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19회 [2부] 40화. 그림자 회담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4.25 | 회차평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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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쉬튼은 대전쟁이 막 종결되던 해에, 막 즉위한 신임 황제 알폰스 1세의 자비로 인해 황실에 입양되었다. 과연 황제는 자신의 부패한 친척인 에쉬튼의 부모님에 대해서 전혀 몰랐을까? 그 배경에 도사리는 음흉한 영향력에 대해 무지했을까? 정답부터 말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다만, 황제는 어리지만 지혜로운 그 소년에게서 놀라운 가능성을 발견하였고 이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 이 부분은 에니그마의 사악한 수호자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정보였는데, 사실 황실은 헥스 같은 하찮은 힘 따위를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이것은 황태자의 존재 덕분이었다.
“안녕, 에쉬.”
열 살 무렵의 에쉬튼은 큰형님을 만났고 그는 그 날을 생생히 기억했다.
황실 밖의 한 인간을 입양하여 ‘브라이틀란트’라는 고귀한 성을 허락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첫 번째는 입양하는 당사자가 되는 ‘더 크라이스토브 브라이틀란트’의 전적인 양육 및 입양 의지였다. 두 번째는 그 입양하는 부모의 맏아들이자 입양될 자의 맏형제가 될 사람의 포용이었다. 이 원리는 유일하신 분과 그분의 아들께서 인류를 입양하기 위해 쓰신 위대한 원리를 본뜬 메커니즘이었고, 비록 모형에 불과했으나 일정량 실질적 권능이 속에 담겨 있었다.
그날 아이는 젊은 청년의 넓고 탄탄한 품에 품어졌다. 무조건적인 포용. 그 크고 부담스럽게 탄탄한 품이 버겁게 느껴지기는 했으나 그 친절은 불쾌치 않았다. 형님은 오랜 황실의 관례대로 어린 꼬마를 더러운 때로부터 씻어주었다. 그리고 그 만남의 예식이 무사히 완료된 후, 간악한 자들이 남긴 은밀한 오염은 물에 녹듯 제거되었다. 비록 에쉬튼 본인의 마음속 상처까지 치유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외부에서 씌워진, 본인의 의지를 왜곡하는 간섭 정도는 취소할 효력이 있었다.
황태자는 이렇게 약속했었다.
“형은 항상 네 편이 되어줄게.”
이후 에쉬튼은 자신을 속여왔고 옛 가족들을 속박해온 거짓말쟁이들의 세력을 배신하고 브라이틀란트 황가의 편으로 전향하였다. 원래라면 숱한 실패를 거쳤어야 할 것을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해결한 격인데 이런 내막을 적들이 알아챌 겨를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에쉬튼은 자신의 내면에서 이뤄진 변혁을 어느 쪽도 알지 못하게끔 은밀하게 숨겼다. 그래서 빛의 세력은 그가 속해있던 원래의 세상을 알지 못했고, 어둠의 세력은 그가 이미 돌아서 배신했음을 알지 못했다. 에쉬튼은 황실 내에서는, 그리고 형제들 앞에서는 적절히 거리를 둔 관계를 유지했다. 잘 섞이지 못하며 겉도는 듯한 행세를 하였다. 반면, 어둠의 세력이 보낸 첩자들 앞에서는 자신이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꼭두각시로 남은 것마냥 위장하며 의심과 혐오의 눈빛을 잘 숨겨두었다.
그렇게 에쉬튼은 양쪽 모두의 의구심을 피한 채 무사히 자라났고 자기 나름대로 재능을 발굴하여 실력을 갈고 닦았다. 그는 특수요원 겸 전략가의 자질을 드러내었고 중앙정보국에서 그 빛을 발하였다.
누구도 그가 그런 진로를 택한 것에 관해 의심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심지어 그를 제어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던 여섯 비밀조직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중앙정보국이라는 조직 자체가 황실과는 견제 관계에 놓인 집단이기 때문이었다. 그 특성 상 원래 황실의 견제자 노릇을 해야 하는 의회보다도 더. 사실 이것은 브리튼의 경우가 매우 이례적인 것인데, 보통 국가들에서 강력한 첩보 조직들이 중앙 정부의 충실한 충견 노릇을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어쩌면 어둠의 세력은 이렇게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정치적으로는 황실과 척을 둔 중앙정보국에 에쉬튼이 진입했으니 그의 향후 행방도 브리튼의 황태자와는 거리를 둔 방향으로 흘러가리라고. 실제로 들리는 여러 소문들에 의하면 에쉬튼은 다른 황자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었다. 적어도 풍문 상으로는. 이런 정황들을 고려해보면 중앙정보국은 되려 황태자의 자유로운 활동을 견제하거나 최소 걸림돌을 놓을, 좋은 견제자가 될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그리고 이것은 여섯 조직의 완벽한 오판이었고 어리석은 착오였음이 드러났다.
