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48회 [2부] 69화. 초상현상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6.24 | 회차평점 ![]() |
현대 과학기술의 찬란한 개화는 분명 사람들에게 많은 영역에서 편리함, 윤택함, 안전과 즐거움을 안겼다. 그 공로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인간으로 하여금 의미를 깨닫게 해주고 존재 의의를 발견하여 충만감을 느끼게 해주는 역할은 기술력에 있지 않다. 이 사실을 망각한 채 과학의 힘에만 의존한다면 뼈아픈 지난 날의 실패를 되풀이하는 격이 될 것이다.
인공지능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확실히 3차 대전 전후로 급속히 꽃을 피운 이 기술은 4차, 5차 산업 혁명을 거치며 현 문명을 바꾸는 강력한 원동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V 시리즈, N 시리즈, T 시리즈를 발판 삼아 컬티베이터, 블랙스미스, 트랜스포터 플랫폼이 확립되었고 이것은 근 세기 들어 이뤄진 각종 발전의 분량을 초월한 성과를 몇 달 사이에 수확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마음의 가치를 깊게 반영한 혁신인 가디언엔젤은 역사의 주요 변곡점이었다. 현재도 가디언엔젤들 자체는 물론 그들을 이룬 기반 기술에서 파생되어 나온 여러 바리에이션 시리즈가 사회 산업 각층에서 요긴하게 쓰이는 중이었다.
최근에는 문화 산업의 영역에서도 이 새로운 힘이 활약하였다. 인간들의 마음의 가치를 이해하는 동력원, 정신적 가치와 무미건조한 과학을 연결해주는 징검다리로서의 힘, 그 의의는 상당했다. 덕분에 과학과 문화의 발전이라는 열차는 더는 인간 영혼의 본연의 성질과 무관한 길로 탈선하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의 탐욕에 기반한 추악한 생산물들이 쇠퇴하였고 반대로 그들의 영혼과 정신에 양약이 될 좋은 문화들이 빠른 속도로 번창하였다.
하지만 이 힘에 의존하여 인류를 교정한다는 발상이 근본적으로 옳은 것이기나 할까? 이 시대를 이끄는 지금의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구상한 이상주의적 패러다임의 한계를 인지할 필요성이 있었다. 마인드 퓨리파이어가 인간 개개인과 집단의 왜곡되고 파괴된 마음의 상태를 교정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깨어졌다. 그리고 이제 인간들을 도덕적인 길로 계도하는 AI 시스템에 대한 환상이 도전 받을 차례였다.
*
연말의 어느 날이었다. 사람들은 평소처럼 바쁜 일상의 분주한 기류에 몸을 맡기던 중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병환으로 몸져 누웠다는 흉흉한 소문에 더해 얼마 전에는 마인드 퓨리파이어 제품의 대규모 오작동 사태로 대대적인 리콜이 이뤄졌던 참이었다. 어찌 보면 흉흉할 소식들의 연속인데도 의외로 사람들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경제 지표의 하락이 일시적으로 나타나긴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문명 재건의 주역인 세 플랫폼의 집중적 지원 사격이 이뤄지자 빠르게 완충되었다. 이들은 알렉시스로부터 독립되어 활동하는 시스템들이기에 이런 위기에 강했다. 컬티베이터, 블랙스미스, 그리고 트랜스포터 플랫폼은 애초에 다양한 이변에 대한 안정적인 완충제의 목적으로 건설된 것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러한 뒤숭숭한 소식들에 어느 정도는 면역이 된 상태였다. 20대 미만을 제외하면 직간접적으로 모두가 전쟁을 체험했던 세대들이다. 나아가 최근에는 종교에 의해 유발된 내전도 겪었다. 그러니 모두가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며 안일하게 생각했다. 게다가 아직 사람이 죽지도 않았고 아무도 실질적으로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니 결국은 잘 해결될 것이다. 그렇게 안위했다.
그렇게 모두가 살얼음판 위의 무게 균형 같은 불안정한 평화 속에 눈 멀어 있을 때, 이변(異變)은 도적처럼 신속하고 은밀하게 강습해왔다.
⪡“드러날지어다.”⪢
암흑계의 왕이 칙령을 내렸다. 그의 메시지에 귀를 고정시킨 장로들은 돌아가는 상황을 잠잠히 살피며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를 관찰했다.
