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620회 아벨의 후예 Ch 50. 소원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6.17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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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S-월드 전개가 지난번 단 한 번으로 끝난 건 아니었다. 인류연합은 첫 번째 전개 때 발견되었던 미흡했던 점들을 보완하고 앞으로 더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방법으로 RS-월드의 후폭풍을 활용하는 전략을 확립하고자 거듭 연구했다. 이렇게 방법론이 확고히 굳어지자, 카이젤의 주도하에 RS-월드를 대략 일 년에 한 번꼴로 주기적으로 전개하기로 결정되었다.
대신 평상시의 근진계 활용 방침이 조금 달라졌다.
먼저, 아엘브론과 레뮬로스와 지구 핵을 동시에 둘러싸는 지구 관통형 원통 막(膜)을 세 겹 연달아 만들고, 각각의 얇은 막의 재질을 미완 형 RS-월드로 채웠다. 이 세 겹을 RS-필드(RS-field)로 명명하였다. 바깥쪽에서부터 제1 필드, 제2 필드, 제3 필드로 칭해졌다. 이 세 층의 RS-필드는 QUASAR-II 같은 에너지원의 공급이 없이도 상시 안정적으로 가동되었다. 사실상 자발적으로 유지되는 영구 동력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제1 필드의 경우에는 똑같은 성질의 RS-필드가 지구뿐 아니라 우주 전역에 흩어진 Upol이나 외계행성에도 동일하게 설치되었다. Upol의 구성 성분 중 가장 중심부에 가까운 구각 면이 RS-필드가 되었다. 외계행성의 경우 적도 면과 자전축이 RS-필드로 채택되었다. 이것들은 지구에 설치된 제1 필드와 연속성을 이루는 공간으로, 공명도 가능한 구조물이었다.
제1, 제2, 제3 필드는 상시 가동형 시설인 동시에 특수한 때를 위한 일종의 마중물 노릇도 한다. 1년에 한 번씩 정해진 날짜가 돌아오면 이 필드들이 별도의 공급원 없이 자체적으로 RS-월드를 생성해 내도록 설계되었다.
원리는 이렇다. 제로원의 중심에 가장 가까운 제3 필드가 RS-월드의 생성 핵이 된다. 이 월드가 제2 필드를 매질로 삼아 확산된 뒤 제1 필드로 섞여 들어간다. 물론 연결되어 있는 지구 외 다른 지역의 제1 필드들로도. 그러면 지구, 하늘도시, 외계행성 모두에 일제히 필드의 확장이 일어나고 RS-월드는 그 근방 전역을 집어삼키게 된다.
지구의 경우 행성 전체, Upol이나 외계행성은 부분적으로 RS-월드에 침식된다. 대략 한번 가동 시 제1 필드의 연속체 전체 중 1%만 활성화되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니 한 해에 한 번씩은 우주의 모든 2등 시민과 비시민 중 1%가 RS-월드에 참여하는 셈이다.
설계상 첫 번째 가동 때보다 포괄되는 주축 영역이 훨씬 넓어졌으니 그만큼 가동 효율성, 효과의 다양성, 후폭풍의 질과 양, 그로 인한 문명의 성장 폭도 비약적으로 늘어나리라 예견되었다.
“세 겹의 필드라……. 아무래도 다음번 경합의 무대가 저곳이 되겠지?”
레리엔은 하와이 근방에 자리한 아엘브론을 올려다보았다. 세 가지 색깔의 원통 막 형태의 ‘특수 차원 기둥’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있었다. 세 기둥은 아엘브론이라는 도시를 감싸고 있었는데 흡사 마법에 걸린 것마냥 몽환적인 모습이었다.
“안녕, 레리엔?”
익숙한 고음이 들려왔다.
“마리아?”
“반가워. 정말 오랜만이네, 그렇지?”
흰머리에 갈색 피부, 건강미 넘치는 근육과 여성미가 넘치는 강건한 몸매. 남미 민족 특유의 매력이 돋보이는 화려한 미녀인 마리아 살바도르가 레리엔의 뒤편에 서 있었다.
“여긴 내 허락 없이는 못 올 텐데?”
“그래? 어쩌나? 리더께서 나더러 이곳에 머무르라고 하셨는데 어떡하지?”
