적인 성자 따위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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