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26회 [2부] 47화. 막내와 맏형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5.12 | 회차평점 ![]() |
한 달에 한 번, 네 번째 주의 휴일이 돌아올 때면 비블로스는 일시적으로 휴면 모드가 된다. 정확히는 그의 속에 들어있는 아홉 기의 가디언엔젤들을 해방시키는 때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이미 융합은 반영구적으로 진행된 상태라 가디언엔젤들의 본체는 그대로 비블로스의 하드웨어 속에 들어있되, 그것들의 단말형 아바타 몸체가 빠져나와 본래의 자율적 자아를 탑재한 채 행동한다. 잠들었던 비서들이 각성하면 그 반동으로 융합체인 비블로스는 동면에 빠진다.
이렇게 분리되어 나온 가디언엔젤 비서들은 알렉시스의 인간 비서들, 곧 그들의 파트너들과 행복한 재회의 시간을 갖는다.
이때 비블로스의 봉인을 풀어 부속품들을 해방시키는 열쇠는 비블로스의 인간 원본인 로빈 비서관이다. 그는 뇌파 연결을 통해 비블로스에 접속한 뒤 그것을 잠재웠다.
곧 귀여운 인형 형태의 아홉 유닛이 거대 로봇의 몸체에서 나와 로빈 뒤의 후배들의 품에 안겼다. 그것들은 각자 자신의 파트너에게 애교를 부리며 귀여움을 한껏 뽐내었다. 간만에 친구들을 만난 그들은 파트너의 아담한 몸체를 쓰다듬었다.
“잘 지냈지.”
{끼웅.}
“귀여워.”
{끼앙.}
애완 동물처럼 구는 그 로봇들의 이중적인 모습에 곁에서 지켜보던 알렉시스는 소름이 돋았다. 자신에게는 늘 매서운 눈빛으로 대하면서 주인들에게는 저렇게까지 달라지는구나. 로빈을 매개체로 삼아 비블로스를 창조하지 않았다면 저것들을 통제하지 못했겠지.
“자, 다들 편안한 주말 되시길.”
알렉시스는 비서들에게 후한 주말 선물과 함께 파트너 가디언엔젤을 안겨준 뒤 각자가 머물 처소 혹은 당직실로 돌려보냈다. 비블로스가 곁에 없으니 허전하기는 하지만 대신에 로빈이 있지 않은가. 최첨단 기계 비서에게도 훌륭한 쓸모가 있지만 인간 비서에게도 그 못지 않은 소임이 있는 법이다.
“오늘 특별한 일정은요?”
“공예배 참석이 끝나시면 막내 황자님과의 미팅이 있습니다.”
“아아.”
로빈의 보고에 알렉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팅이라기보다는, 사실 진료죠.”
“혹시 옥체에 이상이라도?”
“그건 아니고 정기 점검이요. 직업 특성상 필요한 부분이라서.”
알렉시스는 튀지 않는 사복 차림으로 갈아입은 뒤 로빈과 함께 자동 주행 차량을 타고 드라이브의 여유로움을 음미하였다.
일을 부려먹는 비서라기보다는 그저 곁에서 잡담을 들어주고 심심함을 달래주는 친구 역할에 가까웠다, 로빈은. 사실상 업무와 관련된 요소들과 일적인 영역에서의 만남들을 책임져주는 역할은 비블로스 하나로 충분하다. 그렇기에 로빈은 현재 황태자이자 공인으로서의 알렉시스의 보조보다는 한 개인인 알렉시스의 사적 삶에서의 케어를 돕는 역이었다. 특히 황태자로서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서 인간 관계를 관리할 때 로빈은 보조자로서 참견할 수 있는 영광을 허락받았다. 이를테면 알렉시스의 동생들이나 친구들과의 사적 만남의 자리를 관리해준다던가. 장기적으로는 인맥 면에서 로빈에게도 큰 유익이 될 것임은 분명했다.
