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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566회 아벨의 후예 Ch 36. 폰 (pawn) (3)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1.19 | 회차평점 0 0

 

 

 

 

 

 

*

 

 

 

 

 

   1차 경합이 끝난 후, 아홉 달 이상 휴식이 주어졌다. 하지만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었다. 스테판을 포함한 경합 후보자들은 죄책감에 잠겨 숙연하게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들을 위로해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이레귤러들을 가장 맹렬히 미워할 지구 원주민들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미 모두 떠났다. 1차 경합 완료 시점에 이미 99%가 축출되었고 나머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취를 감췄다. 떠나는 대가로 엄청난 규모의 경제적, 사회적 보상을 받았으니 마냥 쫓겨났다는 표현으로는 어색하겠지만.

   여하튼 원주민 중 남게 된 이는 10만 명의 지구 출신 초인, 그리고 그들이 직계 가족으로 인정하는 사람들뿐이었다. 물론 초인의 가족들은 해당 초인이 원하는 경우에만 남겨졌다. 사실 의절하거나 가족을 잃은 초인이 대다수였기에 가족 특혜에 해당 사항에 있는 이는 지극히 적었다. 이 중에는 성한의 식구, 마현의 식구, 그리고 천씨 집안 가족도 포함되었다.

   이레귤러들에게는 지구 위를 자유롭게 활보할 권한이 주어졌다. 하지만 이제 지구의 모습은 전과는 완전히 다른, 그야말로 신세계(新世界)가 되어버렸다. 옛 문명은 대체되었다. 남은 것은 우주 제일의 초고도 문명의 핵심부, 인류의 수도 행성뿐이었다.

   화려한 기술력의 산물들이 사방에 즐비해 있었다. 찬란하게 융성한 문명. 신기하게도 이런 인위적 문명이 자연환경과 더불어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다. 테라포밍 기술이 극에 달한 덕분에 자연을 복원하고 구축하는 기능도 극대화된 것이다.

   겉보기에는 그야말로 지상천국이었다. 하지만 이 땅의 새 주인이 된 ‘선택받은’ 우주 인류의 삶은 그리 즐겁지 않았다. 그들은 새 거주지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실력과 성과를 입증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밀려날 수 있으니까. 이런 긴장감이 쉼을 앗아갔다.

   이레귤러들은 1차 경합 때 우주 인류와 지구 원주민을 좌우에 두고 법적 권한을 재량하던 양팔 저울 노릇을 공개적으로 행했던 원죄가 있었다. 이들은 우주 인류에게서도 썩 좋은 시선을 받지 못했다.

   ‘모두가 우리 적이 되어버렸소. 새 주민들도, 옛 주민들도, 그리고 초인들도.’

   스테판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철저히 되짚어보았다. 그는 더 이상 넘어지기를 원치 않았다. 비록 궁극적인 책임은 없을지라도, 그때 일은 이레귤러 111명에게도 잘못이 없지 않았다. 스테판은 따가운 시선과 환영하지 않는 냉담한 표정을 견디며 새롭게 탄생한 지구 문명의 전 지역을 정처 없이 순회했다.

   마음이 지칠 때마다 그는 크로스솔져 동료들을 만나 고민을 털어놓았다. 크로스솔져들도 1차 경합으로 인한 적잖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무력에만 의존해 시련을 견뎌온 과거의 삶을 회한스럽게 바라보았다. 나름 좋은 기회에 주님을 만나 회심하면서 인격이 성숙했다고 자부했건만, 아직 그들의 삶에는 옛 흔적과 때가 많이 남아있었다. 좀 더 하늘 시민에 걸맞은 거룩한 모습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뼈아픈 훈련이 필요했다.

   성한은 자신이 마음으로 낳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 청년들을 열심히 위로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직 스테판 같은 후보자들은 성한과의 접촉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성한은 크로스솔져들의 입을 통해 경합에 대한 이모저모를 전달받았다. 크로스솔져들 사이의 분위기는 전보다 확연히 무거워졌다. 카이젤을 경계하던 강경파, 성한과 윤혁을 생각해 희망을 품었던 온건파, 두 분파가 대놓고 갈등하지는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속 장벽이 높아졌다. 곁에서 지켜보는 성한도 속상했다.

