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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528회 아벨의 후예 Ch 27. 반셈족주의의 종말 (3)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10.08 | 회차평점 0 0

 

 

 

 

 

 

(이전 회차에서 연속됨)

 

 

 

   메시지의 내용은 이것이었다.

   {침묵을 금지하는 프로세스를 가동합니다.}

   {지금부터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자가 하나라도 발각된다면 상벌 그래프 전체의 부피 총량이 자동 부식 작용으로 인해 축소됩니다.}

   {적극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십시오. 소극적으로 주저하는 태도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적극성은 탈락 및 승격 여부에 반영됩니다.}

   통일시스템은 이레귤러들에게 합격과 탈락에 관한 자세한 기준을 발표하였다. 이번 1차 경합을 통해 수십 명이 탈락하고 총 70명이 남게 될 예정이리라. 이렇게까지 공격적으로 경쟁을 부추기니 이제 혼란은 걷잡을 수 없었다. 개입을 막아보려던 몇몇 후보자의 무익한 시도는 소란 속에 묻혀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다 같이 진흙탕에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시스템은 다시금 개입을 더욱 부추겼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판단 기준을 공개적으로 허용하였다. 나아가 개개의 익명성을 보장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단, 그들이 내린 판단 기준에 대해서는 원주민들에게 공개하겠다고 선언했다.

   ‘무서운 함정이군.’

   한편, 보조인원들과 후보자들 간의 텔레파시 연락 체계는 단방향으로 설정된 상태였다. 보조인원은 오로지 보고하는 것만 가능했고 후보자는 질문하고 명령내리는 것만 허락되었다. 보조인원과 후보자의 대화, 후보자와 후보자의 대화를 거쳐 다른 팀에 속한 보조인원들끼리 모의하는 행위는 통일시스템의 자체적 억제에 의해 방지되었다.

   즉 크로스솔져들이 작당하여 분산된 뒤 각기 다른 팀에 자신들을 심어둔 의미가 사라진 것이다.

   동시에 이번 경합을 ‘게임’이라고 지칭한 이유가 마침내 공개되었다. 후보자는 자기 나름의 특정 도덕 기준을 잣대 삼아 그래프에 개입하는 역할이고, 보조인원은 그들의 개입을 집행하는 역할이었다. 보조인원들에게는 강력한 종속력의 족쇄가 채워져 있었기에 후보자의 명령에 불복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사람을 게임기 내부의 캐릭터 삼아 움직일 수 있도록 설정해둔 판이었다.

   게임의 작동 기전은 개략적으로 아래와 같았다. 일단 후보자가 자신만의 기준대로 특정 민족이나 특정 집단을 벌하거나 탕감하고자 점수를 깎거나 더하겠다고 결정하면 보조인원은 이를 시행하기 위해 그래프 속 차원으로 직접 들어간다. 그렇다. 지금 상공에 나타난 그래프는 허상이 아닌, 실체화된 시뮬레이션 우주를 가공해서 만든 공간이었다. 그 내부에는 지구만큼이나 거대한 가상 공간이 엄연히 현실로 펼쳐져 있었다.

   후보자간의 판단이 서로 어긋날 때가 흥미로운 문제였다. 이 경우에 각 후보자가 거느린 보조인원끼리는 일종의 편 가르기 싸움을 벌여야 했다. 싸움 방식은 무장(武裝) 대결로 지정되었다. 보조인원들에게는 각자의 개별 특성에 걸맞는 무기들이 지급되었다. 물론 현역 히어로 시절 사용했던 무장과 비슷한 것들로.

   또한 보조인원들에게는 절대 보호의 슈트가 지급되었다. 이는 어떤 경우에도 몸을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 마음 놓고 싸우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러다 보니 싸우는 멤버들이 리타이어될 일은 없고 오로지 땅 따먹기 식으로 서로를 밀어내고 튕겨내는 방식으로만 승패가 결정되었다.

   “스테판 씨.”

   정신파 음성을 통해 스테판의 보조인원인 크로스솔져들이 연락을 취해왔다.

   “다들 어디에 있소?”

   스테판이 황급히 질문했다.

   “우리는 지금 그래프의 안쪽, 저 가상공간 안에 있습니다.”

