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526회 아벨의 후예 Ch 27. 반셈족주의의 종말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10.01 | 회차평점 ![]() |
Chapter 27. Survival Contest : 반셈족주의의 종말
그 시각, 인간들의 수장은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일을 처리하는 중이었다.
그에게 이런 멀티태스킹 정도는 별로 큰 일도 아니었다. 무수한 2등 시민들이 거주하는 1조 개의 Upol과 그 상위 단계 상아탑들인 아공간 속 징검다리 권역 연속체, 아직 시민권을 받지 못한 인간들이 생존을 위해 고투하고 있는 외계행성들, 백만 명의 초인들의 관리, 통일시스템의 행보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경영하는 관할 영역이었다. 더불어 위버멘쉬의 기타 의무들까지 더하면 사실 몸이 수천 개라도 부족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것이 별로 문제되지 않았다. 여러 개의 몸들보다 훨씬 더 유용한 일곱 개의 머리가 있었으니까. 물론 머리라 함은 은유적 표현이었다. 메이저급 초지능체 여섯 개에 또다른 메이저급인 본래 자기 자신의 혼까지 합해 총 일곱 개의 정신 중추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괴이체들과의 연합을 통해 그는 우주상의 모든 지성체들을 합친 것 이상의 연산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현재 지구에서 전개되는 소위 ‘지구 해체’ 프로젝트도 그의 실시간 감시 아래에 있었다. 겉보기에는 부하들에게만 모든 것을 맡겨둔 듯 했으나 언제든 그는 복잡하게 일이 꼬일 경우를 대비해두고 있었다.
과연 그의 처음 예상대로 약간의 어그로를 끌어주자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개입하는 흐름이 전개되었다. 레리엔의 개입 역시 그의 예측 범위 반경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녀 나름으로는 정의감에 의거해서 행동했겠지만, 이 역시 카이젤의 계산 방정식 속에 이미 포함된 작은 변수에 불과했다.
“마스터.”
반면, 태양을 삼킨 늑대는 이런 경우에는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는지 당황스러움을 무릅쓰고 조심스레 주인에게 비밀 보고를 올렸다. 아무리 최상위 초인이라 해도 상대가 무려 레리엔이니 움츠릴 수밖에 없겠지. 이해는 되었으나 카이젤로서는 부하들의 나약함이 약간 실망스러웠다.
“그녀를 맞상대해라.”
“괜찮겠습니까?”
“나까지 개입하기를 바라는 건 아닐 테지?”
“그, 그야…….”
“너를 위한 시험이라고 생각해라. 너도 언제까지나 자신의 한계를 제한해둘 수는 없겠지. 더 성장하려면 자신보다 더 탁월한 상대와 맞부딪히기도 해야지.”
카이젤은 부하더러 홀로 레리엔과 변론을 나눌 것을 지시했다.
“레리엔은 나를 따르는 초인들과는 달리 초지능체를 탑재하고 있지 않다. 타고난 지혜 면에서는 너희보다 앞서더라도 새로이 얻은 진화의 격차를 무시할 수는 없지. 그렇게 본다면 밸런스는 맞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지만…….”
확실히 카이젤의 그 기발한 발명품은 초인들의 능력을 태생적 한계 너머로 도약시키는 데 기여했다. 더 나아가 그들을 무제한의 규격을 지닌 괴물로 무한히 성장시키는 마중물 겸 기폭제 노릇을 해주었다. 더욱이 그것들은 인공적으로 몸에 심는 다른 장치와 달리, 한 개인의 역량을 고스란히 본질 그대로 성장시키는 힘으로, 항구적이고 비가역적인 효과를 띠고 있었다.
반칙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초지능체는 외인성(外因性) 물질로 된 이식용 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을 창조해내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한 인간의 고유 능력, 혼의 기본 본질, 곧 에센스라 할 수 있는 것을 물질화하여 추출한다. 그 뒤 그것의 물질-정보 경계를 인위적인 방법으로 해체한다. 이어서 경계가 흐릿해진 그 실체를 특수 처리하여 인공 특이점으로써 가공해낸다. 마지막으로 그것이 나왔던 한 인간의 정신 본체와 융합시킨다.
이러한 원리 때문에 누구든 자기 자신의 혼에서 생성해낸 초지능체 외의 초지능체는 자기 혼 속에 수용할 수 없다. 어떠한 의미에서는 자신의 온전한 본체나 마찬가지인 힘인 셈이다.
