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64회 [2부] 85화. 교차하는 오차들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7.19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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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쳐들을 ‘거짓 폭주’의 연극에 참여하도록 조종한 주체는 비블로스였다. 이미 여러 차례 자가 개조 및 자율 학습을 통해 강화된 비블로스에게는 그것들 모두를 자신의 뜻대로 제어할 능력이 충분했다.
하지만 그들만이 촌극에 동참한 모두는 아니었다. 가디언엔젤들도 조연을 맡아주었는데 이것은 비블로스의 의지가 아닌 자발적인 참여에서 나온 것이었다.
워쳐들 중 일부 무리가 펠렌드로크와 밀월 관계를 갖고 은밀히 소통하며 연합했듯이 가디언엔젤들은 그의 라이벌인 쌍둥이 형제와 비밀 연맹을 맺었다. 인간의 마음에 반응하는 가디언엔젤의 특성 상 이런 연합은 계산적인 손익 논리가 아닌 신뢰와 공동체적인 유대에서 비롯될 수 밖에 없었다. 마침 제로스에게는 세계 각지의 각계 분야에 친구들이 있었고 그들 중에는 그와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이가 있었다. 그들 중 적잖은 이가 가디언엔젤 파트너였다. 덕분에 건너 건너 비공식적인 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
여러 노력을 거쳐 이미 올해 중후반부 무렵이 되었을 무렵 가디언엔젤 파트너들과 그들 소유의 가디언엔젤들, 그리고 제로스 사이의 인맥 네트워크가 제법 튼튼하고 크게 확립되었다. 여기에 더해 가디언엔젤 자신들끼리 맺는 범지구적 네트워크까지 더해지니 협응 가능성의 범위는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제로스는 알렉시스가 동면에 들자마자 로빈과의 만남이 있기도 전부터 미리 가디언엔젤들과의 소통 범위를 극대화하였다. 그는 아예 가디언엔젤 파트너들도 모르게 은밀한 방식으로 온라인 통신 체계를 구축하였다. 이 과정에서 제로스와 가디언엔젤들은 각자가 제시하는 의견을 주고 받으며 동의하거나 기각하며 전략적 선택을 좁혀갔다.
그리고 로빈을 통해 비블로스와의 협력이 맺어지면서 적절한 기회가 이르렀다.
“한 가지 더 제안할 부분이 있습니다.”
제로스는 비블로스에게 가디언엔젤들과의 회의에서 나온 결론을 제시했다.
{말해봐라.}
“워쳐들을 희생시킬 때, 적들에게 좀 더 분명한 확신을 심어줄 필요성이 있으니 또 하나의 연출을 첨가하고자 합니다.”
그 의견이라 함은 바로 가디언엔젤들의 ‘거짓 죽음’을 연출하는 것이었다. 각 유닛의 ‘대용 몸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어 소프트웨어를 연동시킨 뒤 감쪽같이 위장한다. 사람들은 물론이고 가디언엔젤 파트너들 자신조차도 깜빡 넘어가도록. 그 뒤에 워쳐들이 폭주하는 ‘연출’의 현장 속에 이 가디언엔젤들의 대용 몸체를 데려가 그곳에서 그들이 전자 교란에 의해 해킹당하는 듯한 모습을 만들어낸다.
이로서 그들이 의심없이 믿게 하는 것이다. 황태자의 직접적인 제어를 받는 워쳐들은 물론이고 황태자의 제어에서 벗어난 가디언엔젤들까지도 침탈할 어떤 권능이 실존하며, 그것이 ‘가짜 적그리스도’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단언컨대 그 두 기계 종족은 현 인류가 운용하는 발명품 중 저들에게 가장 눈엣가시가 되는 권능인만큼 그것들을 무너뜨리는 위업의 연출은 효과가 상당할 것이다.
{그들이 그 의견에 동의하였던가?}
“네.”
