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585회 아벨의 후예 Ch 41. 야르베스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3.11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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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온은 한참을 다른 이야기로 서두를 끌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
“강윤혁 너는 ‘가정’이라는 문화에 대한 애착이 큰 모양이야.”
윤혁은 잠시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야 당연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당연하겠지만 그에게 있어서 가족들은 소중했다. 혈육의 가족이건 영적 공동체건 그에게는 대체 불가능한 소중한 보물이었다. 특별히 부모님과 선교팀 동료들은 함께 하나님의 선한 은혜를 공유하는, 마치 한 몸과도 같은 사람들이다.
“저에 대해 잘 아시는 듯 말하시는군요?”
“네 이야기를 파파에게 많이 전해 들었어.”
움찔하는 윤혁. 카이젤이 대체 저자들에게 어디까지 떠벌렸을까?
‘그래, 생각해 보니 그 사람도 가족이었지. 잊고 있었네.’
비록 영적 형제들만큼 귀하지는 않다지만 그 사람도 유전적으로는 하나뿐인 윤혁의 형이다. 애착의 대상인 동시에 깊은 갈등의 대상이기도 하다. 양가감정의 애증을 투사하는 대상. 형인 동시에 대적이기에 두 이름의 야누스나 다름없다.
“신기하다고 생각했어. 파파 같은 사람은 피로 얽힌 가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을 줄 알았거든. 따지고 보면 나와 내 형제들도 그의 손에 인위적으로 거둬진 자녀들이지. 그분은 원래 혈통이나 정보다는 능력과 자격에만 이끌리는 위인이거든. 충분한 실력과 가치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등용하는 걸 넘어서 자신과의 특별한 관계를 선물하여 새 정체성을 부여해 주지.”
“철인왕들의 경우처럼 말인가요?”
“그들은 우리보다 늦게 선발된 후발주자, 말하자면 새롭게 선택된 세트지. 우리와 파파가 확립해 놓은 표식 체계의 가시적인 결실, 그중에서도 절정에 이르러 나온 값진 결실이 바로 철인왕들이지. 즉 말하자면 우린 그들의 어미와도 같아.”
“형을 파파라고 하더니, 이번에는 철인왕들의 어미? 엽기적이군요. 무슨 그리스 신화의 가이아와 우라노스도 아니고, 콩가루 집안입니까?”
“가족의 정의를 새롭게 재정립한 거야.”
‘미쳤군.’
윤혁은 어처구니가 없는 나머지 피식 실소가 새어 나왔다. 능력 순으로 평가해서 자식을 인위적으로 택하고 형제자매 관계를 인위적으로 맺고 그걸 기반으로 주종관계를 확립한다니. 우스웠다. 자격이나 공로와는 무관하게 오로지 은혜로 다시 태어나서 한 가족이 되는 하나님 왕국의 출생 원리와는 정반대인 개념이었다.
“그 정의대로라면 저는 형의 동생으로 자격 미달이로군요.”
솔직히 외모든 두뇌든 신체적 힘이든 정치적 영향력이든, 윤혁은 특별한 구석이 없었다. 윤혁 스스로 객관적으로 평가하기에도 자신은 초인은커녕 일반인 가운데서도 기껏해야 평균 정도 수준이었다. 아니, 지금의 우주 인류는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고 했으니 이젠 평균에도 간당간당한다고 봐야 하려나.
“원래라면 그래야겠지.”
“원래라면?”
“그래, 어쨌건 파파는 너를 순수하게 가족으로 여기거든. 그답지 않게 말이야.”
조금 기분이 착잡했다. 일단 인간적인 감정으로는 좋아해야 할 말이 맞긴 하다. 하지만 형이 자신을 아낀다는 것이 좋은 징조인지 나쁜 징조인지 조금 헷갈렸다.
“원래 가족이란 능력이나 재량에 의해 선택되는 것이 아닙니다만.”
“과거에는 그랬었지.”
“앞으로는 달라지리라는 말입니까?”
또 비릿하고 비열한 미소가 아바타 몸체의 표면 위로 떠 올랐다.
“예리하네.”
윤혁의 뇌리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저자들이 무슨 음모를 꾸미는지는 몰라도 심상치 않다. 내버려두었다가는 불행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윤혁은 세미온을 상대할 힘이나 권력이나 지혜가 없었다. 저런 위험한 상대가 몇이나 더 존재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심지어 저들의 계획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아는 바가 없다.
“이런, 너무 날카롭게 날을 세우진 마.”
조롱하는 세미온.
“속셈을 밝히시죠.”
“난 오히려 네 의견을 우리 계획에 반영해 주고 싶다니까 그러네. 다른 둘 같았으면 가차 없이 대적했겠지. 나는 그래도 전통적인 가족 제도의 이점을 어느 정도 일부만큼은 반영해 줄 생각이란 말이야.”
