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575회 아벨의 후예 Ch 38. 배우,스토리,테마,세계관 (4)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2.11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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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나스타샤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고작 그런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길을 평가절하치 말아 주세요.”
아나스타샤는 침착히 유대인 지도자들 앞에서 앞으로 어떤 식으로 전략을 펼칠지를 알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청중은 크게 경악했다. 과연 묘수는 묘수였다. 그런 방식이 가능할 줄은 꿈에도 몰랐거늘.
“다만,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합니다.”
아나스타샤는 정중하게 유대인들의 참여를 촉구했다.
“우리야 괜찮겠지만, 당신은 괜찮겠습니까?”
“저는 염려하지 마세요. 제게도 다 생각이 있습니다.”
그녀는 유대인 지도자들을 안심시켰다. 잠깐 그들끼리 토론이 이어졌다. 어떻게 하면 최대한 많은 전도자를 이 전투장에 참석시킬지를 두고 함께 고민하였다.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레리엔과 아나스타샤는 잠잠히 실랑이를 벌였다.
“다시 한번 냉철하게 재고해 보세요.”
레리엔은 여전히 그 작전을 못마땅해하는 눈치였다.
“부탁이에요, 저는 이미 희생도 각오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리 쉽게 결정할 사안이 아니잖아요.”
둘이 설전을 벌이는 동안 듣고만 있던 레우벤이 다가와 참견하였다.
“얘야, 나는 지금 상황이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는지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아나스타샤 양과 유대인들의 활약이 이번 복음 전파에 꼭 필요하다는 것만은 알 것 같구나. 네가 염려하는 건 이해하지만, 아주 불가능하거나 위험한 일만 아니라면 한 번쯤 도움을 줄 수는 없겠니?”
“하지만 아빠!”
“주님께서 이 행성에 유대인들만 남도록 허락하신 건 그들 자신만 편하게 지내라는 뜻은 아닐 것 같구나.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언약 백성으로 선택받은 의미를 실천할 수 있도록 한 번 기회를 주지 않겠니?”
양아버지가 다정하게 부탁하자 레리엔은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아나스타샤는 쐐기를 몇 가지 더 박아 넣었다. 그녀는 ‘이 방법이면 RS-월드의 후폭풍을 선한 방향으로 옮길 가능성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성적으로는 와닿지 않고 어려운 제안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끌림은 느껴졌다.
‘정말로 가능할까?’
심사숙고하던 레리엔은 못 이기는 척 승낙했다.
그리고 내친김에 그녀는 자기 계획의 노선을 살짝 수정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들의 가능성을 더 믿어볼까?’
그때 회의에 참여한 다른 누군가가 질문을 꺼냈다.
“빛의 임무를 우리가 맡는다면, 소금의 임무는요? 안타깝지만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가능해도 인간 사회의 왜곡을 바로잡는 능력은 없습니다. 정치나 경제, 사회와는 오랜 시간 동떨어져서 지내왔으니까요.”
아나스타샤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 일을 도와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녀는 넌지시 성한의 얼굴을 응시하였다.
“그분들의 지혜와 슬기를 한번 믿어봅시다.”
아나스타샤와 눈을 마주친 성한은 그제야 뇌리에 번쩍 섬광이 스치며 뭔가를 깨달았다. 내면에서 자신을 인도하는 따스하고 자애로운 음성이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네가 믿음으로 양육한 그들을 내게 맡기라] 라고 하는 말 같았다. 성한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레리엔에게 고개를 숙여 부탁하였다.
“부탁드립니다. 제게는 직접 낳은 자식들 못지않게 소중한 아이들입니다. 그들이 후회 없이 자기 자리에서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들을 부탁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레리엔은 많은 생각이 들었다.
‘혈육으로 낳은 아이 못지않게 사랑하는 아이들이라.’
이 자리에 계신 양아버지도 자신을 그렇게 키워주었다. 강성한은 크로스솔져들을 자신의 진짜 아들딸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신앙을 물려받은 소중한 아이들, 영적인 아들딸들. 아이들과 부모의 혼을 대체 무엇이 잇고 있기에 저렇듯 애틋하고 끈끈한 신뢰감이 형성되었을까. 흡사 그녀의 양아버지인 레우벤이 언약 속의 동포인 유대인들과 나눈 유대감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레리엔을 위해서 기도해 주겠다던 그 선량한 섬 주민들, 이미 자매와도 같게 된 루디아도 떠올랐다.
‘비슷하구나.’
강성한과 강윤혁, 크로스솔져들.
루디아와 레우벤과 섬의 유대인들.