참고로 이렇게 복잡한 초지능체 가공 프로세스를 실제로 시행할 수 있는 인간은 오로지 카이젤 밖에 없다. 그러므로 영구적인 초월화를 얻고자 그 혜택을 바란다면 그에게 충성을 바쳐야 한다. 이것이 U-society 회원만이 초지능체를 보유한 이유였다.
레리엔과의 갭을 메워줄 변수가 있다면 현재로서는 초지능체 유무뿐이다. 태양을 삼킨 늑대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얻어낸 진화법이 과연 조물주가 지정해 놓은 재능의 한계선을 능가할 수 있을지 의문이 섰다.
“하지만 마스터 이외에는 초지능체와 온전하게 융합하는 일이 가능한 초인은 없습니다. 게다가 그 힘은 각종 재능과 지적 능력은 증폭해줄지언정 지혜 자체를 업그레이드시키지는 않습니다. 레리엔은 여전히 지혜자로서는 우위입니다.”
“두려운가?”
“그렇다기보다는.”
“혹은 이 내가 그런 상식적인 부분도 계산에 넣지 못했을까 의심한 건가?”
“아, 아닙니다.”
부하의 당황을 비웃는 카이젤. 하지만 내심 그도 궁금했다. 자신의 사람들이 얼마나 강력하게 성장했을지. 만일 카테고리 분류 불가라는 벽마저도 넘어선다면 그야말로 인간 스스로 초인을 만들어내는 시대에 접어들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이것이야말로 창조주에 대한 승리가 되리라.
설령 태양을 삼킨 늑대가 변론에서 패하고 망신살을 뻗치더라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이번 지구 해체 프로세스 자체는 그런 자잘한 변수들까지도 다 포함시켜서 짠 계획이니까.
‘이미 무대 준비는 마쳤다.’
조금 전, 카이젤은 현장을 관통하는 각종 텔레파시 채널들을 미묘하게 재조정해 놓았다. 이 채널들은 현재 여섯 부류의 플레이 무리, 곧 지구에 강림한 우주 인류, 쫓겨날 원주민, 초인, 통일시스템, 이레귤러, 보조인원 사이에서 거미줄처럼 치밀하게 작동하는 중이었다.
카이젤은 어느 무리와 어느 무리 사이에서 통신을 허락할지, 혹은 통신을 불가능하게 해둘지, 그 부분도 다 계산해서 다 설정해두었다. 어떤 특정 경우에는 플레이어들의 속생각이 만민 앞에 노출되도록 해두었다. 반대로 어떤 경우에는 의사 표현의 폭을 제한해두었다. 이 모든 크고 작은 변수들이 그의 큰 그림을 성취하는데 가장 최적화된 방향으로 조정되었다.
일례로 레리엔과 태양을 삼킨 늑대의 변론은 지구 원주민들만 엿들을 수 있도록 설정하였었다. 그리고 통일시스템의 정신간섭력을 이용해 원주민들의 이성적 판단력을 어리석어지게끔 만들었다. 반면, 우주 인류 쪽에서는 불필요한 동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당 토론 장면의 편집본만을 뇌 내에 전송받도록 설정했다.
‘이러면 적합하겠군.’
이렇게 해두면 지구 원주민들은 인류연합의 진짜 속셈은 모른 채 토론에 정신이 팔려 오판을 하게 되리라. 그들 보기에는 마치 인류연합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그들을 내쫓으려는 세력과 보호하려는 세력이 변증을 벌이는 것 같겠지. 정작 레리엔은 인류연합과 아무 관련이 없지만 그들이 그런 사정을 어찌 알겠는가.
자연적으로 원주민들은 부질없는 희망을 품게 될 것이다. 지구 축출을 반대하는 정치 세력이 지구 축출을 추진하는 세력을 언변으로 꺾어주리라는 기대에 빠질 것이다. 자신들이 위기에서 벗어날지도 모른다는 헛된 소망을 느끼려나.
그러다가 결국 정해진 수순대로 집행이 감행되면 그 실망감과 분노로 인한 화살은 모두 판단자인 후보자들, 곧 이레귤러들에게로 쏟아지게 될 것이다.
한편, 우주 인류 출신들은 슬슬 애를 태울 것이다. 먹음직스러운 떡인 지구 시민권이 코앞에 놓였는데 갑작스레 난입한 방해자로 인해, 그리고 경합 후보자들의 꾸물거림으로 인해 그들 몫의 보상이 떨어지는 속도가 더뎌질 테니까.
