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42회 [2부] 63화. 혼란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6.19 | 회차평점 ![]() |
황태자 한 사람이 없다고 해서 현 세계의 운영에 차질이 생기지는 않는다. 각계각층에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양육되어 제 역할을 착실히 하고 있고, 시스템도 워낙 튼튼하게 갖춰진 데다가 황태자와 브리튼 제국의 유지를 이을 탁월한 동료들도 많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지도자의 공백을 걱정할 이유도 없는데, 이는 권좌의 원 주인인 황제가 버젓이 건재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으로 모자란다 여겨진다면 대공(大公)을 고려하면 충분성을 확신할 수 있으리라.
이러한 현실적 안전 장치에도 불구하고 황태자의 일시적 활동 정지가 가져온 공포와 혼란은 가벼운 수준이 아니었다.
이것은 비유컨대 이런 경우와 같았다. 가령 한 사람이 싸움터에 나가 승리하기에 충분한 무기와 체력과 솜씨를 갖추었다고 하자. 그 사람이 어느 날 모든 적군들을 단숨에 쓸어버릴 강력한 병기를 손에 넣었고 그 맛에 취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갑작스레 그가 의지하던 그 병기가 사라진 것이다. 여전히 그는 충분히 싸워 이길 전력과 실력을 온전하고 있다. 그러나 절대 병기에 맛 들린 그는 그 공백에 당황하여 충격과 공황 상태에 빠져 안절부절하지 못한다. 현 세계는 이런 상태에 빠진 격이었다.
이슬람 세계의 폭주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큰 현실적 위험에 맞닥트린 상황이었으며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지도 모르는, 사회 전반의 붕괴를 각오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정작 당황하던 이가 적었다. 승리의 보증이나 마찬가지인 황태자가 멀쩡히 모든 상황을 지휘하고 있었다.
당장 아무런 위기도 눈에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많은 이들, 특별히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이들은 마음은 평안을 잃고 갈팡질팡하였다.
그러나 다가올 풍파를 침착하게 준비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한 발 물러나 상황을 관망하는 이들도 존재했다. 전자는 황태자의 친우들과 가족들이었고, 후자는 시대의 조율자인 마스터들이었다.
마스터들은 누구도 이 소문에 긍정하거나 부정하거나 동승하거나 반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무서우리만큼 잠잠했다. 수집되는 모든 정보를 차분히 모았다. 거시적인 움직임과 미시적인 변화를 면밀히 관찰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어떤 특정한 국가에 절대적으로 충정과 영혼을 바치는 이들은 아니었다. 시대의 승자의 편을 들어주는 자들, 이기는 자에게 합당한 대우를 선사하는 자.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슬기로운 관망자였으며 기회주의자이기도 했다.
브리튼 제국은 과연 패자(霸者)로서의 자격이 있을까? 그들이 쌓은 세계는 시험을 통과하여 증명될 것인가? 한 번 패권을 얻은 것은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았을까? 그들은 자신이 얻은 권세와 영향력을 유지할 격을 갖추었을까? 아니면 그저 뿌리가 얕은 한철의 나무에 불과했을까? 마스터들은 조심스레 브리튼 제국을 자신의 시험대 위에 올려두었다. 재판관이 된 그들은 그 결말을 지켜보기로 했다. 일절 개입이나 방해를 하지 않는 방향으로 자신의 행보를 고정해두었다.
물론 모든 마스터들이 그렇게 중립적으로 행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는 브리튼을 수호하기 위해 암약하던 거처에서 나와 행동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반대로 어떤 이는 이 기회를 자신의 유익을 위해 활용하고자 교활한 술수를 구상하였다.
여하튼 이는 확실히 현 세상이 얼마 전까지 황태자라는 항성을 중심으로 공전하던 세계였음을 증명해주는 방증이었다.
한편, 알렉시스에게 충성하는 자들도 결집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응결핵 중에는 그의 형제들과 친족들이 있었다. 그들은 황족으로서의 프라이드를 간직하고 있었고 황가가 수호해온 가치 체계를 보존하고 강화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특별히 황제가 낳은 이들과 그가 거둔 아이들이 그러했는데 그들은 언약의 강한 속박력에 간접적으로 영혼에 매여 있었다. 또 이들은 현 상황의 잠정적 위험성을 깊이 인지하였고 황태자와 브리튼을 겨냥한 잠정적 위협들을 경계하였다.
세르빈과 유타가 기업 내의 중진들 중 자신들이 신뢰할 수 있는 이들을 모아 신속하면서도 은밀한 논의에 돌입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알렉시스가 잠든 지 사흘만에 그들은 기밀 회의를 시작하였다. 아울러 둘은 직접 따로 만나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 상황에서 형제 이외에는 어떤 이도 100% 신뢰하기 어려웠다. 평소에는 경쟁의 관계였으나 막상 언약을 향한 위험이 꿈틀거리는 때가 이르자 둘은 누구보다도 긴밀한 연합 속으로 들어갔다.
