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60회 [2부] 81화. 가짜의 가짜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7.09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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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스의 또다른 손님, 그가 맨 얼굴을 드러내자마자 비서관은 경악하였다. 그는 입을 떡 벌린 채 잠시 넋을 놓고 대화를 중지했다. 주군을 모심으로써 이런 강력하고 화려한 아우라를 매일 체험해본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만일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눈앞의 이 남자의 실물ㄱ에 좀처럼 적응이 되지 못했을 테니까.
“우와!”
체통도 순간 잊은 채 로빈이 나직이 감탄하였다.
“반갑습니다, 저랑은 초면이죠, 로빈 비서관님?”
남자가 말을 걸었다.
“아, 네.”
그 자신만만한 사내의 호쾌한 패기에 저도 모르게 기를 빨려 말려든 로빈. 얼떨결한 기분으로 그는 그 멋쟁이 사내가 내민 악수를 주저주저하며 받아주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잘생긴 사나이……, 였던가?’
그도 맞는 말인데, 그보다는 사실 다른 재능으로 더 알려진 전설적인 청년이었다. 설령 연예계에는 담을 쌓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가 이안 블레이크의 얼굴과 유명세를 모르겠는가. 그는 연기력의 정점이다. 신이 내린 재능을 지닌,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다는 천재 배우. 탑배우 중의 탑이라 하는 배우를 직접 영접하니 스크린은 감히 그 위엄의 절반도 채 담아내지 못했다는 평가가 들었다.
‘정말 굉장하네.’
단순히 ‘미남’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정의되지 않는 짙은 위압감과 매력이었다. 저 화려한 페이스에 수만 종류의 인생을 마음껏 창조하여 담아내는 마술사. 천의 얼굴을 자랑하는 변천의 귀재. 과연 비범함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이 마치 만져지는 촉감의 실체처럼 응결되는 체험이었다.
“자, 자, 이쪽은 우리 동생, 소개하는 건 처음이네요.”
제로스가 친근하게 이안의 어깨 위에 팔을 얹었다. 이안은 대형견처럼 친근감이 넘치는 형의 친화력에 살짝 미간을 한쪽으로 일그러트렸다. 조금 성가시게 느끼는 기색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싫어하는 투는 아니었다.
“황실도 몇몇 황자들의 신분에 대해서는 대외적으로 비밀을 유지하고 있죠. 그 중 가장 철저하게 지켜지는 비밀이 바로 이 친구랍니다. 아무래도 직업 특성상 너무 유명해서 말이죠.”
“허어.”
그러니까 세계에서 제일 연기력 좋고 잘생기고 인기 많은 배우가, 황자들에 비견되는 유일한 잘난 남자가, 사실은 본인도 출신이 황실 직계였었다? 이런 말이로군. 어딘가 모르게 허탈감이 느껴졌다. 다만, 생각해보니 앞뒤가 잘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적어도 유전 법칙은 거짓말을 하지 않음이 증명되었다. 황실 정도는 되어야 저런 규격 외의 재능과 외모가 나오겠지.
“다시 한 번 반가워요, 이안 이즈카르 브라이틀란트입니다.”
“반갑습니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멋지시네요.”
“고마워요. 뭐, 하지만 우리 큰형만큼은 아니죠.”
“당신께는 실례겠지만, 동의하는 바입니다. 지금 다시 보니 의외로 두 분은 닮게 생기셨습니다.”
유명 연예인을 만나 어쩔 줄 몰라하는 팬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급박했기에 제로스는 서프라이즈 팬 싸인회로 분위기가 흘러가는 것을 중지하고는 다시 본론으로 대화를 끌었다.
“이안도 우리랑 같이 계획에 동참할 겁니다. 괜찮지?”
“물론. 이래봬도 알렉 형이랑 같이 일한 적도 있으니까. 제리 형의 창의성과 발상력이 더해진다면 꽤 시너지가 나오겠지.”
이안의 말에 로빈이 의구심을 품었다.
“황태자 전하께서요?”
“아, 비밀리에 형이랑 입을 맞추고 협업해서 다른 사람들은 모를 거예요. 비서관님조차도 모르는 걸 봐서 형도 철저히 비밀을 지킨 모양이네요.”
