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529회 아벨의 후예 Ch 27. 반셈족주의의 종말 (4)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10.11 | 회차평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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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아수라는 실제 싸움으로 이어졌다. 침묵을 깨고 처음 움직였던 팀의 보조인원들은 간접적 분노 전이로 인해 격동된 다른 팀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인류연합의 예상대로 순식간에 불화의 불씨가 번지고 말았다.
크로스솔져들은 난처해했다. 그들은 싸움에 휘말리기를 원치 않았다. 예전에 신수들을 사냥할 때도 죄책감을 느꼈던 그들이었다. 상대가 인간이라면 더더욱 경솔히 싸울 수 없었다. 비록 절대 보호의 슈트 때문에 다치지 않는 줄은 알지만 그럼에도 무력이라는 수단은 그 자체로 꺼려졌다. 자신들의 정체성이 전사라는 사실이 지금처럼 이토록 원망스러운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원하건 원치 않건 한번 던져진 불씨는 무한히 확산되었다. 이제 후보자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인류 재판에 뛰어들었다. 누군가는 방금 전 벌어진 개입을 무마시키겠다는 핑계로 움직였고, 다른 누군가는 새로 나온 의견들에 반대하는 의견으로 움직였다.
이성적인 판단으로 행동한 이도 있었고 단순히 격한 감정에 북받쳐 움직인 자도 있었다. 어떤 이는 보편적 도덕 잣대를 들이대며 자의적으로 판단을 하기도 했고 다른 이는 나름 신앙적인 변증을 시도하기도 했다.
저마다 판단 내리는 기준도 내용이 다양했다. 누구는 사랑을, 다른 이는 정의를 기준 삼았다. 정의를 판단하는 기준이 저마다 달랐다. 얼마나 우상숭배를 자행해왔느냐, 얼마나 생명 윤리를 하찮게 여겼느냐, 얼마나 세속화되었느냐, 얼마나 성적으로 타락했는가, 얼마나 은혜를 거절하고 복음을 배척했는가, 얼마나 기존 신앙을 저버리고 타락했는가 등. 기독교인이 세상을 판단할 때 사용되는 모든 기준이 모조리 튀어나왔다. 상상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포함한 채로.
한 번 신을 대신해 심판자의 자리에 앉는 순간, 인간의 교만은 선을 넘는 법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판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치사하고 야박한 존재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들은 자신도 죄인임을 잊은 채 민족들을 자기 잣대로 도마 위에 얹되 충동적인 판단도 서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단편적인 사건마저도 정죄 기준이 되었다.
이 민족은 역사적으로 이러이러한 원죄를 저질렀으니 하대 받아 마땅해.
이 민족은 아직 과거에 저지른 크나큰 죄를 회개하지 않았어.
이 집단은 인종차별적인 성향이 강해.
이 국가는 제국주의적 행위에 너무 많이 얽혀있어.
뭐 이런 식으로.
불행히도 후보자들이 간과한 사실이 몇 가지 있었다.
첫 번째, 판단의 주체인 자신들 역시 불완전한 감정과 지식과 의지에 의존하는, 일개 죄악된 인간이기에 객관적이고 공평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점. 두 번째, 조상들이 저지른 죄를 후손 차원으로 섣불리 가져오는 연좌제의 오류를 범했다는 점. 세 번째, 지금 심판자 자리에 오른 후보자들 사이에서도 기준과 의견이 달라 얼마든지 내분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점. 그 내분은 충분히 지저분한 프로파간다 싸움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네 번째, 지금 그들이 제멋대로 내린 심판의 근거가 되는 기준이 상세하게 전 지구 원주민들에게 공개되고 있다는 점. 다섯 번째, 그로 인해 보조인원끼리도 싸움이 벌어졌고 지구 민족끼리의 불화로 일이 번졌다는 사실. 이런 심각성들을 인지했다면 그들은 중도에 자신들의 우매함에 브레이크를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황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았따.
‘모든 일이 마스터께서 계획하신 대로 흘러가는군.’
