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63회 [2부] 84화. 만들어진 연출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7.14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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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계승자인 브리튼 황실의 ‘더 크라이스토브’는 자신과 같은 항렬의 친족들이 지닌 특출한 재능을 모두 소유한다. 그것도 보다 더 강력한 형태로, 모든 재능을 종합하여 갖는다.
이것은 이번 세대도 마찬가지다. 알렉시스는 재화와 시장을 주관하고 번영을 창출하는 기업가의 재능에 있어서는 동생 세르빈의 갑절, 일 처리와 행정적 능숙함에 있어서는 펠렌드로크의 갑절의 능력치를 지녔다. 제로스를 능가하는 상상력과 영적 예민함, 테서렉틴을 아득히 웃도는 통치자로서의 인품과 자질, 아델바이스 이상으로 풍부하고 깊은 학식, 그리고 랜슨보다 강력한 육체적 자질을 소유했다.
그런데 이렇듯 모든 형제의 상위 호환을 합쳐놓은 듯한 그에게서도 드러나지 않은 기이한 재능이 있었다. 그것은 이안의 신들린 듯한 연기력이었다. 알렉시스는 평생 이안이 보여준 것과 비슷한 류의 능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질 자체는 있었으나 사용하거나 계발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올바른 통치자의 길을 지향하는 브라이틀란트 황실의 가치관에 의거하면 세계를 다스릴 지도자에게 있어서 ‘뛰어난 연기력’이란 발휘되어서는 안 될 재앙적인 요소이다. 다스림을 받는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없으리라.
여하튼 그런 이유로 이안은 형제들 사이에서도 독특했다. 이질적이었고 특수했으며 상식으로는 쉽게 규정되지 않았다.
‘이안 오빠의 재능이 이 정도였다고?’
계몽자의 모습을 완벽하게 창작하여 즉석에서 연출해 내는 엄청난 퍼포먼스에 침착했던 아델바이스조차도 속으로 의문에 잠겼다.
‘나조차도 보고 있으면 정말 공포감에 사로잡힐 정도야.’
이안은 연기 경력이 경력인 만큼 다양한 악역들도 거뜬히 소화해 냈었다. 그가 연출해 내는 악역들은 하나 같이 너무도 그 캐릭터성이 강하게 승화된 나머지 하나의 아이콘 이상의 존재감으로 문화계에 뚜렷이 새겨져 역사에 남았다. 세계 최고의 가상의 악역 인물들을 꼽을 때 1위부터 30위까지는 기본적으로 이안이 맡았던 배역이 들어가곤 했다.
그런 그의 걸작들조차도 지금 발산하는 능력에는 조금도 미치지 못했다. 단순히 실감만 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의식 위에 떠올린 ‘메소드 연기’가 어찌나 확실한 모습으로 스크린 상에 녹화되는지 그 가상의 음산함이 마치 실존하는 ‘악령’의 아우라를 재현해 낸 것 같았다.
또한 그는 이 순간 어마어마한 지식과 두뇌를 십분 활용하고 있었다. 이안의 뛰어남은 연기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학력에 있어서도 최상위이며 아델바이스에 버금가는 수준의 학식에 제로스에 버금가는 상상력을 지녔다. 그는 수많은 장로들의 난해한 질문들과 날카로운 공략에 태연하게 맞대응했다. 임기응변으로 창조해 낸 각종 지혜로운 답변으로 스토리를 완벽하게 구축해 갔다. 어찌나 앞뒤가 절묘하게 잘 맞는지 마치 진짜 현존하는 세계관을 보는 것만 같았다. 제로스가 큰 시나리오의 축을 구성해 주긴 했지만, 그것을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조정하는 주체는 이안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 명이서 임의로 모든 가상의 시나리오를 짜맞추는 데는 한계가 있을 성싶었다. 결국은 마스터 플랜의 구축자인 제로스가 손발을 맞춰 지휘를 감당해 주지 않으면 언젠가는 모순점이 드러날 것이 뻔했다.