이안의 해명이 이어졌다. 그가 말한 황태자와의 동업이란 바로 지난 번 이슬람과의 전쟁 때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알렉시스는 비밀리에 여러 이슬람 계열 선지자 호소인들을 만들어내어 원리주의 무슬림들이 알렉시스를 ‘알 마시히 앗 다잘’이라고 확신하도록 하였다. 이맘 행세를 하던 자, 알라의 선지자 노릇 하는 자, 심지어는 스스로를 마흐디의 후보인 것마냥 암시를 주는 자들을 여럿 만들었는데, 그들 모두가 온라인 상에서 얼마나 완벽하게 연기력을 발휘했는지 모든 무슬림들이 그들이 정말 계시를 가져다주는 신의 사자들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 사람들은 음지의 배우들입니다. 양지에서 화려하게 재능을 꽃 피우지 못했던 사람들, 각자 모종의 이유가 있어서 연기의 꿈을 접었어야 했던 사람들이죠. 인기가 아닌, 순수하게 연기 그 자체에 열정과 열망을 가진 인재들인데, 저도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지금의 연기력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말하자면 이안의 동료들이자 스승들이자 제자들이었다. 아직 이안이 데뷔하기 이전 그가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이안의 재능을 심연에서부터 온전히 끌어낸 마중물들로 쓰임 받은 사람들이었는데, 나중에는 극한의 재능을 각성한 이안이 도리어 그들을 훈련시켜 새로운 차원으로의 성장을 촉진해주었다.
“저와 형이 같이 그들의 협력을 이끌어냈어요. 형은 미션과 테마를 주었고 제가 그 사람들을 다듬어서 역할을 소화하게 해주었죠.”
즉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알렉시스를 도운 숨은 카드이자 공신이 이안과 그의 동료들인 셈이다. 정작 이안 자신은 그때 직접 개입하진 않았지만.
“그리고 제리 형도 이미 이런 류의 일에 경험이 있어요.”
“그것도 지난 번 내전과 관련된 것입니까?”
이에 제로스는 쑥스러워하며 무안한 기색으로 얼굴을 붉혔다.
“펠렌드로크의 제안을 받아주었을 뿐이예요. 녀석이 일을 과격한 방향으로 확대할까봐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효율을 극대화할 아이디어를 찾았을 뿐이죠. 북신대륙의 과격파 무슬림들을 유인할 이슬람식 예언을 레퍼토리로 창조했습니다. 아무래도 그럴 듯한 이야기를 창작하는 일은 제 전문이니까요.”
다시 말해서 최고의 극본가도, 최고의 배우도 자리에 갖춰져 있으며 실전 전쟁에서 그 재주를 활용해본 경험도 갖춰진 셈이다. 여기에 조언 및 자문 역으로 학식과 지혜가 풍부한 황녀도 있다.
“이번에는 펠렌드로크와 협업하지 않습니다.”
제로스가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내 쌍둥이 형제도 틀림없이 자기 나름대로 묘수를 세워 움직임을 보일 겁니다. 그러면 일이 얼마나 복잡하게 뒤엉킬지 예측조차 할 수 없어요. 게다가 워쳐들까지 연루되었으니 사태가 한없이 더 커지겠죠. 그 전에 우리가 선수를 쳐서 흐름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펠렌드로크의 성향을 아는 것인지 아델바이스와 이안도 동조하듯 끄덕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우리 모두를 장기말로 삼아줄 조율자, 그러니까 알렉 형도 자리에 없죠. 한치의 실수도 없이 잘 성사시켜야 합니다.”
제로스가 제안한 작전은 다음과 같았다.
펠렌드로크는 아마 십중팔구 ‘그들’ 속으로 침투시킨 자신의 첩보망과 간자들을 이용할 것이다. 자중지란을 일으키거나 역정보를 흘려 내분을 유발하겠지.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혼란을 지렛대 삼아서 에쉬튼의 중앙정보국이 사냥감을 물도록 격전을 유발할 것이다.
그렇다면 제로스의 팀은 그보다 앞서 또다른 경로로 ‘그들’의 네트워크에 침투하여 첩보전을 행한다.