“워쳐들은 존재는 황태자의 비정직성을 드러내는 흠이나 마찬가지다.”
바일덴부르크 결사단의 제1 영도자가 말했다.
“사역마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인간 사회에 심어넣고 정보를 관측하게끔 명령한다고? 그 발상부터가 황실보다는 우리쪽에 가까운 방식이지. 알렉시스 황태자로서는 그것을 떳떳하게 여길 수 있을 리가 없어.”
그의 논리는 이러하였다. 워쳐들을 만들어낸 창조자이자 그것들을 인간들의 세상에 심은 황태자. 그의 그 행태는 완벽한 그의 명성에 있어서 옥의 티로 남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자신들 속에 숨어든 정체불명의 유사 인간들의 존재를 거리낌 없이 편안히 생각할 인간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물며 황실의 찬란한 명예와 도덕성을 기꺼이 의심하고 견제할 수 있는 담대함을 지닌 중앙정보국의 무리라면? 만일 그들이 알렉시스가 만들어낸 괴이의 존재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더 경계하며 촉각을 곤두세울까?
고로 알렉시스의 사역마들은 다른 조직들이라면 모를까, 결단코 중앙정보국만은 공범으로 초청하지 않을 것이다. 황태자 본인의 명예를 물어뜯길 거리를 제공할 뿐 아니라 황실 전체의 깨끗한 명성에도 오점을 남기게 되겠지.
그렇다면 의문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워쳐들이 돕지 않았다면 대체 어떠한 방법이 있단 말인가. 수 년 이상 그늘 속에서 감시의 시선을 드리워온 그들만큼 정확하고 정밀하게 여섯 조직의 인맥을 감찰해낼 존재가 세상에 또 존재할 리는 없다.
“만약에.”
자유건축가연맹의 제11 아키텍터가 발언을 시작했다. 그는 과학 기술계 쪽에 많은 인맥과 연줄을 가진 인물이었고 그 자신 또한 현대 기술에 대한 조예가 꽤 깊고 이해력이 상당한 사람이었다.
“이런 가정을 해봅시다.”
“무엇을 말인가?”
“현존하는 AI 및 AI 내장 유닛들 가운데에서 그 속성에 있어서 가장 미스테리한 존재들은 단연코 두 부류입니다. 우리들을 괴롭혀온 게슈타포들인 황태자의 관측자들, 그리고 다른 한 부류는 최근에 완성된 혁신작들입니다.”
“가디언엔젤이라 불리는 존재들 말인가?”
“그렇습니다. 이렇게 상상해보죠. 만일 특이점에 도달한 두 괴이 발명품들이 서로 협상하여 ‘밀월의 연맹’을 맺는다면? 그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요?”
잠시 무형의 회의석 가운데 침묵이 흘렀다.
“우리가 취합한 정보들을 종합한다면, 가디언엔젤이라는 기계종(種)은 중앙 제어를 전혀 받지 않는 독립 유닛입니다. 그들은 황태자를 돕지 않는 대신, 모종의 속성으로 인해 틀에 묶이지 않고 새로운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핵심이 되는 중요 속성은 ‘사람의 선과 악’을 일정 부분 분별하고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확실히 그림자 속 비밀 세력에 있어서는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황태자의 명령을 받지 않고 독립된 의지로 움직이는 존재들이기에 황태자로부터 정밀한 지시를 받기는 어렵죠. 이슬람을 상대할 때처럼, 겉으로 훤히 드러난 폭력의 세력을 상대할 때는 자율적인 선악 판단이 가능한 가디언엔젤들의 활약이 더 두드러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밀리에 숨겨진 은둔의 세력을 상대할 때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 경우, 가디언엔젤들은 자기들만으로는 공격적인 진취를 이뤄내지 못한다. 애초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가상의 어둠 세력’을 상정하려면 실상 음모론에 가까운 가정을 사고 회로 속에서 떠올려야 하는데, 이런 일은 세상의 은밀한 일들에 대한 정답을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지휘자의 명령이 있어야 시도될 수 있다.
“워쳐들은 반대로 황태자의 종복들이기에 처음부터 우리들의 색출을 목적 값으로 설정하여 행동 원리를 설정할 수 있었죠.”
“하지만 워쳐들에게는 가디언엔젤과 같은 ‘선악의 감찰과 반응’ 능력이 결여되어 있지. 서로에게 하나씩은 약점과 강점이 있는 셈이군.”
