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536회 아벨의 후예 Ch 29. 이드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10.30 | 회차평점 0
|
(이전 회차에서 연속됨)
윤혁은 멜카드제윈의 회상을 듣고는 과연 피곤한 삶이라는 감상을 받았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그럼 지금도 형하고는 사이가 나쁘신 건가요?”
이에 멜카드제윈은 대답 대신 재치있게 되받아쳤다.
“글쎄다, 동생, 네 쪽은 어때?”
“저요? 제가 왜?”
“네 형은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대답하려고 해도 모호했다. 당장에라도 터질지 모르는 폭탄, 그것을 제어하는 안전핀. 비유하자면 형제는 그런 관계인데 이걸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될까. 윤혁과 재혁.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으나 서로에게 유대감을 품은 형제. 독특하고 기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형한테 많이 삐쳤나 봐? 하긴 녀석이 워낙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지.”
“많이 당해보셨나 봐요.”
“응, 사람을 가둬두고 옥죄는 스타일이지. 그래서 너무 답답한 나머지 아예 지구 밖으로 떠나기로 했지. 가까이서 보며 살기 피곤하잖아. 그런데 우주 요새로 가면 또 인류연합의 일에 부역해야 하지. 그리고 하늘도시는 타임필드 때문에 곤란하지. 억겁의 세월에 질식되긴 또 지겹다고. 그래서 그동안은 편히 쉴 곳이 없었어. 이제야 장소를 찾아서 좀 발 뻗고 지내려는데 마지막까지 종속당하니, 원.”
멜카드제윈은 그간 자신이 우주 곳곳을 누비며 겪었던 각종 모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아무래도 성녀 티아라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개인적인 친분을 근거로 카이젤의 허가를 받아 여기저기를 여행했던 모양이다. 도중에 식민지 주민들을 만나 이런 저런 인연도 맺었단다. 그도 나름 초인인지라 여러 능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바람에 주민들에게 신적 존재처럼 떠받들어지기도 했단다. 정작 본인은 그것을 싫어했지만.
“제일 자주 불렸던 별명이 드래곤 로드였거든.”
“용족을 제어하는 능력 때문인가요?”
루디아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질문했다.
“응, 사실 그것 말고도 나한테는 비슷한 계열의 재능이 여럿 있어. 최상위 초인 급은 되어야 가질 수 있는 카리스마타처럼 고유화된 특수 재능은 아니야. 그래도 나름 쓸만은 하지. 특히 초능력이 개발된 이후로는 재능과 초능력이 어우리지면서 훨씬 더 범용성이 넓어졌지.”
멜카드제윈는 보따리장수마냥 진기한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놓았다. 모험담이라기보다는 거의 전설이나 동화에 가까웠다. 보통 사람이 들었다면 허풍이나 판타지 소설 취급했겠지만, 이미 하늘도시들을 돌아다니며 갖가지 기이한 경험을 다 겪어온 윤혁과 루디아는 그 이야기들이 모두 실화임을 어렵지 않게 믿을 수 있었다.
그중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어느 중세풍 문명이 세팅된 하늘도시에서 멜카드제윈이 겪은 일화였다. 아직 전면개방 이전의 이야기다. 그곳에서 그는 어느 한 이종족 계열 능력을 획득한 여인과 그곳 대륙의 토착 문명의 한 황태자를 만났다. 두 사람은 멜카드제윈에게 여러 지식을 전수받았다. 그 후 둘은 대륙을 거닐며 모험과 과업을 무사히 성취하였고 끝내 주민들에게 인정받는 영웅 반열에 올랐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여인과 황태자는 결혼하였는데 황위에 오르기도 전에 갑자기 초인으로 최종 각성하는 바람에 인류연합 측에 발견되어 차출되었다. 결국 하늘도시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어찌 보면 대단히 엉뚱한 결말로 마무리된 에피소드였다.
“아마 나부터가 카이의 영향을 받아 각성한 케이스라서 그런지,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한테도 후천 각성을 유발하는 촉매 능력이 있는 것으로 보여. 잠재력이 높은, 그러니까 높은 클래스가 될 가능성이 큰 후보자들에 한해서 말야. 물론 복권 당첨만큼이나 낮은 확률이라 내 능력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말이야.”
