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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569회 아벨의 후예 Ch 37. RS-월드 (2)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1.23 | 회차평점 0 0

 

 

 

 

 

 

(이전 회차에서 연속됨)

 

 

 

 

 

 

 

 

   같은 위기에 처해 있던 리빙스턴은 이윽고 당황했다. 자신의 의식 속에 갑자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가 침투하는 것이 아닌가. 상황을 올바르게 파악하지는 못했다만 닿는 느낌은 이러했다. 마치 소설 속 인물이었던 자신이 작품이라는 액자에서 빠져나와 진짜 현실, 곧 ‘리얼리티’의 차원으로 환원되어 나온 기분이었다.

   자신이 원래 머무르고 있던 차원, 즉 자신이 탈출한 소설 속 세계에는 자신의 의식의 일부였던 것이 잔재물처럼 남아 있었다. 자신과 연결된 일종의 분신체들, 비유하자면 소설 속에 투영된 작가를 상징하는 아바타(화신, 化身)들 같은 것들이었다. 상위계로 끌려 나온 자신에게 이제 자신의 의지를 투영할 꼭두각시들이 주어졌다.

   더 놀라운 점은 한꺼번에 많은 화신(化身)들을 일일이 조종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정신력이 강화되었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차원 격상으로 인한 본질 개화였다. 인지력이 강화되었고 그 여파로 수억 개의 하위계가 동시에 인식되었다.

   하위 차원에 속한 수많은 세계들에는 각각 자신의 화신이 수도 없이 배치되어 있었다. 물론 같이 대결 중인 폰도 화신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한편 하위계에는 폰과 자신 중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은 NPC(none player character)들도 즐비해 있었다. 말하자면 본체가 거하는 위치는 컴퓨터 방, 하위계는 게임 속 세계 같았다.

   친첸도르프도 똑같은 경험에 휘말렸다. 그의 상황은 더 첩첩산중이요 점입가경이었다. 그는 ‘리얼리티’를 넘어 리얼리티 위의 리얼리티로 끌려갔다. 숱하게 많은 액자 틀을 넘었다. 액자 속은 물론 액자 안에 비치된 더 작은 액자 속 세계들까지 인지력에 닿았다. 마치 현실과 꿈과 몽중몽을 한꺼번에 인식하는 기분이었다.

   폰과 친첸도르프의 개인 속성은 상위 위상으로 올라갈수록 더욱 첨예하게 공명하였다. 마치 물감이 섞여 개인과 개인을 나누는 격막이 사라진 듯했다. 피아의 구분이 거의 사라진 상태. 폰에게 고유 성질마저 빼앗기는 더러운 기분이었다.

   불링거는 이 상황을 침착하게 받아들이고자 애썼다. 하지만 상황은 악화되기만 했다. 뇌(腦)라는 빗장을 통해 잠가두었던 자물쇠가 풀리면서 정신과 혼이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인지 차원이 한도 끝도 없이 상향되자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했다. 자신과 외계를 나누는 경계선이 사라지자 더는 본 마음을 숨길 능력이 없어졌다.

   그는 끔찍한 체험에 던져졌다. 꿈에서 벗어나 더 높은 현실로 끌려가고, 거기서 다시 깨어나 현실보다 더 높은 현실로 이끌리기를 반복했다. 탑의 등반과도 비슷했다. 높은 층에서는 아래 차원의 세계들의 민낯이 낱낱이 인지되었다. 보통 위에서 아래로 내려갈 때 가지가 뻗어나가기에 위로 올라오니 감지되는 하계의 넓이가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었다. 마치 산에 올라오면 넓은 땅이 보이는 것처럼.

   밀려드는 압박감에 차라리 정신을 잃고 기절해 버리기를 바랐다. 그러나 정신세계의 거대한 잠재력이 봉인에서 풀리는 바람에 기대와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지옥에서는 죽거나 기절하고 싶어도 의식을 잃을 수 없다고 했던가. 섬뜩했다. 이대로 진행되다가는 자아를 상실할 것만 같았다.

 

   -{“자, 다들 즐겁게 한 번 놀아보자.”}

   이제 사실상 맞상대할 히어로들과 혼연일체가 된 폰들은 신(神) 놀이를 시작했다. 그들은 리얼리티 위에서 하부 세계들로 의지를 투사하였다. 이에 법칙이 뒤흔들리며 세계관이 개변하였다. 하계의 세계관 속에 히어로들의 기억, 폰들의 메모리에 담긴 여러 요소들이 투영되었다. 그 반사 작용으로 온갖 NPC, 기형 물리 법칙, 특수 능력의 질서가 세계관 속에 심겨졌다.