“렉시드 형은 무사하겠지?”
“…….”
“넌 이 상황에 대해 뭔가 이해하는 바가 있지, 세르빈?”
흑발과 흰 피부의 청년 유타는 신중히 주변을 살피며 상대에게 대답을 구했다.
“내게도 공유해줘. 부탁해. 부끄럽지만, 내게도 큰형은 가장 든든한 지지대이자 가장 의지하는 사람이야. 애초에 난 너처럼 이 집안 출신도 아니었고, 가문의 가치를 그리 깊게 이해하지도, 내 것과 같이 프라이드를 갖지도 못한 놈이었어. 그랬던 나지만 큰형만큼은 신뢰할 수 있었어.”
복잡한 심경이 된 세르빈은 형제의 말에 차마 용감한 답변을 주지 못한 채 침묵을 머금었다. 솔직히 그도 두려웠다. 오만하고 잘난 능력을 갖춘 그도 큰형의 빈자리가 체감되자 마음에 흔들림이 일었다. 저 재수 없던 유타가 애타게 자신에게 조언을 구하는 상황에서도 우쭐대고픈 욕구가 전혀 들지 않았다. 자신도 이렇듯 작고 미약한, 철이 덜 든 어리석은 인간이라는 것이 희미하게나마 체감되었다.
한참 후에야 세르빈이 입을 열었다.
“유타, 이 이야기는 형제들 말고는 함구해줬으면 해.”
“약속할게.”
“네 말대로 형은 어린 시절에 지금처럼 예고없이 잠들었던 적이 있었어. 일주일 간 꿈쩍도 하지 않다가 다시 예고 없이 깨어났지.”
당시의 일을 아는 건 현 황제인 알폰스와 현 황후인 세일린, 그리고 세일린에게서 태어난 여섯 아이들뿐이었다. 유타와 엘리어트도 그 전 시점에 입양되긴 했으나 알렉시스가 동면하였던 때는 유학 중이어서 황궁에 없었다. 알폰스 부부는 이 사실을 가장 가까운 자녀들인 일곱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현재도 황실 관계자 중 그날의 일화를 제대로 이해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우리가 모르는 지병이라도 있으신건가?”
“아니. 병은 아니었어. 너도 알 듯 그는 정신, 영혼, 몸 전부가 흠없이 강인한 사람이야. 그날의 현상은 말 그대로 현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던 이변이었지.”
알렉시스가 이면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깨우친 것도 그 시점부터였다. 그때부터 유독 알렉시스는 여러 가지 꿈을 꾸곤 했는데 그는 종종 그 이야기를 형제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 물론 신비한 느낌의 일장춘몽을 겪었을 뿐이라는 뉘양스로 대수롭지 않게 표현하긴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그의 말에는 진지한 진심이 항상 희미하게나마 서려 있었다.
형제들은 아무도 알렉시스의 각종 꿈 이야기를 현실적인 차원에서 믿지 않았다. 영적인 현명함에 있어서 탁월한 제로스조차도 어린 시절에는 큰형의 말을 그저 흘려 넘겼다. 오로지 아버지만이 알렉시스의 말들을 진지하게 마음에 두고 고려하곤 했다.
“형이 세계 대전에 참전했을 때 그 비극적인 일을 겪은 뒤로는 그 꿈의 내용들이 점점 어두워지긴 했지.”
“그래, 나도 기억해. 그 이후로 악몽을 꾸는 일이 많아지셨던 기억이 나.”
“솔직히 나는 형이 PTSD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제리 녀석은 그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지한 것 같아.”
세르빈은 동생 제로스가 넌지시 던져준 조언들을 떠올렸다. 아울러 그는 작년에 알렉시스가 펼친 판도라 상자인 타르타로스를 회상하였다. 세상에는 정말 신과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초자연적인 힘인 언약 또한 실재한다. 그렇다면 알렉시스의 꿈들은 단순한 일장춘몽이 아닌, 모종의 깊은 실체 차원과의 접속이라고 의심해보는 것도 합리적이지 않겠는가.
“형은 언약의 수호자, 그리고 우리 같은 어중이떠중이들은 감히 이해하지 못하는 깊은 원리들을 큰 그림부터 미세한 요소까지 통찰하는 대현자. 어쩌면 그 꿈쟁이는 꿈들을 통해 이면(裡面)을 엿보는 것인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 일들의 시작점은 알렉시스가 17세 때 코마에 빠지면서부터였다.
“우리는 조만간 있을 변화에 대비해야 해.”
유타가 다시금 현실을 상기시켰다.
“그룹 내에서 끝까지 믿고 신뢰할 사람이 그래도 너밖에 없다.”
여기에는 세르빈도 동감하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반응하였다.
“워쳐들에게서 인계받은 정보, 너도 간직하고 있지?”
“물론.”