마침내 세미온은 아주 살짝 자신의 속내를 내비쳤다.
“그게 무슨 뜻이죠? 전통적인 가족 제도의 이점이라니?”
“한번 잘 고민해 봐. 힌트는 이미 줬으니까.”
“대체 제게 뭘 바라는 거죠?”
“강윤혁, 너는 이미 우리와 한배를 탔어. 네게 우리의 비밀을 일부 누설해 주었다는 건 너에게 조만간 있을 프로젝트에 기여할 권리를 일부 주겠다는 것을 뜻해.”
“왜 하필 저죠? 제가 당신들이 섬기는 위대한 인간의 동생이라서?”
“아니, 그보다는 저것 때문에.”
세미온은 윤혁의 왼쪽 가슴을 손가락질로 가리켰다.
“알트루즘? 그게 당신네 계획에 필요한 겁니까?”
“맞아.”
“그러시다면 왜 제 가슴을 도려내거나 하는 편한 방법을 쓰지 않는 거죠?”
“전에는 그 옵션도 고려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거든. 알트루즘이 네 속성을 너무 많이 머금어버렸어. 너와 하나로 융화된 거지. 이제는 너에게서 강제로 뺏는 건 의미가 없어졌지. 간접적으로 조종해서 다루는 수밖에.”
윤혁은 이를 악물었다. 적의 음흉한 속내가 구린내처럼 진동했다.
“틀림없이 파파께서 전통적 가족 제도에 대한 향수와 새로운 인류 운용 방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건 너와 네 가족 때문이겠지. 네가 미련을 남긴 거야.
그는 과거에 몸소 우리와 일곱 철인왕들을 선발함으로써 새로운 가족 개념을 확립하고 그 모본을 보였어. 심지어 초인들도 그 방식을 본받아가고 있었지. 가문이니 라스트네임이니 유산이니 하는 낡아빠진 제도적 악습을 탈피하고 오로지 자질을 기반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자율적으로 획득하는 방식으로 개혁되고 있었어.
그런데 하필 네가 나타난 뒤로는 파파의 변화에 제동이 걸렸단 말이지.
뭐, 그래도 나는 네가 썩 거슬리지는 않아. 내심 인정하기는 불편하지만, 파파에게도 나름대로 긍정적인 방향의 개선이 나타나기 시작했거든. 지금처럼 적당한 절충선의 수준에서 머무른다면 말이지. 난 전통적 가족 제도에도 나름대로 써먹을 만한 이점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난 내 형제들이 제안하는 도안과 전통 제도를 적당히 섞어서 타협하고자 해.”
“그 타협 과정에 제가 도구로 필요한 겁니까?”
“아까 말했듯 알트루즘이야말로 우리 계획에는 꼭 필요한 필수 요소니까. 마지막 내기를 하는 날이 이르면 어차피 너와 우리는 승부수를 두며 겨룰 거야. 네가 이길 가능성은 그냥 없다고 보면 돼.”
승리를 확신하는 오만한 세미온의 태도가 거슬렸다.
“하지만 패배할 땐 패배하더라도 네 의지를 아주 조금이나마 반영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네가 얼마나 잘해주느냐, 그 여부에 따라 말이야. 내 형제들은 네가 완전히 무너지기를 원하고 있어. 반면 나는 네 승리는 원치 않아도 네가 적당히 저항해주기를 원하지. 그래야 내가 지향하는 타협점에 더 가까워질 테니까.”
이야기를 들을수록 불길함과 불쾌감은 증폭되어만 갔다.
“당최 어떤 내기이길래 그렇죠?”
“안타깝지만 내용은 비밀이야. 솔직히 말하면 지금 말해준 힌트만 해도 우리 형제들 사이에선 계약 위반으로 간주될 위험이 매우 크지. 네가 사전에 많은 정보를 알수록 네게 유리해지잖아. 너는 네 의지대로 알트루즘을 개변할 수 있으니까.”
윤혁은 속에서 올라오는 떨림과 불안을 감추려 애썼다.
*
“이봐, 아가씨!”
멜카드제윈은 혼자서 윤혁을 기다리는 루디아에게 달려왔다. 그의 뒤에는 카일과 조세피나도 동행하고 있었다. 멜카드제윈의 표정은 마치 무슨 사고라도 일어난 것마냥 매우 다급해 보였다. 루디아는 설마 저들이 윤혁의 일을 눈치챈 것인가 걱정했다.
“무슨 일이세요?”
“어이, 동생 녀석 어디 갔어?”
루디아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한 채 멈췄다.
“저, 그게…….”
“혹시 그 친구 혼자서 누군가와 독대하러 간 건 아니겠지?”
멜카드제윈이 급박하게 다그치자 거짓말을 못 하는 루디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곤란하게 됐네.”
“설마 윤혁이가 혹시 위험에 휘말린 건가요?”