 

 

 

 

 

 

 

 

*

 

 

 

 

 

   본래 지금 지그문트와 샤오 윤윤은 같은 조가 아니었다. 최근 갑자기 파트너를 바꾸도록 상부에서 명령이 내려온 이유는 이번 경합의 내용과 관련이 깊었다. 2차 경합은 비단 이레귤러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레귤러들도, 히어로들도, 크로스솔져들도 기여하게 되겠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양념에 불과했다.

   이번 2차 경합 배후에 숨어있는 진정한 목적, 그 프로젝트는 오랫동안 모든 초인과 우주 인류가 갈망해 왔던 궁극 계획이었다. 모두가 꿈같은 이야기로만 치부했던 계획이건만 3대째 위버멘쉬는 마침내 그 일을 현실화하고야 말았다. 지그문트와 샤오는 그 놀라운 위업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곧 펼쳐질 인류 대약진에 차근차근 대비하였다.

   {코드네임 하사: 제페토(인형제작자)}

   {코드네임 하사: 퍼펫마스터(인형술사)}

   통일시스템이 지그문트와 샤오 각자에게 임시 코드네임을 하사했다. 이 코드네임들은 단순한 이명이 아닌, ‘근진계(根眞界)’ 내부에서의 실질적인 역할을 내포했다. 조만간 있을 대규모 프로젝트를 관리 감독할 권한과 직결된 권세였다. 주연 배우들을 효과적으로 다루기에 이 둘보다 적합한 자는 없었다.

   “대단하군. ‘네크로-슈퍼휴먼’을 이렇게 활용하실 줄이야.”

   “그러게. 어디로 발상이 튈지 예측이 안 선다니까.”

   제로원과 연결된 이곳 특수 공간, ‘관제탑’.

   흑발의 냉랭한 미남과 검붉은 머리의 고운 여성이 회의를 나누는 중이었다.

   지그문트는 과거 2세대 초인들을 징벌하고 그들의 존엄성을 부관참시했던 장본인이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카이젤이 ‘네크로-슈퍼휴먼’이라 불리는 일종의 인공 초인 카테고리의 발명품을 제작해내는데 기여를 하였다. 카이젤은 지그문트와의 협업으로 만들어낸 네크로-슈퍼휴먼들을 지속적으로 개량하여 점점 더 탁월한 존재로 탈바꿈시켰다. 심지어 그는 실제 인간을 모방하여 영-혼-육의 삼중 구조를 어느 정도는 모방해내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네크로-슈퍼휴먼의 육체에는 기계, 이종족, 인공발명품 등 현존하는 모든 종류의 하드웨어의 정수를 압축했다. 만물 변환이 가능한 재질도 담았다. 혼의 역할을 대체하기 위해서 크리슈나를 실험쥐 삼아 얻어낸 소프트웨어 데이터에 더해 에녹의 ‘엔젤시스템’의 업그레이드 버전도 융합시켰다.

   그리고 영의 역할을 대체하기 위해서도 모종의 발명품을 심었다.

   이렇게 완성체로 거듭난 네크로-슈퍼휴먼들은 원본 제작에 도움을 준 지그문트에게 다시 대여되었다. 이제 그의 역할은 이번 경합에 유용하게 쓰이도록 네크로-슈퍼휴먼들의 세부 기능을 점검하고 보완하여 보정하는 일이었다.

   한편, 샤오는 현 인류연합 고위 간부 중 유일한 2세대 초인 출신이자 3세대로 각성한 위인이었다. 그리고 인형왕이라는 이명으로 불릴 만큼 원격 조종술에 능숙했기에 2세대 초인을 기반으로 제작된 네크로-슈퍼휴먼을 조종할 인형술사로서 적격이었다. 참고로 그녀에게는 자신에게 조종당하는 인형에 유사 자아나 인간 고유의 특질을 심어 넣는 재능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샤오 윤윤이 다루는 인형은 보통의 뇌파 공명 기기들이나 분신과는 격 자체가 달랐다. 비록 네크로-슈퍼휴먼이 그 자체만으로도 2세대 초인급의 잠재력과 인류 문명의 산물 전부를 내포하고 있다지만, 활력 넘치는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는 샤오의 제어력이 필요했다.

   “이틀 뒤면 정말로 지구 위에 신세계가 펼쳐지겠군.”