“신속하고 정확하게 대응 전략을 펼쳐야겠군. 동지들이 협응이 필요해. 물론 너의 도움도 절실하고.”
둘은 전산에 남지 않도록 암호화된 은어로 소통을 시작했다. 테이블 위에는 정보와 도표가 기록된 종이들이 있었고 둘은 각자 전략도를 그렸다. 혼자서는 막막했던 상황이 두 머리가 맞대어지니 생각보다 순탄하게 풀리는 듯했다. 둘은 토의하고 토론하며 중요 안건과 모든 시나리오들을 예비하였다.
“늦어도 하루에서 이틀 안으로 경영진 내부에서 큰 요동이 일거다.”
“세계 경제 지표 격변으로 연결되겠군.”
“혼선에 대비해야 해.”
“숨어있던 반란군이 기회를 틈타겠네.”
“정답지를 갖고 있길 다행이야. 곧 밀알(wheat)과 독보리(tare)가 선명히 구분된다. 미리 알고서 대응하지 않으면 늦어.”
저들이 어떤 식으로 내부에서 일을 흔들어놓을지 눈에 선히 보였다. 그룹의 재무 지표, 안정성, 경영권을 방어해야 한다. 무너지지 않도록, 빼앗기지 않도록, 때가 무르익기 전에 저들이 형의 큰 계획들을 망쳐놓지 못하도록.
현재로서는 확신할 정도로 믿음직스러운 이가 아주 많지는 않았다. 대다수의 임원진과 경영권자는 회색 지대에 속했다. 적진에 포함되지는 않으나 전세가 기울면 갈대처럼 흔들리며 노선을 바꿀 자들이다. 그러니 한 번의 실수도 허락되지 않으리라. 두 CEO는 자신들에게 맡겨진 몫을 넘어 그룹 전체를 보호 유지하여 지도자가 깨어날 때까지 버텨내기 위한 전략을 밤을 세워 구상하였다.
*
외부에 위치가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은신처.
“몸은 괜찮으신 듯하군.”
두 의사는 모든 데이터와 징후를 종합한 뒤 진단을 확실시하였다. 의학적으로는 마침내 모든 예측될 수 있는 가능성이 배제되었다. 가운 대신에 사복을 입고 있는 이 두 사람은 각각 내과학과 신경과학 분야에서 시대의 정점에 이른 ‘신의(神醫)’였다. 초상 현상이 아닌, 현대 과학이 설명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이들의 판단이 어긋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역시 비블로스에게서 보고 받은 가능성이 사실이라고 판단해야 하나?’
곁에서 지켜보던 리키는 무거운 고심에 빠졌다. 마른 하늘에 내린 날벼락과 같은 이 상황에 그의 심경은 몹시도 복잡했다.
“확인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의사들에게서 정보를 인계 받은 리키는 두 사람을 조심히 배웅하고 난 뒤 홀로 환자 곁에 서서 상황을 면밀히 살폈다. 지금으로서는 간병인이나 간호사나 고용인을 들이는 것마저도 조심스러웠다. 고민 끝에 리키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부분을 자신이 관리하기로 마음 먹었다.
“형님…….”
침대에는 한 미청년이 환자복을 입은 채 깊은 잠에 빠져 누워 있었다. 호흡도 심박도 정상이었으나 잠에서 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몸에 부착된 계측 장비들은 정상 신호만을 기록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행동 불능의 상태에서도 그 모습은 변함 없이 지극히 굳건하고 고귀하고 아름다웠다.
조마조마하고 착잡한 심정에 흔들린 리키. 이대로 정말 저분이 깨지 않으면 어떡하지? 생각해보지도 못한 가능성에 부딪힌 그는 괴로웠다.
‘형님이 없으면 나는…….’
안 돼.
그는 근심에 무너지려는 자신의 나약한 내면을 채찍질하여 각성시켰다. 지금부터는 자신이 이 사람의 몸을 수호하는 책임자이다.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서 형님을 깨워야 한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온전한 마음과 몸으로 복귀하시도록 내 모든 지력과 판단을 총동원해야 한다.
리키는 제리에게서 전해들은 메시지를 곱씹었다. 자신이 아직 형님을 만나기 이전의 일이라 잘 모르지만 전에도 이런 일례가 있었고 회복되어 돌아온 예가 있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단서를 찾아 원리를 추론해야 한다. 현대 의학으로 가늠할 수 있는 영역인지는 의심스럽지만, 정 안 되면 모든 방향으로 지식의 지평을 확장해서라도 답을 찾아내야 한다.
“부탁이에요, 형님.”
심약해진 마음을 추스르며 젊은 의사는 형의 침상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는 버거운 꿈을 맞상대하며 힘겹게 땀을 흘리는 알렉시스의 뺨과 이마를 깨끗한 수건으로 닦았다. 리키는 큰형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평소와 똑같이 따스하고 든든한 온기가 형의 넓고 든든한 손바닥에서 전달되었다.
“무사해줘요. 제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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