자연스럽게 한 가지 가정을 떠올려볼 만하다. 만일 두 기계 군단이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손을 잡는다면? 이 경우, 가디언엔젤들은 흩어져 있는 동안에는 떠올리지 못했던 ‘비밀 세력의 색출’이라는 새로운 목표값에 도전해볼 기회를 얻게 된다. 반대로 워쳐들은 가디언엔젤들의 도움을 받아 더 빠르고 효율적이고 정밀하게 목표 성취에 이르게 된다.
“두려운 가설이군. 하지만 그 일은 불가능하다.”
제2 아키텍터가 반론을 제거했다.
“우리는 이미 팀 아르다와 황태자 휘하의 연구원들, 그리고 커버넌트 그룹 내부에도 스파이들을 심어 그들로부터 정보를 넘겨 받았다. 그들에게서 온 정보에 따르면 두 기계 종은 그 기질과 작동 메커니즘 상 결코 소통이나 연합을 이룰 수 없다. 전산학적으로,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야.”
이것은 허위 정보가 아닌, 프로젝트에 직접 깊이 관여했던 몇몇 이들의 증언에서 나온, 신뢰성이 높은 말이었다. 워쳐와 가디언엔젤은 근본부터 비본질적 요소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완전히 다른 계열의 기술로 창조되었다. 두 종 모두 기존의 단순 전기 회로 대신에 양자 회로를 사용하는데, 설계 메커니즘이 완벽히 상이하며 기반이 되는 물리학의 방향성도 전혀 다르다. 하드웨어에 있어서도 재질 면에서든 화학식 면에서든 전혀 호환이 되지 않는 형태로 구성되었다. 내부의 알고리즘 또한 방향성이 하늘과 땅 차이로 다르다.
“두 괴이종을 창조해낸 것도 기행이나, 그 두 종족을 연합시킨다는 일은 더더욱 말도 안 되는 과업이다. 현 시대의 과학자들로서는 무리야. 황태자가 아무리 영리한 인간이라도 프로 과학자도 아닌 자가 그런 일을 성사시킬 리가.”
제2 아키텍터는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 공학에 대한 이해가 가장 깊은 사람이었기에 누구도 그의 말에 쉬이 반박하지 못했다. 불안감이 들기는 했으나 이성적으로 현재 주어진 정보를 고려해보면 그의 말이 옳았다.
바로 그때.
“그대들은 여전히 우매함의 쳇바퀴 위에서 벗어나지 못했군.”
불쾌한 생각의 음성이 무형의 회의장 내부로 불쑥 침투했다. 참석자들의 사념은 반사적으로 경계의 태세를 갖추었다. 익숙한 자의 침입. 분명 형식상으로는 아군임에도 불구하고 동물적인 거부감과 동족에 대한 혐오감이 그들의 감정을 빠르게 잠식하였다. 어쩌면 ‘질투심’ 또는 ‘열등감’이라는 표현이 이 감정의 정체를 더 올바르게 설명하는 말이리라.
“과거에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단 말이지. 사태를 바르게 깨닫지도 못한 채 자신의 오류에 갇혀 미래를 내다볼 힘을 잃었어. 그렇기에 그 모양 그 꼴로 몰락해 도살장으로 끌려갈 날만을 기다리는 것일테지.”
사념의 회의장에 진입한 사내. 그는 자신의 안락한 처소에서 편안히 등을 등받이에 기댄 상태로 다리를 꼰 채 어리석은 자들의 미련한 행태를 감찰하였다. 명목상이라지만 같은 배를 탄 동지들이거늘, 그는 전혀 동정심이나 공감의 태도를 갖지 않았다. 이것이 이 악마 같은 인간들마저 그를 거리끼는 이유였다.
“챈슬러.”
제1 아크비숍이 입술을 깨물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 회담의 최연장자인 그는 현재 제1 기사단장직과 제1 마탑주 직을 같이 겸하는 중으로, 여섯 조직 최상위 멤버들 가운데는 유일하게 최고위 장로직을 겸직하는 인간이었다. 참고로 제1 아크비숍은 지금 회의장에 개입한 이 사내와는 앙숙이자 악우(惡友) 관계였다.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녀석이 지금에 와서!”
“노친네들끼리 머리를 맞대봐야 별 뾰족한 수가 나오겠나?”
“감히 네 녀석이!”
한때 이 그림자 회담의 최고위원 의석에 포함되었으나 특유의 오만함과 독단적인 개인 행동으로 인해 동료들의 반발을 사 사실상 축출되었던 이 사내. 그러나 아쉬워해야 할 쪽은 그가 아니었다. 그는 늘 그러했듯 여유로이 동료들의 허둥거림을 즐기며 그들을 향한 조롱을 시작하였다.
“이 몸이 그대들에게 가르침을 베풀어드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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