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24회 [2부] 45화. 형님의 고민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5.07 | 회차평점 ![]() |
알렉시스와 비블로스는 아침 근무에 들어가기 앞서 잠시 바람을 쐴 겸 상공에서 바람을 맞았다. 고도가 아주 높지는 않아서 딱히 호흡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높은 산 정상에 등반한 듯한 기분이었다. 풀 슈트를 갖춰 입은 알렉시스는 거대한 비블로스의 본체의 어깨 부분에 앉아 구름들과 섬들, 그리고 개미처럼 보이는 땅 위의 마을들과 도시들을 감상하였다.
{동생들을 몹시 사랑하시는 모양입니다.}
“내 품에 주어진 아이들이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가문을 세우실 때 아버지와 큰아들이 아이들을 품에 앉고 책임지도록 세우졌지. 나는 아이들을 지키겠다고 그분께 맹약하기도 했고. 경솔한 서원일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정말 그럴 의무가 있으니까.”
{인간 세계에 존재했던 대부분의 왕가들과 황가들과 권세자들의 집안은 거의 백이면 백 형제 자매가 서로를 물고 뜯고 싸우던 모습을 보였습니다. 어째서 브리튼은 다른 것입니까?}
“보통은 그것이 우리 인간의 부끄러운 모습이지. 우리라고 도덕성이 우월한 것은 아니야.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약속을 지켜주시기로 했으니까. 그러니 우리도 그분을 믿고 반응해야지.”
{그분을 믿는다면, 어떤 부분에서?}
“모든 부분이지. 너는 영혼이 없으니 이해가 안 되겠지만, 인간으로서 그분께 구원받기 위해서는 순전한 믿음이 필요해. 그리고 일상의 삶에서도 우린 그분을 믿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어.
브리튼 황가의 문제도 마찬가지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둡고 탁한 인간의 시대 속에서 세상을 맡을 청지기로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어. 그리고 항상 이전 세대보다 다음 세대에 더 나은 지도자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 아울러 형제 가운데서 가장 강인하고 지혜로운 자가 맏이로서 가문을 이끄실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어. 그러니 우리는 그분 약속을 믿고 기대에 부응하는거야.”
그러므로 아버지에게는 자신이 아들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아들을 왕으로 세워주시리라는 분명한 깨달음과 인지가 있어야 한다. 황태자를 책봉하는 존재는 당대의 황제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 그러므로 황제에게는 황자 중에서 자신이 택하는 존재를 황태자로 세울 권한이 없다. 고로 그는 황태자에게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며 하나님께 아들을 온전히 내어 맡겨야만 한다.
언약에 의한 의무에 묶이는 것은 황태자도 마찬가지이다. 그에게는 변함이 없이 주어지는 ‘장자로서의 두 배의 몫’이 허락되었다. 자연 법칙보다도 더 확정적인 신적인 법칙에 의거하여서. 그러므로 그는 자기 동생들을 결코 시기하거나 미워해서는 안 되며 그들을 자신의 몸에서 난 아들과 딸처럼 품어야만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태도를 나타내기 위한 브리튼 황태자들의 마땅한 의무이다. 알렉시스의 아버지인 알폰스도, 그의 아버지인 전대 황제도 그러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이는 알렉시스에게도 요구되는 가치이다.
{그 절대적인 요구, 설마 입양된 황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겁니까?}
“맞아. 애초에 브리튼 적통 황가에서는 입양의 전제 조건 안에 맏형의 포용과 희생이 포함되거든. 내가 유타와 엘리어트를 동생으로 맞았을 때 나는 내 사랑하는 삼촌을 잃었어. 에쉬튼을 동생으로 맞았을 시절에는 목숨을 내어놓고 참전에 뛰어들 용기를 시험받았지. 그리고 리키를 받아들일 때 나는 시민들을 위해 내 자신의 몸과 정신의 망가짐을 각오해야만 했지.”
{에드윈도 그렇습니까?}
비블로스가 보기에는 에드윈 황자는 그리 브리튼의 황자다운 기품이 없는 남자였다. 도덕적으로나 명예로 보나 그리 내세울만한 품성이 아니랄까. 단지 엄청나게 잘생긴 외양이 돋보이고 탁월한 재능과 머리와 열정으로 인정을 받을뿐, 한 나라의 황자라고 하기에는 격이 부족해보였다.