마리아는 배 째라는 식으로 막무가내로 나아왔다.
“하아, 여전히 피곤하네.”
레리엔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섬의 결계를 걷어주었다.
“무슨 일이야? 업무상 반드시 요구되는 일이 아니면 돌아가 줬으면 하는데. 정중히 부탁할게.”
“겸사겸사. 일 때문에 온 건 맞는데, 너를 감시하는 것도 그 일 중 하나라서.”
마리아의 예리한 발언에 레리엔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긴장하지 않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카이가 날 감시하라고 하던?”
“어머나, 왜 이러시나? 그때 우주에 있던 나도 이곳 소문 다 들었어. 레리엔 네가 리더의 사업에 두 번씩이나 쓸데없이 참견했다는 걸 말이야. 뭐, 그것도 전부 그분의 손바닥 안에서 이뤄지긴 했지만. 어쨌건 네가 사고를 치니 이번에는 누가 미리 눈을 붙여둬야지 않겠어?”
아마도 3차 경합 때는 얌전히 있으라는 뜻으로 감시자를 보낸 모양이다.
“카이의 사적인 부탁을 맡아줄 만큼 한가한가 봐, 마리아?”
“아, 너를 감시하는 게 주 임무는 아니야.”
“그러면?”
“난 이번엔 디자이너로서 지구에 왔어.”
“디자이너? 뭘 설계하겠다는 거지?”
“후후, 그쪽하고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야, 레리엔.”
마리아는 도시 사람이 미개인을 깔보듯 한 시선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맞춰볼지? 신격화 장벽, 그것의 디자인 때문에 온 것 맞지?”
레리엔이 예리하게 정곡을 찌르자, 마리아는 움찔거렸다. 레리엔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마리아는 능청스럽게 딴청을 피웠다.
“이런, 레리도 벌써 알고 있었구나.”
“워낙 소문이 시끄러워서 말이지. 섬에서 가만히 칩거하며 살아가는 나도 눈치챌 정도로.”
“그래, 우리 초인들에게도 나름 중요한 문제니까 말이야.”
가뜩이나 그렇지 않아도 격차가 크게 벌어진 세계 내 계층 시스템이다. 여기에 ‘인과율-택스 시스템’과 ‘신격화 장벽’이 추가로 설립됨으로 인해 이제는 넘을 수 없이 간격이 벌어지고 말았다. 레리엔이나 티아라 같은 중립자, 에녹, 그리고 윤혁과 루디아 같은 예외적인 언약 체결자가 아니면 이제 모든 인간이 이 두 종류의 장벽 시스템의 밑에서 굴복해야만 하는 처지다.
“마리아, 너는 요정을 발명할 때도 그랬지만, 섬세한 디자인 작업에 능숙했지. 카이가 적임자를 찾았네. 특히 신격화 장벽은 재구성 시 예술적인 능력도 필요하니까 너만 한 보조자가 없겠네.”
“호호, 칭찬인가? 뭐, 고마워.”
“그리고 이왕 순찰 나온 김에 나와 주민들에게 감시의 눈을 붙일 테고.”
이에 마리아는 느긋한 자태로 유대인들이 사는 마을 쪽을 살짝 훑어보았다.
“흠, 지금 내가 손가락을 살짝 까딱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네 힘으론 소용없어. 카이와 저들의 계약 때문에 아무것도 안 통할걸.”
“호호, 농담이야. 내가 설마 계약을 위반하고 해코지라도 하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주민들을 가소롭게 내려다보는 눈빛이 영 심상치 않았다.
‘마리아.’
레리엔과 마리아는 전부터 내색하지는 않아도 서로를 불편하게 여기던 사이였다. 특별히 어떤 원한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서로를 질투할 여지도 없었고 그렇다고 지역감정이나 민족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종종 사람은 특정한 상대에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거리낌을 느끼기도 한다. 이 둘은 그런 경우에 해당되었다. 모른 척하기에는 친분이 애매하게 깊었고 친구라고 하기에는 거리감이 있었다.
“조만간 결혼한다며.”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레리엔이 별 의미 없이 근황을 물으며 상대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그래도 알고 지내던 사이인데 영원히 어색해지고 싶지는 않으니까.