   이리저리 정처 없이 돌아다니던 스테판은 우연히 여섯 명의 후보자로 구성된 일행과 마주했다. 1차 경합 이후로 좋은 점이 생겼는데, 후보자와 보조인원들의 교류가 자유로워진 점이었다. 1차 이전에는 정보 보안 때문에 제약을 두었거늘, 왜 이제는 막지도 않을까? 2차 경합은 굳이 정보를 은폐하지 않아도 미리 대응할 방도가 전혀 없다는 뜻일까? 상상을 뛰어넘는 시험이 임할 것 같다.

   아니면 출제자의 의도 자체가 탈락하지 않은 후보자들로 하여금 서로 적극적으로 교류하게 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미리 서로 친분을 형성해야만 두 번째 경합이 효율적으로 작동하도록 설계된 걸까?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어쨌건 현재 이레귤러들끼리는 비슷한 처지였다. 외톨이가 된 지금 같은 입장의 동포들이 아니면 도와주거나 의지할 사람도 없었다.

   “오랜만이요.”

   “반갑습니다.”

   스테판은 자신에게 다가온 여섯 명 중 맨 앞에 있는 남자에게 악수를 청하였다.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호쾌하게 생긴 그 남자는 기쁘게 손을 받아주었다. 넘버 1이었다. 그는 얼굴에는 용기와 기품, 의로움과 고귀함이 깃들어있었다. 억지로 꾸며낸 가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순수하고 깨끗한 모습이었다.

   “경합 이후로 보는 건 처음이죠?”

   “그렇소.”

   넘버 1의 뒤편으로 넘버 37, 넘버 5, 넘버 103, 넘버 13, 넘버 19도 있었다. 여섯 명 모두 보조인원은 아무도 대동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은 간단히 강가에 자리를 펴고 앉아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터놓았다.

   먼저는 자기소개를 간단히 했다. 이후 이레귤러들은 자신들이 과거 하늘도시 안에서는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하데스 챔버에서 발생했던 대부흥, 곧 칼리드가 일으킨 그 사건의 파장 속에서 어떻게 복음을 듣게 되었고 회심했는지도. 그 이후에 외계행성 콜로니 안에서 몇백 년간 타임필드 속에서 살며 후손 세대를 보아 온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하기 그지없는 장황한 서사시였다. 각 사람의 서사시 중 많은 부분은 기억의 삭제로 인해 드문드문 지워진 필름처럼 끊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한 인생이 밟고 올라온 긴 여정이 풍성하게 녹아있었다.

   스테판도 회복된 기억을 하나씩 되짚어가며 정직하게 과거 이야기를 공유하였다. 윤혁 일행과 나누었던 소중한 추억의 시간들까지도.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놀라운 승리를 거둔 경험도 증언했다. 이레귤러들은 일제히 깊은 감명을 표하였다.

   스테판은 혹시 그들이 ‘그녀’에 대한 정보를 알까 하여 희미한 옛 단서들을 나누었다. 그들에게도 ‘그녀’에 대한 아주 어렴풋한 기억의 파편은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본질이나 정체에 대해서는 거의 알거나 기억하는 바가 없었다.

   정황상 아마도 그녀는 스테판 이전에도 110명의 이레귤러를 선택했던 것으로 보이고 그때마다 어떤 ‘개성’이나 ‘특별함’을 기준으로 삼았던 듯했다. 아무래도 일단 실험체로 삼아 누군가를 택해놓고 손을 본 뒤 자기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과감히 내다 버렸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중 그나마 당신이 많은 것을 선명히 기억하는 듯하군요, 넘버 111.”

   넘버 13이 호기심을 내비쳤다.

   “자자, 기억과 정체성은 차차 숙제로 찾아 나가도록 합시다.”

   “그래요. 당장은 앞으로 닥칠 사태에 대비하는 게 우선입니다.”

   넘버 5와 넘버 103이 현실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현실은 막막함뿐이었다. 1차 경합 때도 그들은 아무 정보도 없이 곤욕스러운 상황과 마주했다. 다음번은 경악스럽기로는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듯하다.

   더 두려운 것은 그들의 민낯과 약함이 낱낱이 만민 앞에 공개되는 상황이었다.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하며 죄에 넘어지기가 쉬운지, 세상 만방에 수치스럽게 나열되는 것이 이제 두려웠다. 혼자만 넘어지는 것으로 그치면 다행이지만, 그들의 실패가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리라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난 지난번 실패를 통해 많은 것을 돌아보았소. 처음에는 인류연합을 원망했었소.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건 내 비겁한 변명에 불과했소. 나도 그때 분명 내 자의적인 판단을 하려는 욕망에 휘말렸었소. 비록 의도치는 않았다 해도 말이오.”