   “이미 여기에는 기묘한 전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후보자 중 누구 하나라도 섣불리 개입한다면 곧장 그래프 가상공간 전체가 난장판이 될 기세입니다.”

   “과연 악질적인 방식이에요. 후보자들이 민족들의 죄의 경중을 제멋대로 판단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모자라 보조인원들끼리 무력투쟁을 하도록 부추기다니.”

   허버트, 웨슬리, 뮬러가 차례대로 보고했다.

   “이건 정말 최악이에요. 앞으로 더한 상황도 닥치겠지만.”

   도덕적인 차원에서 크로스솔져들에게는 이보다 더 곤욕스러운 상황이 없었다.

   “늦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기권은 불가능하겠소?”

   조심스레 스테판이 되물었다.

   “그건 물 건너간 듯싶네요. 우리가 기권하면 지구인들 전부가 한꺼번에 축출될 거예요. 되려 손해죠. 소극적으로 대응할 수가 없게 되었어요. 게다가 후보자들이 최소 한 시간 간격으로 개입하지 않으면 그래프 전체가 축소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어요. 지구인들에게 도움을 베풀려면 판결 내리기에 참전해야 해요.”

   리빙스턴이 다소 다급한 목소리로 상황을 전했다.

   “침묵할 권리마저 막아버리겠단 뜻이구려.”

   “비겁하게 팔짱 끼고 있지 말고 진흙탕 싸움에 내려오라는 뜻이죠.”

   친첸도르프는 다소 주최 측에 성이 났는 지 화난 목소리로 울분을 토했다.

   이 곤혹스러운 강요 앞에 스테판은 고뇌했다. 그는 타인이나 타 집단의 잘못을 정죄하거나 점수를 매기고픈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분별의 의무를 외면하기를 원치는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무엇이 죄이고 선인지 판단하고 선언해야 마땅하겠지. 그러나 죄에 대한 처벌을 결정하거나 죄인의 순위를 자기 잣대를 대어 결정하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만일 이런 판단까지 나선다면 자신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월권을 하는 셈이다.

   잔인하게도 인류연합은 판단을 피해보려는 선택지마저도 막아버렸다. 더 나아가 후보자들끼리의 불신을 부추김으로써 이 판국의 불확실성을 극대화하였다. 익명성을 보장해줌으로써 각자가 마음껏 개인 행동을 할 여지도 남겼다. 이런 상황에서는 판단에 대한 도의적 책임이 줄어든다. 적어도 피부로 느껴지는 책무감은 감량된다.

   크리스천들의 등을 떠밀어 민족들의 심판자 노릇을 맡게 하라. 자신의 역사관으로 세상을 읽고 분석하여 각 민족과 집단의 죄를 순차적으로 등급 매기라. 인류연합이 의도하는 바는 명확했고 불가항력적이었다.

   “차신해 군이나 다른 마흔두 명과의 정보 교류는 어떻게 되었소?”

   스테판은 자신 이외의 후보자들에게 배당된 다른 크로스솔져들에게서 가능성의 실마리를 기대해보았다. 그러나.

   “연락이 불가능해요. 만약 알아내고자 한다면 그 부분은 스테판 씨가 다른 후보자와 소통해서 알아내야 해요.”

   그러나 일이 그렇게 허술할 리가 있겠는가. 사람의 생각마저 얼추 읽을 수 있는 통일시스템은 이들의 정보 교류를 사전에 예견하고 차단했다. 이제 현재로서는 나머지 42명이 어떤 상황에 맞닥트렸는지 파악할 길이 사라졌다. 정보의 비대칭성이 이로써 극대화되었다. 인류연합 측은 후보자와 보조인원 개개인을 낱낱이 간파하는 와중에 감시당하는 자들은 주최 측의 의중을 감조차 잡지 못하는 상황. 절망감이 몰려왔다.

   ‘지금까지는 늘 섣불리 선악을 판단하는 자를 나쁘게만 보아왔소.’

   스테판은 잠잠히 지난날의 삶을 돌아보았다. 그는 믿기 시작한 이후로 산상수훈의 가르침 대로 비판받지 않기 위해 남을 비판함에 앞서 늘 신중하게 굴었다. 성경적인 기준 이외에는 자의적 판단을 하지 않으려 노력해왔다.