“에드윈은 사실 내게도, 아버지에게도 아픈 손가락이긴 하지.”
알렉시스는 비블로스의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에드윈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용인이었어. 하지만 아버지는 그녀를 의자매로서 생각하셨지.”
{생각하셨다 함은, 법적으로 정식으로 받아들여진 건 아니라는 뜻이군요.}
“할아버지께서 반대하셨으니까. 전제 조건이 맞지 않았던 셈이지.”
{능력 면에서 부족해서 그런 것입니까?}
비블로스는 황자들의 능력치가 일반인과 격을 달리하는 수준임을 생각하며 나름의 가설을 사고 회로 속에 만들었다. 아마 브리튼 황가 직계 가문에 정식으로 입양되려면 건강, 지혜, 외양, 능력, 성품 등 모든 면에서 보통의 사람을 능가하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는 건 아닐까?
“글쎄. 내가 보기에는 에드윈의 어머니도 아름답고 명석하신 분이었어. 다만, 그분은 말하자면……, 당시의 황후, 즉 내 할머니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그리 고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은 아니셨지.”
{브라이틀란트 황가 내부의 문제 때문입니까?}
비블로스는 재빨리 데이터베이스 검색을 시도했으나 알렉시스가 곧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어 궁금증을 해소시켜주었다.
“신데렐라 설화는 알고 있지?”
{유럽에서부터 전승되어 온,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구전 설화 중 하나 아닙니까. 동양권에마저 비슷한 류의 이야기가 전승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야기가 쉽겠네. 브라이틀란트 황가 내부에서는 대대로 동화 같은 일들이 여러 차례 있었어. 아무래도 일반인들 보기에는 가장 동화 속 이야기 같은 세계이기도 하고.”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동화 속의 왕자님과 공주님’의 이미지가 극대화되어 현실 속에 나타난 버전, 그것이야말로 브라이틀란트 가를 잘 묘사해주는 표현이었다.
“내 할머니는 신데렐라와 비슷한 삶을 사셨던 분이었어. 높은 집안에서 많은 학식과 지혜를 배우며 자라나셨지만, 부모를 잃으신 이후 친척 집에서 정신적 학대를 받으며 자라나셨지. 강인한 정신력을 지니신 분인지라 꿋꿋이 인내하며 고난을 이겨내셨어. 그에 합당한 품성과 격을 지닌 분이기도 했고. 그 지혜와 현안으로 많은 이들을 아픔에서 구해내셨고, 그 고귀함을 높이 산 브리튼의 황가에 받아들여져 할아버지와 결혼하셨지. 외국인 출신이면서도 말이야.”
{그렇다면 에드윈 황자의 어머니는?}
“바로 그 신데렐라를 구박했던 친척 언니, 그녀가 낳은 딸이었지.”
{아아.}
그렇고 그런 일들이었구나. 황후가 된 신데렐라, 그리고 권선징악의 원리대로 벌을 받아 몰락한 신데렐라의 언니, 두 사람은 각각 찬란히 빛나는 알폰스 황태자와 그의 호위무사 노릇을 할 시녀를 낳았다. 부모 세대의 갈등과 달리 황태자와 그의 시녀는 친분을 쌓았지만 이전 세대의 갈등의 벽을 완벽히 극복하진 못한 모양이다. 비블로스는 참으로 오페라 극장에나 나올 법한 드라마틱한 이야기라 생각하며 감탄하였다.
{에드윈 황자에게도 대를 걸쳐 물려지는 열등감과 비교 의식의 감정이 전달되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만, 아무래도 부모와 조부모 세대의 정서적 영향이 완전히 무관한 변수로 작용하기는 어려웠을 거야. 에드윈의 어머니는 실제로 불우한 삶을 사셨어. 그녀의 어머니의 정서적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셨고 황가에 잘 연합하지 못하셨거든. 결국, 좋지 못한 결혼 생활을 하셨고 그 마무리도 좋지 못했지. 에드윈은 그래서 부모의 사랑도 온전히 체험해보지 못했을 거야.”
아마도 이러한 성장 배경과 정서적 배경이 그의 자유분방하고 반항아적인 태도에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솔직히 알렉시스로서는 에드윈이 많은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것을 들을 때마다 걱정이 앞서곤 했다.