   선과 악을 아는 열매를 먹은 이후 타락해 버린 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다. 스테판은 자신 본질상 역시 선악과를 섭취한 존재임을 깨닫고 한탄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선악을 분별하는 양심이라는 기준이 있다. 죄로 타락했다고 그러한 본성들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허나 진짜 문제는 내면의 선악 기준이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의적인 기준으로 바뀌었다는 데 있다. 1차 경합은 스테판에게는 인간 본연의 자만을 깨트리게끔 해준 기회가 되었다.

   “맞습니다. 저도 동일합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기준대로 모든 것을 판단해요. 제 생각만이 옳은 줄로만 착각하죠. 자신이 얼마나 비겁한 이중잣대에 깊이 물들어있는 줄은 정작 모른 채 스스로를 의인으로 여기죠. 바로 그 오만함 때문에 세상 전체가 죄와 타락으로 물든 것일 테죠…….” 

   넘버 1도 스테판의 의견에 깊이 동조했다. 자리에 모인 일곱 후보 모두가 깊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들도 결국 바리새인과 같았다. 자신의 의를 과대평가했고 멋대로 세운 기준으로 나 외의 모두를 재단했던 악인들. 정작 선악의 기준을 창조하신 절대자께서 성육신하여 이 세상에 오셨더니 또다시 멋대로 그분을 정죄하고 악인으로 정의했던 어리석은 인생들의 후손.

   부끄럽게도 동일한 죄가 그들에게도 있었다. 원죄를 안고 태어난 모든 인간의 모습은 바리새인들과 한치도 다르지 않았다. 주님께서 바리새인의 누룩을 경고하셨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깊이 한탄했다. 구원을 받고 은혜를 입었어도 그들 마음 가운데는 다시금 자신을 높이려는 끈질긴 본성이 남아있었다.

   “우리는 옛사람의 비참한 본성을 그저 감추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넘버 19가 말하자 스테판도 이에 동의했다.

   “그렇소. 인류연합이나 시스템을 마냥 저주할 입장이 아니오. 그들은 도리어 우리의 낯을 밝히 드러낸 도구, 곧 하나님의 막대기였을 뿐이오.

   그렇기에 나는 내가 죄인인 줄을 오늘도 다시금 고백하게 되오. 주님 없이 나는 위선자들보다 못한 자였소. 내 삶의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설정했다고 고백은 했으나 그 말씀에 대한 해석조차도 무심코 내 멋대로 하고 있었소.

   우리는 어리석은 자, 이 땅에 살 동안은 그 무례함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기는 어렵소. 매일 싸워나가며 벗어날 뿐.”

   죄와 허물을 내려놓고 자백하는 자리에서 모두는 정직히 숙연해졌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 주의 은혜가 더욱 절실하오. 단 한 순간도, 1분 1초조차도 그분의 은혜에 의존하여 유지되지 않는다면 나란 실체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소.”

   스테판은 자기 자신과 여섯 후보자들 모두의 어리석음을 하나님께 고백한 뒤 다시금 주님의 손을 붙잡는 심정으로 마음을 재정비했다. 그 자리에 있던 자들도 그 움직임에 동참했다. 그 내면의 고백이 얼마나 진실한지는 오직 주님께서만 아시겠지만, 어쨌건 최선은 다했다.

   “잘해봅시다.”

   “고맙소.”

   넘버 1은 스테판에게 마지막까지 후회 없이 달려보자며 용기를 북돋아 줬다.

   “내 이름은 데이빗입니다. 방랑하던 시절 잃어버렸던, 과거 주민 시절의 이름입니다.”

   넘버 1의 통성명에 스테판도 반응하였다.

   “고맙소. 내 이름은 스테판이오.”

   “훌륭한 이름이네요.”

   “당신도.”

   그 자리에 모인 일곱은 인류연합이 규정한 이레귤러 번호 대신, 자신을 정의하는 진짜 이름을 밝혔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동료들 모두가 같은 성령 안에 거하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비록 아직은 어떤 이가 참된 알곡이고 누가 거짓된 가라지인지 선명히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부디 이 자리에 있는 이들만이라도 한 영 안에서 연합되기를 바라는 바였다.

 

 

 

 

 

 

 

(다음 회차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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