   또 자기 멋대로 타인의 선악을 판단하려는 욕구는 선악과를 먹은 이후로 생긴 인간의 죄악된 본성에서 나온 것이라 믿고 경계했다. 세상 모든 도덕과 철학은 상대적이고 불완전하므로 하나님의 말씀만 굳게 믿으리라. 그렇게 결의하면 판단의 함정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얻을 줄 알았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안일한 생각마저도 교만한 판단이었을지도 모르겠소.’

   막상 딜레마에 던져지니 성경의 잣대를 현실 판단에 적용하는 일이 너무도 어려움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당장 지금 싸움판에 던져진 이레귤러들이 제각기 혼돈에 빠져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설령 성경 그 자체는 완전할 지언정,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인간의 이성은 불완전하고 오류 투성이이다. 현실 속에서 성경적 가치관을 적용하는 일은 더더욱 버겁다. 그 이전에 같은 구절을 두고도 온갖 해석이 엇갈리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이런 현 주소를 직면하자 자신 안의 견고했던 진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이 임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삼는다면 무엇이든 올바르게 판단하고 살 수 있으리라 자신했던 것부터가 터무니 없는 교만이었다.

   더욱 괴로운 깨달음은, 판단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마저 허락받지 못하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일생 가운데 너무도 많다는 점이었다. 앞으로도 살면서 중대한 선택과 도덕적 판단을 회피하지 못할 때가 불쑥 찾아올 것이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은 온전한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스테판과 후보자들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알게 되었고 자신 역시 불가피한 선택의 기로에 던져졌을 때 수없이 틀릴 수밖에 없는 인간에 지나지 않음을 발견했다. 아마 이렇게 실수할 걸 뻔히 알면서도 피 눈물을 흘리며 판단해야 하는 고통 속에 던져지겠지. 잔인한 진실이었다. 설령 가장 경건하고 지혜롭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오판 앞에 언제든 무기력해질 수 있다. 모든 시험과 모략을 완전하게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그리스도 한 분뿐이리라.

 

 

 

 

 

 

 

 

*

 

 

 

 

 

   가뜩이나 불안정했던 대립의 균형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과자 부스러기처럼 산산이 깨어졌다. 후보자 중 누군가가 대대적인 개입을 시작했다. 그는 미리 공부한 지구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주사위와 추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는 선악과를 먹은 인간답게 선악 판단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기준은 살육의 죄. 타민족을 향한 살육을 많이 벌여온 민족을 위주로 심판하기로 했다. 그는 그 기준대로 순서를 정하여 그 순위에 상응하는 불이익을 매겼다.

   침묵의 깨트림은 곧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즉각 그 후보자를 따르던 보조인원들이 행동을 개시했다. 마침 크로스솔져가 포함되지 않은 팀이었다. 즉 신앙 양심의 내면적 제어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신속하게 리더의 뜻을 수행했다. 그래프 가상공간을 날아다니며 깎을 부분을 깎고 올릴 부분을 올리며 조각을 하였다.

   그 반작용으로 차원 내에서 대대적인 지각 변동이 벌어졌다. 본디 그래프 차원 전체는 하나로 연속체였기에 한 부분이 변화를 겪으면 나머지 부분도 상응하는 변화를 겪게 되어있던 것이다.

   그러자 다른 팀의 보조인원들은 일제히 환각을 보았다. 통일시스템이 시각화하여 보여준 환상이었다. 그것은 조금 전 한 팀의 선택으로 인해 그래프가 영향을 받음으로써 도출된 결과물로 인해 지구인들에게 어떤 실질적인 손실이 생겼으며 그것에 대해 당사자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나타낸 정보였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무심코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들은 현실적인 손실과 직면했다. 누군가는 절망하고 누군가는 환호했다. 누군가는 무너진 타민족을 보고 동정심을 느꼈고 반대로 어떤 이는 고소해했다.

   이런 추악한 감정의 파노라마가 후보자들과 보조인원의 뇌리에 생생히 전달되었다. 사람은 감정에 취약한 동물이라고 했던가. 보조인원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그래프상에서 자신이 대기하고 있는 좌표에 명운이 엮여 있는 민족에게 연민을 느꼈다. 반대로 그 민족의 권리를 박탈하려고 움직이는 자들에게 적개심을 품었다. 이것은 정상적인 감정이라기보다는 통일시스템의 꼭두각시 놀음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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