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62회 [2부] 83화. 연기의 신(神)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7.15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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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 중에서 에드윈의 노획물에 대해 공유받은 유일한 사람은 제로스였다. 물론 알렉시스와 다른 형제들에게 비밀로 한다는 조건 아래에서. 사실 제로스만 잠잠히 입을 다물면 한참 수많은 업무로 몸이 갈려나갈 황태자가 이 소식을 알아차릴 리는 없으리라. 에드윈은 자기 머릿속에서 그렇게 단정지었다. 마침 수잔나 사건이 있던 때는 공교롭게도 비블로스의 발명으로 워쳐들이 완전히 활성화되기 얼마 전이었고 덕분에 알렉시스에게 들키지 않고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다.
굳이 제로스의 도움을 청한 이유는 간단했는데 바로 초자연적 성질을 띤 물질에 대한 통찰이 필요한 탓이었다.
“그러니까 일이 그렇게 되었었단 말이지?”
당시 소식을 들은 제로스는 몹시 골치 아파 하며 머리를 짚었다. 도리어 당사자인 에드윈은 뭐가 문제냐는 기색으로 무표정하고 태연스럽게 대꾸했다.
“네 자문이 필요하게 되었다.”
“무슨 사고를 벌이려고?”
“저들에 대한 정보를 좀 공유해줬으면 하는데?”
아직 에드윈은 ‘그들’에 대해 전해듣질 못했다. 황실에서 전승되어 오는 바가 있다고는 하나 형제들 중에서도 알렉시스나 황후의 소생들 정도나 ‘그들’에 대해서 자세히 알 뿐, 에드윈 같은 굴러들어온 돌에게는 허락되는 정보가 많지 않았다. 제로스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에드윈에게 자신이 아는 바의 일부를 나누었다. 물론 ‘에니그마’니 ‘바벨 시티’ 하는 더 본질적인 차원의 성경적, 영적 정보는 공개하지 않았고 오로지 피상적인 차원으로만 가르쳐주었다.
여하튼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공동 전략 전선을 구축하기에는 충분했다. 나중에는 에쉬튼이나 랜슨에게도 정보를 공유하게 될 제로스였지만 또 하나의 루트를 미리 예비해둬서 나쁠 것은 없었다. 이후 제로스는 에드윈이 ‘그들’과의 접점을 얻었다는 사실을 철저히 비밀로 해뒀는데, 심지어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동경하는 큰형에게조차도 그렇게 하였다.
이후 에드윈은 아무도 몰래 무언가의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의 공학적 재주는 비상했으며 발명에 대한 열정과 창조성, 그리고 발상력의 전환은 일곱 최상위 과학자 팀의 중진 멤버들조차도 혀를 내두를 수준이었다. 알렉시스조차 높이 평가할 수준의 잠재력에 틀에 얽매이지 않고 무엇이든 시도하는 괴짜다움이 있으니 무엇이 결실로 나올지 기대되는 바였다.
그 와중에도 수잔나에 대한 감시와 입 단속은 잘 이뤄졌다. 에드윈은 엔지니어로서도 대단했으나 카사노바로서는 더 대단했기에 여자를 가스라이팅하여 정신적으로 옭아매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협박과 회유, 당근과 채찍을 절묘히 사용하여 자신을 배반한 악녀를 정신적으로 속박하였다. 어르고 달래어 자신이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이유를 세뇌적으로 주입하였고, 어느 순간에는 그녀로 하여금 그가 정말로 자신을 용서하고 구원해주기를 바란다고 믿게 만들었다. 그녀를 가문과 배후 세력의 마수에서 건져줄 왕자님. 그런 이미지가 스리슬쩍 형성되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스톡홀름 증후군이 유발되기 시작했다.
한 여자를 이렇게 혹독히 옭아매고 희망 고문하는 것은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처사임이 분명하리라. 다만, 수잔나는 지은 범죄의 전적이 화려했기에 에드윈의 행동은 정상참작의 여지가 충분했다.