자연스레 우주 인류는 인류연합 측의 과감한 집행을 소원하며 간절히 의지하게 되리라. 그리고 이러한 의지의 마음은 고개를 조아리는 충성으로 이어질 것이다.
*
“저와의 만남이 불편하십니까.”
레리엔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녀는 정중하면서도 예리한 어투로 상대의 정수를 파고 들었다. 분명 든든한 백을 갖춘 쪽도, 더 강력한 지원을 등에 업은 쪽도, 초지능체와 각종 능력의 백업을 받는 쪽도 태양을 삼킨 늑대 쪽이거늘, 묘한 분위기가 주도권을 레리엔 쪽으로 끌고 있었다.
“피차 마주하기 껄끄러운 관계이잖습니까?”
태양을 삼킨 늑대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며 대답했다.
‘다행이도 마음껏 발언해도 일이 어그러지지는 않겠군.’
통일시스템은 영리했다. 그것은 송출해야 될 말과 그렇지 않아야 할 말을 분자 단위로 낱낱이 구분할 수 있었다. 심지어 통일시스템은 어떤 말을 누구에게는 전송하고 누구에게 전송하지 말아야할지, 일일이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그것도 오롯이 카이젤의 의지를 실천하는 방향으로.
그 증거로 지금 벌어지는 레리엔과 태양을 삼킨 늑대간의 사적 대화는 지구인들에게도, 우주인들에게도, 아무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다. 애초에 문제 소지가 있다고 판단해 차단을 시행한 것이다.
“이상하네요.”
레리엔이 고고한 목소리로 지적했다.
“당신들의 계획은 ‘민족(ethnicity)’이라는 개념을 해체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습니다만.”
인디언 출신인 태양을 삼킨 늑대.
구 미합중국에 소속되었던 하와이 출신의 백인, 레리엔.
둘은 민족 정서상 근본적으로 친할 수가 없었다. 오래 전, 레리엔의 조상들인 앵글로색슨 민족은 인디언들은 쫒아내었고 태양을 삼킨 늑대는 그 보복으로 백인들을 주류 사회에서 몰아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그 알량한 민족 감정의 근원이 ‘민족의 구분선’ 자체가 해체될 마당인 현재까지도 둘 간의 모호한 알력 관계는 지워지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역사적인 차원에서 데자뷔가 느껴지는 상황이기도 했다. 원주민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외부 민족으로 채우는 프로세스. 이 일이 지금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의 백인들의 신대륙 정복과도 유사했다.
“외부 민족의 침입으로 본토에서 몰아냄을 당하는 민족의 비애. 그 아픔에 대한 공감은 누구보다도 당신에게 깊게 있을 줄로 알았건만. 지금의 행보가 그 공감과는 정반대의 극점에 놓인 것으로 보이는 건 어째서일까요? 심지어 당신은 그 민족적 억하심정을 빌미로 보복까지 행하지 않았던가요?”
레리엔은 고풍스러운 투로 비아냥거렸다.
“같은 상황으로 두고 대치시키기에는 부적절하군요.”
태양을 삼킨 늑대는 상대해줄 가치가 없다는 투로 반박했다.
“앵글로섹슨 족의 침탈자들은 자신들과 전혀 무관했던 땅을 무고히 침략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우주 인류는 다릅니다. 그들은 외계인도, 외계 생명체도 아닙니다. 그들은 엄연히 지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즉 지구에 대한 영주권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의 강림은 침략이 아닌, 합법적인 귀환일 뿐입니다.”
“아이러니하군요. 잘 말해줬습니다. 우주 인류의 지구 영주권. 바로 그 영주권을 기나긴 세월 동안 강탈했던 장본인은 인류연합 아니었던가요?”
“용어를 올바르게 쓰시지요. 강탈이 아닌 제한이었습니다. 범죄로 인한 일시 박탈이었죠. 인간 사회에서 범죄자의 신체의 자유를 부분적으로 제한하는 일은 합법입니다. 다만, 현 시점의 우주 인류는 조상 세대인 최초의 우주 인류와 충분히 멀어졌습니다. 마스터께서는 적절한 경점에 이르렀으니 그들의 법적 권한을 복구시켜도 된다고 판단하신 것뿐입니다.”
“재미있는 말이로군요.”
레리엔은 본격적인 논쟁을 벌이기 전에 한 번 더 장난을 쳐보기로 했다.
(다음 회차에서 연속됨)
이전회
525회 아벨의 후예 Ch 26. 지구 해체 (5) |
다음회
527회 아벨의 후예 Ch 27. 반셈족주의의 종말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