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583회 아벨의 후예 Ch 40. 고백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3.06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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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한참을 입속에서 맴돌던 말을 용기 내어 꺼내 보았다.
“너도 이미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지만…….”
늘 다정하고 침착했던 루디아의 뺨이 수줍음으로 옅게 상기되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네가 좋았어. 물론 지금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 그런 종류의 ‘사랑’도 분명 맞지만, 너에 대해서는 거기에 더해서 특별한 의미로도…….”
차마 말끝을 잊지 못하고 흐리는 루디아.
“고마워.”
윤혁도 같이 쑥스러워하며 옅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해 줘서, 정말 고마워.”
“아니야, 나야말로…….”
“그리고 미안해. 이렇게 비겁하게 도망치기나 해서.”
루디아는 윤혁의 이 말에 긴장이 되었는지 살짝 표정이 굳었다.
“내 속에서는 너를 위하려는 감정이 메아리치고 있는데……, 내가 너의 곁에 있어도 될지는 아직도 뚜렷한 확신이 서지 않아. 내가 이렇게 약한 사람일 줄은 나도 미처 몰랐어.”
너무 진중한 성격 탓일까. 처음부터 평생을 함께할 것까지 염두에 둘만큼? 이것은 강윤혁이라는 사람의 원래 성정이 과도한 신중함을 내포한 탓이었다. 특히 누군가와 인생을 함께하려는 중요한 선택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윤혁아, 처음부터 모든 고민을 다 안을 필요는 없잖아.”
루디아는 그의 염려들을 기꺼이 함께 떠안겠다는 듯 손을 벌렸다.
“그건…….”
윤혁은 걱정되었다. 아직 그는 루디아에게 모든 비밀을 다 열어놓지도 못했다. 일단 자신의 영적 위치가 무엇인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윤혁이 맞상대할 거대한 영적 위협인 위버멘쉬, 아니 적그리스도의 씨앗에 대해서도. 윤혁에게는 그것을 평생 통제해야 할 책무가 걸려있는데 아직 그 사실을 루디아는 모른다. 그의 임무의 성패 여부가 세계의 마지막과 직결되어 있는데도 그녀는 그 큰 부담을 알지 못한다. 어쩌면 마지막까지 모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려나.
설사 그 모든 것을 알려주고 서로 그것을 이해해 준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윤혁을 주시하는 인류연합의 시스템과 초인들이 사방에 우글거린다. 앞으로도 윤혁은 평생 순탄치 못한 길을 걸어가리라.
이미 너무도 많은 위험 요소들과 엮여버렸다. 앞으로 더 많이 엮이게 되리라. 그렇지 않아도 자신으로 인해 같이 엮인 루디아는 평범한 생활에서 너무도 멀어져 버렸다. 동반자로 함께하다 보면 그보다 더 험난한 길을 걷게 되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자신의 심장에 이식된 이 힘도 버거웠다. 자칫하면 루디아에게 평생 자신을 돌보며 간호하는 짐을 쥐여줄지도 모른다. 어쩌면 윤혁 자신도 그녀를 그녀 자신으로서 순수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차마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짐을 포기하기도 어렵다. 윤혁은 의외로 신념에 대해 고집이 강한 성격이었고 한번 맡은 임무를 포기할 리는 없다.
가장 걱정되는 요소는 본래 남의 것이었다가 자신에게 초자연적으로 이식된 초인의 리비도였다. 만일 루디아와 사랑을 시작한다면 틀림없이 이런 정열적 에너지에 이끌려 생성된 감정도 그녀에게 투사되어야 하리라. 그런데 자신의 몸에서 에로스적 욕구를 생성해 내는 원천이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닌 초인의 이능이라는 점을 생각하니 죄책감이 느껴졌다.
물론 머리로는 도덕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음을 알았다. 그럼에도 부담감은 여전했다. 여기까지면 차라리 다행이다. 만약 그녀와 가정을 이루게 된다면? 그 뒤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것이 과도한 생각일까? 장차 그녀와 자신 사이에 생길지도 모르는 아이에까지 생각이 닿자, 가슴이 덜컹했다.
‘만일 그러면 그건 누구의 아이가 되는 거지?’
내 아이일까 아니면 형의 아이인가?’
바로 그때 고민의 연쇄를 끊은 것은 루디아의 목소리였다.
“윤혁이 넌 너무 고민이 많아서 탈이야.”
“룻.”
“잠깐만 머리 좀 식히자.”
핑핑 머리를 돌리는 사이에 루디아가 다가왔다. 그는 살며시 그의 뺨을 두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작은 손바닥이 참 부드러우면서도 시원했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에는 애틋함과 따스한 향미가 묻어있었다. 상대를 존중하려는 마음과 상대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싶은 고귀한 아름다움도 느껴졌다.