“막내 황자님은 요새도 바쁘신 모양입니다.”
“본가에 거의 들어올 일이 없어서 아쉽죠. 들어올 생각이 없는 것일지도. 아마도 제가 관련되지 않는다면 황실과는 상관하고픈 마음이 많지 않을 겁니다.”
“이해는 됩니다. 찬란한 광휘를 내뿜는 위대한 가문이란 저 같은 소시민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짐처럼 느껴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리키는 엄연히 아버지의 아들인걸요. 그만한 능력과 격이 되니까 아버지의 눈에 들은 것이죠.”
브리튼 제국과 커뮤니스트 연방의 생사혈전 때 세상에는 많은 고아들이 생겨났었다. 속죄의 의미로 전쟁 종결 후 브라이틀란트 황가는 그들의 상당수를 지원하고 보살피며 교육시키는 복지 정책을 펼쳤었다.
바로 그렇게 거둬들인 여러 민족들과 지역들의 전쟁 고아들 중에서 단연코 가장 명석했던 한 중동 출신 고아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지금의 황자인 리카온 벤저민 브라이틀란트였다.
학대받는 환경에서 자라났던 그에게는 고아 복지 정책 전까지는 이름이 아닌 번호, 내지는 멸칭에 가까운 별명만이 있었다. 이름을 지어진 주체는 바로 황실이었다. 더 정확히는 알렉시스와 알폰스였는데, 둘은 브리튼의 후원을 받는 전쟁 고아들 중 이름이 없거나 저주스러운 멸칭만으로 불리는 이들에게 축복을 담아 이름을 지어주었다.
여하튼 리키는 아이들 중에서도 유독 돋보이는 천재성과 유능함 그리고 곱상하게 잘생긴 외모를 지녔는데 덕분에 빠르게 눈에 띌 수 있었다. 물론 그것만이 그가 황실에 입양된 이유는 아니었다. 유복함과는 거리가 먼 비참한 환경 속에서 자라났음에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와 끈질긴 열의와 강인한 본성, 그리고 사악함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랐음에도 더럽혀지지 않은 선량한 내면, 이것이 그가 황제의 선택을 받은 이유였다.
그때 그 꼬마는 높으신 분의 택함을 부담스러워했으나 거절하지는 않았다. 반드시 꼭 만나야만 했던 한 청년을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부끄럽고 죄송스럽고 미안했으나 그를 꼭 다시 만나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정작 만난 뒤로는 너무 민망했는지 아직까지도 온전히 고백의 말을 털어놓지 못했지만.
“도착했습니다, 전하.”
“그래요, 어서 가죠.”
차에서 내린 알렉시스와 그의 비서관은 정원을 배경에 둔 어느 한 사택 형태의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평범해보이는 건물이지만 그곳은 전문적인 시설들을 갖추고 있는 훌륭한 의료 기관이자 연구소였다.
알렉시스가 정원 안으로 발을 들이밀자마자 그들을 맞이하러 한 젊은이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호리호리하지만 제법 잘 단련된 마른 근육질의 체형, 알렉시스보다 조금 더 짙은 피부색, 반곱슬의 매력적인 머리를 한 그 남자는 공손하게 황태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였다. 알렉시스는 재빨리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살며시 품에 안아 애정 어린 인사를 건네었다.
“잘 지냈지, 리키?”
“형님, 여기까지 발걸음을 해주셔서 영광이에요.”
“우리 막내랑 오랜만에 보내는 시간인데 형이 직접 행차해야지.”
“다음번에는 저를 부르세요. 어디든 달려갈게요.”
“아서라. 의료인은 자기 맡은 구역을 지켜야지. 쉬는 날은 너도 쉬어야 하고. 형이 괜히 휴일에 불러내서 미안해. 달리 때가 맞지 않아서.”
“저는 형님 도우려고 의사가 된 걸요.”
큰형은 막내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오늘이 첫 진료일이네. 동생이 의사라서 좋네.”