이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에드윈이 어떻게 적의 심장부에 더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의외로 알렉시스가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동생이 가장 먼저 적의 핵심에 접근한 것은 아이러니였다. 수잔나는 처음에는 형벌을 받거나 토사구팽 당할 것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에드윈의 말에 복종했으나 차츰 그에게 진짜로 빠져들었고, 나중에는 마음이 돌아서게 되어 가문의 명령을 배반하고 남자에게 목을 매게 되었다.
그렇게 수잔나는 이중 스파이가 되어 간과 쓸개를 모두 빼주었다. 그는 에드윈이 자신의 몸에 심겨진 ‘그들’의 유산들을 이용해 실험을 하는 것을 허락해주었을 뿐 아니라 제 몸에 가해진 ‘그들’의 개조까지도 모두 밝히 드러내었다. 혈액 속에 담긴 물질들과 입자들, 그리고 신경계에 삽입된 특수 물질 코팅 칩까지도.
나아가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그들’의 보물과 기밀들을 몰래 빼어 애인에게 넘겨주었다. 그 물건들 가운데는 ‘그들’이 오래 전부터 소유해왔던 아티펙트와 렐릭 및 강력한 마도구들이 있었다. 고대 마법의 유물인 동시에 현대 과학이 접목된 위험 물건들, 하나 같이 철저한 검증과 해부의 대상이 되야 할 것들이었다. 이것들을 유출했다는 것부터 이미 그녀는 배를 옮겨탄 셈이었다.
덕분에 에드윈은 별 어려움 없이 적들의 비밀스러운 보배들, 곧 그들이 초자연과의 연접을 하는 데는 써온 매질들을 확보했다.
이러한 발칙한 배반 행위가 한 여인을 통해 이뤄지는 와중에도 적들은 물이 새어나오는 틈새를 인지하지 못했다. 어리석고 무감각한 탓이었을까? 아니다. 이 역시 시기의 적절함 때문이었다. 마침 그 배반이 이뤄지는 시기에 비블로스의 도움으로 알렉시스의 사역마들인 워쳐들이 완벽하게 활성화되었다. 그들의 무시무시한 감시의 눈에 위축된 그림자 세력은 자신들끼리의 연결마저 함부로 행하기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자연히 이중 간첩의 행태가 감시에서 자유로워진 것이다.
몇 달의 시간이 걸려 에드윈의 작품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이걸 너 혼자서 완성했다고?”
제로스는 믿기 어려워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바보 같은 소리, 당연히 아니지.”
“그러면?”
“스승들을 좀 몰아세워 착취했지.”
에드윈은 황실의 문제아답게 뻔뻔스럽게 말했다.
“스승들?”
“내 지도 교수, 그리고 그 외의 일곱 팀의 여러 엘리트 멤버들. 형님 그 인간이 날 키워준다고 이런 저런 인간들에게 친히 소개해주신 덕에 꽤 인맥이 넓어.”
실버피스트 박사와 그 외 에드윈을 사사하는 다섯 명의 각기 다른 분야의 과학자들, 그리고 그뿐 아니라 열댓 명의 천재들이 이 발명에 간섭했다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진짜 발명은 그들이 일궈낸 것이고 에드윈은 그 성과들을 퍼즐 조각 삼아 짜깁기를 하여 하나로 엮어냈을 뿐이었다. 그 또한 대단한 것이긴 하지만.
“자, 잠깐! 그 사람들과 비밀을 공유했다고?”
제로스가 당황하며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 있나. 스승들은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 그 여자에게서 탈취한 물건들을 분해하여 원료 단위로 구축한 뒤 그들에게 비밀 샘플로 제공했을 뿐이야. 외계에서 기인한 신물질이라고 둘러댔지.”
“그 말을 믿는다고?”
“모르지. 하지만 호기심과 탐구욕이 왕성해서인지 다들 말려들던데?”