초인 각성의 유발이 전이되는 특성인 것일까.
“행성혼을 지구혼처럼 바꾸는 것도 그렇고, 특이한 형질이네요.”
왜 카이젤이 멜카드제윈을 쉬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지 알 법도 싶었다.
“사실 행성혼을 바꾸는 건 내 능력은 아니야. 나는 촉매제에 불과하거든.”
“그래도 희귀한 인재인 것은 사실이잖아요.”
“이용당하기에는 딱 좋은 능력이지.”
실제로 멜카드제윈은 드래곤 로드로 불리던 그 시절, 이야깃속의 그 황태자와 그 연인을 A 클래스 초인으로 각성시키는 데 도움을 준 건을 계기로 눈에 띄어 카이젤에게 노동 착취를 당했다. 철인왕마저 쉬이 들락날락하지 못하는 하늘도시를 마음대로 넘나드는 프리패스를 받은 이유도 그러한 특이 형질 때문이었다.
더욱이 멜카드제윈의 유용성은 초인 후보자를 각성시키는 일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때때로 하늘도시와 제로원의 공명률을 높임으로써 해당 하늘도시가 지구혼의 속성을 좀 더 잘 얻도록 도와주는 작용을 하기도 했다. 카이젤은 이를 눈여겨보았고 결국 제 어린 시절 과외 선생을 행성혼 변화 프로젝트에 합류시켰다.
“지구에 돌아가거든 네 형 좀 잘 설득해줘. 이젠 날 좀 놓아달라고.”
멜카드제윈은 장난스레 윤혁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며 부탁했다.
“뭐, 말을 들으실지는 모르겠지만, 고려는 해볼게요.”
잡담을 나누던 중, 겔다가 간식거리를 들고 왔다. 그녀는 멜카드제윈의 이마에 가볍게 꿀밤을 놓았다. 그러자 그는 다 죽어가는 시늉을 하며 투덜거렸다.
“야, 아프다고. 너 언제 이렇게 힘이 세졌냐? 신체가 바뀌어서 그런가?”
“꾀병 부리지 마세요. S 클래스 초인의 초능력이면 하품만으로도 운석 세례를 가볍게 막아낸다는 건 알고 있거든요. 그리고 도련님한테 이상한 바람 불어넣지 마세요.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잔꾀는 밝으시네요.”
겔다의 구박에 멜카드제윈은 장난스레 힝 하고 가짜로 우는 소리를 내며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윤혁과 루디아는 그 모습이 신기하다고 느꼈다. 늦은 나이에 초인으로 각성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멜카드제윈은 다른 초인과는 사뭇 성격이 달라 보였다. 좋은 말로 하면 때가 덜 묻었고 나쁘게 표현하면 정신연령이 초인치고는 어려 보였다.
겔다와 멜카드제윈은 어린 시절부터 고난을 함께 짊어진 동지 사이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사이가 제법 괜찮아 보였다. 말장난도 툭툭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을 보아하니 마치 친오빠와 여동생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행성 방문 이틀째 되는 날 내내, 윤혁과 루디아는 멜카드제윈의 자택에 머물렀다. 계속 머무르기만 하기에 심심했는지 그는 손님들을 데리고 관광이랍시고는 근방 대륙들을 보여주었다. 사실 대륙이라고는 해도 초능력을 활용해 공중을 날아다녔기에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아 행성의 주요 관광 명소들을 순식간에 전부 다 둘러볼 수 있었다.
멜카드제윈은 윤혁과 루디아에게 해당 현지에서 처음 보는 동물들의 생태를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고고학책에서 본 고대 생물 생태학과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었다. 흡사 살아 숨쉬는 지구 역사박물관에 온 기분이었다. 특별히 공룡 같이 경이로운 거대 생명체를 생생히 볼 때면 저절로 신비감이 들었다. 인위적인 느낌의 강력한 지적 인공생명체를 마주했을 때와는 또다른 경외감이었다.
현장 학습을 마친 일행은 멜카드제윈의 저택에 다시 돌아와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저녁 식사를 나누었다. 간만에 윤혁은 혹독한 시련의 모험에 대한 부담감을 내려놓고 몸과 마음을 재충전할 기회를 만끽하였다.