“펠렌드로크가 아무리 조직력과 권모술수에 능하다고 해도, 그의 마수가 뻗친 영역은 잘해봐야 하위 조직 체계들일 것입니다. 많이 쳐줘도 최상위 간부들에까지 직접 닿을 방법은 없을 겁니다. 그렇기에 그가 택할 수 있는 옵션은 적들 내부에서 도는 소문을 읽고 그 소문 위에 또 다른 교란 정보를 더하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제로스는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의 침투 루트를 하나 발견했다.
“저는 그 경로를 통해 곧바로 ‘그들’의 최상위 지도자들에게 정보를 주입할 것입니다.”
“정보요?”
“적그리스도가 마침내 도래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 되어야죠.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 소식을 처음 알렸던 것처럼요. 저들도 분명 그 소식이 들려오기를 오매불망 앙망해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듣고 싶은 ‘저들만의 복음’을 들려줘야죠.”
어떤 의미에서 펠렌드로크의 방식과 같은 ‘거짓 정보전’은 아니었다. 성경 예언을 믿는 제로스는 적그리스도의 등장이 반드시 임할 것을 알았다. 그때가 언제인지를 모를 뿐이지. 그러니 저들의 귀에 ‘그분이 가까이 오셨습니다’ 라고 애매하게 말한다면,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님에도 그들 스스로 속아 취하게 만들 수도 있으리라.
“물론 언어는 저들의 언어로 변환해서 말해줘야죠.”
“혹시 저들은 비밀리에 라틴어나 고대 바빌론 어를 쓴답니까?”
“아뇨, 비서관님. 그런 맥락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제 소설 ‘악마의 편지’처럼 저들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서술해줘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아.”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그 존재를 ‘적그리스도’라고 부르겠지. 하지만 반대로 힐렐 숭배자들 입장에서는 ‘메시아’가 되는 셈이다. 그들의 언어대로 적당히 포장해서 그 존재의 강림을 소식으로 전한다.
“알렉시스 황태자께서 중태에 빠진 것이 바로 그 징조라고 알려줘야겠죠. 그러면 그들은 정말 ‘그들의 메시아’의 임재가 코앞에 이르렀다고 믿을 것입니다.”
이렇게 믿게 만듦으로써 제리가 노리는 기대 효과가 몇 가지 있었다.
우선, 저들의 대다수는 경거망동하지 않고 잠잠히 때를 기다리게 될 것이다. 메시아의 등장이 목전이고 원수인 황태자는 봉인되었으니 이제 깨어서 기다리며 준비하는 일만 남지 않았겠는가.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상식적인 자들은 잠잠히 왕의 강림을 예비하는 일에 힘을 쓸 것이다.
물론 그 준비라 함은 범죄에 속할 것이다. 이것이 제리가 기대하는 또다른 부분이었다. 승리가 임했다고 믿은 그들은 지금껏 적립해온 범죄 기록을 인멸하려 하기보다는 되려 완성하고 거두려고 하리라. 즉 그간의 계획의 진행을 늦추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 모두를 체포할 물증 확보에 필수적이었다.
이렇게 하면 알렉시스가 잠든 이 위태로운 기간에도 적의 경거망동과 폭주로 인한 시민들의 피해를 줄일 수 있고, 또한 범죄자들의 뿌리를 가장 깊숙한 부분까지 적출해낼 단서를 확보하리라.
“만약 그들이 어떤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유도한다면 더욱 좋겠죠. 체포 당하고 적발당하기 좋게 말입니다. 저는 에쉬에게도 정보를 흘려서 그가 미끼를 문 사냥감들을 잡도록 몰래 도울 생각입니다.”
물론 소수의 몇몇 일당은 과격한 방식으로 돌발 행동을 벌일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대세에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며 쉬이 진압될 것이다. 그런 자들은 어차피 소식을 굳이 주지 않아도 이 기회를 틈타 어떤 식으로든 발칙한 범죄를 행할 것이다. 그렇게 해준다면 되려 저쪽의 자멸이 되니 이쪽에서도 감사할 일이었다.
“이안, 네가 그 전달자 역할을 해줬으면 해.”