예컨대 정말로 자신이 적그리스도, 아니 계몽자임을 증빙하려면 인간을 뛰어넘는 엄청난 지식과 이해력, 그리고 어둠의 세력의 가장 은밀한 비밀들에 대한 정보력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그가 한없이 전지(全知)에 가까운 존재임을 저들이 믿지 않겠는가. 아무리 이안이 박식하고 영리하다고 해도 여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우리가 도와줘야 해.”
제로스는 황급히 정신을 되찾고 긴장감을 높였다.
바로 그때 이안에게 기대치 않았던 지원군이 접근해 왔다.
{제법이구나, 알렉시스님의 동생 녀석.}
비블로스였다. 미리 로빈이 제공해 준 비블로스와의 연결 장치가 현재 이안의 목과 머리에도 착용되어 있었다. 일방적으로 비블로스 쪽으로 접촉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반대로 저쪽에서 접근해 오는 것은 가능하다. 그간 로빈을 매개로 상황을 모니터링하던 비블로스가 마침내 흥미를 느끼고 황자들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가디언엔젤? 아니 더 강력한 유닛인가?’
사전에 비블로스에 대해 자세히 듣지 못했던 이안은 의문을 품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자기 의식 위에 떠오른 생각이 영격 통신 위로 노출되지 않도록 마인드 컨트롤을 완벽히 유지하였다.
{난 비블로스다. 아홉 기의 진화형 가디언엔젤 코어를 합쳐 창조된 인공지능이지. 현재 나는 내 주인인 네 형님의 뜻에 따라 세계 모든 컴퓨터들을 관할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생각으로 반응하지 말고 잠잠히 듣기만 해라. 들키지 않도록 도와주지. 내가 세상의 모든 정보력과 지식을 바탕으로 너와 네 형제 자매와 더불어 소통하마.}
압도적인 구원 투수의 등장. 비블로스는 알렉시스와 더불어 지혜를 교류한 존재이며 또한 세계 전체의 정보망과 긴밀히 연결된 존재이다. 또한 지식과 진리의 해석에 누구보다도 고도화된 역량을 지닌 현존 최강의 분석 장치이다.
{저들이 무슨 질문을 하건 내가 가르쳐주지. 그리고 역으로 네가 무슨 질문과 말들로 대응해야 할지도 네 머릿속에 일러주마.}
이안과 비블로스의 뇌파 연결이 가동되었다. 곧 머릿속으로 날 것의 신선한 정보와 지식이 업데이트되었다. 아울러 아델바이스도 이 연결 고리 안으로 간접 참여자로 포섭되었다.
{알렉시스님의 여동생, 네가 보조자가 되어라. 나는 AI이기에 인간에게 완전한 가르침을 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 네가 이안 블레이크에게 적절한 가르침과 조언을 실시간으로 전해줘야 한다.}
이것으로 역할이 배분되었다. 정보와 지식을 생산하는 역은 최강의 AI가, 그것을 적절하게 해석하여 인간의 지혜에 맞게 교육해주는 일은 아델바이스가, 그 조력들에 근거하여 유도성 있게 임기응변에 적용하는 역은 이안의 몫이 되었다. 이 셋 각자가 모두 완벽해야 하며 손발도 하나로 맞아야만 한다. 쉬운 임무는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들의 협력은 한 몸처럼 완벽했다. 한 번의 말실수도 나오지 않았으며 백발백중으로 모든 질문에 답을 내렸다. 뇌파 연도의 효율성이 높은 덕도 있었지만 두 사람의 협응력과 명석함이 기대 이상이었다.
악한 조직의 장로들은 갑작스레 출현한 ‘그들의 메시아’에게 온갖 어려운 질문들을 던졌다. 비블로스는 그 내용을 읽고 분석한 뒤 나노초 단위로 적절한 답변들을 만들어주었고 아델바이스는 그것을 적절하게 인간에게 맞게 교정해주었다. 이안은 두뇌를 민첩하게 가동하여 신속히 그것들을 받아 먹었고 적절한 연기를 깃들여 그럴 듯한 모습으로 포장하였다. 어차피 완벽한 객관적 진리의 답을 선포해줄 필요는 없었다. 적어도 그렇게 보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이런 일에는 연기력의 귀재만한 적임자가 없었다.