“처음부터 모든 미래를 다 예측해 내는 사람이 어딨어.”
“…….”
“아마 누구든 처음 도전을 시작할 때면 다 두려울 거야. 아무리 신중히 준비해도 결국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갈 테지. 위기가 닥쳐올지도 모르지. 시련이나 절망과 마주할지도 모르고.
그래도 그게 최악은 아니잖아. 너와 나,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야. 이미 우리가 품던 가장 큰 두려움은 예슈아께서 대신 짊어지고 제거해주셨어. 그분께서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셨잖아. 그러니 무서움 때문에 시작조차 못 하고 주저할 필요가 있을까.”
루디아는 아이를 달래듯 상냥하게 말을 이어가며 그를 설득하였다.
“난 네가 책임감 있고 선량하고 상대를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좋은 사람인 걸 알아.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둘 다 부족하고 나약하니 거듭 넘어지겠지. 그때는 같이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다시 일어서면 돼. 처음부터 완벽할 필요는 없어. 조금씩 서로를 알아나가며 완성으로 나아가면 그만이야.”
“난…, 네게 너무 큰 부담을 지울까 걱정되어서…….”
“어차피 우리의 삶은 나그넷길이야. 우린 각자 십자가를 짐으로 짊어졌어. 세상은 안식처가 아니야. 그걸 다 감수하고 장래의 소망을 바라보고 있는 거잖아. 그런 마당에 내게 너의 부담을 조금 나눈다고 해서 달라질 일이 있을까?”
그녀의 친절한 대답은 갑갑한 가슴을 시원하고 상쾌하게 해주었다. 세상의 여러 여인들의 관능적인 유혹의 향기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세련되고 화려한 미도 깃들어있지 않았다. 그 대신 훨씬 더 고귀하고 아름다운 성품이 녹아 있었다.
“넌 잘 몰라서 그래.”
“걱정이 있으면 내게도 말해줘.”
윤혁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거부하지 못할 강력한 인력을 느꼈다. 그것은 십자가의 연약해보임 속에 세상의 권세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이 담긴 이치와도 흡사했다.
한참을 고심하던 윤혁은 혼자 끙끙 앓던 비밀을 터놓았다. 자신이 왜 큰 의무에 눌려있는지, 자기 몸의 여러 문제 때문에 걱정되는 부분까지도. 루디아는 그가 체감하는 난처함을 있는 그대로 공감해 주었다. 그녀는 그 부담감의 무게를 결코 과소평가하거나 깎아내지 않았다. 그 대신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러면 너랑 나랑 함께 그 짐들을 들고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자. 어때.”
“…….”
“너 혼자서 들고 가긴 무겁지? 나도 기꺼이 함께 거들어주고 싶어.”
허탈감에 윤혁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녀의 신실한 성정은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어처구니없이 다정하고 상냥할 줄이야. 너무도 그녀다운 정답인지라 웃음으로 응대하는 것조차도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사실 그렇게 잘난 남자 아니야.”
“나도 그런걸.”
“그리고 난 원래 가벼운 연애 같은 건 잘 못 해. 원래부터 내 연애관은 시작할 때부터 결혼까지 염두에 두는 연애관인지라 네가 부담 느낄지도 몰라.”
“그 부분도 나랑 똑같네. 게다가 우리는 오랜 기간 함께하며 여러 모습을 다 봤잖아. 서로를 잘 알잖아. 상대방을 향한 헛된 환상을 품을 리도 없지. 물론 모르는 부분은 지금부터 더 알아나가면 되고 말이야.”
루디아는 이성 교제에 대해서 과도하게 이상화된 생각을 갖지 말자고 제안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란 건 없어. 두 사람이 짝으로 만나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준다 해도 여전히 둘은 부족할 거야. 한없이 완벽해 보이는 네 형님과 아가씨도 한때 서로를 좋아했는데도 결별했잖아. 중요한 건 조건 같은 게 아니야. 서로를 지탱하는 신실함과 주님을 향한 믿음을 기반으로 부족함을 함께 극복해나가면 돼.”
“룻, 넌 참 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네.”
“내게도 약점이 많은걸. 그래서 네 어려워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
그들은 한참 동안 가슴속에 묻어 놓았던 응어리들을 터놓았다.
“저번에 이드가 우릴 기습했을 때 봤었지. 난 내가 몸의 욕구에 대한 제어를 잃을까 봐 무서워.”
“넌 주님의 자녀니 잘 극복할 수 있을 거야. 기도해 줄게.”