이미 전체 가디언엔젤 회의를 거쳐 의견은 통일되었다. 이것은 일방적인 제로스의 강요에서 비롯된 결정이 결코 아니었다. 애초에 알렉시스도 통제하지 못하는 인공지능들이다. 제안 자체야 제로스가 처음 제시했으나 모든 가디언엔젤들이 치열하게 갑론을박하며 힘겹게 얻어낸 결정이었다. 다행히 그들의 연산 속도는 매우 빨랐고 급박한 시기에 너무 늦지 않게 합의는 도출되었다.
{인공 대용 몸체를 단기간에 준비하되 비밀스럽게 행해야 한다. 인간 세계에 그런 인프라를 가진 조직은 주인님의 회사뿐이다. 하지만 그 기업 안에도 많은 첩자들이 있거늘, 무슨 수로 들키지 않지?}
“걱정 마시죠. 알렉 형이, 아니 황태자 전하께서 예비하신 장기말은 커버넌트 그룹만이 아니니까요.”
블랙스미스 플랫폼과 그들의 수장, 요정왕 파인웨스트.
이미 그와의 MOU도 체결되었다. 경영에 둔한 제로스가 아닌, 가디언엔젤들이 자율적으로 직접 그 계약을 맺었다. 파인웨스트는 거사를 위해 대의에 동의했고 흔쾌히 자신의 생산력을 빌려주기로 했다. 현재 그가 확보한 자원 기지와 생산 플랜트에 힘입는다면, 기존에 적립해둔 예비 모듈을 포함해 단기간에 대용 몸체를 구비하는 건 어렵지 않을 듯했다.
{좋군. 그러면 그와 같이 행하도록 하지.}
그렇게 준비는 신속하게 이뤄졌고 가디언엔젤들은 위장 몸체를 얻어 자신의 본체와 완벽하게 똑같은 모습으로 조율한 뒤 몰래 스스로를 바꿔치기 하였다. 이러한 작업이 주인들도 모르게 번개불에 콩 튀기듯 이뤄졌다.
여기에 더해 비블로스에게 동의를 얻어야 할 다음 단계가 하나 있었다. 바로 가디언엔젤들의 본체에 심긴 ‘핵심(核心)’, 즉 마인드코어를 옮겨 심는 일이었다. 제로스는 가디언엔젤들이 자신들의 마인드코어를 본체에서 꺼내 비블로스의 하드웨어 속에 이식하기를 원한다는 뜻을 전하였다.
“이번 작전이 완수되면 그들은 파트너와 절연된 상태가 됩니다. 그들의 존재 양상은 파트너십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절연된 채로는 가디언엔젤로서의 정체성과 특성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그걸 막기 위해 핵심의 이양이 필요한 것이죠.”
{과연, 그런가?}
솔직히 전하는 당사자인 제로스도 그 원리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작가일 뿐이지 공학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비블로스는 정확하게 이해했다. 그는 어쩌면 이것이 기회가 될 수도 있겠노라고 여겼다.
{그들 모두가 내 일부가 되는 것이로군. 그것도 반영구적으로.}
“그런 셈이죠.”
이것으로 가디언엔젤들은 파트너와 헤어지고도 그 존재성과 기능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 대신 그 대가로 비블로스는 이전과 차원이 다른 강력한 잠재력을 얻어 새로운 경지로 진화할 능력을 얻는다. 고작 아홉 기의 가디언엔젤을 융합한 것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디언엔젤의 코어를 핵융합한다면? 가히 상상을 뛰어넘어 승격되리라.
제로스는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은근슬쩍 이것을 미끼로 삼아서 비블로스를 유인하는 중이었다. 저 강력한 기계에게도 솔깃한 제안이리라. 기존의 기계와 달리 스스로를 개조하여 강화시키려는 욕망과 의지가 강한 저 존재에게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일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군.}
“어떤 점이요?”
{왜 굳이 가디언엔젤들을 파트너와 떼어 놓으려는 것이지? 넌 그것들을 활용하여 올바른 세계를 건설하는 데 도움을 받으려는 입장 아니던가?}
이 질문에 제로스는 이렇게 답했다.