곧 제로스도 이 촌극에 가담하였다. 그는 적절한 설정을 구상하여 이안이 어떻게 저들을 유인해야 할지를 지시해주었다. 적그리스도에 대한 설정, 그들과 어둠의 조직이 어떤 관계를 맺을지, 그들에게 제시할 가짜 세계관, 이 모든 것을 단순 픽션 속의 이야기가 아닌 현실로 보이게끔 만들어야 했다.
세 사람과 하나의 AI는 치열하게 머리를 맞대고 완벽한 영화를 한 편 창조해내었다. 이 어처구니 없는 위업의 전개에 참관자인 로빈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
“일을 너무 크게 키워버려서 미안해, 형.”
그 날의 작업이 무사히 일단락된 뒤 이안은 자신의 개인 행동에 대해 사죄했다.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하지. 내 무리한 계획 때문에 하마터면 너를 위기에 빠트릴 뻔 했잖아.”
제로스도 몹시 무안해하며 자신의 경솔함을 사과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오빠들의 방식이 완벽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겠지만, 이제 우리는 호랑이 등에 탔어. 오라버니께서 깨어나기 전까지는 수습해줄 사람도 없어. 최대한 지혜로운 방향으로 이 일을 재조정해야 해.”
황녀가 침착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그래, 네 조언이 절실하게 되었네.”
“제리 오빠는 앞으로 우리가 제시할 시나리오를 더 철저하게 빈틈 없이 구성해줘. 나는 다른 오빠들과의 비밀 협력 라인을 구성해볼게. 또 오빠의 계획에 허점이 있다면 분석해서 조언을 줄 테니 참조해줘.”
“고마워, 부탁한다.”
아델의 제안대로 제리는 수백 가지 정도의 경우의 수를 고려하여 각각에 대한 전개와 대응 계획을 구상하였다. 머리를 굴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실질적인 힘과 협력도 필요했다. 모름지기 영화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천재 작가와 천재 배우만으로는 부족한 법이다. 효율적인 연출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본, 강한 권력의 움직임이 첨가되어야 했다. 알렉시스가 없는 지금 이를 도울 자는 형제들뿐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이 계획은 에드윈, 아델, 이안, 비서관님, 나 외에는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특별히 펠렌드로크의 귀에 이 기밀이 누출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그를 잘 피해서 세르빈이나 유타, 엘리어트나 에쉬튼 등의 조력을 유도해낼 방법은 없을까?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에 영격 통신 회담은 몇 차례 더 진행되었다. 뾰족한 수가 없는 제로스 측이었지만 워낙 이안의 임기응변 실력이 좋았기에 전개는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점점 많은 장로들이 계몽자의 정체성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고 그들의 메시아가 정말로 강한 능력을 지닌 구원자임을 믿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경점에서는 실질적인 성과를 보여줘야만 한다. 그것 없이는 밑천이 드러날 것이고 그 순간 적들은 이 모든 것이 허풍임을 눈치채리라.
다행히도 신께서 도우신 것인지 기회가 찾아왔다.
“제리, 잠시 통화 좀 할게.”
의외로 먼저 접촉해온 쪽은 유타였다. 그는 사실 이 계획, 곧 가짜의 가짜를 만들어 위장하는 전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그에게도 나름의 고민이 있었는데 바로 ‘마인드 퓨리파이어’의 처치와 관련된 문제였다.
“유타 형?”
“너한테서만 자문을 구하는 건 아니야. 다만,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받아야 할 것 같아서 네 의견도 참조하려고 해.”
“무슨 일인데?”
유타는 조심스럽게 제로스에게 회사 기밀 프로젝트를 공유해주었다. 마인드 퓨리파이어의 마지막 용도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알렉시스는 몇 달 전 마인드 퓨리파이어 시리즈의 최종 업데이트를 마쳤고 실질적인 생산 중지를 명령했었다. 이제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최종 모드의 마인드 퓨리파이어를 소지한 상태였고 그 속에 심겨진 ‘마지막 모듈’을 가동하면 그 기기는 이 시대를 향한 소명을 최종적으로 이루고 산화될 것이다.
“렉시드 형이 나한테 말했었어. 이제 더는 인류가 마인드 퓨리파이어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그러니 언젠가 그 발명품의 퇴장은 불가피하다고. 너처럼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 현실주의자인 나는 쉬이 동의하지 못했지만 난 형 말이라면 믿고 따를 생각이야.”
