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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628회 아벨의 후예 Ch 52. 제2필드와 제3필드 (1)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7.08 | 회차평점 0 0

 

 

 

Chapter 52. Survival Contest : 제2 필드와 제3 필드

 

 

 

 

 

 

 

 

임재의 구멍 너머로는 작은 틈새가 있었다. 열 명은 가까스로 그 좁은 통로를 향해 뛰어들었다. 문지방을 넘자마자 곧 제1 필드와의 접속이 완전히 끊어졌다. 이내 열 명의 실존 형태도 아까와는 상이하게 뒤바뀌었다.

 

 

임재의 구멍이 일종의 ‘필터’로서의 기능을 하였기에 후보자들의 본체는 상당부분이 깎여나갔다. 마치 빛이 얇은 슬릿을 통과할 때 회절 간섭을 거치는 것과 흡사했다. 이로써 지금껏 제1 필드에서 축적되었던 기억과 지성과 경험과 시간과 힘이 본체 손실에 비례하여 소실되었다.

 

 

초거대 형태 신수의 임재는 이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틈새를 통과하면서부터 서서히 그 영향력이 옅어지더니 제1 필드를 빠져나간 뒤로는 아예 그 냄새조차 자취를 잃었다. 대신에 이번에는 또다른 존재의 지배력이 피부에 와닿았다. 이제 영역을 지배하는 주인이 바뀌었다. 아까 맞상대했던 존재는 감히 비교조차 불가능할 만큼 거대하고 막강한 자. 굳이 학습하지 않았는데도 온몸이 공포로 전율하였다.

 

 

바로 그 시각, 필드의 감찰자 카이젤은 차원 너머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엘, 네가 어떤 허튼수작을 부렸는지 솔직히 아주 조금은 궁금했어.”

 

 

덫에 걸려든 손님들을 맞은 그는 미리 준비된 연구 작업을 개시했다.

 

 

“네 실력으로는 턱없이 불가능한 일이었을 텐데 말이지. 당시는 우리 인류의 과학 기술과 의식 수준이 지금과 비교해 한없이 형편없고 원시적인 수준이었으니까. 심지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카리스마타의 활용법조차도 온전히 다 몰랐지.”

 

 

현재 5천 개 이상의 카리스마타를 보유한 그조차도 2차 각성 이전에는 153개의 카리스마타를 소유한 게 전부였다. 물론 최상위 초인조차 많아야 한두 개 갖는 점을 생각하면 경이로운 수준임은 분명했다. 경쟁자였던 나머지 네 친구조차도 두 자릿수 개수만큼의 고유 재능을 보유했으니 그는 분명 특출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 사건’ 이전에는 그 적은 개수의 고유 재능조차도 그는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고유 재능을 적절하게 사용하도록 보조해줄 기술력이 없던 탓이다.

 

 

카이젤도 그러하였으니 몇 수 아래였던 엘은 더더욱 그러하였으리라.

 

 

“넌 대체 무엇의 도움을 받은 게지? 인류의 매국노여.”

 

 

그는 제2 필드, 그 혼잡한 ‘어둠의 바다’에서 무질서하게 헤엄치는 열 명을 인식하였다. 카이젤은 자신의 지배력을 활용해 제2 필드를 조종했다. 근진계의 힘을 매개체로 사용해 열 명의 실험체의 정신세계를 엿보았다. 전에 칼리드가 이레귤러의 뇌를 해부했던 데이터를 보내주었다지만, 그것만으로는 몹시 미흡했다. 그는 엘 피어슨이라는 과거의 망령이 남긴 비밀을 직접 해부해보기로 결심했다.

 

 

 

 

 

“끄아아아악.”

 

 

“크윽.”

 

 

후보자들은 갑작스럽게 임한 정체불명의 격통에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무언가가 뇌리로 침식하고 있었다. 아니, 혼 그 자체를 침식하였다. 그 침식이 향하는 대상은 이레귤러들이 소유한 내부의 무언가, 곧 ‘왜곡된 표식’이었다.

 

 

침식해오는 그 미지의 힘은 그 자체로 엄청난 지성과 분석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후보자들은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을 체감했다. 동시에 그간 무의식에 묻혀 잊혔던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재생되다가 다시 소멸하는 과정이 무한히 반복되었다. 그 내용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하늘도시 시절에 그들이 겪어왔던 삶, 그들의 기원에 맞닿은 기억, 그들의 비밀, 나아가 그녀의 비밀까지.

