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548회 아벨의 후예 Ch 32. 안내자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11.26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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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2. Intergalactic : 골룸의 안내
한동안 윤혁은 부끄러움과 쑥스러움 때문에 루디아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그 심정을 이해한 루디아도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면 그가 무안해하지 않도록 일부러 자리를 비켜주었다.
솔직히 말하면 루디아도 그날의 일을 생각하면 평정심을 지키기 어려웠다. 좋아하는 남자가 웬 정신 나간 괴한에게 수치스러운 일을 당했는데 어찌 괜찮겠는가. 그 젤리 덩어리, 정체가 인공지능인지 인간인지 아니면 그 언저리인지는 모르겠으나 존재 자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너무도 불쾌했다.
하지만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말씀(엡 4:26)을 기억한 루디아는 곧 감정을 추슬렀다. 아무리 의로운 분노라고 해도 통제에서 벗어나면 넘어짐의 올무가 되기 십상이니까. 윤혁은 앞으로 자신이 보호해주면 된다.
정작 그보다 더 곤란한 문제는 낯부끄러운 기억을 얻은 점이었다. 비록 의도치 않은 사태였고 침략자의 잘못이라지만, 하필이면 윤혁의 그렇고 그런 상태를 마주해버렸으니까.
한편, 윤혁은 또 다른 골칫거리로 머리가 아팠다. 초인의 리비도가 좀처럼 통제 불능이 된 것이다. 사랑을 통해 욕망을 다스리는 방법의 실마리를 잡았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생리적 성욕이 거세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는 단순한 일반인의 리비도나 약물을 통한 일시적인 생리 반응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고통이었다. 초인의 리비도는 단순히 초인 개체가 소유한 생물학적 신체 반응 그 이상의 어떤 고유한 실체였다. 그것은 오로지 초인에게만 유익이 되는 힘. 그것은 초인으로 하여금 강렬한 욕망을 발생시켜 궁극적인 진보와 성장으로 환원케 하는 일종의 ‘승화’ 촉진제였다. 일반인이 그런 과분한 것을 품으면 해소할 수 없는 괴로움을 얻는다.
어린 시절의 윤혁은 다행히 이차 성징이 나타나기 이전에 하나님을 만났고 그분과의 영적 교제를 시작했고 덕분에 청소년기의 정욕을 다스리는 법도 배울 수 있었다. 그 덕에 초인의 리비도도 폭발하지 않고 어느 정도는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했었다. 보통 사람의 몇 배 이상으로 신체가 왕성했긴 했으나 그것이 잘못 사용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 아슬아슬한 경계를 부수는 기폭제였다. 가까스로 넘치지 않은 채 펄펄 끓는 잔잔한 기름 솥에 물 한 방울이 튀자 냄비가 넘치며 사방으로 기름이 폭발하여 발산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이드가 열어 젖힌 판도라의 상자, 곧 육체해방(肉體解放) 술식은 윤혁을 큰 곤경에 몰아넣었다.
그 후유증은 수개월 이상 지속되었다. 안정되기까지 윤혁에 몸에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고통스러운 반응이 파도처럼 몰려옴에 고역을 겪었다. 심지어 실험 받는 중에도 내내 몸이 제어불능이 되었다.
알트루즘으로 인한 희생적 흡수의 고통을 받아들이면 욕구가 사그라들까 하는 희망도 품어 보았다. 그 생각에 평소의 몇 배 이상의 분량만큼 짐을 받아들였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초인의 리비도는 그런 식으로 상쇄할 수 없었다.
몇 달 후, 실험 데이터를 체크하던 태헌은 후배의 신체 상태가 지속적으로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인 것을 알아차리고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괜찮니? 꽤 많은 일수가 지났는데도 전혀 진정되지를 않네.”
“아, 아직은 견딜만해요.”
“그 행성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를 모르니 원.”
태헌은 찬찬히 데이터를 살폈다.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의 작동 패턴이 확연히 달라졌어.’