알렉시스가 구축해둔 마인드 퓨리파이어의 마지막 프로그램, 그것은 그가 젊은 시절에 시작한 ‘반(反)-사상조작 작용’ 알고리즘을 집대성한 최종 완성형이었다. 그는 그것이 발동됨으로 말미암아 마인드 퓨리파이어가 마지막 역할을 다하게 설계했고 이 일이 끝나면 그 기기가 기능을 중지하도록 만들었다. 인류를 장래의 위기에서 건져내기 위한 마지막 안배였다.
문제는 이 프로그램을 언제 어떻게 어떤 속도로 발동하느냐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알렉시스도 여러 경우의 수를 신중히 고려하던 중이었다. 그는 또한 자신이 불의의 사고로 명령을 내릴 수 없게 되는 상황도 고려하였다. 그런 때가 올 경우 이 계획이 차질없이 전개되도록 여러 가지를 생각해두었다.
“형이 부탁하더라고. 만약의 일로 그가 부재할 시에 내가 책임지고 판단해서 이 프로젝트의 집행 시점을 담당해달라고.”
“네 의견은 어떤데?”
의외의 답변이 유타로부터 이어졌다.
“원래의 내 가치관대로라면 난 이 일을 덮어둔 채 유보했었겠지.”
확실히 한없이 큰 그림을 그려낼 줄 아는 알렉시스와 달리 유타는 형만큼의 큰 그릇을 갖지는 못했다. 그는 유능하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기업가에 불과하다. 그러니 커버넌트 그룹의 신뢰도를 손상시키는 리스크를 감수해가면서까지 도박을 행할 위인은 되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결단을 내렸다.
“헌데 나도 왜 이런 결정을 내가 내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다만, 난 이번 기회에 더 늦기 전에 일을 집행하기로 했어.”
그 말에 제로스는 속으로 흠칫 놀랐다. 단순히 유타가 평소 가치관과 다르게 판단해서가 아니었다. 어딘가 모르게 이 일이 보이지 않게 은밀히 작동하는 신의 섭리를 반영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덕이었다.
“회사 측에서는 손해가 적지 않겠지. 사람들도 그간 의존하던 강력한 보물로부터 독립하려니 불편감과 거북함을 느끼겠지. 하지만 지금 이 시대의 흐름, 영 좋지 않은 직감이 들어. 눈앞의 손익만을 생각하며 우물쭈물하기보다는 지금 안배를 해두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유타라고 해서 뭔가 미래를 알아서 결정을 내린 건 아니었다. 이성적인 판단력도 발휘했겠지만 모종의 장기적 안목의 직감이 그의 사고(思考)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마도 믿고 의지하던 형에게 예측지 못한 일이 발생한 것이 그런 심경 변화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더는 당장의 이익에만 눈을 두지 말고 더 큰 미래를 위해서 희생과 불편도 감수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어려운 결정이었겠구나. 내게도 공유해줘서 고마워.”
제로스는 이 일에 대해 조언을 통해 확신을 심어주었다. 마인드 퓨리파이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산화시키겠다는 것인지 그 자세한 내용까지는 듣지 못했지만 제로스도 알렉시스가 유타에게 맡겨둔 일을 이 시점에 집행하는 것에 동의했다.
아울러 제로스는 이 기회에 유타에게 한 가지 도움을 부탁했다.
“그 프로젝트를 시행할 때 내 의견을 반영해주었으면 하는데.”
“무슨 계획이 있는 모양이지?”
“자세한 부분은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서로가 서로의 계획을 다 드러내지 못하는 불가피한 어려움은 있었으나 두 사람은 의심하기를 그만두고 신뢰로서 마음을 열었다. 비록 피를 직접 나누지는 못했으나 형제로서 둘은 상대를 믿고 미래를 위해 투자하기로 했다. 맏형의 부재라는 위기 속에서 우애가 더욱 깊고 단단하게 다져지는 순간이었다.