“……아, 뭐, 응.”
“축하해. 그 사람은 상식적이고 좋은 인간이니까 잘 지내봐.”
“넌 생각 없고?”
마리아의 되받아침에 레리엔은 침묵으로 응답했다.
“하긴 고귀하신 레이디께는 눈에 차는 격의 상대가 없으려나?”
“……무익한 소리는 그만 해.”
“너 사실 아직 리더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니고?”
이에 레리엔의 눈빛이 매우 날카로워졌다. 마리아는 주춤하였다.
“농담이야. 그냥 해본 말이잖아.”
“불편하니 그 이야기는 피해줬으면 좋겠네.”
“알았어. 아무튼 너야말로 몸 잘 사리고 조심해.”
마리아는 뒤돌아서서 제 걸음을 갔다.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
“너와 네 섬의 주민들은 계속 감시할 테니 허튼 짓할 생각하지 말고.”
레리엔은 가볍게 혀를 내찼다.
‘당분간은 아무런 움직임도 드러내지 말고 칩거해야겠군.’
*
시간이 흘러 다시 3차 경합의 날이 가까워졌다. 그동안 스테판은 잠정적 경쟁 대상이자 친구들인 후보자들과 더불어 지구 방방곡곡을 누비며 유랑에 가까운 여행의 시간을 보냈다.
크로스솔져나 다른 히어로들, 그리고 살아남은 다른 ‘폰’들을 포함하여 보조인원들과의 접촉은 크게 제한되었다. 그들과 접촉하여 대화할 시간은 대략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주어졌다. 폰을 제외한 보조인원들은 보호구역에서 지냈고 폰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는지 아예 모습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다행히 후보자인 이레귤러들에게는 비교적 지구 내에서 거취와 이동의 자유가 많이 허락됐다. 하지만 그들도 긴장감을 늦추지는 못했다. 어쩌면 이것이 최후의 순간이 이르기 전에 베푸는 일말의 자비일지도 모름을 알기에. 2차 경합 때도 보았듯 언제든 탈락의 가능성은 현실이다.
다음번에 탈락자들의 운명이 어찌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처음에 탈락한 41명은 다시 제로원의 시설에 구금되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이레귤러라는 이유로 실험체로 이용당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2차 경합 때 떨어진 60명은 더 좋지 않다. 그들은 아직 RS-월드에 봉인된 상태다. 살아있기야 할 테지만 언제 풀려날지는 전혀 기약이 없다.
‘어쩌면 다음 차례는 내가 될지도 모르겠소.’
결국에는 열 명 중 하나만 남을 테니 확률상 탈락 위험이 훨씬 더 컸다.
‘떨어진 자의 운명도 걱정되지만, 솔직히 말해서 더 염려되는 부분은…….’
이겼을 경우의 일이 두렵다. 스테판은 대체 저들이 말하는 ‘소원’의 정체가 뭘지 진지하게 궁금해졌다. 단순히 문자 그대로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는 뜻일까. 하긴 인류연합 지도자의 어마어마한 권력과 권능과 부와 천재성을 생각한다면 웬만한 범주의 소원은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 장치가 숨어있다면?
‘이건 기회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위기일 수도 있소.’
아무리 생각해도 인류연합 수장은 이레귤러들은 물론이고 우주 인류 전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더욱이 스테판은 RS-월드에서 깨어나기 직전에 스치듯 본 환상이 자꾸만 뇌리에 남았다. 구체적인 형상은 기억에서 지워졌지만, 뭔가 모르게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잊어버려도 되는 걸까.
‘윤혁은 아직 답장이 없구려. 먼 곳에 있나 보오.’
최근 크로스솔져들과 면회했을 무렵 좋은 기회가 하나 열렸다. 때마침 중립지대의 여주인이 특수한 방법으로 우주에 메시지를 보낼 방도를 찾았다길래 스테판 자신이 몇 달간 끙끙 앓았던 고민과 의문을 정리하여 윤혁에게 편지를 보냈다. 형과 가까이서 지냈던 윤혁이라면 혹시나 그자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나온 시도였다. 물론 윤혁과 루디아가 워낙 먼 우주에 있어서인지 답변은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다음 회차에서 연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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