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39회 [2부] 60화. 잠든 황태자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6.13 | 회차평점 ![]() |
지혜자 아미르. 그가 적을 훼파하기 위한 효력 있는 강력한 단도로 발탁된 것은 고작 소년 시절의 일이었다. 막 열여섯이 되어 푸르르게 익어가던 그 유대인 소년의 가치를 발견했던 사람은 어느 멋진 신사였다.
제 소개에 따르면 마흔을 조금 넘긴 나이임에도 그는 기껏해야 이십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외모였다. 진갈색과 밀색이 절묘히 섞인 그 남자는 선명한 자안이 돋보이는, 어른스러운 성숙함이 두드러진 미남이었다.
“네가 그 천재 소년이로군.”
그 아저씨는 아미르를 초면부터 높게 평가해주었다. 실제로 아미르는 당시 브리튼령에 거주하는 유대인 사회 가운데 최고로 현명하고 영특한 새싹으로 인정받던 자였다. 오백 년에 한번쯤 나올까 말까 하는 현인. 뭇 학식을 깊게 익혀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수 있는 자. 어린 랍비이자 권위자. 이것이 그를 설명해주는 칭호들이었다.
“네 동족들이 너를 ‘호크마’의 수호자라고 칭한던데.”
꿍꿍이를 알기 힘든 그 미남 신사는 느긋한 웃음을 머금은 채 당황해하는 어린 소년을 떠보았다.
“선생님께서는 무엇에 대해 듣고 오신 것입니까?”
“이모저모를. 난 그대의 종족의 전통과 유산들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랍비들께서는 이방인들에게 우리에게만 속한 신비들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무슨 방법으로 접근하셨길래 우리에 대해 캐내신 것입니까?”
“이런, 까칠한 친구로군. 먼저 가까워지는 것이 먼저인가?”
남자가 어떻게 그 소문을 들은 것인지는 몰라도 일단 사실이었다. 이방인은 알지 못하는, 오로지 유대인들의 사회에서만 전승되는 유산 겸 비밀. 호크마란 그런 것이었다. 아니, 전 세계 유대인들 중에서도 가장 슬기로운 랍비 수십 명만이 그 형이상학적이면서도 실체적인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카발라 같은 영적인 신비주의 따위와는 거리가 먼, 훨씬 더 실천적이고 고차원적이며 투명하며 분명한, 신적 의지의 소산이었다.
수천 년간, 유대인들의 생존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요소 중 하나가 바로 호크마였는데 이 사실을 알거나 이해하는 이는 극소수의 최고위 랍비뿐이었다. 다윗의 혈족과 레위의 혈족이 섞임으로서 빚어진 열매, 그 무형의 정신적 자산은 혈통적인 유대인들 사이에서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기전을 통해 유전되어 왔다. 그 덕택에 많은 유대인이 태어나면서부터, 혹은 후천적으로 생존에 적합한 슬기로움을 획득해왔다. 지식과는 다른 개념인 지혜. 그들은 지혜를 친구로 삼아 세상을 견뎌왔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 유산의 주도권을 빼앗겨버린 그들에게 호크마의 유산마저 없었다면 그들은 진작 멸종했으리라.
브리튼 건국 이전에는, 좀 더 정확히는 크리스토프의 계약 이전에는 유대인들의 호크마가 분산된 형태로 유전되고 계승되고 있었다. 이렇게 분산된 형태로 편재할 때 호크마는 종족 내부의 강화를 유발하는 장치로 작동하였다. 덕분에 많은 영재들이 유대인들 가운데서 출현하였다.