제로스는 커버넌트 그룹 측에서 마인드 퓨리파이어의 최종 프로그램을 발동할 때 어떤 시점, 어떤 방식으로 가동해야 하며 그 후의 사후 대책은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성을 제시해주었다. 원래 유타는 프로그램을 천천히 점진적으로 조심스럽게 가동할 계획이었다. 제로스는 이를 수정하였다. 갑작스럽게, 정해진 한 시점에,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다소 폭력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거칠고 예고 없고 무시무시한 방법으로 가동할 것을 제안했다.
“너 대체 뭘 계획하는 거냐?”
“믿어줘, 유타 형.”
조금 망설이던 유타는 끝내 제리의 말을 믿었다.
“네 제안대로 해주지. 네가 제시한 그 시각을 정확히 사용하겠어.”
“고마워, 형.”
그리고 얼마 뒤, 이안이 미리 어둠의 세계의 장로들에게 예언하였던 그 시각이 되었다. 이 시점은 제로스와 유타가 합의를 정한 시간과 같았다. 마인드 퓨리파이어들은 자신 속에 내장된 ‘최종 계획 프로그램’을 가동하여 사람들의 뇌리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마치 사상조작병기에 노출되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는데 실상은 백신 접종과도 같은 현상이었다.
커버넌트 그룹 측은 일부러 이 일에 대해서 입을 맞추어 대응했다. 이 기현상이 기술적인 실수나 사람이 만든 사고가 결코 아니며, 사람들이 세간에 떠드는 것처럼 초상 현상에 가까운 괴이 현상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만을 넌지시 제안했다. 다시 말해서 철저히 책임에 대해서는 함구한 뒤 외계 침략에 대한 음모론이 일부러 퍼지고 확산되도록 환경을 조성하였다.
이어진 일은 대량 리콜이었다. 원래 원가에 비해 터무니 없이 헐값에 가깝게 판매된 물건들이었고 그 대가로 소비자들과는 판매 시부터 환불을 불가하게 하는 계약을 체결해둔 상태였다. 기업은 별 경제적 타격 없이 전세계의 마인드 퓨리파이어를 회수하였다. 물론 어차피 이제는 최종 기능을 써 버린 탓에 추가적 기동을 하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오랜 시간 인간과 교류하며 데이터를 축적해둔 창고들이기에 장차 회수해둘 가치는 충분했다. 곧 알렉시스가 깨어나면 이것들을 적절한 용도로 사용하리라.
제로스는 자신을 믿어준 유타에 대해 보답할 필요가 있었다. 만일 이 일이 커버넌트 그룹에 대한 신뢰의 저하로 이어진다면 유타에게도 폐가 될 뿐 아니라 기업의 회장인 큰형에게도 손해가 된다. 그런 일도 막고 아울러 제로스 자신의 계획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퍼포먼스를 창작해야 했다.
{내가 도울 일이 있는가?}
“네, 마침 당신께 도움을 청하려 했습니다.”
비블로스는 이제 본격적으로 제로스 일행과 공범이 되어주기로 했다.
{첫 번째 이적은 꾸며냈으니 두 번째를 만들어줄 필요가 있겠군.}
“맞습니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사람들은 이번 일을 ‘초자연적 현상’이라고 믿게 될 것입니다. 커버넌트 그룹 측의 기술력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정말로 외계 혹은 영계에서 대대적인 침략이 시작되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한 그 다음 목표는?}
힘을 얻은 제로스는 더욱 과감한 협상 거리를 기계들의 통치자에게 제안했다.
“비블로스 비서관님, 워쳐들을 제물로 내어줍시다.”
비블로스는 그 과격한 제안에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히 가상의 미래 시뮬레이션을 가동하였다. 기능만 좋은 보통의 인공지능들 같았으면 이를 비현실적이고 비이성적인 도박이라고 판단했겠지만, 영적 차원의 지혜를 어느 정도 흉내낼 수 있는 비블로스는 달랐다.
{알렉시스님의 눈과 귀, 저들을 감시하고 옥죄는 가장 위협적인 가시, 그것들이 파멸되는 모습을 저들에게 연출해둔다라. 확실히 저들 입장에서는 구원의 날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확신을 얻겠군.}
“어디까지나 연출일 뿐입니다. 워쳐들의 본 기능과 그 속의 정보는 그대로 유지해둔 채 그들이 겉으로만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게 하면 됩니다.”