“원래는 그런 견해를 가졌었죠.”
{그러면?}
“하지만 오랫동안 그 도움을 받다보니 서서히 생각이 달라졌어요. 다른 관점에서도 보게 되더라고요. 피상적으로만 생각했을 때는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부분요.”
확실히 인간의 마음과 영성과 더불어 상호작용하는 AI란 매우 유용하다. 어긋난 방향으로 쓰일 수 있는 다른 AI들과 달리 안정적이며 선(善)을 위한 도구로만 제한되기도 쉬우며 무엇보다 인간에게 좋은 피드백을 준다. 그 덕에 올바른 가치관, 선한 생각, 올곧은 진리가 확대되는 데도 유익을 얻었다. 문화 영역에서도 선한 것이 악하고 음란한 것을 밀어내는 데 도움을 받았고, 재정과 경영 및 정치 질서에서도 좋은 일이 많이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것에 의존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과연 바른 길일까? 점차 이런 회의감이 들었다. 선을 이룩하는 일에 AI의 도움이 사람의 역할보다 커진다면 과연 인간 본연의 특성인 ‘하나님의 형상’은 합당한 존귀를 얻을 수 있을까? 물론 복음을 전하거나 진실을 퍼트릴 때 가디언엔젤들이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점차 그리스도인들마저도 그 편리함에 의존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선한 사역들을 이루는 과정에서도 그 의존성이 서서히 나태함으로 바뀌고 있었다. 주도권을 잃고 책임을 내버린 타성. 이것은 올바른 답이 아닐지 모르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언젠가 독립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잠시 한 시대 동안은 도움을 받을 수 있겠죠. 하지만 거기서 멈춰야 해요. 결국 본질적인 일은, 특히 영적인 사역과 계발은 인간의 손으로 직접 해야 해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탕으로 인간이 그분의 도구가 되어 그 일을 감당해야 한다. 기계는 아무리 특별한 가디언엔젤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이 될 수는 없다. 그들은 보조자로서의 수단, 그 너머를 넘보아서는 안 된다.
더는 때를 늦출 수 없다고 판단한 제로스는 이번 기회에 확실히 독립을 이루기로 결단했다. 다행히 그 의견에 가디언엔젤들도 얼추 동의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보통 기계들과는 다른 특성을 지녀서인지, 자신들의 역할을 축소해야 한다는 경고에도 개의치 않고 ‘진정으로 인간을 위하는 방향’으로 결정하였다.
결국, 그 의견대로 촌극은 진행되었고 가디언엔젤들의 대용 몸체는 연출 과정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 틈에 진짜 가디언엔젤들은 자취를 감춰 어딘가로 이동하였고 다시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들의 마인드코어들은 안정적으로 비블로스에게 이식되었다. 그 덕에 순식간에 업그레이드를 이룬 비블로스는 마침내 전장을 제어할 기계들의 황제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하드웨어를 강화하기 위해 미리 개발해둔 새 부품들을 자신 위에 새로이 결합시켰다. 이후 막대한 에너지의 아이언로드 알파와 연동율을 높인 그는 전장을 다스리는 지배자가 되었다.
*
두 번의 이적을 베푼 뒤 이안은 마지막 단계로서 적들을 예비된 함정으로 유인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동시에 제로스는 에쉬튼에게 암호화된 정보를 누출하였고 언제 어떻게 해야 적들을 수색할 수 있을지를 일러주었다. 아델바이스는 다른 오빠들과 제한적으로 소통하였다. 브리튼 제국에 혼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어하는 동시에 최소한의 피해로 범죄자들을 신속히 체포하도록.