“솔직히 말해서, 사랑과 정욕을 혼동할까 봐 지금도 걱정돼.”
“너답지 않은 기우인걸.”
윤혁은 얼굴이 조금 상기되었다. 그는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순결에 대한 서약을 약속했다. 차마 목소리를 높여 말하기에는 쑥스러운 주제이기도 했기에 더욱 얼굴이 붉어졌다.
“뭔 상황에서도 하나님 말씀대로만 할게. 너를 잘못된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생각하는 실수는 하지 않을 거야.”
“그래, 나도 약속할게.”
“그렇다고 네게 진지한 마음이 없단 뜻은 아니야.”
“나도 알아.”
“안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수수한 외양의 루디아는 사실 외모로 칭찬을 들은 적이 거의 없었다. 윤혁의 천진난만하면서도 수수한 칭찬을 듣자 자기도 모르게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도 멋있고 잘생겼어.”
“우리 아빠나 형에 비하면 발끝에도 못 따라가는걸.”
“오히려 그래서 더 인간미도 있고 좋은 거야.”
윤혁은 조심스럽게, 신중히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살짝 감싸 포옹했다. 너무 과하지 않게 천천히. 적당히 온기를 전해줄 수 있을 정도로만. 약한 도자기가 깨어질까 염려하는 장인처럼 그는 정성스럽게 친구에게 솔직한 정서를 전했다. 그리고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루디아도 두 손으로 그의 단단한 어깨를 살짝 붙잡았다. 온기가 느껴졌다. 널찍하고 든든한 기둥 같아서인지 저절로 의지가 되었다.
*
고백 후, 윤혁은 정직하게 당장 자기가 가장 염려하는 바를 털어놓았다.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긴 했지만, 솔직한 속내로는 이 부분은 고민이었다. 바로 자신이 그녀가 기대하는 모습에 못 미치리라는 점이었다. 언젠가 실망시키게 되리라. 어쩌면 이는 어느 연인 관계에서건 마찬가지의 문제겠지.
당장 윤혁은 시작부터 그녀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일에 대한 양해를 구해야만 했다. 그녀는 온전히 그를 믿어줄까?
“내기를 위해 더 정보를 모아야 해. ‘그자’가 나와 독대를 요청했어.”
그 말을 듣자마자 어떤 의미인지 루디아는 금세 직감해 냈다. 선교 여행 때도 진이라는 이름의 후원자는 유독 윤혁 이외의 선교사들은 마치 투명인간처럼 취급하며 대놓고 무시했었다. 정보 공유를 제한할 것도 명령했었지. 틀림없이 이번에 만난 ‘세미온’이라는 자도 초인이라는 점에서 같은 부류이니 비슷하리라. 그때와는 달리 윤혁과 루디아가 연인이 되었으니 어쩌면 섭섭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미안해.”
하지만 루디아는 윤혁과의 신뢰 관계를 의심치 않았기에 개의치 않았다.
“어서 가. 네 말대로라면 그자들에 대한 정보는 강력한 우주 차원의 보안이 걸려있다며. 그렇다면 우리도 그에 발맞춰서 응수해야지. 난 네가 잘 해내리라 믿어. 내게 미안해할 것 전혀 없어.”
윤혁은 여전히 미안해하며 그녀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실망시키지 않을게.”
“그래, 우리 꼭 이겨내자. 오만한 세상을 향해 경종을 울려주는 거야. 어때?”
루디아는 방긋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내심 그와 자신 사이에 비밀이 생기는 게 달갑지는 않았지만, 강윤혁이라는 사람의 인품을 믿기에 서운치는 않았다. 윤혁은 마음속으로 루디아가 자신에게 과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흘째에 윤혁은 약속된 좌표로 이동했다. 멜카드제윈이나 데미안에게는 전혀 알리지 않은 채로. 과연 결계가 처져 있었다. 비밀 회담이라는 용어 그대로였다. 세미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저번에 본 작은 소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마도 다른 매개 몸체를 쓰는 것 같았다. 갈색이 섞인 검은 머리의 키 큰 미청년의 모습이었다. 그 눈동자에는 א 문양이 있었다.
‘알레프? 에드레이 씨의 코드네임이자 형의 미들네임인가.’
세미온은 백색의 근사한 제복을 입고 있었다.
“어서 와. 강윤혁군. 형제들보다 내 독대를 먼저 받아들여 주다니, 영광이군.”
여유롭게 먹잇감을 내려다보는 포식자와 같은 태도였다.
“당신!”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기의 충돌과 함께 번뜩거리는 스파크가 튀었다.
‘미안하지만 더는 결코 호락호락 이용당해 주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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