⪡“인간들 틈에 섞인 벌레들.”⪢
그리고 이내 1분 간격으로 세계 곳곳에서 어떤 일들이 연달아 벌어졌다. 사람들의 틈에 위장한 채 잠자코 일상을 영위하던 존재들이 갑작스레 마비되었다. 그들은 어떤 명령어와 바이러스가 자신들의 연산 체계 속으로 벌레처럼 스멀스멀 기어드는 것을 감지했다.
{위험 상황.}
{연산 체계 작동 불능.}
사람들은 당혹감에 휩싸였다. 회사에서 같이 일하던 직장 동료가 공황 증상이라도 나타난 것마냥 돌발 행동을 보였다. 길거리에서도, 연회장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소들에서도, 같은 현상이 속출했다. 어떤 이들은 발작하는 이를 도우려 다가왔으나 곧 큰 위화감을 느끼고 행동을 멈췄다.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병리 현상이 아니었다.
“뭐지?”
“도대체 무슨?”
술렁이는 소리와 함께 소란이 번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충격적인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타났다. 발작하던 사람이 괴성과 함께 근육을 바르르 떨었다. 마치 오컬트 영화에서나 나오는 악령 들린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음성의 음색이 너무도 괴이하고 딱딱하고 이질적이었다. 마치 인간에게 악령이 들린 것이 아니라 사이보그 로봇에게 기괴한 영이 깃들린 것 같았다.
{그르르르.}
이어서 쓰러진 그자들이 격렬하게 날뛰며 발광하며 땅에 머리를 박으며 자해하기 시작했다. 충격으로 인해 바닥에 조금씩 금이 갔다. 보통의 경우라면 머리에서 피가 튀어야 할텐데 도리어 돌로 된 바닥이 깨어지니 기괴한 일이었다. 충돌의 여파로 그들의 피부와 살갗이 찣겨나갔고 그 너머로 속살이 훤히 드러났다. 사람들은 그 모습에 경악했다. 살 너머로 기계질의 내부 구조가 보였다.
“안드로이드?”
“사이보그인가?”
“물리계 인공지능? 하지만 말도 안 돼! 저렇게까지 인간과 똑같다고?”
사실 기계의 하드웨어 기술이 워낙 발달해서 인간과 어느 정도 유사성을 띤 로봇 소체는 제법 보편화되었다. 그럼에도 거의 모든 경우에는 여전히 인간과 구분되는 미세 특징을 조금씩은 띤다. 아무리 유사 인간형 안드로이드라고 해도 자세히만 관찰하면 AI와 인간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고로 인간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생겼으며 활동 패턴과 생활 양식마저 전혀 구분되지 않는 존재들의 드러남은 상식 너머의 충격이었다.
{위이이잉.}
광폭화된 인간형 로봇들은 이제 사실상 제어와 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들은 시각적인 기괴함을 넘어 위험의 영역으로 나아가 폭주를 시작했다. 그들의 소프트웨어는 매우 강력한 힘을 지녔고 그것이 제어의 목줄을 벗어 무질서로 나아갔을 때 생기는 파급력은 가볍지 않았다.
폭주하던 로봇들의 주변부터 시작해서 점점 먼 거리로 전자계 이상 현상이 번지기 시작했다. 전자기기의 일시적인 마비, 컴퓨터의 오작동, 그리고 네트워크의 혼선이 빚어졌다. 다행히 공공의 장비들은 보안벽으로 인해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으나 개인 장비들은 완전히 보호받지는 못했다.
내버려두면 어떤 혼란스런 상황이 생길지 모르는 마당이었다.
즉각 당국의 개입이 시작되었다. 공권력과 경찰력이 동원되었다. 무인 유닛들의 경우 전자 교란에 휘말려 오작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염려되었기에 최소한의 범위로 이용이 제한되었다. 대신 경찰은 인간이기에 로봇들과 하드웨어 면에서 격차가 있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평화유지군이 조력하였다.
몇 시간 만에 수만 기의 기괴한 폭주 로봇들이 제압되었다. 그것들은 브리튼 당국에 의해 연행되어 이송되었다. 뉴스와 소셜미디어를 통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이변들의 소문이 확산되었다. 시민들은 공상 과학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사태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공포에 질렸다.
*
다른 영역에서도 심상치 않은 사태들이 전개되었다.