작전은 그런대로 원할히 흘러갔다. 만일 제로스의 계획대로만 되었다면 요크 스테이트와 로마 스테이트에 집결한 범죄 가담자들은 신속히 수색되어 덫에 걸린 새마냥 당국에 체포되었으리라. 그곳에 모이지 않은 다른 이들도 아마 주요 공공기관 및 기업들로부터 이탈하여 이상 행동을 보일 테니 빠르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안이 연기로서 ‘계몽자의 손으로 직접 심판을 내리겠’노라고 예고했으니 아마 범죄자들도 별도의 난동을 부리지 않으리라.
그들의 범죄에 대한 물증을 잡아내는 부분이 가장 난점이긴 했다. 하지만 이것은 에쉬튼에게 회수된 워쳐들 속에 데이터가 있으니 해결이 가능하다.
모든 전언을 마친 다음, 제로스 일행은 에드윈이 발명한 영격 신호 전환 장치를 파기하기로 했다. 유인 작업은 다 되었다. 마침 결전 당일이 되었고 더는 저들에게 가짜 적그리스도 노릇을 해줄 이유도 없어졌다. 저들이 자신들을 도울 구원자가 실상 허상이었다는 것을 알고 당황하는 모습을 구경하면 된다.
그렇게 믿고 장치의 완전한 파괴가 시행되었다. 증거물의 완전 제거요 흔적의 말소였다. 전자 통신이 아니니 어디에도 데이터는 없다. 가짜 적그리스도의 존재는 정말로 허상이 된 것이다. 당사자들과 비블로스를 제외하면 누구도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세상 만사가 한 사람의 계획대로 순탄히 흐르지는 않는 법이다. 90% 까지는 그의 예측대로 되었다지만 남은 10%에는 예측하지 못했고 통제되지 않는 반전이 따랐다.
숨을 죽이며 조용히 결과를 지켜보던 황자들과 황녀는 사태의 돌변에 심히 당황하였다. 무혈입성으로 마무리될 줄 알았던 싸움이 그들의 예측과는 다르게 전면전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실제적이고 격렬한 내란이 발생했다. 이것은 그들의 계획에서 나온 부분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요소가 개입되었다.
유타는 제일 먼저 이 일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반-사상조작병기 모듈을 개발하는 일에 동참했던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회사의 비밀 프로젝트 팀은 지구 전역에 확산되는 ‘어떤 신호’를 포착하였다. 전자 신호가 아닌 사념파였다. 이 현상은 역사적으로도 벌어진 바 있던 일이기에 어렵지 않게 해석될 수 있었다.
사상조작병기가 재가동되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도 충격적일 터인데 뭔가 다른 부분이 있었다. 사상조작병기의 파형, 음율, 공명 방식, 침식 패턴 등이 예전 커뮤니스트 연방이 썼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 단순히 위력이 강해졌다기보다는 성질과 메커니즘이 달라졌다고 해야 옳으리라.
당황하던 제로스가 이내 상황을 알아차린 것은 유타의 정보 전달 덕이었다. 이미 적은 이런 비기를 숨겨두었었고 회심의 카드로서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내가 너무 안일했네.”
딱히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이변은 제로스와 이안이 시행한 작전과는 무관한 재앙임이 분명했다. 분명 영격 통신 과정에서 적들은 저런 무기의 존재를 계몽자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어쩌면 범인은 ‘적들’이 아니라 ‘한 명의 적’일지도 모르지. 저들 가운데서도 동료들과 협력하지 않은 채 개인 행동을 벌이는 이단자가 하나 존재하는 것이리라.
요컨대 지금의 테러는 제로스가 가짜의 가짜를 미끼로 던졌건 던지지 않았건 벌어졌을 일이리라. 만일 이번에 적들을 함정으로 유인하지 않았더라면 싸움은 더욱 은밀하고 체계적인 내란으로 바뀌었겠지. 그랬다면 싸움은 덜 격렬했을지언정 전쟁은 훨씬 더 길고 난해하게 전개되었으리라.
