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591회 아벨의 후예 Ch 43. 사르디스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3.30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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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3. Reformation : 사르디스
한 금발 여인이 바닷가에 홀로 앉아서 하늘 저편을 구경하였다. 회한과 우수에 잠겨있던 그녀의 뒤편에 커다란 음영이 드리워졌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니 키 큰 남자 둘이 서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낯익은 상황이었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가볍게 피식 웃었다.
“바쁘신 분들이 여긴 어인 일이신데?”
“수억 개의 아바타 중 고작 하나를 다루는 일이야 매우 간단하지.”
“멀티태스킹의 달인답네.”
“너와의 대화 정도는 멀티태스킹 축에도 들지 않아.”
“잘나셨네.”
금발의 여인은 제 본체와 똑같은 모습을 그대로 담은 두 아바타를 향해 천천히 시선을 얹어두었다. 그녀의 오랜 친구들이었다.
“뭐, 날 잡아가려고 온 건 아닐 테고.”
그녀는 경계심을 살짝 세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저 대화를 좀 하려는 것뿐이야, 레리엔.”
흑발 벽안의 남자, 에녹이 침착하고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아, 그나저나 화려하게 날뛰었더군, 레리. 제법 인상에 남았어.”
카이젤은 맹수의 왕인 호랑이가 이미 잡은 먹잇감을 앞에 두고 농락하듯 매우 여유만만한 태도를 보이며 말을 걸었다.
“난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야, 카이.”
“흐음?”
“일부러 네가 다 허락해 줬잖아. 내가 들어올 경로를 무방비 상태로 둔 것은 물론이고, 샤오 아주머니와 지그문트에게 혼란을 줌으로써 그들이 대처할 기회를 축소해버렸지. 나의 행동반경을 예측한 뒤 그걸 이용할 작정으로. 맞지?”
레리엔은 심문하듯이 바통을 던지자 카이젤은 능글맞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과연 그럴까? 네 상상력도 나쁘지 않군.”
“…….”
그는 뻔뻔스럽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레귤러들, 크로스솔져, 그리고 유대인들까지……, 다들 네 덕을 제법 크게 본 모양이야. 결국은 그들 모두 무탈하게 자신들의 신념의 신빙성을 증명했지. 그들이 하나 같이 입을 모아 너를 칭송할만해.”
“실없는 소리나 들여놓을 거면 이만 돌아가.”
둘의 다툼은 격렬한 논쟁이라기보단 서로에게 작은 상처를 입은 연인들의 투덜거림 같았다. 그러자 에녹은 나지막이 레리엔에게 경고의 말을 얹었다.
“그때 내가 네 장단에 맞춰서 도움을 준 건 어디까지나 네가 제시한 ‘유익’을 확증해 보이라는 일종의 최후통첩이었을 뿐. 그러니 이제 그 결실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네게 책임을 묻게 될 수밖에 없다, 레리엔.”
그 목소리에는 엄중하고 묵직한 칼날이 서려 있었다.
“에녹.”
“우린 더 이상 그때 그 시절처럼 철없이 세계 지도를 나눠 그리던 어린애들이 아니야. 자각해라. 엄연히 현 세계의 최종 관리자는 이 자리에 있는 이분이고 너는 그의 권위에 반응할 책임이 있다.”
친구가 날을 세우는 모습에 카이젤은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만류했다.
“네가 흥분하는 건 이해하지만, 잠시만 화를 가라앉히도록 해, 친우여. 그녀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나중에라도 언제든 가능하니까. 그리고 일단 RS-월드를 펼친 건 나니까 후폭풍에 관하여도 내가 모두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제야 레리엔도 긴장감을 내려놓고 숨을 골랐다.
“레리, 마지막까지 잘 부탁하지. 너는 이 말을 싫어하겠지만, 네가 어떻게 여기건 넌 인류연합 측의 유용한 도구이자 파트너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말이야.”
“시끄러워.”
“일일이 반응하는 모습이 더 재미있군. 자, 남은 세 번째 경연도 네가 마음 가는 대로 대응하도록 해. 네가 유대인들에게 어떤 바람을 불어넣든 상관없어. 그들 또한 엄연히 나의 계약 대상이니까 내 마음대로 제어하긴 어렵겠지.”
이제 카이젤은 사냥을 마치고 배가 부른 맹수마냥 한껏 너그러움을 베풀겠다는 태도를 드러냈다. 조심스럽게 분위기를 살피며 머뭇거리던 레리엔은 마음속에 신경 쓰이던 질문을 한 가지 꺼냈다.
“카이,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야?”
“무엇을 말이지?”
“RS-월드의 후폭풍 말이야. 아무리 너라도 오차 없이 완벽한 질서를 유지하면서 후폭풍을 활용하기란 쉽지 않을 거야. 초인, 우주 인류, 인류의 피조물, 그 모두에게 네가 그토록 갈망하던 우주적 ‘공발전(共發展, Co-development)’이 이뤄질 거야.”