요약하면 사탄 숭배자들에게서 탈취한 초자연적 물질들은 ‘외계 문명’의 산물로 소개되어 이 시대 최고 천재 과학자들에게 제공되었고 그들은 강한 승부욕에 사로잡혀 그것들로 연구와 발명을 시행하여 열매들을 거둬들였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다른 시대에 났으면 시대를 뒤바꾸었을 위인급인만큼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괄목할 성취물들과 발명품들이 확보되었고 그것들을 하나로 연결하여 에드윈은 자신이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일궈냈다. 요행과 행운이 겹치고 겹친 결과였다.
제로스는 한 번 더 질문했다.
“그분들이 알렉 형에게 말하지는 않았고?”
“경쟁심을 부추겨주더니 알아서 비밀을 잘 유지해주던데?”
에드윈은 영리한 제자이긴 했으나 선량한 제자는 아니었다. 그는 스승들을 골리는 데 매우 이골이 난 기린아였다. 특히 사이가 썩 좋지 않은 실버피스트의 경우에는 이런 식으로 충동하였다.
“당신이 이걸 연구해서 뭔가 유의미한 성취를 거둘 수 있을지 모르겠군. 미지의 영역에 대해 진일보를 이룬다면 켈리온 부부의 성역을 넘어설 수 있을지도 모를 텐데. 허나 당신 정도로 가능할까?”
이에 열등감이 긁힌 실버피스트는 경쟁심을 불태우며 분노를 드러냈다.
“건방진 애송이 녀석이! 네 형님께 부끄러움이나 끼치는 문제아 주제에!”
“응, 나도 알아. 난 형님보다 훨씬 못난 인간이지. 내 전문 재능에서도, 인품으로도, 인간 그 자체의 완성도로, 한없이 못 미치는 걸 알아. 하지만.”
에드윈은 지도 교수의 역린을 잘 알았다. 겉보기에는 팀 아르다의 전대 중역인 켈리온 부부의 성취를 시기하는 것 같지만, 실버피스트가 정말로 열패감을 느끼는 태산은 따로 있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선생.”
“뭐?”
“솔직히 당신도, 나도, 당신네 잘난 팀원들도, 공학자로서의 재능에서마저 형님한테 발끝에도 못 미치잖아. 그 사람의 본질이 왕이라서 그렇지 만일 정치하는 데 쓰는 시간의 십 분의 일만 연구에 투자했더라도 우리는 범접조차 못 했겠지.”
팩트로 뼈를 맞은 박사는 격분하였다. 그는 속으로 그 태산 같은 자, 자신을 거둬들였던 은인의 경지를 뛰어넘어 보리라고 우격다짐을 하였다. 그가 해내지 못했던 일들을 이뤄내고야 말겠다. 그런 아집과 집념으로 그는 아무도 몰래 연구에 돌입했다. 알렉시스나 다른 팀원들 몰래 에드윈이 넘긴 비밀의 외계 물체로 실험에 들어갔다.
그 악바리 받친 광기의 집중력이 이뤄낸 기적적 성과일까. 불과 몇 달만에 기대를 넘어선 성과물이 나왔다. 에드윈은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스승들의 열등감을 자극해 자신의 이득을 얻어냈다.
*
이안은 마른 침을 목 뒤로 넘겼다. 그는 현재 캄캄한 밀실 형태의 스튜디오 룸 안에 있었다. 이 방의 벽면 뒤로는 에드윈이 스승들을 착취해 발명해낸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설명은 이해되었지?”
에드윈의 목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전해졌다.
“아, 그래. 수도 없이 카메라 앞에 서 봤지만 이건 좀 색다른 체험이로군.”
이 발명품의 본질은 ‘영격(靈格) 소통’을 ‘전자계 신호’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즉 어둠의 세력이 자신들만의 보물들을 통해 구축한 ‘정신파 교환 통신 네트워크’ 자체를 인간이 읽을 수 있는 전자파 신호로 변환하여 자유로이 통신에 개입하게 만들어주는 일종의 ‘번역 장치’였다.