병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다만 마치 화학 분자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의지를 갖고 행동하는 듯한 양상이 보였다. 혈중 호르몬 수치는 모두 정상인데 수용체들과 리간드들의 상호 작용 경향성이 달라졌다. 신기하게도 똑같은 수용체 분자도 신체의 어느 장기에 존재하느냐에 따라 효현제(agonist)와 길항제(antagonist)에 대한 친화도가 각기 달랐다. 마치 유기물에 불과한 분자들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자유의지라도 얻어 선택적 선별을 하기라도 하는 것 같달까.
인체를 단순히 물리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무작위적인 분자들의 움직임의 연합으로 이해하는 관점에서는 설명하지 못할 현상이었다. 입자 하나하나에 영혼이 주입된 것 같은 현상. 혹시 인간의 비물질적 부분인 혼이 직접 작동하는 것인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도 들었다.
현대 의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이 현상에 태헌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 몸이 망가지거나 한 것은 아니죠?”
“그래, 너 아주 건강하다. 걱정하지 마. 그나저나 너 진짜 힘든 것 같은데 차라리 내가 자리라도 피해 줄까? 곤욕스러워 보이거든.”
윤혁은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태헌은 진지했다.
“농담하는 거 아니야.”
“아, 괜찮아요. 참을게요. 이러다 보면 가라앉겠죠.”
태헌은 한숨을 내쉬었다. 윤혁은 한숨과 심호흡을 거칠게 반복했다.
“하여간 너는 참 신기한 녀석이야. 학창 시절부터 다른 친구들과는 확연히 다르다고 느끼긴 했거든. 그런데 이번 여행을 함께하면서부터 느낀 건데……, 늘 친근하게 다가오던 너에게서 조금 다른 인상을 받았지.”
정직한 표현으로 말하자면 그 감정의 정체는 경외감이었다. 태헌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를 알았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소년이었던 윤혁.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에게서는 색다른 기색이 감지되고는 했다.
윤혁의 삶에는 무의식적으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이 묻어 있었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특출한 힘이나 뛰어난 지혜도 없으나, 뭔가 보이지 않는 위대한 힘이 정체불명의 매력으로 이끄는 듯했다. 인간 스스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불굴의 강한 의지, 스스로를 내어주는 마음, 자신의 욕망에 고분고분 항복하지 않는 고결한 생각까지. 그것은 마치 인간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기원한 고귀함 같았다.
‘정말 신께서 살아계셔서 저 친구와 함께하시기라도 하는 걸까?’
선교사로서의 윤혁이 지켜온 가치, 태헌은 그것을 단순한 인간적인 도덕관념이나 철학 정도로만 치부했었다. 그러나 윤혁이 손수 자신이 전한 진리를 삶에서 실천하는 모습을 보니 생각이 서서히 바뀌었다. 더는 형이상학적인 메시지가 아닌 모종의 만져지는 실체가 어렴풋이 느껴진달까.
*
그렇게 며칠이 하염없이 흘렀다.
“심심한데 책이라도 같이 읽을래요?”
“그러자.”
사흘씩이나 지속되는 지루한 치료 도중에 심심함을 느낀 두 사람은 시간을 태울 겸 독서를 시작했다. 사실 둘이 고등학교 때 만났던 계기도 문학 동아리에서의 만남이었다. 태헌과 윤혁은 성향 자체는 이공계 인재였으나 이런 쪽에도 소양이 있었다. 그들은 시대를 관통하는 여러 문학 장르에 관심이 풍부했다.
윤혁은 인체 실험용 캡슐 안에서 액체에 잠긴 채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홀로그램 영상으로 책을 읽었고 태헌은 평소 취향대로 아날로그적인 낭만을 느끼기 위해 낡고 평범한 종이책을 펼쳐 읽었다.
한창 정적이 지속되던 와중에.
“저기요, 태헌이 형.”
“왜?”
“그게 말이죠, 조금은 민망한 질문인데요.”
윤혁은 독서 중 문득 이드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제 신체 조직 중에……, 제 유전자와 다른 유전자를 지닌 부분이 있던가요?”