*
데미안의 아바타는 Planet-1,556,987의 위성 궤도 쪽에서 이면 차원에 숨어 좌표를 고정한 채 외곽을 감시하였다. 아바타의 몸체에는 강력한 무기와 권능이 심겨있었기에 용족은 접근도 하지 못한 채 지레 겁을 집어먹고 물러났다. 셀레스티언 이상의 강력한 갤럭시 클래스 바이오스피어라 해도 이제 고도로 발달한 고차원적 초능력으로 무장한 초인에게는 난공불락이 아니게 되었다.
물론 정말 단순히 물리력으로만 붙는다면 수적으로나 체급으로나 상식 밖의 우위에 있는 용족이 더 강하겠지만, 데미안의 아바타는 인류연합 수장이 하사해준 권위를 소유하고 있었다. 빌린 권한에 불과하다지만, 이 권위를 계엄 레벨까지 발동하면 근방의 물리법칙마저 대거 개변하는 일마저 가능했다. 수만 마리의 용족은 어슬렁거리기만 할 뿐 섣불리 행성에 접근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데미안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용족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훨씬 위협적이고 성가신 상대가 접근해오는 것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행성에 멜카드제윈과 더불어 감시 대상인 강윤혁, 루디아가 거주하고 있기에 그 골치 아픈 상대가 지금 시점에 다가오면 일이 복잡해진 것이다.
데미안은 비상 권한을 발동할지 말지 고민했다. 가뜩이나 접근자는 자신보다 높은 클래스의 초인이라 상대하기 어려운데 이래도 되는 걸까.
이윽고 걱정했던 대로 공간 이면이 두 겹의 종이가 분리되듯 분리되었다. 상위 차원의 공간을 가로질러 어떤 존재가 날아왔다. 이 근방의 항성계들을 감시하는 관리자였다. 그는 강윤혁의 낌새와 존재감을 냄새 맡더니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비켜라, 비서관.”
관리자가 강압적으로 명령했다.
“무슨 목적으로 오셨습니까?”
계급 차이에도 불구하고 왕의 권위를 빌려 받은 데미안은 당당히 막아 세웠다.
“건방진 것, 네가 감히 알 바 아니다.”
그 존재는 아름답게 형광을 발하는 젤리 덩어리 같은 물체였다. 그는 데미안의 아바타를 아무렇지도 않게 협박했다. 그러나 맡은 바가 있기에 데미안도 물러서지 않았다.
“순순히 비켜드릴 수는 없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저보고 강윤혁님의 안위를 책임지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당신들이 내릴 시험이 합법적이고 합당한 내용이 아니면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목적을 명확히 밝히시죠.”
“파파와 우리의 비밀에 속하는 영역이라 네게는 관여할 몫이 없다.”
“그렇다면 저도 대표님의 권위를 빌리겠습니다.”
금세라도 싸움이 벌어질 기세였다. 그제야 싸움 중재자가 개입했다.
{데미안 비서관, 아크삼형제의 분신체더러 행성으로 진입하도록 그냥 보내주십시오. 위버멘쉬께서 시험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내려질 시험 내용은 비공개이기에 비서관이 개입해서는 안 됩니다.}
통일시스템이 카이젤의 명령을 전했다.
“하지만 아시잖습니까? 저 행성에는 강윤혁님뿐 아니라…….”
{멜카드제윈 테일란드, 그자도 이번 시험에 필요한 재료 중 하나입니다. 이것 역시 모두 위버멘쉬께서 고려하시고 계산하여서 내린 결정이니 두 번 다시 반문하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데미안의 아바타는 얌전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진작 그렇게 할 것이지, 하찮은 상위 초인 주제에.”
젤리 덩어리는 ‘위상 공간의 벽’을 뛰어넘어 곧바로 통상 공간으로 진입했다.
“재미있는 시간이 되겠군. 연구도 해볼 겸.”
정작 공격의 대상이 된 인간은 아무것도 모른 채 무방비하게 있었다.
(다음 회차에 계속)
|
이전회
535회 아벨의 후예 Ch 29. 이드 (1) |
다음회
537회 아벨의 후예 Ch 29. 이드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