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576회 아벨의 후예 Ch 39. 빛과 소금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2.13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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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9. Survival Contest : 빛과 소금
이레귤러들의 뇌리에 심겨진 ‘왜곡 표식’들이 아자토스의 강렬한 사념파에 접촉해 반응을 일으켰다. 이에 본격적으로 근진계(根眞界)에서의 게임이 시작되었다.
각각의 이레귤러들은 이제 자신만의 고유 정신계를 공급 받은 뒤 그 안에 섰다. 그 고유 정신계는 여러 영역이 겹친 구조로 되어 있었다. 마치 두 거울이 맞은 편에 놓일 때 무수히 많은 상들이 형성되는 모습을 떠올려보자. 고유 정신계는 이와 같이 무수한 상(像)들의 연쇄적 나열로 된 세계였다. 그리고 거울상의 무한 연쇄에서 한 명의 인간이 무한한 수의 그림자로 불어나듯이, 고유 정신계의 각 부분들에도 후보자 한 명의 ‘거울상 그림자’가 각각 하나씩 배치되었다.
거울 속 허상들의 수가 무한하다고 해도 그들 모두가 다 같이 본체인 사람의 움직임에 발맞춰 비슷한 자세로 움직이듯, 후보자의 거울상 분신들도 한 영혼의 의지가 동일하게 반영되어 동시다발적으로 행동했다. 다만, 어느 정도 연합됨을 보이는 동시에, 거울이 일으킨 굴절로 인해 다양성과 개성도 발생하였다. 그로 인해 각 분획 속의 거울상은 각기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였다.
이어서 후보자 개개인의 생각, 정서, 사상, 이념이 고스란히 발가벗겨져 드러나는 일이 벌어졌다. 이는 차원 상승에 따르는 위상 변화 때문이었다. 혼이 자리하는 영역에 가까운 차원에 근접하는 바람에 각 사람의 본체의 중심축이 조금씩 육체 쪽에서 혼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후보자들은 제각기 자기 마음속에 거주한 신을 훤히 드러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각 혼 안에 담겨있는 ‘신의 그림자’였다. 그 그림자가 진정한 절대자의 임재를 투영해낸 형상인지, 아니면 그저 자기가 만들어낸 허상인지, 그것은 당장 제삼자의 눈으로 판단하기 어려웠다. 다만, 이제부터 서서히 실체가 드러날 것이다.
스테판뿐만 아니라 나머지 69명의 후보자도 제각기 자기 웅변을 외쳤다. 자신과 같은 종류의 영에 이끌리는 자들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도 모두 하나님의 이름과 절대자의 이름을 내세웠다. 다들 자기가 믿는 마음속의 상(想)이야말로 절대자의 참 형상이라고 믿었다.
편 가르기 게임이 시작되었다. 각자가 자기가 소유한 신(神)의 상(想)을 매개체로 발산한 사념파는 고유의 주파수를 갖고 있었다. 어떤 파동들은 서로 상충 작용을 일으켰다. 반대로 어떤 파동들은 공명을 일으켰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상호 작용도 일어났다.
-{“자, 이제 시작하자.”}
-{“그래.”}
840명의 폰들은 연기가 바람에 흩어지듯 흐드러져 영역에 녹아들었다. 그들의 존재성은 마치 양자 확률 파동마냥 RS-월드 전역으로 흩어졌다. 이내 그들은 보이지 않는 무형의 영향력 같은 방식으로 실존하기 시작했다.
임재의 형태가 바뀐 폰들은 이제 자신들끼리 겹쳐져 하나로 합체된 연합 오비탈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이제 자신들이 맡은 ‘벌목자-건축자’ 역할에 힘을 투자하였다. 동시에 엘리베이터에 있던 이레귤러 후보자들의 본체가 흔들림을 입었다. 그들은 마치 솜사탕이 녹아서 연기가 되듯, 설탕이 물에 녹아들 듯, 본체가 조금씩 연해지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건?”
“대체 뭐지?”
당황한 이들에게 폰들이 룰을 설명해주었다.
우선 폰들이 ‘벌목-건축자’라면, 이레귤러들은 ‘쓰레기 소각자’의 역할이다.