적들이 애용하는 ‘마음을 통한 통신’, 그 메커니즘 안에는 몇 가지 원소들이 들어 있다. 첫째는 초자연적 요소인 유사 신접(神接) 현상, 둘째는 이를 돕는 주술적 매질과 그것이 자아내는 초상 현상, 셋째는 저들의 신체 속에 이식된 금지된 매질, 넷째는 AI와 컴퓨터와 칩을 비롯한 각종 현대 과학 기술이었다.
당연히 이런 불결한 요소들이 포함되었기에 외부인은 절대 이 네트워크에 개입하지 못한다. 특히나 언약의 수혜자인 황가의 후손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하나님의 율법에 의거하면 저들이 사용하는 모든 수단들은 가증한 것이니까.
그런데 에드윈의 패러다임 전환이 새로운 우회로를 창조해주었다. 저들처럼 신접, 신체 이식물, AI와 인간 뇌의 교접, 불법 물질 주입, 영격 통신과 정신 접속을 사용하지 않고도 침투할 수 있는 방법. 저들의 토론장에서 벌어지는 고차원적 초상 현상을 전기 영상 신호로 바꿔 소리와 빛으로 전환하고, 그것에 대해 말과 표정을 통해 반응을 돌려준 뒤, 그 반응을 다시금 저들의 뇌리에 초상 현상으로 나타나도록 바꾸는 원리이다. 저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또다른 영격 통신자가 나타났다고 믿게 되리라.
“이 장치는 외부 전산망과는 일절 연계가 되지 않아. 즉 전산 흔적이 남지 않기에 포렌식도 불가능하지. 오로지 저들만 우리가 내는 신호를 인지할 수 있어.”
“완전 범죄라 이 말이군.”
이안이 감탄하듯이 웃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너는 그저 평소에 카메라 앞에서 했듯 얼굴과 표정과 말로서 시그널을 만들어내면 그만이다. 그러면 나머지는 저 장치가 알아서 변환하여 보내준다.”
“실감나게 연기하는 편이 좋겠지?”
“아무래도. 변환 장치이긴 해도 영격 통신과 연계되는 매질이다보니 부분적으로나마 네 ‘의식(意識)’ 차원의 감정 상태가 전이될 확률이 높아. 네 속 생각까지 노출되진 않겠지만, 적어도 마음 속에서부터 실감나게 메소드 연기를 해야 효과가 극대화되겠지.”
“그 말을 들으니 긴장감이 고조되는군.”
어깨가 무거워지는 이안이었다.
“이안, 네 역량은 최고이니 자신감을 가져. 너무 무리하지 말고 적절한 선에서 신중하게 해줘.”
제로스가 격려를 전했다. 그러는 본인도 몹시 긴장하며 염려하는 기색이었다. 이 ‘영격 통신 번역 장치’의 효력은 아직 실전에서 충분히 입증되지 못했다. 에드윈이 간간이 이 장치를 통해 저들의 회의를 도청하기는 했지만, 멀리서 기록하는 방식으로는 번역의 정확도가 충분치 않았다. 장치 가까이 직접 다가가서 긴밀히 소통하면 더 정확히 정보를 캐낼 수 있겠지만, 그러다 자칫 존재를 들킬까 염려되어 시도해보진 못했다. 이 장치 바로 앞에서 적들과 직접 대면하는 것은 이안이 최초였다. 여러모로 도전적인 상황이었다.
“잘해볼게, 제리 형.”
“그래, 일단은 소규모 회의들부터 하나둘 씩 침투해보자.”
원래의 계획은 이것이었다.
아직 그림자 세력의 소통 원리를 백 퍼센트 이해하지 못한 지금, 정확히 어떤 때에 어떤 회의가 열릴 지는 알지 못한다. 그저 알렉시스의 신변에 대한 소식이 저들에게도 들렸을 테니 여러 단계의 회의가 잦아지리라 예측할 뿐이었다. 그러니 그 점을 노려 랜덤으로 주파수를 검색한 뒤 기회가 닿으면 적절한 주파수에 접속하여 회의 네트워크 내에 침투한다.