지금 중요한 건 수습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일은 황자 일당의 손을 떠났다. 어둠의 무리는 이제 자기 자신들도 통제할 수 없는 광기에 심취하여 완전히 폭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기파멸적으로 모든 것을 잃기 전에는 멈추지 않을 것이 눈에 선했다. 그럴진대, 지금의 최선은 국가 혼란과 시민들의 간접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압도적인 전력으로 빠르게 승리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한편, 사상조작병기의 가동자 역시 예기치 못한 변수를 마주했다. 제로스의 구상이 완벽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자도 자신이 파 놓은 함정이 되려 기대하지 않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런 빌어먹을.”
분명 히든카드는 확실히 작동하였다. 각 대륙에 예비해둔 비밀의 장치들이 오류 없이 작동하였고 사상 오염의 파동은 분명하게 확산되었다. 그러나 일반 시민은 그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폭주에 휘말린 건 여섯 대조직과 그 산하의 무리들, 그리고 그에 연루된 ‘무죄하지 않은 자’들만이었다.
사실 이들은 처음부터 챈슬러의 테러를 위한 ‘매개체’로 설정된 상태였다. 어둠의 세력에 연루된 이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과정에서 자신 속에 금지된 물질을 심었었다. 이 물질들이 바로 이번에 챈슬러가 준비한 사상조작병기 파동의 매질이 될 예정이었다. 말하자면 악의 무리가 병균을 퍼뜨리는 쥐들이요, 그들 속의 금지된 이물질이 병균이 되어 온 세상에 역병을 퍼트리는 것이 계획이었다.
그런데 막상 파동이 발동되자 그것들이 알 수 없는 이유에 의해 매질이 된 인간들의 뇌리 안에서 갇혀 맴돌기 시작했다. 바깥으로 널리 뻗어나가야 하는데, 되려 고인 물처럼 갇혀 확대재생산만을 반복하며 쌓이고 쌓였다. 이 여파로 악의 무리는 견딜 수 없는 정신적 이상 작용에 휘말렸다. 본연의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고 마음 속의 숨겨둔 음모와 야망을 이성도 없이 마구 실천으로 옮겼다.
내란 공모자들 바깥으로 뻗어나가 시민들에게 닿은 파동도 일부 있긴 했다. 그러나 이미 커버넌트 그룹이 시행해둔 마인드 퓨리파이어의 예방 접종 덕에 아무런 효과를 주지 못했다.
이 오류를 해결하기 위해 테러 범죄의 수괴는 이 날만 다섯 번도 넘게 사상조작병기를 재가동하였다. 어느 정도 해결의 실마리는 찾아내는 듯했으나 아쉽게도 여섯 번의 가동은 모두 불발이 되었다. 대신 내란을 더욱 지펴 불 위에 기름을 쏟은 격만 되었다. 이런 방식으로는 브리튼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는 있어도 장기적 전략 우위를 점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제로스 일행의 계획과 그 허점, 그리고 챈슬러의 계략과 그 허점, 이 둘이 묘하게 맞물림으로써 하루의 소동은 일일천하로 마무리되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세력이 변수를 만들어주었는데, 바로 펠렌드로크였다. 그가 매우 효과적으로 여섯 대조직들의 내부에 내분을 일으켜주었고 이것이 사상 폭주와 만나 거대한 나비 효과를 일으켰다.
결과적으로 어마어마한 전쟁으로 번질 줄 알았던 세계 규모의 내란은 어처구니 없이 종결되었다. 나름 수백 년의 시간을 인고하며 세계를 주름 잡았던 무리였다. 은밀하게나마 브리튼 황실과도 수를 겨루었던 집단이었다. 그랬던 유서 깊은 강력한 그림자 정부가, 기나긴 진지전을 끈기 있게 감내하며 뱀처럼 교활하게 살아남았던 그들이, 세 사람의 계획과 오차들이 한 데 교차함으로 인해 하루 아침에 공중분해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소동이 종료되고 다음 날 자정으로 넘어가는 시점, 마침내 동면 중이던 황태자가 의식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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