여기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자연 상태의 ‘상위계’를 향해 뻗쳐진 인류의 정복용 임시 천막 ‘RS-월드’, 그 내부에는 아직 인류가 발굴하지 못한 자연법칙과 물리량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애초에 RS-월드를 전개한 목적 중 한 가지는 바로 이런 천연자원들, 곧 날 것 그대로의 자연법칙과 물리량을 채취하고 가공한 뒤 인류 문명의 역량을 폭발적으로 향상시키는 원동력으로 쓰는 것었다.
이 과정에서 RS-월드 속 자원을 가공할 인원도 필요하지만, 그 가공에서 발생하는 쓰레기, 곧 엔트로피(Entropy)에 대한 처분도 필요했다. 현실 세계의 유익만을 위해 상위 차원을 무분별하게 갈취하고 갉아먹으면 그만큼 엔트로피의 축적도 만만찮아지기 마련이다.
이 해결책을 위해 폰 이외에 다른 스텝들이 투입되었다.
이레귤러들에게는 특이하게도 우주 인류가 보편적으로 지닌 표식이 있되 본래의 형태에서 벗어난 변질된 표식이 심겨져 있다. 이들의 표식에는 크레센트의 선지자가 남긴 ‘혁명적 혼돈의 본질’이 녹아 있다. 카이젤은 발상을 전환하였다. 이 왜곡 표식들을 역이용함으로써 RS-월드 개발 과정에서 나오는 엔트로피를 소각할 매개체를 얻자.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그만의 독특한 발상이었다.
이레귤러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그런 역할에 놓인 현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본체’의 ‘존재성’을 뱃삯으로 지불함으로써 이 세계에서 나오는 쓰레기들을 소거할 것이다. 무시무시한 게임 규칙이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안 될 걸. 순식간에 너희는 다 녹아 없어질 거야.”}
-{“뭐라도 행동해봐. 너희의 내일을 위해서라도 투자라도 좀 해봐.”}
폰들의 조롱에 한 후보자가 화를 내며 반문했다.
"무엇을 투자하란 말이지?”
-{“말했잖아. 너희에겐 ‘쓰레기 소각’용 희생물 역할만 주어진 게 아니야. 쓰레기 소각자란 소스-홀로그래피 축의 관점에서 주어진 역할이고 리얼리티-시뮬레이션 축에서의 너희 역할은 ‘테마 생성자’야. 킹께서 구성한 세계관에 우리는 스토리를 집어 넣고 너희는 테마를 주입한다.”}
-{“바로 너희 본체의 존재성을 지폐 삼아 투자함으로써 말이지.”}
-{“너희가 RS-월드 내의 멀티버스와 패러렐 월드 안의 ‘테마’를 넣어 변형을 가하려면 너희 본체를 조금씩 소비해야 한다. 일종의 간섭에 대한 지불 대가이지.”}
-{“단, 너희가 투자한 테마로 인해 발생하는 차원계 내 장기적인 이윤에 대해서는 보상이 들어온다. 그 보상으로 소비해버린 너희 본체를 복원할 수 있지.”}
-{“본체가 전부 소모되면 게임 오버. 그러면 즉각 탈락자가 되어 RS-월드에 깊숙이 봉인된다. 배우들이야 풀려나겠지만 스텝은 달라. 탈락자가 되면 절대 못 풀려나. 킹께서 풀어주시기 전까지는 앞으로 RS-월드라는 체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소비용 조미료로 쓰이게 될 거야.”}
-{“끝까지 살아남은 10명만이 이번 2차 경합의 승격자가 된다.”}
설명을 듣자 하니 섬뜩했다. 저번 경합의 트라우마가 세게 남긴 했으나 그렇다고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고 가만히만 있으면 ‘쓰레기 소각자’ 역할이 주어진 탓에 그대로 RS-월드에 흡수당할 판이었다.
살아남으려면 투자를 해야 한다. 테마 제너레이터의 역할을 충실히, 신중히 수행해야 한다. 본체를 소모해 다중 세계들의 테마 속에 변주를 가하고 유용한 결과를 낳는다면 보상을 통해 현상 유지가 가능하다. 반대로 잘못된 테마를 투입해 혼돈을 낳으면 아자토스의 징계를 받고 더욱 빠르게 본체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는 마치 정부 기관에 민원을 넣는 것과 원리가 비슷했다. 테마 투입이란 곧 세계관이라는 기관을 상태로 민원을 넣는 것이다. 곧 가치관을 뒤바꾸도록 명령어를 제시하는 것이다. 허나 민원이란 본디 혁명적이고 반항적인 본질을 띠고 있다. 때때로 그것은 사회 공공선을 증진할 수도 있지만, 지극히 이기적인 의도에서 시작된 민원은 오히려 불화를 낳을 수도 있다.