두 집단의 영적 연합이 너무도 비슷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겹쳐 보였다.
‘카이나 나는 그 울타리 안에 감히 소속될 수 있을까?’
가슴이 아려왔다. 겹겹이 가면으로 감싸놓았던 마음의 장벽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폭풍으로 이어지듯, 유대감을 추구하는 마음과 추억의 메아리가 심경에 서서히 잔잔히 변화를 일으켰다. 결국, 레리엔은 자신도 모르게 충동적인 결정을 내렸다.
“기회는 한 번뿐입니다.”
이렇게 일생일대의 흥미로운 도박이 시작되었다.
*
권능과 지혜로 치열하게 맞서던 중, 레리엔은 샤오의 인형 조종용 텔레파시 라인을 해킹으로 읽어내었다. 덕분에 불완전하게나마 RS-월드 내에서 벌어지는 역할극 정보를 탈취할 수 있었다. 샤오는 힘겹게 해킹을 막아내며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레리엔 양은 골치 아프네.”
“너무 힘 낭비하지 마세요, 여사님. 당신은 이미 쇠퇴한 세대시잖아요.”
레리엔은 은근슬쩍 상대를 도발하며 시간을 끌었다.
“이런, 난 원로들과는 달리 3세대로 재각성했다고. 벌써 뒷방 늙은이 취급이라니 참. 서운하네.”
“개구리 올챙이 도적 기억 못 한다더니, 여사님이 딱 그 모양이시네요. 자신이 3세대의 최상위 초인과 동격으로 승격되었다고 자기 옛 동족을 인형으로 만들어서 농락하시다니 말이죠. 자꾸 그렇게 사시면 천벌 받으실걸요.”
이제 레리엔도 이미 네크로-슈퍼휴먼의 본질에 대해서 깨달은 참이었다.
‘굳이 지그문트와 샤오 여사님을 이 시점에 여기 심판관으로 불러드린 이유도 그것 때문이겠지, 카이.’
네크로-슈퍼휴먼의 본질은 기존 질서를 뒤엎는 ‘혁명(revolution)’이다. 혁명이란 본래 남파와 가장 잘 어우러지는 단어이다. 그 사상의 대표 주자인 엘도 갈트론도 항상 무언가를 파괴적으로 갈아엎으려 해온 사람들이다. 엘은 국가 간의 분열과 경쟁을 원했고 갈트론은 종족들의 질서를 새롭게 재구축해 혼란을 일으켜왔다.
남파 쪽에 해당하는 네크로-슈퍼휴먼과 북파 식의 교육을 받아온 1등 시민 및 히어로들을 대립 구도를 갖게 만든다. 이것은 전형적인 카이젤의 방식이다.
‘허나 인조인간인 네크로-슈퍼휴먼은 순수한 남파가 될 수 있어도, 반대로 인간들은 순수한 북파가 되지 못해. 그들은 어떻게든 영성의 영향을 받게 되어있다.’
예를 들어 히어로는 기독교적인 영성에 영향을 받았고 1등 시민은 티아라의 서파 방식에 물들었다.
여하튼 요약하면 배우 역할을 맡은 부류의 경우 인간 쪽은 북(北), 비인간 쪽은 남(南)에 배치한 셈이다.
그리고 배우와 달리 스탭 역할, 곧 스토리와 테마를 생성하는 자들의 경우 정반대로 배치되었다. 인간인 이레귤러는 본질 자체가 표식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남(南)파, 반대로 카이젤의 분신인 클론솔져들은 철저히 북(北)파에 속한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로 인간 쪽은 동이나 서 둘 중 하나에 물들어있으리라. 스테판처럼 순수한 영성을 지닌 자가 있는가 하면 유리스 방식의 영성을 받아들인 가짜들도 섞여 있으리라. 아니면 영성에는 관심이 별로 없고 경건의 모양만 받아들인 혁명가 성향도 있을 테고.
이제야 카이젤의 퍼즐 배치가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여사님, 언제까지고 저희 3세대 초인의 시대가 영속되리라 기대하세요?”
레리엔은 더욱 도발의 강도를 높였다.
“어머나, 망측해라.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망발이니, 레리엔?”
“설마 잊으셨나요? 1세대 초인들과 2세대들도 자기네가 다스리는 시절이 영원할 거라고 기대했어요. 하지만 둘 다 불과 몇십 년을 넘기지 못했죠. 초인들도 참으로 불쌍하리만큼 어리석지 않나요? 1세대부터 기본 천 살을 넘는 자연 수명을 소유하고도 정작 그걸 다 써먹지도 못한 채 다음 세대에 숙청당한다니 말이에요. 이거야말로 속 빈 강정이 아니겠어요?”