하지만 브리튼 언약이 체결된 이후에는 그 유전 패턴이 달라졌다. 생존의 기회가 열리자 더는 악착 같이 행동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일까? 호크마의 유전 패턴은 점점 ‘압축되는 방식’으로 수렴하였다. 특별히 브리튼 영토 내의 유대인 사회에서는 이런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이렇게 압축된 호크마의 계승자가 바로 당대 세대에서는 아미르였다. 그가 사람들의 지혜를 일깨워주는 재능에 있어서 탁월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는 가르침에 능숙했으며 계몽에 능통했고 인간의 마음을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객관성과 과학성을 향해 나아가게끔 하되, 합리주의의 함정이 아닌 올바른 영성과 지성의 균형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 호크마를 품은 그릇은 자기 자신을 위해 그 힘을 쓰지 못한다. 오롯이 이웃과 주변과 세상에 지혜의 축복을 내릴 수 있는, 이타적인 작용의 매개체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나 호크마의 계승과는 전혀 관계 없이 별개로, 아미르는 본인 스스로도 천재였다. 바로 그렇기에 그는 호크마의 그릇으로서의 자질을 보다 더 이기적으로, 좀 더 정확히는 종족 중심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그랬던 소년의 영역에 침투해온 최초의 탐식자가 바로 이 청년이었다. 그는 친분을 쌓기 위해 가면을 벗고 신사의 모자를 벗어 맨 얼굴을 드러내었다. 그 이목구비가 드러나자마자 아미르는 크게 놀랐다.
“황태자?”
브리튼의 모든 남자들과 여자들에게 인기와 신임을 한껏 받던, 아름다운 미남자 알폰스 황태자. 그 유명한 얼굴과 정확히 똑같이 생긴 모습이었으니, 말 그대로 눈썹 하나와 얼굴선 하나에 털의 색채와 채도까지도 정확히 같았다.
“그분은 내 형님이지. 난 그의 일란성쌍둥이 형제고.”
이것이 그 ‘대공(大公)’과 소년 랍비의 첫 만남이었다.
대공은 아미르의 친구가 된 뒤 그의 재능을 색다른 방향으로 일깨워주었다. 고고한 랍비의 영역을 뛰어넘어 가공할 사냥 병기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정치 투쟁의 기법이라고 해야 할까나. 언어, 사상, 설득, 기밀의 파헤침, 그리고 세계 정세의 본질을 읽는 감찰안까지. 이 모든 개화를 대공의 사사를 통해 얻었다.
대공은 청년이 된 아미르를 자신과 비슷한 류로 성장시켰고 그를 활용해 브리튼의 정적들과 외적들을 부수는 일에 도움을 얻었다. 가장 먼저는 당시 암약하며 활동하던 두로와 에돔의 후손들, 곧 바벨 시티의 에니그마의 수호자들을 적대하였고 각계각층에 심겨진 그들의 씨들을 솎아내는 일을 도왔다. 또한 역사의 왼쪽 날개인 커뮤니스트 연방에서 흘러들어온 사상범들과 첩자들을 몰락시키는 일에도 동참하였다.
결과적으로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상당수 반 브리튼 세력의 몰락의 배후에는 은밀하게나마 아미르의 계략과 활동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많은 범죄 카르텔의 치부가 드러나게 하였고, 정치가들의 추악한 실체가 폭로되게 하였으며, 비리를 범하는 회사들이 몰락하게 하였다. 대공과 황태자는 젊은 코헨의 도움을 발판 삼아 황가와 나라를 위협하는 적들의 세력을 축소하였고 그것들이 싸움에서 꼬리를 내리고 음지로 숨도록 하였다.
이토록 굳건한 신뢰와 의리를 형성한 대공과 랍비였으나, 그럼에도 랍비가 온전한 믿음으로 자신의 멘토에게 모든 것을 열어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일례로 그는 끝까지 호크마의 미스테리에 대해 아무것도 시인하거나 부인하지 않은 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였다.
경계심 많은 아미르 코헨 벤큐리온이 생각하기에 황가는 과욕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신에게서 영적 보물을 얻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나머지 보물의 반쪽까지 독차지하려는 욕심쟁이 같았다. 황태자는 몰라도 적어도 대공은 그런 류였다. 왕이 될 자신의 형제에게 모든 보물에 대한 독식권을 선물하기 위한 충신. 유대인들로서는 거리를 어느 정도 둘 필요가 있는 사람이었다.
또 한 가지, 아미르가 결코 가르쳐주지 않는 비밀이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가짜 유대인들에 대한 진실이었다. 마치 그들의 조상 야곱이 형인 에서 흉내를 내어 아버지 이삭을 속였듯이, 에서의 후손들은 거꾸로 야곱의 행세를 하고 있다는 추악한 진실. 이 전승을 계승한 자는 소수의 랍비들뿐이었고 아미르 역시 그중 하나였다. 그는 이것을 결코 이방인들 사이에서 시인하거나 드러내지 않았다.