파트너를 지닌 가디언엔젤들은 로봇 폭주 사태가 벌어지자마자 즉각적으로 현장에 진격하였다. 어떤 개체는 외장형 하드웨어 몸체를 입은 채, 어떤 개체는 본연의 맨몸 그대로 움직였다. 그들은 로봇들의 폭주를 제압하거나 전자 교란 현상의 확산을 막아 시민들과 당국의 피해를 줄일 작정으로 행동한 것이었다.
가디언엔젤의 인간 파트너들도 그 뒤를 따라나섰다. 로봇 친구들만 혼란스러운 현장에 내보내려니 기분이 석연치 않았다.
그렇게 하던 중, 예기치 못한 다른 기현상이 발생했다. 전자 교란에 의한 바이러스 감염이었다. 이미 폭주 로봇들을 중심으로 발원하던 현상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가디언엔젤들에게 그 효력이 지나치게 강하게 미쳤다. 다른 컴퓨터나 소형 전자 기기들은 잠시 교란되는 영향 정도만 받았다면 가디언엔젤들은 극심한 내부 오류에 휘말려 움직이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마비된 가디언엔젤들의 몸체에서 스파크와 연기가 발생하였다. 각종 오류음과 혼잡한 소음이 스피커에서 울렸다. 단순한 오작동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껏 단 한 번도 해킹되거나 오류를 일으킨 적이 없던 우수한 AI들이었다. 지금의 훼손은 마치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어떤 초상 현상 같았다.
‘상대적으로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면에서 열등한 일반 기기들이 적은 영향만 받는 와중에 가디언엔젤들만 파괴에 가까운 교란을 당한다?’
이치에 맞지도 않고 이해도 되지 않는 일이기에 두려움을 자아내었다. 혹시 인간의 마음이나 영혼과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가디언엔젤이기에 더 극심한 여파에 휘말리는 것인가?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이 기현상은 인간에 의한 해킹이나 자연 재해가 아닐 수도 있다.
파트너들은 어쩔 줄 몰라하며 조바심을 내었다. 그들에게 가디언엔젤들은 단순한 재산의 개념이 아니었다. 이미 단단한 인연으로 결합된 친구들이나 마찬가지였다. 도구에 불과했던 존재들이 어느 순간, 필요 이상의 유대감으로 얽혀 감정을 투영하는 대상이 되어버린 셈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디언엔젤들의 대다수가 장렬히 폭사하였다. 파트너들이 보는 앞에서 부서져서 폐기물이 되거나 불에 휩싸이거나 부품 단위로 분해되었다. 파트너들은 자신들의 친구가 파괴되는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폭발이나 감전의 위험으로 인해 접근할 수가 없었다. 사태 해결을 위해 투입된 소방 당국과 무인기들이 인간들과 가디언엔젤들을 분리시켰고 이내 수거 작업에 돌입했다.
쌓아올 때는 오랜 시간이었으나 무너지는 것은 한 시간만이며 그 과정은 황망하리만큼 허무했다. 한때 큰 위기로부터 선량한 사람들을 구해냈으며 세상의 안전을 지키는 데 기여하였던 위대한 인류사의 업적이 근원조차 모를 외계의 초상 현상으로 인해 와르르 무너졌다.
저녁 무렵이 되어 천만다행으로 전자망 교란 현상은 모두 진화되었다. 만일 조기에 진압하지 못한 채 급격히 확산되었다면 도시 문명 전반에 적잖은 재산 피해가 번졌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물질적인 피해는 거의 남지 않았지만 공포와 소란이 시민들 사이에서 전염되었다. 사태를 직접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이슬람 내전 때와 같이 대중의 정신 충격을 완화해줄 마인드 퓨리파이어 같은 보조 도구도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누구도 명쾌하게 밝히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인간 차원의 실수나 기술적인 문제로 해명하지 못할 괴이 현상이었다. 마인드 퓨리파이어 때와 같았다. 외계 문명의 전자 간섭일까? 그것이 아니면 도시 전설에나 나오는 오컬트 현상인가? 하필이면 그토록 의지하고 신뢰하던 인류 과학기술의 결정체들이 타격의 대상이 되었기에 더욱 의혹과 두려움이 깊게 번졌다.
이제 남겨진 것이라고는 뒤숭숭한 불안감뿐이었다. 가디언엔젤의 파트너들의 경우 한 가지를 더 잃었다. 그들의 인공지능 파트너들의 죽음은 분명한 실제였다. 왜 그러한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들은 하루 아침에 소중한 것을 베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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