이후 이안은 익명의 사자(使者)로 위장하여 모호한 메시지를 통해 ‘악마왕의 강림’을 암시한다. 너무 급진적으로 접근하다가는 들킬 위험이 있다. 그러니 조심스럽게, 하나씩 하나씩 부분적으로 소식을 심으며 은밀한 암시를 준다. 반복적으로 저들 내부에 소식이 주입된다면, 그들도 이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의문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 원래는 이렇게 보수적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첫 시도부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가 벌어졌다.
“뭐지?”
커맨드 룸에서 모니터링을 하던 에드윈은 갑작스러운 반전에 경악하며 얼굴 표정이 얼어붙었다. 그 곁에서 같이 촬영실 상황을 감시하던 세 사람도 덜컹 염려하며 긴장하였다.
“무, 무슨 일이야?”
제로스가 다급하게 질문했다.
“설마 통신에 실패하거나 우리의 위치를 노출당한 건?”
침착했던 아델바이스도 우려를 비쳤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통신 접속은 성공이다. 번역 장치의 출력, 입력, 변환에도 오류가 없어. 이안에게 미치는 간섭 영향도 없고. 문제는…….”
유일하게 예상하지 못했던 한 부분, 그것은 회의의 범위와 타이밍이었다. 일반적으로 영격 통신은 부분적인 규모로만 이뤄진다. 전 세계의 모든 그림자 세력이 한 번에 단합하여 한 네트워크 안에서 회의하는 일은 수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일이다. 아주 중요한 세계적 급변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한.
하필 그 날이 오늘 이 시점일 줄은 알지 못했다.
“통신의 규모가 커도 너무 커. 관측되는 신호를 계산해보니 범위가 최소 지구 전체야.”
“뭐라고?”
그 날은 모든 장로들이 한데 모여 영격 통신을 개진한 날이었다. 최고 간부들의 회의가 가동되고 있었고 각 간부들이 자신 휘하의 세력과도 별도의 네트워크를 구축한 상태였다. 최고 회의에서 결정된 사안들은 실시간으로 각 휘하 세력으로 하달되었고 그 내용은 다시금 산하의 조직들로 영격 통신을 통해 전달되는 중이었다. 그 모든 통신이 실시간으로, 동시점에 한꺼번에 가동 중이었다.
에드윈의 장치가 접속에 성공한 신호는 바로 그 최상위 회의였는데, 하필 기계의 성능이 기대 이상이었는지 하위 통신들까지 한꺼번에 동시 연결되었다. 즉 이안 이즈카르 브라이틀란트의 존재감이 전 세계의 모든 두로와 에돔의 후손들 및 그 수하들에게 나타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은밀한 접근법은 실패다. 원래 회의 참석자가 많지 않은 시점에 몰래 정체를 숨기고 접근하기를 여러 통신에서 거듭 반복하여 점진적으로 소문을 퍼뜨릴 생각이었다. 가짜 적그리스도의 실체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을 공개하지 않은 상태로 그저 저들의 자발적 상상력에 맡길 심산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계략은 무산되었고 도리어 적들에게 에드윈의 장치를 들킬 위기에 놓였다.
“이, 이안!”
일이 뜻대로 흐르지 않음을 깨달은 제로스는 서둘러 위기를 수습하려고 머리를 굴렸다. 일단 동생을 위기에서 구출해야 한다. 더 노출되기 전에 이안을 빼내고 이 일이 저들에게 간과되어 넘어가기를 기대해야 한다. 그게 안 된다면 서둘러 이 장치를 증거 인멸해야 한다. 아까워도 그 방법 밖에는 없으리라.
“누구지?”
“누가 접근한 거지?”
치직거리는 신호음의 형태로 저쪽 편의 접속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격 통신이니 아마 그들의 생각 속에서 발생한 사념파일 텐데 이안의 귀에는 분명한 육성의 형태로 들렸다. 이안은 긴장했다. 자신이 떠올린 생각도 자칫 저렇게 노출될 수 있겠구나. 그런 의심에 마음이 망망대해의 돗단배처럼 흔들렸다.