‘대공을 믿을 수 없다.’
그 매끈하게 잘생긴 얼굴과 듬직한 체격 뒤에 숨어 있는 교활한 내면. 브리튼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유대인의 유산도 기꺼이 이용하려는 영악함. 그런 자에게 가짜 유대인의 비밀이 드러난다면 감당하기 버거운 일이 벌어질 것이다.
사실 대공은 수상쩍은 냄새를 많이 맡긴 했다. 그는 제 형인 황태자의 지력에 한없이 근접할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아미르와 수년 간 친구로 지내면서 낌새를 전혀 못 느낄 리는 없었다. 진실의 실체를 확실하게 알지는 못했겠지만 그는 유대인 사회 내에서 뭔가 ‘수치스러운 비밀’을 감추고 있음을 동물적으로 직감하였다. 유대인의 혈통과 사회가 완전하게 깨끗하지 않다. 적어도 감 하나만은 형보다 나았던 그는 편집증적으로 의심의 촉을 세웠다. 그로서는 이 비밀이 몹시 알고 싶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대공에 버금가는 지혜를 지녔던 아미르는 아무것도 확정적으로 증언해주지 않으려 애썼다. 브리튼 황실은 그간 자신들의 명예로운 정신에 의거하여 유대인들과 유대인 사회를 보호해왔다. 그런 그들이 자신이 맡은 새 둥지 내부에 뻐꾸기들이 숨어있음을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필시 차기 황제는 알곡과 가라지를 무리하게 갈라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이런 미래가 전개되리라는 예상 자체가 유대인인 아미르 입장에서는 대단히 불쾌한 것이었다. 자신과 형제들을 판별하겠노라고 해부와 검증의 장치를 작동하려는 데 누가 자존심이 상하지 않겠는가. 만일 진실이 드러난다면 아마 누가 가짜 유대인이고 누가 진짜 유대인인지, 브리튼 황실은 밝혀내고자 애쓸 것이다.
정통 유대인으로서 아미르가 인정하지 않는 책이긴 하지만 신약 성경에는 바로 이런 상황에 대한 염려와 경계가 기록되어 있었다. 알곡과 가라지가 밭에 섞여있음을 깨달았을 때 신의 종들은 극히 염려하며 ‘우리가 가라지들을 미리 갈라내어 제거하는 것이 좋겠나이까’ 하고 질문하였다. 그들은 걸리적거리는 불순물을 한시라도 빨리 없애고픈 조급함이 들었으리라. 밭의 주인은 이렇게 답하였다.
[아니니라. 너희가 가라지들을 모아 오는 사이에 그것들과 함께 너희가 알곡까지 뿌리 뽑을까 우려하노라] (마태복음 13:29)
신께서는 이런 상황을 실제로 염려하셨던 것일까. 그의 섭리는 알폰스와 그 형제의 대에 이 진실이 노출되지 못하도록 차단하셨다. 당대의 호크마 계승자인 아미르는 필사적으로 진실을 보호하였고 성급한 제 이방인 친구들이 경거망동할 기회를 차단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 세대가 태어났다. 호크마의 유산은 또다른 고아 유대인에게로 전승되었다. 브리튼 언약 또한 다음 세대의 장자(長子)인 황태손에게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이 세대에서는 비밀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 천재 랍비 아미르와 달리 신중함이 모자랐던 다음 세대 호크마의 계승자들은 기꺼이 차기 브리튼 황제와 진실을 두고 거래를 하였다.
*
집무실 옆 숙식실 쇼파에서 잠시 잠든 알렉시스. 각종 고된 정신 노동, 연구, 정치와 경영 업무, 회의, 사고 실험과 지식 묵상, 그리고 기계 세상의 통제와 아바타들의 제어로 인해 그의 뇌는 몹시 노곤해진 상태였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인체인 그의 건강한 몸 역시 혹독한 훈련과 슈트 운용 연습으로 인해 지쳐 있었다. 야근을 마친 뒤 가볍게 샤워를 한 후 그는 깊은 밤잠에 빠져들었다.
“일어나.”
꿈결에 어떤 목소리가 그를 일깨웠다.
“누구지?”