적그리스도, 아니 힐렐의 메시아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복된’ 소식을 범죄자들에게 전해줄 전령. 그 일은 아무나 맡아서는 안 된다. 안정적이고 편리한 펠렌드로크 휘하의 암부 조직들과 첩자들과는 달리, 제로스가 사용할 경로는 매우 위험하다. 일단 접근 자체도 쉽지 않고 기회가 제한된 데다가 잘못하면 그 정체가 들통날 확률이 높다. 한 번이라도 실패 시 두 번의 기회는 없다. 그야말로 호랑이 등에 타는 격이었다. 그렇기에 완전한 포커페이스로 뻔뻔스럽게 적을 안심시킬 수 있는 자가 필요했다. 보통 첩자 정도로는 안되며 연기력 그 자체를 현현시킨 능력자여야만 한다.
이안은 이 조건에 만족되는 지구상의 유일한 인간이다. 그가 ‘익명의 전령’이 되어 몰래 그들 사이에 소식의 씨앗을 퍼트리는 일을 해야 한다. 그의 연기력이 빛을 발할 기회가 될 것이다. 얼마나 그가 잘해주느냐에 따라 얼마나 많은 장로들이 소식을 믿어줄 지가 결정될테니까.
“점진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여러 회의장에 소식의 씨앗을 던질 겁니다.”
그렇게 소문을 주입하다보면 서서히 확대되고 증식되어 겹친 뒤 걷잡을 수 없이 큰 흐름으로 확대되리라. 그러면 여섯 대조직의 커뮤니티는 그 소문을 무시하기 어렵게 된다. 때마침 황태자의 의문스러운 행방불명도 설명되지 않으니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힘을 얻을 것이다.
이때까지는 이것이 제로스가 구상한 원 계획이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이안도, 아델바이스도 동의하였고 로빈 역시 동업을 약속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제로스가 제안한 문제의 그 ‘경로’가 무엇이냐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제로스 쪽이 먼저 신속하게 답을 제시하였다.
“갑시다.”
변장 후 네 사람은 차를 타고 어떤 건물로 이동하였다. 비밀 아지트 겸 실험실이었는데 개인이 소유한 어떤 현대 공학 연구소였다. 그곳에 들어가니 마침 그들을 맞아줄 또다른 협력자가 기다렸다.
“메시지는 확인했지?”
작업복을 입은 채 조용히 자기 작업에 골몰하는 한 사내를 향해 제로스가 질문을 던졌다.
“응.”
“보안 처리도 잘 했고?”
“물론.”
사내는 키가 크고 모델처럼 좋은 비율의 몸을 갖고 있었고 머릿결이 좋았다.
“네 터무니없는 계획에 내가 노략한 비장의 카드를 소비하겠다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이해해줘. 우리가 믿을 건 너 밖에 없어.”
제리가 조금 간곡함이 깃든 목소리로 어르고 달래자 젊은 그 남자는 혀를 차며 투덜거리듯 빈정거렸다. 로빈은 그 남자에게서 건성스러운 인상을 받았다. 황자들과 달리 품위는 조금 떨어져보이는 사람이었다.
사내는 이내 작업용 복면을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부탁한다, 에드윈.”
“제로스, 나중에 이자는 톡톡히 쳐서 받는다.”
“승락할게.”
또 한 명의 황자의 등장에 로빈은 다시금 말문이 막혔다. 저 집안 자녀들은 도대체 어느 하나 범부가 없군. 황실의 아픈 손가락이라고 불리는 방탕아. 멀리서만 간간히 보던 말썽꾸리기를 이렇게 코앞에서 직접 마주하다니.
‘그나저나 얼굴 하나는 정말 예술이군.’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에드윈도 황자들 가운데 상위권에 해당하는 미남임이 분명했다. 이 자리의 이안에 거의 필적할 정도라는 감상이 들었다. 저 좋은 얼굴에 재능까지 뛰어나다 보니 저런 오만한 사고뭉치가 된 것일까? 어쩌면 그렇기에 성격까지 올곧은 알렉시스가 대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뭐, 언젠가 나도 그들에게 제대로 엿을 먹여주려 했는데,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려면 네 제안에 동조하는 편이 낫겠지.”
벽안의 미남자는 불량스럽게 씩 웃으며 승리자의 패기를 은근히 드러냈다.
“같이 잘 해보자구.”
제로스와 에드윈은 악수를 나눴다. 제로스의 눈에는 승리를 쟁취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가, 에드윈의 눈에는 흥미로운 장난감을 찾아낸 악동의 것과 비슷한 이채가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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