   지그문트가 네크로-슈퍼휴먼들을 수리하며 중얼거렸다.

   “과연 그런 엄청난 규모를 행성이 감당할 수 있으려나?”

   샤오가 약간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염려를 내비쳤다.

   “지구혼은 다른 천체혼과 달리 성질이 특별하니까 문제없어.”

   “하긴. 빨리 지구혼을 양산할 수 있어야 RS-월드를 더 넓게 펼칠 텐데. 단 한 번, 그것도 작은 행성 위에서 전개하는 것만으로도 우주 인류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정도라면, 한꺼번에 넓게 전개할 때는 파급력이 어떠하려나?”

   “분명 이번 전개를 기점으로 전후의 우주 질서가 완전히 달라질 거다. 그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떠할지는 나로서는 감히 예측하기 어렵군.”

   아마 지금까지는 많아야 백 개 이하의 초능력 채널에만 특성화가 가능했던 초인들도 이번 ‘개변’ 이후로는 모든 채널의 동시 특성화가 가능해지리라.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또한 우주 인류 개개인의 능력과 정신력의 진보 속도도 급증할 것이다. 이런 혁명마저도 원래 목표로 한 개혁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겠지.

   개혁이 궁극적인 결말에까지 다다르면 선(善)이 될까, 아니면 예측지 못한 악이 될까. 최상위 초인의 지식으로도 이 질문에 정답을 내리긴 어려웠다.

 

 

 

 

 

 

 

 

*

 

 

 

 

 

   성한은 피곤한 눈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섬에 마련된 숙소는 쾌적하고 따뜻했으나 그럼에도 성한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다행히 옆에 누운 아내는 새근새근 편하게 자고 있었다. 전부터 느낀 것이지만 그녀는 남편보다 마음이 굳건했다. 아무리 험난한 상황이나 불길한 예견이 닥쳐도 밤에 기도 한 번만 드리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잠들 수 있는 강심장의 소유자였다.

   “나도 그럴 수만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중얼거리며 조용히 옷을 갈아입던 차에 소형 로봇 하나가 성한에게 다가왔다.

   {잠깐 주인님께서 강성한 씨를 찾으십니다.}

   “레리엔 씨가 나를?”

   {네, 내일 벌어질 일에 대해 공지할 겸 비공식 회담을 나눌 예정입니다. 특별히 강성한 씨도 참석하는 편이 좋을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음…….”

   {아내 분은 숙소에 머무르도록 귀띔해 두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이번 회의는 되도록 적은 인원만 참여하는 편이 낫습니다. 휘말려서 좋을 일이 없거든요.}

   성한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승낙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유진에게 알리기 위해 거실에 쪽지를 남겨두었다.

   ‘잠시만 기다려줘, 여보.’

   잠시 후 회의는 정원에 위치한 커다란 테라스 안에서 진행되었다. 자연 친화적인 풍경과 고풍스러운 건물이 어우러져 근사한 모습을 자아내었다. 자리에는 일흔 명 정도의 유대인 대표들이 있었고 아나스타샤도 그들과 같이 동석하였다. 로봇 두어 기가 레리엔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레우벤도 참석했는데 아무래도 유대인들과 레리엔의 의견 조율 때문인 듯했다.

   ‘중립지대로 대피한 지구인은 우리 식구뿐인가 보네.’

   어떤 이변이 생긴다는 것인지는 몰라도 아마 다른 초인의 가족들은 하늘도시 쪽으로 대피한 모양이었다.

   회의가 시작되자 레리엔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녀의 표정은 다소 진중했다.

   “내일 자정, 정확히 말하면 이곳 하와이섬의 위도를 기준으로 오늘에서 내일로 넘어가는 12시부터 지구 전역이 일대 변화를 겪게 될 겁니다. 아마 여러분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격변일 겁니다.”

   그녀가 서론을 떼자 일제히 호기심이 증폭되었다.

   “여러분은 혹시 시뮬레이션 우주와 홀로그래피 다중우주에 대해서 아십니까?”

   대화 진행 전 점검 차 레리엔이 청중의 사전 지식을 들춰보았다. 일제히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레리엔도 딱히 기대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애초에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은 아나스타샤를 제외하고는 현대 물리학이나 첨단 과학 기술에 그리 조예가 없었다.

   ‘서두가 길어질 것 같군.’

   레리엔은 잠시 숨을 고른 뒤 탁월한 교육자다운 면모를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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