민원과 이번 게임의 차이점이라면, 테마 제너레이터에게는 보상과 형벌이 확실히 주어진다. 만일 그들이 RS-월드를 상대로 넣은 민원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처벌받아 RS-월드의 거름이 될 터이고, 결과가 좋아 유용한 후폭풍을 창출한다면 살아남으리라. 이번 경합이야말로 저번과 달리 ‘생존’ 게임이라는 이름에 부합했다.
*
상대의 허점을 찾아낸 레리엔. 그녀는 샤오의 텔레파시 네트워크의 틈을 비집고 마침내 자신의 의식체들을 주입하였다. 아주 잠깐의 틈이었으나 레리엔이 당초 계획했던 바를 이루기에는 충분했다. 곧 샤오의 인형 노릇을 하던 네크로-슈퍼휴먼들의 정신 중추로 레리엔의 의식이 침투해 흘러 들어갔다. 당황한 샤오가 황급하게 주도권을 되찾았지만, 이미 다수의 기체가 의식 파편에 의해 오염되었다.
“뭘 할 작정이지, 레리엔?”
“글쎄요. 과연 뭘까요? 맞춰 보시죠.”
다만 생각보다 네크로-슈퍼휴먼들의 정신력이 막강한 탓에 레리엔도 적잖은 정신 부담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계획을 진행시켰다.
그 과정에서, 많은 정보가 얻어졌다. 특히 2세대 초인들의 개별 정보가 상세히 레리엔의 뇌로 전송되었다. 놀랍게도 네크로-슈퍼휴먼이란 단순히 인격 복제 차원의 테크놀로지가 아니었다. 경이로우리만큼 2세대 초인 각각의 개성, 재능, 본질을 똑같이 모방한 물건이었다. 레리엔 본인도 깜짝 놀랄 만큼.
‘지나간 세대를 이렇게까지 모욕하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그녀는 과거의 일들을 기억 속에서 되새김질 해보았다.
아직 다섯 아이들이 유년기에 있었던 시절이었다. 카이젤은 사적인 자리에서 레리엔과 여러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때론 그는 특정 집단을 향한 분노마저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이는 그의 친어머니가 2세대 초인들의 저열하고 비겁한 투쟁에 휘말려 목숨을 잃던 그 해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카이젤에게는 어머니를 향한 특별한 애정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낳아준 존재를 향한 일말의 책임감이나 경의는 있던 모양이다.
라일라는 2세대 중에서는 상위권이었다. 허나 샤오나 이벨리아처럼 정상 자리를 두고 겨룰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들 바로 다음 급에 들 정도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이벨리아가 죽기 직전, 허울뿐이나마 비상시를 대비한 전권을 이벨리아 본인에게서 위임받았다.
사실 이벨리아도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다음 세대의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대 위버멘쉬를 낳을 어머니에게 2세대를 통제할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것을.
불행히도 많은 2세대 초인들은 그 사실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3세대라는 종족에 의해 역사의 뒤편으로 밀려나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라일라와 그녀가 키우는 아이를 잠정적인 정적으로 여겼다. 이것이 라일라가 사고를 위장한 전 세대 초인들의 음모에 휘말려 명을 달리한 배경이었다.
당시 카이젤은 겉으로는 분노를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차분히 그는 2세대를 축출과 정리의 대상으로 규정하였다. 끌어내릴 명분은 간단했다. 초기 인류연합을 와해시키고 사욕에 물들어 인류를 분열 위기에 몰아넣은 주범. 인류를 이끌 책임을 방만히 여기고 혼돈의 시대의 참상을 방치한 어리석은 실패자들. 그는 2세대 전원을 그렇게 정의하고 적성(敵性) 대상으로 간주했다. 이후 각종 명분으로 2세대는 처참히 끌어내려졌다.
힘을 얻은 뒤 카이젤은 로스트엠페러들을 앞세워 기존 세대를 숙청했다. 자신의 손은 더럽히지 않은 채, 적법한 명분을 잡아냄으로써 정적들을 제거했다. 그렇게 과거의 그림자가 되어버린 2세대는 끝내 지그문트의 손을 거쳐 망령으로 재탄생되었고 처참한 부관참시의 결말로 마무리를 맞이했다.
(다음 회차에서 연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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