 

 

 

 

 

“그랬었군. 역시나.”

 

 

그제야 이레귤러들 속의 왜곡된 표식이 철저히 분석되었다. 엘이 넣은 바이러스인 ‘최초의 오류’가 무엇이었는지 본질이 밝히 드러났다. 나아가 카이젤은 자기가 소유한 ‘역산(逆算)’ 용도의 카리스마타를 여러 개 동원하여 ‘최초의 오류’에 맞닿은 것들을 계산해보았다. 과연 그가 잘 알고 있던 몇 가지 고유 재능, 즉 엘 피어슨의 오리지널 카리스마타가 섞여 있었다. 이미 예전에 그녀의 능력을 복제 흡수해둔 적이 있던 카이젤이기에 인식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는 미리 복제해둔 그녀의 재능을 활용해서 ‘최초의 오류’의 수학적 모델링에 간섭했다.

 

 

“내가 파악하지 못한 다른 종류의 고유 재능들도 섞여 있다고?”

 

 

카이젤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엘의 고유 재능에 무엇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항목별로 낱낱이 알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이번에 ‘최초의 오류’ 속에 다른 성분도 섞여 있음을 감지하고는 의아해했다. 다행히 미리 그녀에게서 복제해둔 재능들을 더 높은 차원으로 강화시켰기에 알지 못했던 나머지 ‘미지의 고유 재능’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간접적 분석은 가능했다.

 

 

“흐음.”

 

 

연구 결과, 흥미로운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엘에게는 어느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던 카리스마타가 15개 더 있었다. 도피 생활 전에는 그녀 자신도 그 재능들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던 것인지, 아니면 특정 조건이 갖춰질 때야 비로소 각성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도 아니면……, 초자연적 도움을 받았다던가.’

 

 

자신도 모르게 깊은 분노와 경멸감이 느껴졌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프라이드를 내다 던지고 그따위 방법으로 재능을 강화하다니. 엘 피어슨은 더 이상 초인은커녕 인간으로 칭해질 자격도 없으리라. 그는 그렇게 심판하여 단정지었다.

 

 

이후 카이젤은 열다섯 개의 미지의 재능까지도 역으로 계산해낸 뒤 그것마저 학습해내었다. 이미 숱하게 단련된 그의 본성인 ‘학습의 괴물’은 더는 직접 보지 않고도 상대의 고유 능력을 허공에서 구현해내는 경지에 이른 상태였다.

 

 

이로써 이레귤러들을 통제하고 조작할 권한이 손아귀에 들어왔다. 이제는 QBE를 활성화하여 본격적인 게임을 전개할 차례다. 선을 넘어서 태산이 기다리리라.

 

 

“최고의 가치로 엄선된 열 개의 실험체라……, 엘이 선물을 마련해주었군.”

 

 

그의 강대한 사념이 제2 필드로 스며들었다.

 

 

 

 

 

 

 

 

*

 

 

 

 

 

옛 기억이 해부되는 고통은 얼마 안 가 눈 녹듯 사라졌다. 수많은 장면이 각 후보자의 뇌리를 반복해서 스쳐갔으나 다 지나가고 나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깊은 정체성 혼란이 후유증으로 남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들은 정체불명의 검은 물질로 이뤄진 아공간의 바닷속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3차원 공간이 아니었다. 얼핏 감지되는 차원 개수만 해도 최소 백 개의 축은 넘을 듯했다. 당연히 후보자들의 본체도 원래 알던 육체의 모습대로 인지되지 않았다. 정확하게 형태를 묘사하긴 어려워도 공간 초월적인 형태로 실존하는 듯했다.

 

 

그때 그들이 들고 왔던 구슬이 격렬한 반응을 일으키며 빛을 발했다. 강렬한 기운이 내뿜어지며 해당 차원을 잠식해갔다. 후보자들은 자신이 든 구슬의 힘에 휘말렸다. 이내 구슬이 깨어지더니 내부에 담겨있던 정체 모를 물질, QBE가 기괴한 형태로 변형되며 후보자의 본체를 집어삼켰다. 그들의 정신은 QBE에 침식당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의지가 흐려지며 정체성의 분열되는 극심한 고통이 임했다.

 

 

‘이건 위험해.’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집어삼켜진다!’

 

 

‘지금껏 구슬을 쓰도록 유도했던 게 설마 이걸 목적으로!’