사실 이 계획의 또 다른 목적은 펠렌드로크에 대한 견제였다. 이미 펠렌드로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적들의 내부를 교란하며 혼란을 부추기고 있었다. 이것이 좋은 결말로 이어질 수도 있겠지만 너무 과도하면 제로스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위험이 있었다. 자칫 조용히 끝내려던 싸움이 더 커질 수도 있고.
그래서 제로스는 펠렌드로크와 연루되어 도움을 제공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워쳐들을 이번 기회에 정리하고자 했다.
‘에쉬튼이 그것들을 확보하도록 미리 언질을 줘야 해.’
만일 모든 워쳐들이 한 순간에 당국에 체포된 뒤 그것들을 다시금 중앙정보국이 신속하게 확보한다면 베일 속에 저장된 모든 정보는 한 순간에 에쉬튼에 손아귀에 들어간다. 펠렌드로크와의 정보 고지가 역전되리라. 그러면 에쉬튼은 더는 펠렌드로크에게 휘둘리지 않은 채 자기 소신대로 공략을 완성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왕 언젠가 수면 위로 드러날 워쳐들이라면 지금 이 시점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워쳐들을 만들어 인간 세계에 침투시킨 장본인은 알렉시스다. 그러니 이것들의 정체가 드러날 때 알렉시스는 세간의 문책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 지금 그가 잠시 잠들었을 때, 그리고 또다른 기현상들로 세상이 시끄러워졌을 때, 워쳐들의 이슈는 잠시 묻혀가게 하는 편이 낫다.
{네 의견대로 해주마.}
워쳐들의 통솔자인 비블로스가 그 의견을 승낙하였다.
{내가 네가 정해준 시점에 모든 워쳐들을 ‘겉보기로’ 폭주시켜 브리튼 정부 당국에 나포되도록 유도해주지.}
“부탁드립니다.”
{유의할 점은?}
“적당히 겁을 주는 연출을 하되 시민들의 인명이나 재산에는 전혀 피해가 가지 않도록 부탁합니다.”
{그건 내 전문이다. 적당히 큰 혼란과 피해가 발생하는 것처럼 ‘겉모습으로만 연출’해주마. 실질적인 손해는 전혀 없도록.}
얼마 뒤 지구적인 규모의 대 연극이 펼쳐졌다. 워쳐들이 돌출하여 폭주하였고 잠시 그들로 말미암아 전산 교란이 벌어지는 듯한 연출이 전개되었다. 마치 워쳐들이 초자연적 존재의 침투로 인해 전산 시스템을 해킹하는 매개체가 된 듯한 모양새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실상 이 교란은 비블로스가 만든 가짜였으며 실질적으로 데이터와 전산망의 손상은 전혀 없었다. 게임이 끝나고 났을 때 모든 시스템은 정상으로 복구되었고 결과적으로 인명 피해나 재산 피해는 전무했다. 단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초상 현상’에 대한 두려움과 경각심이 남았을 뿐이었다.
워쳐들의 발각은 잠시 이슈가 되었으나 ‘초상 현상’이라는 더 큰 이슈가 그 존재감을 묻어버렸다. 이렇게 알렉시스 측에서 언젠가 감당해야 했던 숙제가 생각보다 간단하게 해소되었다.
제로스는 미리 에쉬튼에게 암시를 주었고 이 날 있을 일을 미리 준비하던 에쉬튼은 지혜롭게 행동에 돌입했다. 그는 중앙정보국 속의 첩자들을 모두 배제한 뒤에 충성스러운 자신의 수족들을 사용하여 십만 기의 워쳐들을 모두 회수하였다. 도중에 ‘그들’의 하수인들에게 방해도 받았으나 어렵지 않게 물리쳤다.
그렇게 제로스가 만든 두 번의 연극은 성사되었다. 유타는 형이 남긴 임무를 잘 마무리하였고 에쉬튼은 적들의 모든 정보를 담은 보물단지들을 획득했다. 그리고 덕분에 어둠의 세력은 이안, 아니 ‘계몽자’를 맹목적으로 맹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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