“실망시켜드리지 않을게요.”
“네 실력 믿으니까 걱정 안 해.”
형제끼리 온후한 대화가 오가는 동안 로빈은 잠잠히 구경하며 대기하였다. 흔히 상상하는 황자들끼리의 엄격한 질서를 상상했거늘 너무도 상상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보통 사회 상류층 집안이 저렇게까지 막역하게 서로를 대하던가?
“비서관님도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는데, 안에서 차라도 같이 하시겠습니까?”
리키가 예의바르게 로빈에게 말을 얹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하지만 진료 일정도 있으니 저는 정원 밖에서 황태자 전하와 선생님이 시간을 나누시는 동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근처에 별장이 있으니 거기서 쉬고 있어요, 로빈. 숙식 시설과 여가 시설도 있으니 그저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면 됩니다. 주무셔도 좋고요. 일정이 끝나면 다시 연락드리죠.”
“네, 알겠습니다, 전하.”
알렉시스는 비서를 잠시 떼어놓은 뒤 동생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
리키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간은 그의 큰형님이다.
다른 가족들이나 친척들에게도 그런대로 인간적으로 좋은 감정을 갖긴 했다. 비록 가문 자체는 부담스럽고 버거운 짐이지만 그곳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객관적으로 훌륭한 인물들이니까. 대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있을 지언정 별달리 나쁜 감정을 품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애정을 온전히 쏟기 어려웠다. 황제이신 양아버지만 해도 그에게 느껴지는 감정은 존경심, 외경심, 공경 등의 마음이지 보통의 부자간의 친밀하고 끈끈한 애착으로 분류하기는 어려웠다. 조부님은 더욱 그러했다. 삼촌들이나 사촌들이나 먼 친척들 역시 자신을 대할 때 그런대로 존중의 태도는 발견될 지언정 그들의 시선에서 애착이나 소속감과 유대감을 발견하긴 어려웠다. 그저 자신은 친절한 대우를 받는 객(客),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그나마 예외가 있다면 형제들 가운데 가장 성격이 좋다는 테디나 제리 정도였으니 둘은 그래도 진심으로 리키를 자신의 동생으로 생각하며 아끼는 편이었다. 그러나 다른 형제들과는 묘한 거리감이 있었다. 적실 소생에 속하는 황자들과 황녀는 물론 입양아 출신들조차도. 특히 원래 막내였던 랜슨과 아델바이스 쌍둥이의 경우 리키를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귀여움받는 막내 자리를 빼앗겼다고 생각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리키가 보기에 대외적으로는 황실의 귀염둥이 막내로 받아들여지는 이들은 황녀가 낳은 쌍둥이 오누이지 자신은 아니었다. 이것은 올바른 자기객관화였다. 특히나 아델바이스의 경우 육촌 범위까지 포함하여 전전대 황제가 낳은 직계 후손 및 그 입양아들 가운데 홍일점이었기에 모두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했다. 생물학적 남성만 가득한 삭막한 집안에 지혜롭고 아름다운 공주님이 났으니 얼마나 귀엽겠는가. 심지어 테디나 제리조차도 리키보다는 아델바이스를 막내로 인식하는 듯한 태도를 자주 보였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알렉시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리키를 단순히 동생이라기보다는 자신이 가슴으로 낳은 아이처럼 대우하였다. 리키에게도 알렉시스는 형님인 동시에 진정한 의미에서 아버지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러한 친밀한 감정과는 별개로 의사로서의 리카온 교수는 전문가다움의 결정체였다. 애정하는 형님을 자신의 환자로 맡는 상황에서도 그는 냉철한 지성과 판단력을 흔들림 없이 유지하였다.
“편히 주무신다고 생각하셔도 좋아요.”
연구실 겸 진료실에 들어온 알렉시스는 외투를 벗어두고 진료를 받을 준비를 하였다. 미리 어떤 의료 행위를 진행할지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두었기에 별도의 설명 과정은 필요 없었다.