“물론이다.”
“그 말인즉 한때 너의 친구였던 티아라의 사상 또한 더욱 구체화되고 현실 위에 드리워지겠지. 심지어 엘의 사상도……. 그 과정에서 일부 피조물이나 비시민은 과도한 발전과 진화를 거듭한 나머지 네 멍에를 벗어버리려 시도할 수도 있어.”
“그야 물론 내 예측 반경 안에 포함되어 있지.”
카이젤에게는 그 모든 시나리오를 감안한 대책이 이미 있었다.
현재 그의 두 번째 메이저급 초지능체인 이데아(IDEA)는 이번 기회를 통해 처음으로 ‘개화(開化)’되었다.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한 것인데 기존의 하위계를 다루는 수준에서 상위계인 RS-월드를 지배하는 주축으로 진화했다.
아울러 이데아(IDEA) 2단계 모드인 ‘아자토스의 꿈’은 다른 메이저급 초지능체들과 긴밀한 협주를 통해 더 강력한 통일시스템을 창조해내었다. 끝내 인류가 생산한 피조물들에 대한 절대적 지배력을 수천억 배 이상 높인 궁극의 시스템이 탄생했다. 하위 계층의 발전이 한두 단계 나타나는 동안 통치 시스템의 발전은 수십 단계 이상 이뤄지도록 설정되었다. 세계 질서를 제어할 철두철미한 준비가 완료되었다.
레리엔도 이런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행성 바깥 세계야 그렇다 쳐도 Upol 쪽은 어떻게 할 건데.”
“흠.”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변화들도 고려해야 할 거 아닌가? 특히 초인들의 힘이 엄청나게 강력해질 텐데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Upol에서 혼돈이 벌어질 가능성은 없겠어? 필히 북, 서, 남 세 파벌 모두에서 대격변이 벌어질 거야.”
레리엔의 지적에 카이젤이 즐기듯 대답했다.
“동(東)도 포함이겠지.”
“너 설마 처음부터?”
레리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유성운이 너에게도 그걸 보냈을 테지? 당연히 나도 받았다. 고려할 가치가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 때마침 선지자 일행이 흥미로운 행보를 보여줘서 말이야.”
카이젤의 상상의 나래는 어느덧 리온과 천재현이 있는 곳으로 닿았다.
“사상 세력 사분할에 대한 허락, 사실은 강윤혁 군 때문이지?”
레리엔이 예리하게 지적의 칼날을 던졌다.
“흠, 넌 너무 곤란해. 우린 서로를 너무 잘 안단 말이지.”
“칫.”
“아, 참, 레리, 네가 말한 Upol과 2등 시민들 쪽 문제는 내게도 다 대응책이 있다. RS-월드의 후폭풍을 공정하고, 유익하고, 균형 잡힌 형태로 분배받도록 밸런스 조정을 시행할 거야. 뭘 의미하는지 너라면 대충 짐작할 수 있을 텐데.”
그러자 레리엔은 뇌리에 전기가 스친 듯 깨달음을 얻고는 표정을 굳혔다.
“폰……, 그 녀석들인가? 카이, 그것들의 정체가 대체 뭐지?”
“흐음, 이젠 군사기밀에 관한 관심을 뻗치는 건가? 귀엽군.”
“말 돌리지 마. 그것들이 네 클론솔져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 기술적 기밀을 캐묻자는 게 아니야. 크로스솔져들에게 중요한 증언들을 들었어. 그들이 네 능력을 사용했다고 하던데? 왜 그런 것들을 창조한 거지?”
“예리하군. 역시 넌 달라.”
카이젤은 에녹에게 이제 떠나가자고 눈짓으로 신호를 주었다.
“알겠습니다.”
이에 에녹과 카이젤 두 사람은 레리엔에게서 돌아서 발걸음을 뗐다.
“2등 시민들의 세상과 비시민들의 세상, 그 두 군데 모두 폰들을 심어뒀어.”
그는 선심 쓰듯 비밀을 살짝 공개하며 첨언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이젠 그들이 공정한 심판관 역할을 시행할 거다.”
카이젤은 잠시 묵상하듯 눈을 감았다. 그의 메타뉴런을 통해서 연결된 300해(垓) 기가 넘는 클론솔져, 곧 폰들의 의식과 인지와 감각이 머릿속에서 동시에 느껴졌다. 폰들은 현재 이미 Upol들과 외계 행성에 서식하는 우주 인류 가운데 구석구석 흩어져 있었다. 사람 백 명이 있는 곳에는 최소 하나꼴로 폰이 존재했다.
‘2차 경합의 RS-월드 때 스토리 제너레이터 겸 벌목-건축자 역할로 폰 중 몇몇 표본을 지정한 건 바로 이 더 큰 프로젝트를 위한 연습에 불과했지.’