“황자님, 이안 황자님을 빨리 퇴장시켜야!”
같이 모니터링하던 로빈도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 그럽시다.”
얼이 빠져 있던 제로스도 동조하였다.
‘내가 너무 경솔했다.’
그렇게 그가 자책하던 중에.
⪡“재미있군.”⪢
갑자기 스튜디오 전체와 관측실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1초 전까지 긴장감에 매몰되는 듯했던 이안의 모습이 갑자기 변화했다. 가면을 쓴 청년 배우는 갑자기 음산한 암흑의 향취와 소름끼치는 위압감을 발산하는 존재로 화하였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복장이나 가면, 외양이나 체형은 그대로였다. 변한 것이라고는 기운과 아우라였다.
⪡“그대들이 내 종들의 후손이로구나.”⪢
로빈은 순간적으로 귀신이 빙의한다는 것이 어떤 개념인지를 상상하였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너무도 기괴하고 기이했으며 마치 초상 현상을 연상케했다. 한 인격체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더 초월적인 무서운 무언가가 세워지는 모습. 카메라 앞에서 사람들은 저런 장면을 수없이 체험했던 것일까?
‘적그리스도?’
주일에나 가끔씩 교회에 출석하는 로빈이기에 성경의 종말론을 제대로 공부해보지는 않았다. 그런 그마저도 적그리스도라는 존재가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이상하게도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는 체험을 하였다. 공포감에 솜털이 곤두섰다. 정말 자신 앞에 어떤 거대한 무저갱의 악령이 서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안 황자님?”
이안, 아니 이안의 거죽을 쓴 듯한 저 정체 모를 무언가는 기다렸다는 듯 아무런 준비 동작도 없이 적그리스도처럼 말하며 적그리스도처럼 미혹하며 적그리스도처럼 사람들에게 최면을 걸었다. 진짜 최면인지 최면에 걸린다고 착각한 것인지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 흡입력이 너무도 엄청난 나머지 분간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이었다.
이후 네 사람은 귀신이 홀린 듯 멍한 표정으로 넋이 나가 전개되는 상황을 지켜만 보았다. 회의는 기대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설마 저런 식의 메소드 연기가 통할까? 익명의 메신저로 위장하는 전략은 그런대로 가능하리라고 여겼다. 속이는 데 실패하더라도 꼬리만 잘 자르고 도망치면 문제가 없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아예 ‘가짜 적그리스도’ 그 자체가 되어 접근하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위험도도 위험도지만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하지만 정말 충격적인 부분이 따로 있었다. 저들이 정말로 믿기 시작했다.
“대, 대단하네요.”
가까스로 현실로 돌아온 로빈은 나름대로 상황을 파악하였다. 아마 이안 황자가 즉흥적으로 순발력 있게 대응한 것이리라. 연기의 신이라는 이명은 들어왔는데 스크린에서 볼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전에도 그 놀라운 연기력에 정말 감탄했었지만 그간 대중에게 보여준 재능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저걸 연출해낼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단순히 연기력만 뛰어난 게 아니라 계획성과 상상력과 구축 실력까지.”
로빈은 이것도 플랜 B로 있었느냐고 물을 심산으로 제로스 쪽을 돌아봤다.
“화, 황자님?”
그는 충격으로 얼어붙은 제로스의 표정을 발견하고 당황했다.
“괘, 괜찮으십니까?”
제로스는 여전히 굳어 있었다. 정작 이 모든 작전을 상상해낸 장본인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무시무시한 지옥의 아우라를 마음껏 창조해내는 저 스튜디오 룸 속 청년의 위엄을 감상하며 견디기 힘든 정신적 충격에 휩싸였다.
‘저 사람, 아니 저 존재는 누구지?’
자신의 친형제에게 이런 거대한 이질감을 느낀 적은 난생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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