태양을 삼킨 늑대는 난리가 되어 돌아가는 상황을 관망하며 비웃었다. 지구는 그야말로 혼돈에 잠식되어 있었다. 민족들은 절망하거나 악다구니를 쓰거나 서로를 책망하거나 후보자들을 저주하고 있었다. 우주 인류는 어떻게든 더 기회가 나서 자신들이 이익을 누리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중이다.
이번 일이 다 마무리되면 그들 가운데는 패자만 남을 것이다. 최종 승리는 초인과 인류연합, 그리고 새로이 지구 시민이 될 선택받은 자들의 몫이 되리라.
“어리석군요. 경건하다고 자부하는 자들이라고 해도 본질은 다를 바가 없군요.”
태양을 삼킨 늑대는 자신과 대치 중인 레리엔에게 넌지시 떠 보듯 말했다.
“그렇게 보이긴 하군요. 허나 위대한 지성의 소유자를 자처하면서 상대적으로 지혜가 부족한 자들을 곤경에 몰아넣는 당신들의 방식은 어떤가요? 과연 이 사람들이 당신들의 그 교묘한 술책에서 벗어날 도리가 있었을까요? 난 당신들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하, 어설픈 시비로군요. 무슨 상관입니까. 어차피 지구 인류는 곧 뿔뿔이 흩어질 것을. 현 인류의 절대다수는 우주 인류입니다. 그리고 곧 체계는 새로이 개편될 겁니다. 소수에 불과한 원주민들이 불만을 품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조금 전까지는 레리엔이 나름대로 변증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녀의 탁월한 지혜와 슬기로운 활약에 적잖은 지구 원주민들이 관망 중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그것은 무의미했다. 변증도, 콘테스트도, 최종결론은 어차피 정해진 각본대로 흘러가리라.
레리엔 자신도 자신이라는 작은 존재의 개입이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것임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저 기세등등하게 설치는 인류연합의 비열한 꼴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개입했을 뿐이었다.
한편, 이제 원주민들은 세 곳에서 전개되는 대결 상황을 생중계 텔레파시로 전달받았다. 하나는 레리엔과 초인의 토론, 다른 하나는 이레귤러 후보자들이 도덕 혹은 신의 말씀을 근거 삼아 민족들에게 심판을 선언하는 현장, 마지막 하나는 그래프로 만들어진 가상공간에서 벌어지는 난투극이었다.
그 중 하나에서 나오는 정보 량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인데 세 상황이 한꺼번에 펼쳐지자 제정신을 차릴 턱이 없었다. 그럼에도 원주민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저 세 곳의 상황이 모두 자신들이 어떤 장래 처우를 받게 될지, 그 운명과 직결되어 있었기에.
*
싸움은 점점 더 격해져 갔다. 이제 후보자들 대다수는 고상함을 잃어버렸다. 한번 금지된 판단을 시작해버린 순간 이미 추락은 예정되어 있었다. 종국에는 바닥까지 떨어질 것은 자명했고 그것은 금세 현실화되었다.
프로파간다 전쟁, 다른 후보자나 특정 민족을 향해 정죄와 비난을 칼날을 세우기, 상대의 판단이 그릇되었다고 주장하며 신과 윤리를 명목으로 논쟁하기, 지저분한 방식의 투쟁을 합리화시키기까지, 악마가 본다면 쾌감에 절로 어깨춤이라도 출만한 어리석은 상황이 단 몇 시간 만에 나타났다.
<<한심하구나! 이게 너희 본색이야. 성도는 무슨 성도? 쓰레기들 같으니.>>
물론 이렇게 하도록 부추긴 자들의 책임은 분명 더 크긴 하리라. 그 배후에 있는 세상의 영들은 말할 것도 없고. 허나 이제는 자칭 타칭 신앙인들마저도 이 더러운 진흙탕에 대한 책임에서 발뺌하지 못하게 되었다. 어쩌면 누군가는 진정한 신앙인이고 누군가는 거짓이리라. 이는 신께서 판단하실 일이겠지만, 어쨌건 결과적으로 참된 자건 거짓된 자건 다 같이 수치스러운 허물을 덮어쓰고 말았다.