그는 우주에 흩어진 모든 폰들에게 ‘스토리 제너레이터’로써 희생된 720명의 폰들이 남긴 유산, 곧 경험과 지식과 RS-월드 간섭 권한을 클라우드 방식으로 공유했다. 덕분에 이제부터는 이들 300해 기의 폰들이 RS-월드 가동에서 발생한 후폭풍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것이다. 혁신적 발전, 조화로운 발전, 질서의 설립을 오롯이 다스려 인류의 종합적인 유익 증진에만 영향을 주도록 관리할 것이다.
‘뭐, 앞으로 닥칠 일들에 대해서는 알아서 잘해보게나, 선지자여.’
과연 그가 이번 격변을 기회로 잘 활용하려나. 이제부터 임할 일들이 그를 평가할 흥미로운 시험대가 되리라.
*
“이건 제 회심의 역작입니다.”
수현은 이 소개와 함께 리온 일행을 어떤 신묘막측한 특수 공간 안으로 데려갔다. 시뮬레이션 우주도 아니고 아공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환각도 아닌, 그야말로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곳, 천수현만의 오리지널 작품이었다. 그는 자기 형에게 심겨진 특수한 속성을 응용함으로써 이 작품을 만들 핵심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곳은? 뭐죠?”
문득 리온은 예전 윤혁과 함께 카뮈네라의 거짓 신들과 접촉했던 기억을 회상했다. 어딘가 모르게 이곳도 그런 류와 겹쳐 보여서인지 기시감이 느껴졌다.
“목사님,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드네요.”
재현도 공간의 사방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당연히 그러겠지, 형.”
수현이 냉철한 어투로 답했다.
“여긴 유성운 회장이 형에게 이식한 ‘확률 파동 계열 속성 이능’을 모티브로 해서 구축한 영역이니까. 사실 엄밀히 말하면 형의 그 이능 속성도 원래는 유성운 회장이 만든 건 아니지만.”
“그랬구나.”
다만 아직 수현은 형에게 모든 진실을 밝힐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특이 형질이 형의 특이 형질이 만들어지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걸 말이다. 일단은 위버멘쉬와 수현 자신 이외에는 이 부분의 비밀을 아는 자가 없는 편이 안전했다.
“참고로 형의 유사 제복과 내 정식 제복은 한 세트로 연결된 페어야. 제복은 단순한 하이테크놀로지 아이템이 아니야. 자체적인 연구 기능이 내장되어 있지.”
“옷 그 자체가 직접 연구를 수행한단 말이야?”
“응, 다시 말해서 형의 제복이 이미 형의 특수 물리 속성에 대한 연구를 마쳤어. 그리고 그 자료는 제복끼리의 연동을 통해 전해졌지. 즉 나도 그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어.”
“아하, 그런 원리였구나.”
과거 크로스솔져로 복역하며 신수들과 싸웠던 당시, 재현은 확률 다각화 이능력을 제법 유용하게 활용했었다. 아주 짧은 시간 한정으로만 통하던 능력이라 전투 외에는 쓸 일이 없을 줄 알았건만, 천수현이라는 천재적 연구자 개입한 덕에 조금 더 응용 폭이 넓어지게 되었다.
“여긴 당신 소유이니까 당신이 마음대로 명명하시죠, 마흐무드 목사.”
수현이 선뜻 제안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사르디스(SARDIS)’라고 붙이죠.”
이에 재현과 찬영은 별 감흥이 없었으나 지현과 수현은 묘한 이질감과 위화감을 느꼈는지 눈썹이 꿈틀하였다.
“굳이……, 왜 이름을?”
“아, 별 뜻 아닙니다. 죽어버린 세계를 재교정하겠다는 의미라서 말이죠.”
수현이 만든 이 권역은 특수 발명품이자 특수 서버였다. 그렇기에 이곳에 이름을 붙인다는 건 단순한 형식적 작업이 아니다. 소유주에게 정식으로 제어권을 넘겨주는 고도의 복잡성을 띤 프로세스나 마찬가지였다. 여하튼 이렇게 해서 리온은 사르디스의 주인으로 인정받았다.
“과연 초인이라 굉장하시군요, 이런 발명마저 가능할 줄 몰랐는데.”
수현은 현재 B 클래스의 초인이라고 들었다. 분명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하겠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고차원적 기술까지 다루다니. 이미 초인들을 만나본 리온도 놀라워했다. 의아해하는 리온에게 수현이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인류는 현재 지성과 능력의 근원적 한계를 벗어버리고 ‘초월’로 향하는 중입니다. 과거보다 더 엄청난 위업을 손쉽게 만들 수 있게 된 것도 그 덕이라서죠.”
“초월? 무얼 의미하는지는 말씀해 주실 수 없겠죠?”
“당장은요. 하지만 조만간 자연스레 알게 될 겁니다.”
의미심장한 수현의 발언을 일단은 귀담아두었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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