“흐음, 아무래도 탈의는 필요하겠지?”
“네, 특수 설비 연결이 필요해서요. 커튼 쳐 드릴게요.”
“괜찮아. 나랑 동생밖에 없는데 뭘. 준비되면 말해줘.”
알렉시스는 미리 마련된 천을 허리춤에 두른 뒤 몸에 걸치던 것을 모두 떼어내었다. 평소의 강인한 위치에서 연약한 한 명의 환자로 입장이 바뀌니 어딘가 모르게 부끄러움이 들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수건 한 장만 두른 차림으로 의사가 준비해둔 특수 설비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마련된 특수 침상에 그가 눕자 곧 장치들이 그를 에워둘렀다.
“불편한 곳은 없으시죠?”
“응, 편안해. 온도나 습도도 적합하네.”
“수면 상태에서 형님의 상태를 점검할 예정이에요. 잠시 잡념은 내려놓으시고 편안한 생각만 하셔요.”
리키는 직접 형의 몸을 여러 진료 기구로 체크한 뒤 생체 징후가 안정적임을 확인하였다. 그후 그는 직접 연결형 부착 기구들을 형님의 커다랗고 탄탄한 몸 위에 붙여주었다.
“타르타로스 가동 때 내가 강제했던 일을 비슷하게 겪으니 기분이 어색하네.”
“뇌파 연동만 비슷하지 메커니즘은 전혀 다르잖아요. 수면다원검사하고 비슷하다고 보시면 돼요.”
“그래, 잘 부탁할게.”
미소로 동생을 안심시킨 알렉시스는 얌전한 양처럼 누워 장비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따스한 액체가 그의 몸을 에워둘렀고 가느다란 선들이 촘촘하게 짜여져 그의 몸 표면과 얕은 부분으로 침투하였다. 여러 장비들이 곧 가동되었고 연계된 컴퓨터들이 운행을 시작하였다. 알렉시스의 정신과 혼, 그리고 뇌는 부드러운 파동의 오케스트라 선율에 잠기듯 서서히 긴장감을 내려놓았다.
‘생각보다 편한 걸.’
누구보다 강력한 철인이지만 그만큼 고생도 많이 하였고 정신적, 육체적 짐 또한 많이 거머쥐었다. 자신 스스로 무거운 족쇄와 짐도 많이 자처하였고. 그러므로 알게 모르게 내면에는 생채기들과 손상이 많이 쌓였을 수밖에. 더욱이 아직도 온전히 치유되지 않는 깊은 회한, 마음의 부서짐, 충격은 그에게 중요한 숙제였다.
‘동생에게 맡기길 잘했네.’
얼마 전, 그는 기나긴 고민 끝에 망설이던 결정을 과감히 실행에 옮겼다. 마음의 훼손들에 대한 해결을 위해 동생의 도움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용기를 낸 알렉시스는 막내에게 연락하였고 그를 자신의 정신과 주치의로 받아들였다. 리키는 평생 염원하던 과제였던지라 속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춘 채 기쁜 화색으로 형의 용기를 응원해주었다.
“형님, 정말 잘 결정하셨어요.”
그때 리키는 매우 기뻐했다. 지금도 그러했다. 그는 천천히 눈꺼풀을 떨어트리는 자신의 듬직한 형님에게 상냥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틀림없이 이전처럼 회복되실 수 있을 거예요.”
의사가 환자에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경솔한 보장을 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러나 이번만은 리카온도 그 금기를 깨트렸다. 이것은 자신의 결의이자 염원이자 목적이기도 했기에. 어차피 완전한 회복 이외의 가능성은 허락해둘 생각도 없었으며 믿지도 않았다.
알렉시스는 깊은 무의식의 수마에 잠겼고 관측 장비의 손길에 자신의 생각과 꿈들을 그대로 내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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