 

 

‘대체 QBE라는 에너지는 정체가 뭐지?’

 

 

‘예상했던 대로 심판을 위해 준비된 물건이었나?’

 

 

처음 구슬을 받았을 때부터 다들 어렴풋이 불길함을 느꼈었다. 이 이질적인 힘이 담긴 그릇이 왜 그리도 불길하고 불편하게 다가왔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기독교 복음에 접촉돈 이들 모두가 잘 아는 비유, 열 명의 처녀와 그녀들의 등불의 이야기 때문이었다(마 25:1-13). 하나님을 믿는 열 후보자를 위해 예비된 시험이라 그런지 이번에는 유독 성경 말씀 속 이야기를 기묘하게 비틀어 오마쥬한 안티테제와 오마쥬가 많았다. QBE를 담은 구슬도 마찬가지였다.

 

 

QBE는 간접적으로나마 각 소유자의 영혼의 색을 반영하여 비출 수 있었다. 소유자가 QBE를 특정 방향으로 사용하면 해당 행동에 담긴 심리, 동기, 의도, 욕구, 추구 가치 등이 ‘본질에 거의 가깝게’ 투영되어 QBE의 색깔을 바꿔버린다.

 

 

이렇게 오염된 QBE의 색깔은 각 사람의 선택들이 그 기저에 어떤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반영해준다. 그의 선택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얼마나 영속적인지, 얼마나 정직한 마음에서 기인했는지, 진정한 동기가 무엇인지, 양심에서 얼마나 어긋났는지, 얼마나 깨끗하고 순결한 동기에서 우러나왔는지 등을 말이다.

 

 

마치 열 처녀가 각자의 통에 ‘기름’을 준비하거나 준비하지 않았듯, 열 후보자는 제1 필드의 험난한 난관들을 헤쳐나가면서 구슬 속에 ‘올바르고 영속적인 가치’를 담아 단기 포트폴리오를 생성하도록 과제를 요구받았다. 그 구슬에는 그들이 행해온 모든 어리석음과 슬기로움이 합산되어 누적되어 있었다.

 

 

제1 필드에서는 잠잠히 침묵하였으나, 이제는 그 축적된 선택과 과오의 합이 역으로 선택의 주체를 심판할 차례였다. QBE는 카이젤의 명령에 즉각 반응하여 활성화되었다. 그것에는 의지가 덧입혀졌다.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오염된 QBE는 그에 이제 적법한 방식으로 후보자의 정신을 침식할 것이다.

 

 

열 명 모두가 침식으로 인해 고통받았으나 모두가 함락당한 것은 아니었다. 비교적 순결한 방식으로 가치를 담아왔던 자들은 QBE의 침식을 견뎌내었다. 이들의 구슬 안에는 어리석음의 합계를 넘어서는 슬기로움의 합계가 들어있었다.

 

 

하지만 그 임계점에 도달하지 못한 이들은 속수무책으로 미지의 힘에 잠식당했다. 넘버 1, 13, 37, 103, 111은 그나마 잘 버텨나가는 쪽이었다. 그러나 넘버 5, 12, 19, 72, 108은 양팔 저울의 방향이 영 안 좋은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어서, 막아야 하오!”

 

 

불길함을 감지한 스테판이 외쳤다. 오로지 데이빗만 그 말뜻을 다 이해했다.

 

 

“같이 해봅시다.”

 

 

“늦어서는 안 되오!”

 

 

그 둘은 자기 구슬에 담긴 여유분의 ‘순결함’과 ‘슬기로움’을 위기에 휘말린 다섯의 잔에 옮겨 담았다. 천하의 카이젤도 성경의 비유를 완벽히 똑같게 모방해낸 건 아닌 모양인지 스테판과 데이빗에게는 ‘여유분의 기름’이 있었다(마 25:8-9).

 

 

그러나 그걸 나눠서 받았다고 해서 다섯 모두가 다시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몇몇은 회광반조(回光返照)를 보이다가 소생의 길로 돌아섰고 나머지는 그렇지 못할 듯한 기세였다. 이 이상은 스테판과 데이빗로서도 무리였다.

 

 

그 순간에도 열 명의 QBE 침식은 점차 가속되고 있었다. 곧 그들의 본체는 개화된 QBE와 완벽히 융화하더니 전혀 새로운 ‘어떤 형태’로 변화하였다.

 

 

 

 

 

(다음 회차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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