“그 아이, 오는 여자며 가는 여자며 막지 않는 성격이야. 아버지 어머니 몰래 가볍게 만난 사람들도 꽤 많고. 아직 선을 넘지는 않은 것 같지만. 연애와 우정의 경계선에 얹은 애매한 관계도 문어발처럼 많이 만들어두었다고 들었어.”
이런 넋두리를 사람에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절대 보안으로 보호되는 자신의 종속체인 비블로스이기에 털어놓는 이야기였다. 사실 비블로스는 인간이 아니니 알렉시스의 넋두리도 엄밀히 말하면 대나무 숲에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의 행태와 그 기반 심리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얼굴은 또 빼어나게 잘생기고 몸매도 매력적인 데다 화술이나 사교성도 좋고 능력도 뛰어나고 경제력도 좋으니 상류층부터 하류층까지 거의 모든 여자들이 꼬일 수밖에 없지. 상류층은 결혼을 목적으로, 평범한 집안의 여인들은 돈 같은 불순한 목적으로 몰려들더라고.”
{생각보다 심각한 문젯거리였군요. 호되게 질책하는 편이 낫지 않을지.}
기계의 냉혹한 평가에 알렉시스는 피식 실소하였다.
“몇 번 부드럽게 타이르려 시도하긴 했는데, 오히려 잔머리를 더 굴려 교묘하게 선을 넘지 않으며 스릴을 즐기더라고. 성인이 된지라 통제하기도 쉽지 않아.”
{자칫하면 가문에 먹칠을 하지 않겠습니까?}
“절대로 혼전 순결은 어기지 말라고 엄포는 놓았지. 그래도 겁은 먹었는지 그건 잘 지키더라고.”
{그걸 일일이 감시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압니까?}
“난 그 아이의 표정을 분석할 수 있으니까. 내 앞에서 완벽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은, 적어도 내 가족 중에서는 없어.”
아마도 에드윈은 일말의 양심을 느끼긴 했을 것이다. 고아였던 자신을 포용해준 맏형이 어떠한 상태에 처했는지 눈으로 보아 생생히 잘 아니까. 그랬기에 그 자유분방함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성(性)적으로 경거망동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에드윈만 걱정은 아니야. 솔직히 내 다른 동생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 연애 문제가 많이 걱정되거든.”
황자들은 객관적으로 지나치게 잘난 남자들이다. 젊고 건강하며 체격이 크고 단단하고 키가 훤칠히 크다. 모두가 다양한 면에 있어서 다재다능하며 기본적으로 못하는 일이나 치명적인 약점도 없고, 자신만의 특화된 재주에 있어서는 자타의 인정을 받는 천재들이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경제적으로도, 신분에 있어서도, 출생과는 별개로 본인이 쟁취한 사회경제적 지위에 있어서도 정상 중의 정상에 속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남들이다. 최상위 연예인들이 오징어로 보일 정도로.
당연히 지극히 극심한 여난(女難)이 예상되는 바였다.
“난 그 아이들 모두가 행복하고 기쁜 가정을 마련했으면 해. 정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잘 만나서 멋진 인생을 살아갔으면. 물론 그 일이 무사히 잘 이뤄진 아이들도 있지만, 그 전까지는 나도 꽤 마음고생을 했거든. 아버지도 물론 고민하셨고. 아직 연애 사업이 완결되지 않은 아이들의 경우 지금도 꽤 마음이 쓰이지. 혹 이상한 것들이 접근하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야.”
알렉시스가 여기서 말하는 ‘이상한 것’들은 단순히 속물적이거나 신앙심이 없거나 마음이 혼탁하거나 불순한 의도로 유익을 추구하는 자들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브리튼 황가는 그 이상의 위험에 노출된 적이 많았다. 당장 자신의 어머니부터가 그 비극들의 산 증인이 아닌가.
“절대로 우리 세대에는 ‘그런 일’을 물려줄 수 없어.”
결연한 다짐을 확고히 하는 알렉시스의 표정에 비블로스는 대체 ‘그런 일’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하였다. 하지만 가정사를 함부로 파헤쳐서는 안 되는 법. 대신 좀 더 접근하기에 부담이 없는 쪽으로 다가가보았다.
{황자들의 연애와 결혼의 문제가 단순히 치정의 차원은 아닌 것은 이해하습니다. 무엇이 가장 염려되는 부분인지요? 제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호천사들과 순찰자들을 한꺼번에 움직여서라도.}
이에 알렉시스는 슈트를 해제한 뒤 편한 차림으로 앉아 설을 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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