그녀는 염려하며 되물었다.
“이번에 독대한 사람 때문은 아니고……, 다른 녀석이 개입했단 말이지.”
“네?”
루디아의 의문에 이번에는 카일이 대신 나서 대답을 가로챘다. 그는 자신에게 이 행성의 시스템 관리를 맡긴 주체에 대해서 간략히 알려주었다. 사실 카일도 조세피나도 그 정체불명의 윗선이 누구인지는 잘 몰랐다. 그 존재는 그저 어떤 신기한 힘과 기술을 전수해 주었고 어떻게 결계를 제작해야 할지 조언만 전해주었을 뿐이었다.
한편 그자는 카일 부부에게 외부 세력의 감시에 관해서도 경고했었다.
“우리는 외부 세력에게 결계 안쪽을 감지당하지 않도록 경계를 지시받았죠.”
“그런데 일이 복잡해졌어요. 2분 전쯤 결계 안쪽으로 뭔가 강한 힘이 침투해 들어왔어요. 물리적 간섭을 일으키진 않았지만, 무언가를 감지하긴 한 모양이에요.”
카일과 조세피나가 조금 다급해진 듯한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일이 그렇게 쉽게 벌어질 수 있나?”
이상하다고 생각한 멜카드제윈이 차분히 따져 물었다.
“원래라면 그렇지 않습니다만.”
“않다만 이라면, 뭐가 있는 건가?”
“그게……, 하필 ‘후폭풍’으로 힘의 제약이 풀리는 바람에 계산이 어긋났습니다.”
“아.”
카일의 대답에 감이 짚인 멜카드제윈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루디아는 혼자만 대화 속에서 드러난 상황 돌아가는 바를 이해하지 못해 조마조마한 기분이었다. 멜카드제윈이 그녀를 배려하여 현황을 간략히 요약해 주었다.
“아가씨, 인터갤럭틱 호가 어떤 존재에게 봉쇄당했어.”
“네? 그 정도로 강력한 세력이 있다고요?”
“세력이 아니야. 개체 하나야.”
“하지만!”
“우리 쪽에도 함대 전력이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좀 예외적인 상황이야. 세력 균형이 흔들리는 중이거든. 조만간 인류와 그 피조물들이 일제히 상상을 초월할 상향 진보를 일으키기 시작할 거야. 문제는 그 발전 가능성이 균일하지 않아서 어디서부터 파워밸런스의 깨어짐이 나타날지 몰라.”
상황이 다급해서인지 멜카드제윈은 자세한 정황은 말해주지 않고 알 듯 모를 듯한 모호한 용어만 늘어놓았다. 그는 윤혁이 어디로 갔는지 알려줄 것을 루디아에게 요구했다. 하지만 루디아도 그 위치는 알지 못했기에 도움은 되지 않았다. 급한 대로 카일은 자신의 감지 능력으로 윤혁의 위치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그때 하늘의 빛들이 가리어지듯 소멸하더니 사방이 어두워졌다.
“일 터졌군.”
거대한 굉음이 발원하였다. 누군가가 큰소리로 울부짖는 듯했다. 행성 주민들은 최면에라도 걸린 듯 일제히 기절한 상태가 되었다. 조세피나가 황급히 광역 탐지 능력으로 주민들을 모조리 물색한 뒤, 염동력으로 사람들의 몸을 아공간 속 캡슐로 옮겨 담았다.
“저 존재는 누구죠?”
카일이 멜카드제윈에게 황급히 질문했다.
“내가 알려줘도 못 알아들어. A 클래스 이하 초인은 인지하는 것조차 금지된 기밀의 존재거든.”
“무슨 통일시스템 보안이라도 걸린 겁니까?”
“그래, ‘녀석들’에 의해 직접 각성된 초인이 아니면 아예 녀석들 근처에 다가가지도 못하지.”
“아, 소문으로만 듣던 위버멘쉬의 ‘비밀 프로젝트’를 담당한 멤버들이로군요.”
“맞아, 아쉽지만 이만 너희는 빠져라. 더 곤란해지기 전에.”
멜카드제윈은 염동력으로 두 초인을 기절시킨 후, 결계로 봉인했다.
“저, 저도 알아선 안 되는 건가요?”
루디아는 자신도 설마 기절시키는 건가 하여 걱정스레 질문했다.
“아니지, 아가씨는 저번에 녀석들을 인식하는 것을 허락받았잖아.”
“저번이라면, 윤혁이와 제가 만났던 그 이상한 사람인가요?”
세미온이라고 불린 그 소녀 몸체를 입은 존재가 떠올랐다.
“그 녀석하고 아마 같은 일당이야.”
그러나 이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멜카드제윈은 더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왜냐하면 곧바로 초거대 물체의 음영이 하늘에 드리워졌기 때문이었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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