“일어나시지. 그쪽 세계의 왕.”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짙은 기시감 서린 음성이었다. 동물적으로 알렉시스는 직감하였다. 자신이 현재 의식의 차원도, 무의식의 차원도 아닌, 초의식의 차원 내지는 그 언저리에 발을 내딛고 있음을. 불분명한 기억이 그의 뇌리에 스쳤다.
‘이랬던 적이 언제였더라?’
그는 종종 꿈 속에서 무의식과 초의식 사이의 어떤 영역과 접하는 일이 잦았다. 환상 체험이나 입신과는 다른, 또다른 카테고리의 현상이었다. 그 경험을 통해 그는 종종 평행 세계 비슷한 어떤 권역들의 일을 보고 듣곤 했다. 대부분은 깨어나면 연기처럼 기억에서 지워지긴 했지만, 그중 일부는 지식 속에 남아 그가 무언가를 획책하고 구상함에 있어 영감으로 남곤 했다.
그런 기현상들을 체험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니 열일곱살 쯤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지금껏 그날의 꿈, 아니 특수한 체험에서 어떤 것을 보고 들었고 누구를 만났는지 잊고 있었다. 그런데 동일한 류의 체험 속으로 던져지니 서서히 흐릿하게나마 과거의 그 체험이 뇌리에 재생되기 시작했다.
“이 기시감, 이상하군.”
알렉시스는 자신의 몸을 살폈다. 꿈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선명한 감각과 논리적인 사고 활동이었다. 그는 자신의 육체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느끼고 볼 수 있었다. 본가인 황궁에서 잠들 때의 차림, 짧은 하의만을 걸친 편안한 맨몸이었다.
그는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적막한 회색의 공간으로 덮여 있었다. 원근법이 적용되지 않는 영역인지 정확히 기하학적인 형태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뻐근한 근육들을 풀었다.
“오랜만이지?”
알렉시스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몸을 고정했다. 어떤 사람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특수몽 상태라 그런지 그의 얼굴이 정확하게 인식되지가 않았다. 이목구비가 보이긴 보이는 데 그것의 정체성을 분석하기를 뇌가 거부하는 듯한 상황이랄까. 라하토브의 세계가 평소에 이러했던 것일까 공감이 되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시스는 상대의 정체를 무의식중에 인지할 수 있었다. 그는 분명 17세의 알렉시스가 꿈 속에서 만났던 존재였다. 이상하리만큼 가깝게 느껴지는 존재.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것 같으나 자신과 동류임이 분명한 존재. 알렉시스의 감각들은 이 남자를 자신의 또다른 일부처럼 인식하는 중이었다. 묘한 불쾌감에 잘생긴 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네 이름이 뭐지?”
“나는 너, 그리고 너는 나이기도 하지.”
“네 이름은 알렉시스 벨레로폰 엘 죠세프 브류나크인가?”
“아니, 너의 그릇으로는 내 존재를 다 인식할 수 없어.”
마치 동화되어 있기라도 하듯 불쾌한 동질감이 느껴지는 상대. 알렉시스는 마치 그가 자신의 팔이나 다리의 일부인 것마냥 인식하는 자신의 뇌가 몹시 거북하였다. 이내 그 정체불명의 갈색머리 남자의 얼굴이 알렉시스의 얼굴과 마주하였다. 순간 남자의 눈이 선명하게 안광을 발하였다. 오른쪽 눈은 알렉시스와 정확히 같은 자색이었다. 그러나 왼쪽 눈은 달랐다. 핏빛? 와인의 색깔? 꿈이라 분명히 인지되지는 않았으나 붉은 색 계열 같았다.
“또다시 뜻하지 않게 세계 속에 감춰진 ‘숨겨진 글(Dark sentence)’의 일부를 인식하였군, 알렉시스.”
“그게 무슨 말이지?”
“날 따라와. 너를 만나려는 존재가 이곳에 왔거든.”
이해하기 힘든 명령이었으나 기묘하게도 거절할 저항력이 발생하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무언가에 홀린 듯, 불쾌감을 그대로 안은 채 움직였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남자의 명령어에 이끌렸다. 이내 회색 공간의 너머로 이어지는 작은 문이 하나 허공에 만들어졌다. 정체불명의 갈색머리 남자와 알렉시스는 그 문을 넘어 미지의 공간으로 걸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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