느긋하게 독서하던 태헌이 별안간 책을 덮으며 표정을 뻣뻣하게 굳혔다.
“역시 뭔가 아시는 게 있는 거죠? 저한테 말해주세요.”
“이런, 너도 이제 알아차렸구나. 하긴 이런 저런 일들을 겪었으니.”
사실 되도록 본인 앞에서 발설하지 말라는 지침을 받았기에 태헌은 잠시 이래도 될지 망설였다. 하지만 당사자가 이미 알아차려 버렸으니 억지로 숨겨도 별 의미는 없으리라고 생각되었다. 엄금된 비밀도 아니고.
“윤혁아, 음, 놀라지는 말아라.”
마른침을 꿀꺽 넘기며 윤혁이 태헌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네 말이 맞아. 계측 장비로 점검한 결과, 네 생식기관 전체는 네 게놈과는 다른, 완전히 다른 유전 정보를 담고 있어. 세포 하나하나가 전부 다 말이지.
다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다른 유전 정보’가 계측 장보에 읽히지 않고 있어. 염기 서열 분석이 불가능해. 마치 절대 금기의 보안키라도 걸려있는 것처럼 컴퓨터와 의료 기기가 해당 유전 정보를 읽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어. 심지어 샘플의 저장마저도 시스템이 강제적으로 거부하는 중이야.”
심증이 확고히 굳어졌다.
‘통일시스템의 간섭인가?’
이유 막론하고 절대적으로 보호되는 정보라면 그 근원은 뻔하다. 믿기 힘들었던 이드의 증언이 강력한 근거로 뒷받침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제 생식기관이라면 어디까지를 포함이죠?”
대답이 돌아오기 전 윤혁은 긴장감과 불안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모든 부위, 전부 다.”
“그, 그렇다면!”
“볼피안(Wolffian) 계열 발생 장기들, 외생식기와 정관, 부고환, 정낭, 전립샘까지, 그리고 당연히 정소(精巢)도 포함이야. 말하자면 정자 세포 역시 해당되지.”
윤혁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외생식기 이야기는 잠시 못 들은 말로 치더라도, 정소, 즉 씨는 대충 넘어갈 사안이 아니지 않은가. 그 말인즉 자신은 자녀를 낳아도 유전적으로는 자녀와 연결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윤혁이 아이를 낳으면 그는 사실상 유전적으로는 재혁의 자녀가 된다.
“말도 안 돼.”
“신기하게도 네 몸과 네게 심겨진 그 신체 조직은 현 의학 기술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융합되어 있어. 면역계의 충돌도 전혀 없고 마치 태어날 때부터 한 몸이었던 것마냥 생리적인 질서도 매우 균형이 잡혔어. 우리 시대의 이식 기술은 상당히 경이로운 수준이지만, 이건 그런 경지가 아니야. 흡사.”
태헌은 이런 표현을 빌려도 될까 싶어 잠깐 망설였다.
“태초에 신이 남성의 갈빗대를 뽑아서 태초의 여성을 만들었다고 말했던가. 마치 그에 버금가는 수준의 간섭이 아닐까 하는 정도야. 흡사 초자연적 영역이랄까.”
“허어, 그렇군요.”
이드의 말이 사실이었다. 윤혁은 난처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왜 하필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그리고 왜 이런 고초가 허락되었을까. 사람을 곤경과 혼란에 몰아넣는 이런 힘, 차라리 원래 주인에게 돌아간다면 좋았으련만.
‘그랬으면 형도 좌절할 필요 없고 나도 정욕으로 고통받을 일이 없을 텐데.’
샴쌍둥이와도 같은 기묘 현상. 그 탓에 형은 마땅히 소유했어야 할 힘을 잃어 상실감과 좌절감으로 무너졌다. 동생 쪽은 제어하지도 못할 거대한 에너지원을 짊어진 채 곤욕에 처했다. 지금이라도 교정이 불가능할까? 잠시 이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재혁도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겠지. 그런 그가 손을 쓰지 않았다.
‘너라도 건강해서 다행이라는 말이 이런 뜻이었나.’
(다음 회차에서 연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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