레리엔의 도발에 샤오는 뜨끔하였다. 실제로 3세대 초인들은 이전의 두 세대를 대부분 몰살하거나 처형했었다. 반역이니 뭐니 하는 여러 명분으로. 만일 샤오가 3세대로 다시 각성하지 못했다면 그녀도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4세대 혹은 그 이후의 세대가 영원히 등장하지 않을 것 같으세요?”
“한심하구나. 3대째 위버멘쉬는 불로불사이자 우주적으로 무적인 존재! 그런 그가 살아있는 마당에 어찌 다음 세대로의 전환이 일어나겠니?”
“모르는 일이죠. 천하무적인 카이가 갑작스런 봉변을 당할지 누가 알겠어요. 그때가 되면 4대째 왕이 세상에 출현하고 4세대 초인들 혹은 그 다음 세대가 대거 각성하겠죠. 이미 우주 시대가 개막되었으니 다음 세대는 숫자로든 질로든 우리를 압도할 테죠. 우리는 그들에게 순식간에 제압당할 거예요. 설마 그때도 아이들에게 빌붙어볼 생각이신가요?”
레리엔은 여유로이 농락하며 상대방을 정신적으로 자극하고 몰아붙였다. 동시에 그녀는 탁월한 멀티태스킹 실력을 발휘하여 아나스타샤와 더불어 미리 짜둔 계획을 실천으로 옮겼다. 설전은 그저 시간 벌기였다. 부디 그녀가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크로스솔져들과 아나스타샤, 그리고 후보자들이 각자 맡은 임무를 잘 처리해 줘야 할 터인데. 걱정이 들었다.
*
-{“넌 생각보다 의연하군.”}
유일하게 평온한 표정으로 임하는 스테판을 향해 한 명의 폰이 질문하였다.
“이미 소중한 동료들과 온갖 위기를 다 겪어봐서 말이오.”
스테판은 비록 외모나 신체 능력이나 지적 수준 면에서는 다른 이레귤러들과 달리 특별한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이들에게는 없는 소중한 시간을 간직하고 있었다. 윤혁 일행과 함께해왔던 그는 숱한 위기들을 이겨왔다.
그는 이세벨의 재현과도 같았던 그 성녀와의 대결을 보았었다. 지금 RS-월드에서 펼쳐지는 멀티버스나 패러렐 월드에는 못 미쳐도, 나름대로 다중 우주를 구현해 놓았던 하늘도시 내부 구조물도 보았다. 원시적 단계의 ‘성좌 시스템’도 보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매번 그런 위협들에 맞서 용감히 싸우는 것을 곁에서 보아왔다. 승리하는 순간에도 패배하는 순간에도, 그는 그 친구들과 함께해왔다. 심지어 그는 칼리드라는 괴물 앞에서도 살아남았다. 이 모든 과정에서 그는 하나님께 신의란 무엇인지를 배웠다.
설령 이제 전무후무의 위협인 RS-월드가 펼쳐진다 해도 위축되지 않는다.
-{“호오.”}
그때 스테판의 사념파가 나머지 69명의 후보들에게 전송되었다.
“여러분도 눈치챘다시피 여기서는 자신의 사상을 숨기지 못하오. 왜냐하면 의식과 인지가 훤히 노출되는 차원으로 올라왔기 때문이오. 나와 여러분의 내면은 벌거벗겨진 듯 드러날 것이오. 이런 마당이니 이제는 설득 같은 치사한 방법은 그만두고 오로지 선포만을 하겠소.
방금 그대들은 저치들에게 들었소. 우리가 이 ‘이상한 세계’에서 테마 생성자의 역할을 맡았다고 하오. 그런데 말이오, 애초에 우리가 따라야 할 가치관이란 오로지 단 하나뿐이오. 그러니 이제 여러분께 선언하오.”
그의 강력한 웅변이 모두의 넋 위에 격렬한 풍파를 일으켰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선 자들은 나아오시오(출 32:26)!”
후보자들의 영혼이 그에 반응해 진동하였다. ‘사망과 생명의 향기(고후 2:14-16)’가 동시다발적으로 번져나갔다. 이제 자신의 본색을 숨기는 자는 없었다. 같은 부류의 영을 가진 자들끼리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테판의 사념파에 격하게 반발하는 자들이 나타났고 반대로 동조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각자의 영은 사념파의 형태로 발산되었다. 혼잡한 토론의 폭풍이 엘리베이터를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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