천만다행으로 스테판은 아직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았다. 굳건히 주님을 붙잡으려는 의지 덕이었다. 그 역시도 불완전하고 약했다. 그는 비열한 논쟁과 투쟁의 파도 속에 당장에라도 떨어질까 봐 두려워하고 전전긍긍하였다. 그는 자신의 불완전함과 죄악된 본성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구출을 구하였다.
‘하나님, 나는 세상의 죄악으로부터, 또 나 자신의 이기심으로부터 나를 온전히 보호하지 못합니다. 타인의 티끌을 판단하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판단이 솟구치는 죄인입니다. 이 불쌍한 나와 눈앞의 동료들을 용서하여주시옵소서.’
그라고 해서 현실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그 역시 한 시간에 한 번씩은 불가피하게 그래프에 개입을 해야 했다. 그 순간 책임에 종속될 것을 그는 잘 알았다. 그러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행동해야 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최대한 중립적으로, 최대한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자신의 이기심을 배제하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책임으로 더럽혀진 사실을 감히 외면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자신의 도마 위에 오른 민족들에게 사죄하였다. 불완전한 자기 모습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스테판은 스물네 명의 크로스솔져들에게 부탁했다. 팀원끼리의 분열을 피해달라. 되도록이면 다른 팀의 보조인원과 무력으로 충돌하지 말아라. 적당히 구색만 맞추다가 양보해주어라. 절대로 통일시스템이 주는 거짓된 감정에 현혹되지 말아라. 심지어 스테판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좋다고 당부했다.
그 신실한 태도에 그를 따르던 크로스솔져들은 큰 도전으로 가슴이 무거워졌다. 전체 후보자 111명 중 최소 절반 이상이 혼돈의 아귀에 휘말렸는데도 스테판은 겸손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큰 귀감이 되었다. 케리를 비롯한 온건파들은 저도 모르게 스테판에게 기대감을 품었다. 저 겸허함이라면 변화를 낳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난리 북새통 가운데서도 어렴풋이 희망이 솟아났다.
그런 희망과 별개로 후보자들간의 대결은 점점 격렬해질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경합 이면에 숨어있는 또 하나의 규칙을 파악했다. 후보자들이 현재 보조인원들을 동원하여 벌이는 대리전 대결이 실질적인 경기 점수로 환산되어 경합에 반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공정한 판단을 내렸는가. 그 판단을 굳은 결의와 행동력을 바탕으로 얼마나 과감하게 실행시켰는가. 지구 원주민들로부터 어떤 감정 반응을 끌어냈는가. 보조인원을 얼마나 현명히 통솔했는가. 경합에서 얼마나 많은 승리를 따냈는지. 이 모든 요소가 복잡한 방정식을 거쳐 최종 점수 속에 반영되는 중이었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점이 있었다. 이번 경합에서는 후보들 가운데 일흔 명만 남는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을 상기하자 프락치들을 동원한 대리전을 대강 대강 벌일 수도 없게 되었다. 그로 인해 싸움은 더 격화되었다.
“추락했군요. 이미 볼 장 다 본 듯 한데 말입니다.”
한창 토론을 즐기던 인류연합측 대사는 여유로이 한 눈을 팔며 레리엔에게 시비를 걸었다.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망발이신지?”
“저기 후보자들을 보세요. 이미 그 추악한 민낯이 드러났죠. 바닥까지 떨어졌습니다. 신을 믿는 자들이 신의 이름을 먹칠했어요. 사람들의 분노도 모조리 그쪽으로 집중된 것 같군요. 자업자득이에요. 자신보다 나을 것 없는 심판자들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이제 우리 변증 쪽은 아무도 관심을 안 두는 듯하군요.”
그의 말이 옳았다. 레리엔도 정황을 객관적으로 냉정히 판단하더니 현실에 수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어차피 애초에 잃을 것이 없었기에 의연했다. 애초에 그녀가 참여한 진정한 목표는 따로 있었으니 굳이 이렇게 상황이 흘러가도 상심할 것은 없었다. 후보자들의 모습이 조금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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